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도 및 장물의 되찾기
1989년, 태국인 끄리양끄라이 떼차몽(Kriangkrai Techamong)은 자신이 수위로 근무하던 파이살 빈 파드(Faisal bin Fahd: 1945~1999) 왕자의 궁전에서 진귀한 보석류를 훔쳐냈다.(주2) 끄리양끄라이는 왕자의 침실에 접근하여 보석들을 훔친 후, 텅빈 청소용 가방 속에 집어넣어 궁전 안에 감춰뒀다. 그가 훔친 보석류는 진귀한 블루 다이아몬드를 비롯하여 귀중한 것들이었다. 그는 이 보석들을 갖고 태국으로 귀국한 후 고향인 람빵(Lampang) 도에 보관했다.(주3)
태국 경찰청(Royal Thai Police)은 찰러 껏텟(Chalor Kerdthes) 경찰 중장은 본부장으로 하는 수사본부를 꾸려 이 사건을 수사하여, 끄리양끄라이를 체포하고 도난당한 보석류 대부분도 찾아냈다. 끄리양끄라이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범죄를 자백했다는 이유로 감형되어 3년만에 출소했다.
찰러 경찰 중장을 단장으로 하는 태국 경찰의 사절단은 사우디를 방문하여 되찾은 보석류를 전달했다. 하지만 사우디 당국은 거의 절반 정도의 보석류가 모조품이라는 점과 블루 다이아몬드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사우디 왕가의 측근이기도 한 사우디인 사업가 모함마드 알 루왈리(Mohammad al-Ruwaili)(주4)가 조사를 위해 방콕에 파견됐지만, 그는 납치되어 살해됐다. 또한 3개월 후에는 방콕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직원 3명이 방콕 시내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사건의 범인들은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다.(주5)
1995년, 수사 책임자였던 찰러 경찰 중장이 이 사건에 연루된 보석상의 부인과 아들을 납치, 살해한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주6) 2009년 10월 16일, 태국 대법원은 찰러 중장의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주7)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된 다른 경찰관 6명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국왕은 자신의 84회 생일(2011년)에 이뤄진 사면령을 통해 찰러의 형기를 징역 50년형으로 감형했다.(주8) [그는 2013년 10월에 가석방됐다.]
2. 외교적 파장
* 이 부분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사우디 아라비아-태국 외교관계"(Saudi Arabia–Thailand relations) 항목을 참조하라. |
살인사건들이 발생한 후, 사우디 아라비아는 태국인들에 대한 노동허가서 발급을 중단하고, 자국민들의 방콕 여행을 자제시켰다. 또한 외교관계도 대리공사(chargé d'affaires) 급으로 격하시켰다. 1989년에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하고 있던 태국인 근로자들은 15만명에 달했지만, 2006년에는 단지 1만명 선에 불과한 상태이다.
추가로 읽어볼만한 자료
- "Thai Blue Diamond Affair: Kingdom demands justice", Arab News. 2014-7-4.
관련 외부 링크들
A law unto themselves
Timeline of the Blue Diamond Affair
Saudi Envoy Helps Expose a Thai Crime Group: The Police
Warrant issued over Saudi murder
The missing pillar in Thai-Gulf ties
A Journal on "Blue Thai Af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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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태국 경찰이 끄리양끄라이 떼차몽(우측 2번째)을 체포한 후 되찾은 보석류를 공개한 모습. |
이하의 내용은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의 비밀 외교전문이다. 이 외교전문은 에릭 존(Eric G. John) 방콕주재 미국대사가 2010년 2월 2일 본국으로 보고한 것이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다. [크세] |
블루 다이아몬드의 저주
사우디와의 관계복원을 위해 태국은 경찰관 5명에 유죄선고
THE CURSE OF THE BLUE DIAMOND: THAILAND INDICTS FIVE POLICEMEN TO SALVAGE RELATIONSHIP WITH SAUDI ARABIA
1. 요약 : 지난 20여년간 태국-사우디 아라비아 관계를 악화시켰던 사태의 최신 국면으로서, 태국 검찰청은 1월12일 자국 경찰관 5명을 기소했음. 이들의 혐의는 1990년에 살해된 사우디 왕가의 측근 사업가를 살해한 혐의임. 이러한 움직임은 20년인 공소시효를 불과 몇주일 앞두고 이뤄진 것임.
