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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3 편
결혼 제도
. 세라핌의 우두머리
. 1934년
83:0.1 이 글은 결혼제도의 초기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혼은 집단의 절제 없는 난잡한 교배로부터, 여러 가지 변화들과 적응들을 거쳐서, 결국에 부부의 짝짓기를 실현하게 한 결혼 기준이 나타나기까지 진보해 왔으며, 부부가 짝짓는 것은 가장 높은 사회 체제인 가정을 세우려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는 것이다.
결혼은 여러 번 위험에 처했고, 결혼 풍습을 지탱하기 위하여 재산과 종교 모두에서 많은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과 그에 따라 생기는 가정을 언제까지나 보호하는 진짜 영향력은, 남자와 여자가, 가장 원시적 야만인이든 가장 교양 있는 필사자이든 간에, 분명히 혼자 살 수 없다는 단순하고 타고난 생물학적 사실이다.
이기적인 사람이 자신이 동물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유혹을 받은 것은 자신의 성적 충동 때문이었다. 자기 존중과 자기 만족적인 성(性)관계에는 자아 부정의 특정한 결과를 수반하는 이타적 의무와 종족을 이롭게 하는 수많은 가정적 책임을 떠맡게 되어있다. 여기서 성적 관계는 야만인에게 인식되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못한 문명이었다; 이 성적 충동은 자동적으로 그리고 변함없이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고 결국 타인을 사랑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1. 사회 제도인 결혼
83:1.1 결혼은 남녀의 육체적 사실에서 생겨나는 많은 인간관계를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고안된 사회적 장치이다. 그러한 제도로서, 결혼은 두 방향에서 작용한다:
1. 개인적인 성관계의 규제에 있다.
2. 혈통ㆍ상속ㆍ계승, 사회 질서의 규제에서, 결혼은 더 오래된 최초의 기능이었다.
결혼으로 성장하는 가정은 그 자체로 재산과 더불어 결혼제도를 안정시키는 요소이다. 결혼 안정성을 더하는 다른 강력한 요소들로는 자부심, 허영심, 기사도, 의무감, 종교적 신념 등이 있다. 그러나 결혼은 높은 곳에서 승인되거나 거부될 수 있지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 인간 가족은 명백히 인간의 사회적 제도로 진화된 것이다. 결혼은 사회의 제도이지 교회의 분과가 아니다. 물론, 종교는 결혼에 큰 영향력을 미쳐야 하지만, 독점으로 그것을 통제하고 규제해서는 안된다.
원시 결혼은 주로 산업적이었다; 심지어 현대에도 종종 사회적 또는 사업적 문제이다. 안드 종족 혈통 혼합의 영향을 통해서, 그리고 진보하는 문명의 풍습의 결과로서, 결혼은 천천히 상호적이고, 낭만적이며, 부모다워지고, 시적이고, 애정이 깊고, 윤리적이며, 심지어 이상주의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원시의 짝짓기에는 선택과 소위 낭만적 사랑은 극히 적었다. 옛 시절에 남편과 아내는 별로 같이 있지 않았다.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다. 옛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애정은 성적 매력과 강하게 연결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주로 함께 살고 일하기 때문에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2. 구혼과 약혼
83:2.1 원시의 결혼은 반드시 소년과 소녀의 부모들에 의해서 계획되었다. 이러한 풍습과 결혼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절 사이의 과도기 단계는 결혼 중개인들, 곧 전문 중매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매인들은 처음에 이발사였고, 나중에는 사제였다. 최초에 결혼은 집단의 행사였고, 다음에는 가족의 문제였다. 요즘에야 결혼은 개인적 모험이 되었다.
원시의 결혼은 서로에게 끌려서가 아닌 강제적인 것이었다. 옛 시절에 여자는 성에 냉철하지 않았고, 풍습이 주입되어 오직 성적 열등감을 가졌다. 약탈이 거래보다 앞선 것처럼, 납치하여 결혼하는 것이 계약 결혼보다 먼저 이루어졌다. 어떤 여자들은 자기 부족의 늙은 남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로잡힐 때 모른 체하곤 했다; 그들은 다른 부족의 동갑내기 남성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더 선호했다. 이 거짓 도피행위는 무력에 의한 생포와 나중에 매력으로 이어지는 구애 사이의 과도기였다.
