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
한성기 교수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장) Ⅰ. 문제의식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공예배 가운데 하나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배가 끝날 때는 반드시 목사의 축도로서 마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없는 교회의 예배에서는 주기도문으로 예배의 끝을 맺기도 한다. 그러나 목사가 있는 경우는 교파를 초월해서 모든 교회가 축도를 한 후 성가대가 응답송을 하고, 그리고 반주자의 후주로서 예배를 마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는 기독교 예배의 전통으로서 형식과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이를 시행함에 있어서는 대부분 교회법의 기초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장로교회의 경우, 총회 헌법예배모범 제6장 강도의 제5항에 보면 “강도를 마친 후에는 목사가 기도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그 다음에는 시나 찬미를 부르고 하나님을 대표하여 축복기도로 폐회함이 옳다(고후 13:14, 히 13:20-21, 유다 24-25, 엡 3:20-21, 살후 3:16-17, 민 6:24-26)”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예배시의 축도는 교회법의 근거 아래 명문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는 또한 오랜 전통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예배순서의 한 행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축도에 대해 근래에 들어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특히 축도자의 자격, 축도문의 내용, 축도의 형태 등이 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축도는 반드시 목사만이 해야 하는가? 축도문의 내용 가운데 종결어미를 “있을지어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할 것인가? 축도문의 성경적 근거로서는 고린도 후서 13:13절의 소위 ‘바울의 축도’만을 사용하는데 개혁자들이 사용했던 민수기 6:24-26의 ‘아론의 축도’는 왜 사용하지 않는가? 축도할 때 목사는 두 손을 들어야 옳은가 한 손을 들어야 옳은가? 축도의 대상인 교인은 눈을 감아야 옳은가 떠야 옳은가? 등등에 관한 문제들이다. 이러한 문제 외에도 아직 목사안수를 받지 않고 담임교역자로 시무하고 있는 전도사들은 손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 가지 형태의 축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이 축도를 하지 못하는 전도사들이 시무하는 교회를 기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축도문의 내용을 변형시켜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행위들은 한마디로 말해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의미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실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우리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제 본고에서는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 그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로 이상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축도에 대한 일반적 고찰로서 축도의 어원, 축도와 축복의 개념 파악, 축도의 성격 규정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본 주제의 중심 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될 축도의 성격 규정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로 축도에 대한 형식적 고찰로서 특히 축도문의 종결어미 문제, 즉 “있을지어다”와 “축원하옵나이다”에 대해 각각 그 문제점들을 성경의 본문대조를 통해 성경적, 국문학적 고찰 속에서 그 논리의 타당성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셋째로 축도에 대한 내용적 고찰로서 축도문의 내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적 근거 아래서 파악하며 그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갈 것이다. 마지막 결론적 고찰에서는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가지고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의 방법을 모색하면서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Ⅱ. 축도의 성격 축도가 그 성격에 있어서 기원적((optative)이냐, 아니면 선언적(pronounce)이냐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말하자면 이는 축도가 기도의 한 형태이냐 아니면 강복의 선언이냐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의미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축도의 종결어미 문제에 있어서 “할지어다”냐 아니면 “축원하옵나이다”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축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견해가 있다. 첫째로 축도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사장적 축복 그 자체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축도는 단순히 기도라기보다 하나님이 복내려 주실 것을 선언하는(pronounce) 행위라는 것이다. 둘째로 축도는 축복을 기원한다는 견해이다. 즉 이는 바울의 축도(고후 13:13)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축도자가 회중과 함께 회중을 대표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함께 해 달라고 기원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셋째로 축도는 그리스도와 계약적 교제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성령이 전하는 영적 축복의 선언이 기도의 형식을 취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들은 나름대로 그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론의 근거가 빈약함으로 인해 그 주장 또한 확실하지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축도의 형태인 ‘아론의 축도’(민 6:24-26)와 ‘바울의 축도’(고후 13:13)는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를 서로 비교해 보기로 하자. 아론의 축도는 여호와께서 제사를 담당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할 말로서 준 것이다. 반면에 바울의 축도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인사말이다. 즉 아론의 축도는 순수한 축복의 말이고 바울의 축도는 작별인사의 한 형식이다. 그런데 이 둘을 축도로 인용할 경우 말하는 사람은 목사요 듣는 사람은 예배에 참석한 회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한 가지 공통점은 아론의 축도든 바울의 축도든 그 내용은 발화자, 즉 말하는 자의 희망과 바람에 대한 피력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아론의 축도의 “원한다”의 주격이 “여호와”라고 잘못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원한다”의 주격은 분명히 아론(목사)이다. 즉 아론의 축도의 본문 앞에는 “나는”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점에 있어서는 바울의 축도도 마찬가지다. 즉 바울은 말하기를 고린도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나는...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론의 축도를 G.N.B에서는 “May the Lord bless you”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바울의 축도에서도 본문의 형식적인 주어인 “The grace of the Lord ...”를 받는 동사로 원문에 없는 ‘be’동사를 써서 기원문의 형태, 즉 현대 영어에서 ‘may’로 시작하는 문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처럼 명령문이나 기원문의 주어는 생략되는 것이 여러 언어의 일반적 법칙이다. 따라서 축도에 있어서 축도를 지나치게 신성시하여 목사는 주어진 성경 구절을 그대로 옮길 뿐이라고 하면서 기계적 강복 선언설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복선언이라고 하면 복을 내려 주신다고 선언한다는 것인데 복을 내리시는 주체는 하나님만이 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그 선언도 그 주체만이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단지 하나님의 복을 비는 주체에 불과한 목사는 선언(pro nouncement)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도는 하나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강복선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예배를 마감하면서 목사가 회중들에게 하는 기원적 의미를 지닌 ‘축복의 작별 인사’라고 할 수 있다.