1989년, 사우디 왕궁에서 일하던 태국인 노동자 한명이 많은 양의 보석류를 훔친 후 태국으로 숨겨 들어왔음. 여기에는 50캐럿 크기의 블루 다이아몬드도 포함됨. 이후 착복, 살인, 납치 등이 이어졌고, 태국-사우디 관계는 현재까지도 악화된 상태로 남아 있음. 1989~1990년 사이에는 사우디 외교관 4명이 살해됐지만, 그 정황은 단 한번도 공개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음.
사우디 정부가 사법적 심판을 요구하자, 태국 정부는 일련의 사건들 중 일부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경찰청의 고위 간부들을 체포했음. 그렇게 함으로써 사우디와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고 걸프 연안국들에 대한 투자 및 교역 증진을 꾀하려던 것임.
2. 논평 : 이 사건은 흥미를 자극하는 소재와 절도, 납치, 살인, 경찰의 부패, 경제적 이해관계, 게다가 양국 왕실 가족들의 유대관계에 관한 가능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작가들과 음모론자들에게 풍푸한 소재를 제공했음. 하지만 투명한 수사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사법정의는 방치된 채로 남았음.
태국 언론들은 보석 절도사건을 각각의 사우디 외교관 살인사건과 섞어서 다루면서 사우디 아라비아와 헤즈볼라(Hezbollah) 사이의 반목에서 비롯됐다는 관점을 고수해왔음. 심지어는 1989년에 발생한 최초의 보석 절도사건과 이후 1990년에 발생한 사우디 사업가의 살인사건, 그리고 [보석상들의] 가족들의 살인사건조차도.... (문서유실. 이 부분의 정확한 내용 파악 안됨)
(문서유실. 이 부분의 정확한 내용 파악 안됨) 태국에서는 관계 당국에 있는 이들이 범죄를 저질렀고, 이 사건에서는 경찰들이 개입했음. 이러한 움직임(=경찰들의 구속)은 태국-사우디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충분하진 않을 수 있음. 태국 주재 사우디 대리공사에 따르면, 압둘라 국왕이 그에게 대리공사 직을 대사로 격상시킬 것이라고 했다고 함. 그렇게 함으로써 양국간 관계를 복원하면서, 대리공사로 하여금 사업가 살인사건과 보석 절도사건에 진전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 한다는 것임. 현재로서는 살인사건에 관한 진전은 있지만, 절도사건에 관한 진전은 없는 상태임. (요약 및 논평 끝)
저주받은 다이아몬드가 경찰과 판사들을 부패하게 만들다.
4. 1989년, [당시 국왕이었던 파드 국왕의 아들인] 파이살 왕자의 궁전에서 일하던 태국인 끄리양끄라이 떼차몽이 거의 2천만 달러 상당의 보석류 200파운드(약 454그램)를 훔쳐낸 후, 태국으로 갖고 들어왔음. 그 중에는 사우디 왕가의 보물인 50캐럿 크기의 블루 다이아몬드도 포함됨. 1990년, 끄리양끄라이는 결국 태국에서 유죄선고를 받아 징역 5년형에 처해졌음. (그는 거의 3년간 복역한 후 1994년에 석방됐음.)
5. 도난사건 및 보석류의 유통경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연루된 보석상 산티 시타나칸(Santi Sithanakhan)의 부인과 아들이 납치되어 인질이 됐다가, 결국 1994년에 살해됐음. 태국 형사법원(1심)은 2002년에 경찰청 소속 수사관들에게 유죄를 선고했음. 태국 경찰은 보석류에 관한 정보 획득을 목적으로 산티를 압박하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납치했다고 알려짐. 경찰들로 구성된 이 범죄조직은 수백만 바트의 몸값을 요구했지만,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를 감추기 위해 몸값을 받은 후 인질들을 살해했음.
6. 납치사건 범인들의 기소 과정에서, 항소법원(2심) 판사 1명과 대법원(3심) 판사 1명은 납치 조직의 두목에 해당하는 찰러 껏텟(Chalo Koetthet) 경찰중장에게서 [사건을 잘 봐주는 댓가로] 수백만 바트를 갈취하려 시도했음. 이들 판사 2명은 2001년에 부패 혐의로 입건되면서 해임당했음.
2004년, 항소법원은 납치사건 범인들에게 1심보다 무거운 판결을 내려, 찰러 중장은 사형 선고를 받았음. 2009년 10월, 대법원은 [찰러에 대한] 사형 판결을 유지하고, 여타 공모자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형기의 무거운 형량을 언도했음. 일부 피고인들은 재판과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거나 혐의가 기각되기도 했지만, 최소 1명의 피고인은 감옥에서 사망했음. 미신을 신봉하는 많은 태국인들은 [해당 피고인 사망과 관련하여] 블루 다이아몬드의 저주 때문이라는 가설을 세웠음.