초기 형태의 결혼식은 탈출하는 흉내, 일종의 도망 연습이었고, 이것은 한때 흔했던 풍습이었다. 나중에는 생포를 흉내 내는 것이 정상 결혼식의 일부가 되었다. 현대의 소녀가 “사로잡히는 데” 저항하는 체하는 것, 결혼에 대하여 말을 아끼는 것은 다 옛 풍습의 유물이다. 문턱을 넘어 신부를 들고 다니는 모습은 특히 아내를 도둑질하던 시절의 수많은 고대 풍습을 연상시킨다.
여자에게는 결혼생활에서 자기 뜻대로 처신하는 완전한 자유가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으나, 좀 더 지적인 여자들은 그들의 영리한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항상 이러한 제약을 피할 수 있었다. 남자가 보통 구혼을 주도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여자는 때때로 공식적으로뿐 아니라, 비밀리에 결혼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여자는 구혼과 결혼의 모든 단계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혼하기 전 구혼 기간에 사랑, 낭만, 개인 선택의 증가는 세계 종족들에게 안드 종족이 공헌한 것이다. 남녀 사이의 관계는 순조롭게 진화하고 있었다. 진보하는 많은 민족이 효용과 소유권에 근거를 둔 옛날의 동기 대신에 어느 정도 이상이 된 성적 매력의 개념을 차츰 받아들이고 있다. 성적 충동과 애정의 감정들은 일생의 짝을 고르는 데 있어서 냉혹한 계산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83:2.6 최초에 약혼은 결혼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옛 민족들 사이에서 약혼 기간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풍습이었다. 최근 들어 종교는 약혼과 결혼 사이의 기간에 성 금기를 확립하고 있다.
3. 아내 사들이기와 지참금
83:3.1 옛날 사람들은 사랑과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지속적 결합은 반드시 물질적 안전, 즉 재산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아내 사는 값은, 이혼이나 아내를 버릴 경우 남편이 잃을 수 밖에 없는 양도나 보증금으로 여겼다. 신부 사는 값이 지불된 후에는 남편의 표식을 여자의 몸에 불로 지지는 것을 여러 부족에서 허용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아직도 아내를 사들인다. 사랑하는 아내나, 백인 남자의 아내는 그들이 그녀에게 아무런 값을 치르지 않기 때문에 고양이에 비교한다.
신부를 보여주는 것은, 신부가 아내로서 더 높은 값을 받으리라는 기대로 대중 전시를 위해 옷을 입히고 치장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물처럼 팔리지는 않았다―후일의 부족들 사이에서 그런 아내는 남에게 양도할 수 없었다. 아내를 사는 것이 반드시 냉혹한 돈거래도 아니었다; 봉사(奉仕)는 아내를 사기 위한 현금과 같았다. 다른 면에서 바람직한 남편이 제 아내의 값을 치를 수 없으면, 여자의 아버지에게 양자가 될 수 있었고, 그런 다음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난한 남자가 아내를 구하면서 욕심 많은 아버지가 달라는 값을 치를 수 없으면, 장로들이 흔히 그 아버지에게 바짝 압력을 넣곤 했는데, 이것은 그의 요구를 수정하게 만들곤 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눈이 맞아 도망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서, 아버지들은 딸을 파는 것처럼 보이기가 싫었고, 그래서 신부 사는 값을 계속 받는 한편, 신부의 값과 대충 같은 값으로, 그 쌍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신부를 위한 지불이 중단되자, 이 선물들은 신부의 지참금이 되었다.
지참금의 개념은 신부의 독립에 대한 인상을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노예 부인과 재산 동반자 시대로부터 이미 없어진 것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는 지참금을 완전히 돌려주지 않고서 이혼할 수 없었다. 어떤 부족들 사이에서는 상호 보증금, 실제는 결혼 보증금이 신부와 신랑, 양쪽의 부모에게 맡겨졌는데, 이것은 한쪽이 다른 쪽을 버리는 경우 몰수하도록 하였다. 아내 사들이기에서 지참금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아내를 샀다면,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속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아이들은 아내의 가족에 속했다.
4. 결혼식
83:4.1 결혼 예식은 결혼이 두 사람이 내린 결정이 열매를 맺은 것일 뿐 아니라, 본래 공동체의 일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짝짓기는 개인의 활동일 뿐 아니라 집단적인 관심사였다.