Ⅲ. 축도의 형식 1. ‘있을지어다’의 문제
우리말 개역성경은 ‘바울의 축도’라고 불리는 고후 13:13의 종결어미를 ‘있을지어다’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라고 하는 세 가지의 주어 다음에 “여러분 모두와 함께”로 문장이 종결된다. 즉 원문에는 이 말을 받아 주는 동사가 없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문장의 완결을 짓기 위해 ‘있을지어다’를 첨가하면서 그것이 원문인 헬라어 성경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작은 글씨로 표시를 했다. 그런데 이 ‘- ㄹ 지어다’를 ‘국어대사전’에서는 설명하기를 “받침 없는 동사의 어간에 붙어서 ‘마땅히 하여야 함’의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라고 하면서 그 예문을 “사람들이 부모님께 효도를 할지어다”라고 하는 예문을 들고 있다. 이처럼 예문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 ㄹ 지어다’ 형태의 종결어미는 2인칭 명령형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이 ‘- ㄹ 지어다’의 종결어미는 축도의 형태로서는 문법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첫째로 축도의 종결어미인 ‘있을지어다’가 형태상으로는 명령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도의 내용상 문맥대로 보면 명령을 받는 이는 회중이 아니고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된다. 즉 생물이 아니고 무생물이 명령을 받고 있는 형태가 된다. 그러므로 기원문의 형태인 ‘바울의 축도’의 종결어미로서 ‘있을지어다’는 문법적인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축도의 종결어미인 ‘있을지어다’는 문법적으로 형태상 비존대형이기 때문에 우리말의 관습에 있어서는 그 표현이 바람직하지 못하다. 요컨대 ‘축복의 인사’의 의미를 지닌 축도를 실제적으로 목사가 성도를 향해서 하는 경우 우리말로서는 자연스러운 인사말이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2. ‘축원 하옵나이다’의 문제 그렇다고 해서 이 ‘바울의 축도’의 종결어미를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하면 얼핏 들어 기도가 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기도는 삼위일체의 제2위인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바울의 축도’인 고후 13:13은 이와 같은 골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부르는 말로 시작되는데 고후 13:13은 그렇지가 않으며 더욱이 여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인 3위가 동시에 언급되어 다시금 성자 예수의 이름을 언급할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첫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할 때 이 동사의 가상적인 주어(기원을 나타낼 때는 일반적으로 주어를 쓰지 않는다)는 1인칭이 될 수밖에 없는데 축도 본문의 가상적인(생략된) 동사의 주어는 주기도문 가운데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경우와 같이 3인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하면 3인칭으로서 복의 주체인 성삼위보다 복을 비는 1인칭으로서 목사가 더 주체적이 되는 결과가 된다. 셋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는 종지법은 축도 본문의 내용으로는 기원을 나타내고 있지만 문장의 형태상으로는 기원문이 아니고 서술문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로 ‘축원하옵나이다’로 끝맺을 때는 종종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문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첨가되기도 하는데, 축도 본문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기도와는 달리 이 말을 첨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 기도할 때에 요청되는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이 말을 첨가할 수가 없다. 다섯째로 ‘축원하옵나이다’라는 종지법이 헬라어 원문으로나 우리말의 문법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의미상으로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 종결어미가 직설법이 되어서 다른 일반적인 기도와 동일시되기 쉬운 결점이 있다. Ⅳ. 축도의 내용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의 마지막 인사말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항상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기원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항상 함께 계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성도의 삶속에서 그 공효를 유지할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완전한 삶으로서의 미래적 은혜로서 앞으로의 성도들의 삶속에 축복으로 풍성하게 임하기를 기원한다는 미래적 축복의 의미이다. 2. 하나님의 사랑 우리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의해서이다. 즉 이 사랑은 죄악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인간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신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축도의 내용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를 그 사랑의 하나님께 위탁하는 뜻이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이 구원받은 이후에도 성화되게 하시고 또한 부활을 통하여 영화에 이르게 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사역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 성도들을 보전하시고 협력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미래적 축복을 의미한다. 3. 성령의 교통 이 말씀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지만 문맥으로 볼 때 구원받은 성도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심을 의미한다. 