사우디 사업가의 행방불명
7. 1990년 2월, 이 음모의 실타래에 또 다른 희생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했음. 그는 사우디 아라비아가 파견한 사업가 모함마드 알 루왈리(Mohammad Al-Ruwaily)인데, 태국에서 행방불명됐음. [이 사건과 관련하여] 처음에는 솜킷 분타넘(Somkhit Boonthanom) 경차중장이 이끄는 경찰조직원들이 구속됐지만, 검찰청이 그들에 대한 혐의를 기각했음.
2009년,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총리의 정부는 특수수사국(DSI)에 이 사건을 재조사할 것을 지시했음. 1월12일, DSI와 검찰청은 알 루왈리의 납치, 구타, 살인 사건과 관련하여 솜킷 경찰중장을 비롯한 경찰관 5명에 대한 기소를 발표했음.
8. 태국 주재 사우디 대리공사 나빌 아시리(Nabil Ashri)는 금년(2010) 1월27일 [미국대사관의] 해군 무관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말하기를, 자신이 압둘라 사우디 국왕으로부터 개인적인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음. 즉, 알 루왈리 사건 및 보석 절도사건에 진전이 있을 경우 그를 대사로 승진시키겠다는 것임. 나빌 대리공사에 따르면, 압둘라 국왕을 알현할 당시, 국왕이 자신에게 "이 사건들에 진전이 있을 경우 대사로 승진시키겠다"고 확약했다는 것임.
사우디 외교관들의 사망사건
9. 심지어는 이번 보석 절도 및 처분 사건이 부패, 갈취, 살인의 늪지대로 빠져들기 전인 1989년 1월에도 방콕에서 사우디 외교관 1명이 살해된 바 있음. 그리고 알 루왈리 살인사건 발생 직전인 1990년 2월에 사우디 외교관 3명이 살해됐음. 사건 초기에 태국 당국은 태국인 무슬림 사업가들을 체포하여 그들에게 외교관 살인 혐의를 적용했지만, 대법원은 그들의 혐의를 기각했을 뿐임.
이후 20년 동안, 태국 언론들은 일반적으로 보석 절도사건과 외교관 살인사건들을 함께 다뤄왔음. 하지만 <방콕포스트>(Bangkok Post)가 금년 1월16일에 태국-사우디 사이의 헝클어진 외교관계를 다루면서, 태국 특수수사국(DSI)이 "현재 [사우디] 외교관 살인사건을 종파간 분쟁으로 결론내린 상태"라고 언급한 정도는 존재함.
10. 금년 1월15일, 태국을 방문한 앤드류 사피로(Andrew Shapiro) 미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는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 총리실 사무부총장 겸 정부 대변인인 빠니딴 와따나야꼰(Panitan Wattanayagorn)과 오찬을 가졌음. 빠니딴은 사우디-태국 사이의 여러 사건들과의 관련성을 차단하는 데 더욱 단호한 태도를 보였음. 빠니딴은 태국의 보안 및 정보 당국 관계자들이 주장하는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사우디 외교관 4명이 헤즈볼라에 의해 살해됐다면서, 사우디 아라비아가 헤즈볼라 정보원들을 암살하려 한 서투른 시도들에 대한 보복 조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음. 빠니딴은 언론이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정보를 공개적으로 발표할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면서, 태국 정부는 헤즈볼라와 이란 사이의 유대관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함.
외교정책이 태국 경찰의 책임을 가릴 수 있을 것인가?
11. 금년 1월12일에 시작된 기소절차는 인권 옹호자들 및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음. 오랜 경력의 인권변호사 통바이 통빠오(Thongbai Thongpao)는 사우디 외교관 살인사건 피고인 2명을 성공적으로 대변했던 인물임. 그는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자신은 이번 기소 조치가 법치주의에 대한 더 나은 존중 문화를 장려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음. 그는 본 대사관에 강조하기를, 이 사건이 오랜 기간 휴면 상태에 있었음에도 새로운 증거나 증인이 나타나면 표준적인 사법절차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강조했음. 그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인권변호사 위분 잉카꾼(Wibun Ingkhakun) 역시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특수수사국과 검찰청이 이 사건을 부활시키기에 충분한 새로운 증거들을 발견했을 것으로 믿는다고 했음. 그는 이 사건을 기소한 것에 국내 정치의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으로는 보지 않았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압력 때문이란 점을 인정했음.