예로부터 마법, 의식, 그리고 예식이 옛날 사람들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었고, 결혼도 예외가 아니었다. 문명이 발전하고 결혼이 더 진지하게 여겨지면서 결혼은 점점 가식적이 되었다. 초기 결혼은 재산 이해 관계의 요소였고, 오늘날처럼 법적 의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후 자녀의 사회적 지위는 가능한 한 널리 알려져야 했다. 원시인은 기록이 없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구경함으로 결혼이 증명되어야만 했다.
처음에 결혼식은 약혼의 형식이었고, 단순히 함께 살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만을 포함했다. 나중에는 공식적으로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변했다. 어떤 부족들 사이에는 부모가 단지 딸을 남편에게 데리고 가기만 했고, 다른 경우에는 선물을 공식적으로 교환한 후에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신랑에게 내어주곤 했다. 레반트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든 형식을 생략하는 관습이 있었고, 결혼은 성관계로 끝을 맺었다. 홍인은 더 정교한 결혼 축하 행사를 발전시킨 첫 번째 사람들이었다.
자식이 없는 것은 매우 두려웠고, 불임을 영이 장난치는 탓으로 돌렸기 때문에, 다산을 보장하려는 노력은 특정한 마술이나 종교의식과 관련시키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행복하고 아이를 많이 낳는 결혼을 보장하려는 이 노력으로 많은 부적이 이용되었다; 심지어 점성가들도 계약하는 당사자들의 출생 별을 확인하려는 상담을 받았다. 한때는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모든 결혼에 정규 행사였다.
사람들은 행운의 날을 찾았고, 목요일은 가장 호의적인 날이었으며, 달이 가득 찬 날에 축하하는 결혼식은 예외적으로 운이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신혼부부에게 곡식을 던지는 것은 많은 근동 사람들의 관습이었다; 이것은 다산을 보장하는 마법의 의식이었다. 어떤 동양인들은 이 목적으로 쌀을 사용했다.
83:4.6 불과 물은 항상 귀신과 악령에 대항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성수의 세례로 뿌리는 것뿐 아니라, 제단에 불을 지피고 촛불 켜는 것이 결혼식에 흔히 보였다. 오랫동안 귀신과 영들을 길에서 쫓아내려고 가짜 결혼일을 정하고, 갑자기 그 행사를 연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새로 결혼한 사람들을 놀리고 신혼여행을 하는 자들에게 못된 장난을 하는 것은 모두 아득히 먼 시절의 유물이며, 그때는 귀신의 질투를 일으키는 것을 피하려고 귀신의 눈에 불쌍하고 불안해 보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었다. 신부가 베일을 쓰는 것은, 귀신이 그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또한 귀신이 그 여자의 아름다움을 시샘하고 부러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신부를 변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시절의 유물이다. 신부의 발은 예식이 있기 바로 전에, 결코 땅에 닿아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20세기에도 여전히 차량이 내리는 데서부터 교회의 제단까지 카펫을 까는 기독교 풍습 아래에 있는 것이 관습이다.
혼례의 가장 오래된 형태 중 하나는 사제가 자손 번식을 보장하기 위해 결혼 침대를 축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공식 결혼 의식이 생기기 오래전에 행해졌다. 결혼 풍습의 진화에서 이 기간에는 결혼식 손님들이 밤에 침실을 통과할 것으로 기대되었고, 따라서 혼례 완성에 대한 법적 증인이 되었다.
모든 혼전 테스트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혼이 나쁜 운을 갖게 되는 요인에 대해서, 원시의 남자들은 결혼의 실패에 대한 보험으로 사제와 마술을 찾게 되었다. 이 운동은 결국 현대의 교회 결혼식에서 직접적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결혼은 대체로, 계약하는 부모―나중에는 그 부부가―내리는 결정이라고 인식되었으며, 한편 교회와 국가가 지난 5백 년 동안에 관할권을 장악하고, 이제는 결혼 선언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 여럿과 결혼하기
83:5.1 결혼의 초기 역사에서 미혼 여성들은 그 부족의 남자들에게 속했다. 나중에, 한 여성은 한 번에 한 명의 남편만 두었다. 이러한 관행은 집단의 성의 문란함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여자는 한 명의 남자만 허용되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러한 일시적인 관계를 마음대로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느슨한 규제는 집단생활과 구별하여 짝지어 사는 첫걸음이었다. 이 결혼 발달 단계에서 아이들은 보통 어머니에게 속했다.
