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君이나 君 가운데 한사람이 세자책봉을 받게되면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되고 대궐안에 있던 나머지 大君 또는 君은 대궐 밖으로 나가살게 된다. 또한 혼인을 하면 대궐 밖 인근 처소에서 살게 되는 것이 宗室의 법도였다. 그러다가 王統을 이어받게 되어 대궐로 들어가 寶位에 오르면 대궐 밖 처소를 잠저(潛邸) 또는 잠제(潛第)라고 부른다.
즉 국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거처하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칭한다.
어의궁(於義宮)은 仁祖와 孝宗의 잠저(潛邸)인데, 종로구 낙원동 소재 상어의궁(上於義宮)과 나중에 孝宗이 이주한 종로구 효제동의 하어의궁(下於義宮)이 있다. 孝宗 (봉림대군)은 상어의궁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가례(嘉禮) 後에 하어의궁으로 이사해서 보위에 오를 때까지 하어의궁(下於義宮)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인터넷 상에는 孝宗의 잠저가 사직동 上於義宮으로 서술한 곳도 있다. 하긴 임금이 태어난 곳도 잠저(潛邸)일 수 있고 나중에 이사가서 살다가 寶位에 오른 곳도 잠저(潛邸)일 수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두 곳 모두 잠저(潛邸)라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리라.
사직동에는 宣祖大王 (德興君의 제3男)의 잠저(潛邸)가 있는데 바로 도정궁(都正宮)이다. 1913년 大正2년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된 이후 日帝에 의해 200여필지로 나누어 매각되서 지금은 흔적 찾기도 힘들다. 朝鮮의 王統 精氣를 말살하려는 日帝가 저지른 조선 역사 왜곡의 참담한 결과물의 일례에 불과하다.
그러면 중종반정으로 보위에 올랐던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살았던 잠저(潛邸)는 어디에 있을까?
보위에 오른 날이 1506년 9월2일이니 효종이 즉위한 때(1649년)보다 57년이 앞선다.
대부분 朝鮮 왕들의 潛邸 이름은 역사서에 궁 이름이 나오는데 반해 중종대왕의 잠저는 宮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현실이다. 궁금증을 갖고 찾아헤메던 중에 문화재해설사를 하고계시는 이순자氏가 펴낸 [조선의 숨겨진 王家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에 뜨는 글을 발견하고 중종대왕실록을 찾아보니 꼭꼭 숨겨져 있던 진성대군(晉城大君)의 잠저((潛邸)가 나오는 것이었다. 본문이 아니고 [ ]속 註釋으로 말이다.
진성대군(晉城大君) 시절에 연산군의 장인 신수근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여 약7년간 살다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등극한지 일주일만에 반정공신들의 강압으로 궐밖으로 내쳐진 조강지처(糟糠之妻).
1739년(영조 15년), 돌아가신지 232년만에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지만 역사는 이긴 자에 의해 쓰여짐을 어찌하랴
폐비 신씨가 사는 집에 도둑이 들어 당직 군사를 늘리라는 전교에서 잠저(潛邸)가 밝혀진 것이다.
中宗 23년 1월 29일 1528년 (중종실록 60권)에 나온 기록이다.
그 잠저 名이 於義洞 本宮이며 어의동(於義洞)에 위치하고 있어 그리 불려진 것이고 인터넷에 떠도는
상어의궁(上 於義宮)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서울특별시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수선총도(首善總圖 1850년대 추정)에서 어의동 본궁(於義洞 本宮) 위치를 찾았다. 수선총도를 보면 옛 한양의 연화방(蓮花坊)이라고 쓰인 곳 오른쪽 위에 위치하며 지금의 종로5가 기독교회관 위 예식장이 많은 곳 부근이다. 이화사거리 좌측 모서리 인근으로 추정한다.