12. 방콕주재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은 보도자료를 배포하여 태국 정부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사우디는 "거의 20년 동안 이 날만을 기다려 왔다"고 밝혔음. 사우디 대사관의 성명은 열정적인 논조로 되어 있지만, "태국 당국이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다른 2건의 사건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노력과 모멘텀을 유지해주길 희망한다"고 표현하여 주의깊은 지적도 함께 했음.
13. 그러나 태국 외무부의 습사꾼 쩜몬(Suepsakul Common: 그는 6년 동안 사우디에 관한 본부 책임자도 역임한 바 있음) 중동-아프리카 국장은 본 대사관레 밝히기를, 사우디 대사관의 보도자료에도 불구하고 진짜 미해결 사건은 알 루왈리 살인사건 뿐이라고 말했음. 그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외교관 살인사건들에 관한 유죄판결은 없었지만 [태국-사우디] 양국 모두 그 살인사건들이 "중동에서의 갈등"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믿고 있다고 주장함. 습사꾼에 따르면, 따라서 사우디 정부는 태국 당국이 그 사건들에 관한 증거 수집을 계속해주길 바라지만, 태국 당국이 그러한 일을 하는 데 직면하게 될 난점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임.
새로운 시작?
14. 태국 총리실의 빠니딴은 사우디 사업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태국의 경제회복 전략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음. 태국 정부의 경제정책은 태국 농산물 및 노동력의 새로운 판매시장과 투자 재원의 새로운 유입처로서 걸프 연안 국가들을 포함한 새로운 시장을 타겟으로 하고 있음. 빠니딴은 아피싯 총리가 카타르, 바레인, 아랍 에미리트(UAE)를 방문했다면서, 그러한 국가들 역시 태국의 고려 대상에 들어가 있다고 말함. 하지만 걸프 연안 국가들 전체와의 관계 강화가 사우디와의 관계 때문에 정체된 상태라는 것임.
15. 빠니딴은 대화에서, 보석 절도사건 및 그 후의 파장들이 있기 전에 태국 노동자 25만명이 사우디에서 태국으로 송금을 해왔고, 사우디 관광객들도 태국으로 몰려들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음.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후 사우디 정부는 대부분의 태국 노동자들을 태국으로 돌려보냈고, 자국 국민들의 태국 여행도 제한하여 사우디 관광객은 80% 정도가 감소했음.
태국 최대 재벌인 '짜런 폭판 그룹'(CP Group)의 사라신 위라퐁(Sarasin Viraphong) 부회장도 1월15일 사피로 차관보와의 오찬에 함께 했었음. 그 역시 자신이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하고자 할 때 수속절차가 6주 정도 걸린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자사의 임원들이 출장을 갈 때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도 사우디가 수속기간이 긴 편에 속한다고 말함.
16. 태국 외부무의 습사꾼 국장은 이번 기소 건이 양국 관계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면서, 이번 조치가 사우디와의 대화를 재개시켜 줄 것이라고 말함. 그는 이로 인한 이득이 단순히 태국을 방문하는 사우디 관광객들의 증가나 석유 및 가스의 새로운 판로, 태국 노동자들의 재송출 등의 수준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함. 더욱 중요한 점은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이 무슬림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이 될 것이고, 특히 태국 무슬림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고 말함.
하지만 블루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는가?
17. 태국 당국이 도난당한 보석류 가운데 일부를 되찾긴 했지만, 1990년 3월에 사우디 아라비아에 반환한 보석류에는 다수의 모조품들이 섞여 있었고, 모조품 중에는 블루 다이아몬드도 포함됨. 태국 외무부에 따르면, 보석류 중 약 50%가 사우디 왕가에 반환됐음. 하지만 일부 언론들은 반환된 보석들 중 최대 80%가 가짜였다고 보도하기도 했음.
이 사건 직후, 태국 엘리트 계층의 일부 부인들, 특히 경찰청장이나 경찰 고위 장성들의 부인들이 도난당한 사우디 왕가의 보석류와 유사한 장신구들을 걸치고 각종 공식행사나 사교계 모임에 등장한 모습이 촬영되기도 했음.
1990년대에는 한 경찰 장성의 아내가 블루 다이아몬드를 착용한 모습이 몇 차례 목격되기도 했지만, '2006년 9월 19일의 쿠테타' 이후 많은 수의 반-왕당파 웹사이트들이나 활동가들은 블루 다이아몬드를 가장 최근에 착용한 것으로 목격된 사람이 시리낏(Sirikit) 왕후라고 증언했음. 비록 20년간의 죽음의 자취가 궁극적으로는 해결된다 할지라도, 블루 다이아몬드의 정확한 행방은 여전히 미스테리에 싸여 있을 가능성이 존재함. (에릭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