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교수와의 인터뷰가 '우리교육' 9월호에 실렸다. 김상봉 교수의 글은 '도덕교육과 파시즘'을 읽으며 학부 때 처음 접했는데 그 때 이미 그의 팬이 되었다. 교육학과였던 탓에 동서양의 교육 철학을 얕게 접하며 '그렇다면 지금 우리 나라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이의 철학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사람은 많으나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해 나가는 시도는 많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그의 글을 읽고 참 반가웠다. 온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개념을 만들어 내고, 우리 사회 속에서 그 개념을 설명해 가고, 지향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음은 우리교육에 실린 대화를 읽다 친 밑줄을 옮긴 것이다. 블로그에 올려서 짬 날 때 마다 보면 좋을 것 같아서다.
그가 말하는 서로주체성은 하나의 지향을 제시한다. 그래서 좁은 교실에서 못난 나의 모습에 풀이 죽고, 학부모에, 관리자에, 세상에 주눅들어 그저 수동적여지기만 하는 자신에게 힘을 준다.
-(중략) 그런데 자유에 대한 오해 때문에 지금 인류문명이 벽에 부딪히고 있어요.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너는 노예가 되어줘야겠다는 거예요. 이런 문제는 자유의 주체를 고립된 개별자로 보는 한계 때문이에요. 그걸 저는 홀로주체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제가 서로주체성을 말하는 겁니다. 자유는 만남에서 온다는 게 핵심이에요. 서양의 자유는 스스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상황에서 형성되는 것인데 여기에 너와의 만남은 빠져있어요. 그게 요즘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돈만 있으면 된다'로 나타나는 거죠. 저는 인간이 만남 속에서만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너를 통해서만 내가 된다는 게 서로주체성 이념이에요. 저는 이걸 가지고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육이 파행으로 치닫는 이유도, 교육은 만남의 사건이라는 걸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라고 봐요.
-인간의 궁극적 욕망이 뭐냐 물으면 서양 사람들은 자기실현이라고 합니다. 이걸 저는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는데요, 이게 일종의 변태입니다. 저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욕망을 참된 만남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자기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남을 위해 스스로 자기 권리를 포기할 줄도 아는 존재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그 기준은 뭔가? 참된 만남이 기준입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신화입니다. 저는 믿지 않아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사랑이에요.
-우리시대의 질병이 실용성에 목숨 거는 겁니다. 물론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걸 구하려고 하는 게 실용적인 거죠. 그건 삶의 목적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걸 다들 목적으로 놓고 사는 거예요. 그게 최초의 노예 상태입니다. 한국 교육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끊임없이 “야, 너 그래가지고 나중에 뭐 해먹고 살래?”라고 윽박지르고, 그래서 결국 아이들을 먹고 살기 급급한 인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이때 가장 큰 문제는 각자가 불행하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꾸 강요해요. ‘나 삼성 들어가서 돈 많이 버니까 행복해’라고 하는데 사실 행복하지 않거든요. 그런다고 남이 먹는 밥의 열 배를 먹겠어요? 전체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거죠.
오늘 우리시대의 문제는 학생들이 열정 없이 크는 데 있어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공부하는데 그건 참된 의미의 열정이 아니죠. 군대에서 하는 ‘선착순’을 학교에서도 체육시간에 하죠? 아이들이 죽어라고 뛰는데 그걸 열정이라고 하기 힘들잖아요. 한국사회의 열정이라고 하면 두 가지예요. ‘낙오될지 모르겠다’라는 공포, ‘반드시 이겨야지’ 하는 탐욕. 이건 둘 다 철학적으로 보면 타율적이에요. 강요된 거라는 거죠.
-권리 투쟁도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참된 만남을 막는 것에 저항해서 싸워야 해요. 그렇다면 현장의 교육적 실천 자체가 모두 저항의 과정입니다. 교육에서 만남의 가장 큰 저해요인은 강제와 폭력이에요. 그건 어떤 경우에도 만남과 양립할 수 없어요. 물론 학생과 교사 사이의 교육적인 만남에는 일정한 정도의 비대칭성과 타율성이 있어요. (중략) 타율성은 학생의 자율성을 신장시키기 위한 발판으로서만 허락되어야 합니다.
-교사들이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 건가’ 고민해야죠. 이럴 때일수록 ‘자, 그럼 뭐가 진짜 교육이냐’ 물어야죠. 먼저 시대를 꿰뚫어보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고,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학교가 어떻게 급속한 급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와 있는가를 냉철히 판단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우리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요즘 ‘낙오자 되기’ ‘내부로의 망명’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현명한 부모, 교사라면 입시경쟁을 통해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것보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 한발짝이라도 앞선 사람을 길러내야죠. 그게 낙오자입니다. 낙오자가 된다는 건 공부도 하지 말고 어떤 종류의 자기계발도 하지 말고 부랑아가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지배계급의 요구, 가치,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지배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탁월함, 경쟁력, 우수함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 거짓된 것이므로 그걸 꿰뚫어보고 부정하고 거부하라는 겁니다. 그게 지배자 눈에는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선구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낙오자들이 서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목소리를 분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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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열린도서관의 "겨울 농민 인문학" 1회 강의가 1월 5일 있었다는 소식입니다.
개요적인 내용이나마 공유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