於義洞 本宮에서 살았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 도둑이 어의동 폐비 신씨 집 (=진성대군 시절에 함께 살던 잠저(潛邸)에 도둑이 들기 6년전인 중종17년 12월 16일 (1522년) 중종실록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인용]
"지금 사복시(司僕寺)의 숙마(熟馬)379) 한 필을 시급히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 【대비(大妃)의 본궁이다.】 으로 보내야 한다." 【틀림없이 비는 데 쓰게 하려 한 것이다.】
○傳于政院曰: "今司僕寺熟馬一匹, 速送于於義洞本宮 【大妃本宮。】 可也。" 【意必祈禱也。】
[인용 끝]
여기서 주목할 점은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 【대비(大妃)의 본궁이다.]" 이다.
중종대왕 재임시 대비(大妃)라 함은 바로 成宗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 尹氏)이다.
어의동궁於義洞宮은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의 본궁으로 下於義宮을 말한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비가 되자 계비로 책봉되어 훗날 中宗이 되는 진성대군(晉城大君)과 신숙공주를 낳았다.
진성대군은 어릴 적에 이곳에서 살았다. 바로 중종의 잠저인 것이다.
세조대왕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는 하성위 정현조에게 하가(下嫁 = 혼인)했는데 의숙공주는 후사 없이 1477년 35세로 돌아가셨다.
중종대왕이 진성대군 시절 잠저(潛邸)에 있을 때, "공주가 中宗을 시양(侍養)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인용]
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 2월 4일 병인 2번째기사 1566년 명 가정(嘉靖) 45년
○傳曰: "淨土寺非他雜寺之比, 卒懿淑公主 【世祖女。 中宗在潛邸時, 公主以中宗爲侍養。】
[인용 끝]
즉, 진성대군과 폐비 신씨는 혼인 이후 중종반정 때까지 어의동 본궁(於義洞 本宮)에서 할머니 의숙공주((懿淑公主)를 시양(侍養)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의숙공주((懿淑公主)가 후손없이 죽자 제사를 모셨던 것이다.
폐비 신씨(단경왕후)는 어의동 본궁에 거주하면서 의숙공주의 제사를 받들며 살았고 중종이 사복시 숙마 1필을 기도하는데 쓰라고 보내준 것이다. 【意必祈禱也。】
중종실록 중종5년 1510년 3월21일 기록이다.
처음에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縣祖)가 세조의 딸 의숙 공주(懿淑公主)와 결혼하였는데, 공주가 죽은 뒤에 사족(士族) 이씨(李氏)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으니, 그 때 이씨를 첩으로 논정(論定)하였다.
"부마(駙馬)에게 적자(嫡子)가 없으면, 첩자는 제사를 받들지 못하며, 공주의 부마는 재취하지 못하는데,.. 이하 중략.
수선총도와 비교해 보려고 다음 지도를 함께 인용해 올린다.
신병주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의궁은 원래 인조의 잠저(潛邸)를 칭한 용어였으나, 인조의 아들인 봉림대군이 태어난 후 거처를 동부 숭교방(崇敎坊), 지금의 종로구 효제동으로 옮기면서 인조의 잠저는 ‘상어의궁(上於義宮)’이라 하고 효종의 잠저는 하어의궁(下於義宮)이라 불렀다. 별궁으로 활용된 곳은 바로 하어의궁이며, 이후에는 어의궁 또는 어의동별궁(於義洞 別宮), 어의동 본궁(於義洞 本宮)으로 불려졌다.
국립중앙도서관 발간 [서울지명연구]에는 어의궁과 어의동을 각각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어의궁(於義宮):
종로구 낙원동. 仁祖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로 교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어의동(於義洞):
종로구 효제동. 고려 때 李氏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는 도선도참(道詵圖讖) 說을 믿고 그 기운을 미리 막기위해 한양 동촌(東村)에 오얏나무(李)를 많이 심었다가 무성하면 베어버려 예이동
(刈李洞)이라고 불렀던 것을 於義洞으로 고쳤다는 說이 전한다.

[인용]
중종실록 60권, 중종 23년 1월 29일 임인 2번째기사 1528년 명 가정(嘉靖) 7년
○폐비 신씨의 수직 군사를 6명으로 늘리라는 전교하였다.