짝짓기 진화의 다음 단계는 집단 결혼이었다. 결혼의 이 공동체 단계는 가족생활의 전개에서 사이에 끼어야 했는데, 이는 부부의 결합을 영구하게 하기에는 아직도 결혼 풍습이 충분히 튼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와 자매의 결혼은 이 집단에 속했고, 한 집안의 다섯 형제와 다른 다섯 자매의 결혼이 가능했다. 전 세계적으로 느슨한 형태의 공동 결혼은 점차 다양한 형태의 집단 결혼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 집단 결합은 주로 토템 풍습들에 의해 규제받았다. 성관계와 결혼에 대한 규제는 더 많은 아이들의 생존을 보장함으로 부족의 생존 자체를 선호했기 때문에 가족의 삶은 느리고 확실하게 발전했다.
더 진보된 부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복혼―일부다처 와 일처다부―의 풍습 앞에서 집단 결혼은 차츰 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일처다부는 결코 널리 퍼지지 않았고, 여왕이나 부유한 여인들에게 보통 국한되었다. 더군다나 그것은 관례로, 여러 형제와 한 아내가 사는, 집안일이었다. 카스트와 경제적 제한은 때때로 여러 남자가 오직 한 아내로 만족하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그런 때에도, 여자는 오직 한 사람과 결혼하고, 나머지는 합동 자손의 “아저씨”로서 적당히 참아 주곤 했다.
한 남자가 “자기 형제의 씨를 기르는” 목적으로 죽은 형제의 과부와 사귀도록 요구하는 유대인의 관습은 고대 세계의 절반이 넘는 데서 있던 관습이었다. 이것은 결혼이 개인의 결합이기보다 가족의 일이었던 시절의 유물이었다.
83:5.5 일부다처 제도는 다른 시절에 네 종류의 아내를 인정했다:
1. 예식을 올리거나 합법적인 아내.
2. 사랑하고 허락된 아내.
3. 첩, 계약한 아내.
4. 노예 아내.
모든 아내가 평등하고 모든 아이가 평등한 진정한 일부다처제는 매우 드물었다. 보통은 복혼의 경우에 우두머리 아내, 지위가 있는 동반자가 가정을 지배했다. 그 여자 혼자, 의식 결혼식을 올린 지위가 있는 아내가 특별히 주선하지 않으면, 오직 사들이거나 지참금을 낸 그러한 배우자의 아이들만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83:5.11 지위가 있는 아내는 반드시 사랑하는 아내일 필요는 없었다. 옛날에 지위를 가진 아내는 보통 그렇지 않았다. 사랑으로 맞는 아내는 종족들이 어느 정도 진보할 때까지, 더욱 상세하게 말하자면, 특히 진화하는 부족들이 놋 종족과 아담 종족과 섞이기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금기의 아내―법적 지위를 가진 한 명의 아내―는 첩을 두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이 풍습 밑에서 한 남자는 오직 한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지만, 몇 명이라도 첩들과 성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첩 제도는 일부일처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버젓한 복혼으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유대인ㆍ로마인ㆍ중국인의 첩들은 아주 흔히 아내의 몸종들이었다. 나중에는, 유대인들처럼, 남편에게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그 법적 아내를 어머니로 여기었다.
아이를 배거나 젖을 먹이는 아내와 성관계를 하지 말라는 오래된 금기는 일부다처제를 권장하는 경향이 컸다. 원시의 여자들은 고된 일과 더불어 자주 임신했기 때문에 아주 일찍 늙었다. (지나치게 짐을 진 그런 아내들은, 아이로 몸이 무겁지 않을 때, 그들을 달마다 한 주 동안 고립시켰다는 사실 덕분에 겨우 그럭저럭 버티었다.) 그러한 아내는 흔히 임신에 지쳤고, 둘째이자 더 젊은 아내를, 아이 낳는 일과 집안일을 도와줄 수 있는 아내를 얻으라고 남편에게 부탁하곤 했다. 따라서 나이 든 배우자들은 새 아내들을 보통 기쁘게 맞이하였다. 성적인 질투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아내들의 수는 남자의 부양 능력에 따라서 제한되었다. 부유하고 유능한 남자는 아이들을 많이 원했고, 아기 사망률이 아주 높았기 때문에, 큰 가족을 이루는 데 한 무리의 아내들이 필요했다. 여럿인 이 아내들 중에서 다수는 단순한 노동자요, 노예 아내였다.