성령은 일찍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우리는 이 내주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에 의하여 성도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교통’은 성령의 끊임없는 교제 속에서 성도가 성장해 가도록 위탁하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까지 성도들을 계속해서 성결케 하시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게 하셔서 궁극적으로 구원을 완성시키실 것을 기원하는 성령의 미래적 축복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축도의 내용은 신약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는 은혜와 사랑과 사귐이고, 그것들의 원천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성도들에게 있기를 비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교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있다. 그것은 먼저 복의 주체가 대개의 바울서신 첫 머리 기원문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고, 끝머리 기원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 있는데 대해, 고후 13:13의 축도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즉 성삼위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삼의일체 교리를 의식하고 사용한 표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교회가 하나가 되고, 보호하시는 성령의 교통을 축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성삼위의 순서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가 아니라, 성자 성부 성령의 순서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의 순서에서 그리스도가 앞에 위치한 이유를 충분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바울이 절실하게 그리스도를 사모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요 14:6)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리스도 중심의 바울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Ⅴ.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다각적인 측면에서 논해왔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형식의 일치와 내용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한국 교회 축도의 모습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시작으로 축도의 성격, 축도의 형식, 축도의 내용에 대해 그 본질적 의미를 해명해 보고자 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 가운데 가장 큰 논의의 주제는 역시 축도문의 내용가운데 종결어미를 「선언문」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기원문」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여기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서 그 결론을 지어보고자 한다. 축도의 바른 형식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 바대로 「바울의 축도」(고후 13:13)를 사용할 경우 그 종결어미인 ‘있을지어다’와 ‘축원하옵나이다’ 가 모두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법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 두 가지가 혼용되고 있는 한국 교회 현실 속에서 문제해결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경대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법(法)대로 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에도 보면 고후 13:13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로 번역하고 있다. 둘째로 성경대로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서는 번역상의 문제에서 언급한대로 헬라어 원문에도 없는 ‘있을지어다’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문장의 완결을 짓기 위해 첨가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있을지어다’는 문법적으로도 역시 문제가 있음 또한 이미 언급한 바대로다. 따라서 축도의 종결어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바른 우리말 성경번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이를 위해서는 교단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자뿐만이 아니라 국문학자 등도 참여한 공동연구를 통해 가장 바람직한 통일안을 도출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축도문의 통일안은 한마디로 완벽한 결정이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위에서 밝힌 견해는 현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참고로 각 교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축도의 종결어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장 대신은 1987년 상정된 헌의안의 결의에 따라 ‘있을지어다’를 사용하고 있다. 통합은 1989년 총회 결정인 ‘축원하옵나이다’로, 합동과 고신은 성경 본문인 ‘있을지어다’를 거의 통일적으로 쓰고 있다. 기장은 1988년 시점에서 총회신조위원회에 축도가 너무 다양하니 통일하자는 헌의가 들어와 “축도 본문을 그대로 쓰되 종결절만 ‘축원하옵나이다’로 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는 첨가하지 않는다”라고 결정을 했다. 감리교는 성경의 본문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 하는데 대다수가 ‘축원하옵나이다’로 소수가 ‘있을지어다’로 한다. 성결교는 절대다수가 ‘축원하옵나이다’로 하고 있으나 요즈음은 부흥사들이 ‘있을지어다’로 하는 경향이 있다. 침례교는 대다수가 ‘축원하옵나이다’로 소수는 ‘있을지어다’로 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사용의 통일에 대한 문제를 논해왔다. 바라기는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가 축도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서 진정한 축복의 통로로 자리매김하여 사용할 것을 기대하며 글을 맺는다. (출처: 복음신문) |
출처: 대한민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원문보기 글쓴이: 오늘도기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