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재철 목사님의 저서 <사명자반> 174쪽에 있는 글입니다.
사명자의 믿음의 토대는 부활신앙이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 21:14)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부활하신 후 세 번째 나타나심이었다. 주님의 부활 후 처음과 두 번째 나타나심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기거하던 숙소에서였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본문을 기록하면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라고 기록하였다. 사도 요한은 '부활'을 왜 이렇게 긴 문장으로 표현했을까? 헬라어에는 '부활'을 뜻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인가? 헬라어에는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 '아나스타시스'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왜 그 간단하고도 분명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으로 풀어서 설명했을까? 그러고 보면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다. 사복음서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이라는 단어로 표기한 곳은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2천년 전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부활'이라는 단어에 대해 지니고 있던 보편적 인식은 오늘날 우리의 인식과는 전혀 달랐다. 당시 사람들이 '부활'을 언급했을 때는 두 경우 중의 하나였다. '부활'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의미로 부정하기 위한 경우거나, '부활'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설이나 신화 속의 이야기임을 나타내기 위한 경우였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허황된 전설 혹은 신화로 받아들일 것이 뻔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당시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던 '부활'이라는 단어 대신 다르게 표현하였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5-6)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마 28:5-7)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 24:5-6)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 21:14)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한결같이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으로 기술하였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우리말로 '죽은 자'라면 고상하게 들리지만, 헬라어 '네크로스'는 '시체'라는 말이다.
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시신'이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역설하였는가? 예수님의 부활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거나 허황된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호흡이 잠시 멎거나 가사상태에 빠지셨던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시고 시신이 되셨다.
시체는 끝남이다. 한 인간의 인생은 시체가 됨과 동시에 막을 내린다. 그래서 시체는 절망과 체념의 동의어이다. 모든 것의 끝남을 의미하는 시체에는 형체마저 소멸되는 부패만 있을 뿐,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도 있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시신이 되셨다는 것 역시 그분의 모든 것이 끝났음을 뜻했다.
그러나 그분의 시신이, 시신이셨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모든 것의 끝남과 절망과 체념의 죽음을 깨뜨리신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그분의 시신이, 시신이셨던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역설하였다. 그분 안에서는 죽음도 끝남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절망이나 체념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요 기회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다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예수님의 시신이, 시신이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대는 정녕 이 사실을 믿고 있는가? 이것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것이 우리 믿음의 토대가 될 때에만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명자로 살아갈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죽음이 끝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의 시발점일진대, 대체 이 세상에서 그 무엇이 사명자로 살아가는 우리를 절망시키고, 사명자로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를 체념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활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보다 깊은 뜻이 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행 13:32-37)
바울은 하나님께서 시신이셨던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을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신 것'으로 설명하였다. 시체는 시체가 되는 순간부터 썩기 시작한다. 만약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 시체는 더 이상 썩지 않는다. 십자가에 못박혀 시신이 되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예수님의 육체는 썩지 않게 되었다. 예수님의 육체만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역, 예수님의 뜻 등 예수님의 모든 것이 썩지 않게 되었다. 언제까지? 예수님께서 영원히 다시 사셨으므로 영원히 썩지 않게 되었다.
그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우리의 모든 뜻도 영원히 썩지 않는다. 그래서 사도들의 육체는 이 세상에서 순교 당했을망정, 주님을 위해 살았던 그들의 뜻은 영원히 썩지 않고 사도행전을 통해 지금도 결실되고 있다.
그대가 부활신앙을 믿음의 토대로 삼는 한, 주님을 위해, 그대가 품고 있는 뜻이 비록 그대 생애에는 빛을 보지 못한다 해도, 시신이 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 안에서는 결코 썩음을 당하지 않고 영원 속에서 대를 이어 가며 반드시 결실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예의의 사람이 되라. 그대의 사명감이 그대가 당할 수 있는 배신감을 압도하게 하라. 매일 밤 주님의 은혜를 헤아려 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라. 그대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켜라. 물질 이전에 마음을 주라. 그 위에 더하여 부활신앙의 토대 위에 서라.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은 매일 주님 안에서 사명자행전으로 엮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