"어의동(於義洞) 폐비(廢妃) 신씨(愼氏) 집의 【바로 금상(今上)의 잠저(潛邸) 때 집이다.】 수직(守直) 군사를 단지 4명만 정했는데, 매우 부족하여 근일 도둑이 출입한 일이 있었다. 6명으로 늘려 지키도록 하라."
○傳曰: "於義洞廢妃愼氏家 【卽今上潛邸時, 室也。】 守直軍士, 只定四名, 至爲不足。 近日有盜賊出入之事, 加定六名, 使之看直。"
【태백산사고본】 30책 60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16책 620면
위 지도와 관련하여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개천(開川)〉을 읽어보면 그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당시 개천 물의 흐름과 다리(橋) 이름 설명이 자세히 묘사되어 어의동 본궁 위치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현재 혜화동 로타리 인근 부터 동숭동 대학로를 지나 종로5가 인근을 흘러간다.
○관기교(觀旂橋) 서반수(西泮水)에 있다. 길이가 17자, 너비가 23자이다.
○광례교(廣禮橋) 관기교 동쪽에 있다. 동반수(東泮水)가 이 다리 서북쪽에서 서반수와 합쳐진다. 다리의 길이는 15자, 너비는 21자이다.
○응란교(凝鑾橋) 광례교 남쪽에 있으니 바로 궁원(宮苑)에서 흘러나온 도랑이 반천(泮川)에 유입되는 곳이다. 다리 길이는 3자, 너비는 21자이다. 이상 세 다리는 임인년(1782, 정조6) 봄에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이 감독하여 조성한 것이다.
○ 장경교(長慶橋) 응란교 남쪽에 있다. 반수가 여기에 이르러 어의동천(於義洞川)이 된다. 다리의 길이는 34자, 너비는 20자이다.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여름에 조성되었다.
○조양교(朝陽橋) 장경교 남쪽에 있다. 속명은 신교(新橋)이고, 길이는 29자, 너비는 19자이다. 다섯 다리의 이름은 좌상 이복원(李福源)이 하교를 받들어 지었고, 훈련대장 구선복이 하교를 받들어 쓰고 새겼다.
본궁(本宮)에 동가할 때 길이 어의동(於義洞) 입구를 경유하면 조양교가 제1교, 장경교가 제2교가 되고, 길이 관현(館峴)을 경유하면 관기교가 제1교, 광례교가 제2교, 응란교가 제3교가 된다.
[주D-001]서반수(西泮水) : 반수의 서쪽 부분을 지칭한다. 동쪽 부분은 동반수이다. 반수는 태학(太學) 전반(前半)에 빙 둘러 흐르는 내를 지칭한다. 반수가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태학을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며, 반수가 바로 태학을 지칭하기도 한다.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 개천(開川)〉에 “동반수(東泮水)는 성균관 앞 다리와 식당교(食堂橋)와 비각교(碑閣橋)를 경유하고, 서반수(西泮水)는 집춘문(集春門) 앞 다리를 경유하여 대성전(大成殿) 남문 밖에서 합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관기교(觀旗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충락교(忠樂橋)가 되며, 광례교(廣禮橋)에 이르러 흥덕동(興德洞) 물과 합하고, 또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 응란교(凝鸞橋) 물을 지나서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 장경교(長慶橋)가 되고,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 앞을 지나고 신교(新橋)를 지나와서 오간수문(五間水門)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또한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제4권 금제(今制) --> "궁로(宮路)와 교량(橋梁)"에 더욱 자세히 위치 근거를 찾아 볼수 있다.
아울러 송인호, 조은주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논문 "조선 별궁 於義宮(龍興宮)의 도시 위상과 英祖의 親迎'을 참고하면서 이를 입증해 보았다.
推記: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다르면 상어의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에 있었고 (在中部慶幸坊), 이곳에는 잠룡(潛龍)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다(有池名潛龍池)고 기록하였다. 原文은 (在中部慶幸坊有池名潛龍池)’다. 지금의 낙원동 인근으로 국립중앙도서관 발행 [서울지명연구] 자료에 쓰여있다.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연구원)에는 [요약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있었던 궁궐.]로 표시하고 있다.
海安君 15世
漢覇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