#신흥무관학교_개교
#105년전_오늘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며 대종교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소회를 읊었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깍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
어찌 내 무릎을 꿇어 그들의 종이 될까 보냐”
1919년 5월 3일, '신흥무관학교'가 개교한다.
전신은 1911년 설립된 '신흥강습소'이다.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이다.
대종교와도 무관하지가 않은데, 설립자인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선생이 대종교인이었고 역대 교장 중 1대 '이동녕', 2대 '이상룡', 3대 '여준', 4대 '이광', 5대 '이세영' 선생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대종교의 청년들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에서 활약하며 '청산리대첩'을 이루어낸다. '신흥무관학교'는 만주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독립군을 체계적으로 양성한 군사학교였다.
처음 '신흥강습소'로 시작한 1911년부터 운영된 기간은 불과 10년이었지만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는 그대로 우리 독립군의 역사가 됐다. 만주일대의 항일투쟁에서부터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를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까지, 독립전쟁의 선봉에는 언제나 '신흥무관학교'가 낳은 정예군인들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_교가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품어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가슴 끓는 피가 우리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장백산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반만년래 피로지킨 옛집이거늘
남의자식 놀이터로 내어맡기고
종설움 받는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자손들이라.
가슴치고 눈물뿌려 통곡하여라
지옥의 쇳문이 온다
칼춤추고 말을달려 몸을단련코
새론지식 높은인격 정신을길러
썩어지는 우리민족 이끌어내어
새나라 새울 이 뉘뇨
우리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청년들이라
두팔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떳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서로군정서 '독판'과 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했다. 위의 '신흥무관학교' 교가는 석주 선생이 지었는데, 1절을 보면 중국 대륙의 서북, 서남 전체가 한민족의 고토이자 활동무대였음을 상기시킨다. 유학자였던 석주 선생의 이와 같은 역사 인식은 대종교로부터 수렴되고 백암 박은식의 역사 인식의 변화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석주와 백암 모두 대종교를 접하기 전에는 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가 1절을 보면, (배달국, 배달나라의 어원은 대종교에서 시작한다), 중국은 아직 어리석기에 단군의 자손인 우리가 업어 길렀고, 아직 문명에 눈 뜨지 못한 섬나라 일본은 젖 먹여 길렀다고 한다.
“서북으로 흑룡태원(산서성) 남의 영절(절강성)에/ 여러 만만 헌원(軒轅, 한족 최초 임금) 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 섬 중 어린 것들(일본인) 품에다 품어, 젖 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대종교의 원로원장을 역임중이던 성재 이시영 선생은 환국 후 학교를 설립한다.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은 '신흥대학'이다. 6.25 한국 전쟁등의 여러사정으로 운영이 여의치 않아 운영권이 상실되어 새로운 재단에게 넘어갔다.
새로 맡게된 재단은 신흥대학과의 연을 끊고 경희궁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대학명으로 출발했다.
바로 현재의 '경희대학교'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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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이회영 #성재이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