인간의 관습은 진화하지만, 아주 느리다. 하렘의(☞) 목적은 왕위를 지탱하기 위해 강하고 많은 혈족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떤 족장이 하렘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한 아내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즉시 하렘을 해산하였다. 불평을 품은 아내들은 친정집으로 돌아갔는데, 감정이 상한 친족들은 성이 나서 족장에게 몰려왔고, 그때 그 자리에서 그를 처치해버렸다. ☞ 하렘 : 하렘(harem)은 회교권 나라에서 후궁을 지칭.
6. 진정한 일부 일처제―부부의 결혼
83:6.1 일부일처제는 독점을 의미한다; 이 제도는 바람직한 상대를 만난 자에게 이상적이지만, 그렇게 운이 좋지 않은 자들은 생물학적 어려움을 겪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인들에게 미치는 효과에 아주 상관없이, 일부일처제는 자녀들에게 단연코 최선이다.
가장 일찍 있었던 일부일처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곧 가난 때문이었다. 일부일처제는 문화적ㆍ사회적, 인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그것은 진화하는 인간에게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부일처는 더 순수한 놋 종족과 아담 종족에게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모든 진보된 종족에게 문화적으로 큰 가치가 있었다.
갈대아 부족들은 아내가 자신의 배우자에게 둘째 아내나 첩을 두지 않겠다고 결혼 전에 서약을 부과하는 권리를 인정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일부일처의 결혼을 찬성했다. 기독교가 결혼을 신성한 일로 보는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조상 숭배는, 언제나 일부일처제를 장려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는 것조차도 여러 아내를 가지는 것에 비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오실 때가 되자, 문명화된 세계의 거의 전부가 이론상으로 일부일처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동적 일부일처제는 인류가 실제 결혼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부부 결혼은 결국 성관계의 독점과 비슷한 것이며, 이 일부일처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그 요구 조건에 협조하고 그 조건을 준수하려고 최선을 다했을 때에도, 새롭고 개량된 이 사회 질서에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불행한 남녀의 딱한 형편을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경쟁 무대에서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은 뛰어넘을 수 없는 어려움이나 현재의 풍습이 지워준 다방면의 제한 때문일 수도 있다. 참으로, 일부일처제는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상적이지만, 혼자 사는 차가움 속에서 외톨이로 남은 자들에게 불가피하게 큰 어려움을 안겨준다.
불행한 소수는 항상 대다수가 진보할 수 있도록 언제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유리한 입장에 선 다수는 그들보다 운이 나쁜 동료를 친절하게, 배려하는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들은 전진하는 사회의 진화에서 최고 풍습의 인정을 받고서 모든 생물학적 욕구를 채워 주는 이상적 성(性) 대상자의 계열에서 회원 자격을 얻지 못한 값을 치러야 한다.
83:6.6 일부일처는 언제나 인간 성생활의 진화에서 이상적 목표였고, 지금도 그렇고, 언제까지나 그러할 것이다. 이 참된 부부 결혼이라는 이상에는 극기가 따르며, 따라서 단지 계약 당사자의 한쪽이나 양쪽이 모든 인간 미덕의 절정, 곧 강한 자제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실패하는 일이 아주 흔하다.
순전히 생물학적 진화와 구별해서, 일부일처는 사회 문명의 진보를 재는 척도이다. 일부일처는 반드시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문명을 당장에 유지하고 계속 발전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은 세련된 감정, 도덕적 성격의 향상, 정신적 성장에 이바지하며, 이런 것은 복혼의 경우에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여자가 남편의 애정에 대해 경쟁의 관계 속으로 강요될 때 그녀는 결코 이상적인 엄마가 될 수 없다.
부부의 결혼은 부모의 행복, 아이의 복지, 사회의 효율성을 위해서 최선의 방책인 깊은 이해와 효과적 협동을 유리하게 만들고 촉진시킨다. 노골적인 강요로 시작되었던 결혼은 점차 자기 문화, 자기 통제, 자기 표현, 자손의 번식을 위한 훌륭한 제도로 진화하고 있다.
7. 혼인의 취소
83:7.1 결혼 관습의 초기 진화에서 결혼은 마음대로 중도에 종결될 수 있는 허술한 결합이었으며, 아이들은 언제나 어머니를 따랐다; 어머니-아이 사이에 있는 끈은 본능적이고, 풍습의 발전 단계와 상관없이 작용했다.
원시 민족들 사이에서는 겨우 절반 정도의 결혼만이 만족스러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별의 가장 흔한 원인은 아이가 없는 것이었고, 이를 언제나 아내의 탓으로 돌렸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는 영 세계에서 뱀이 된다고 믿었다. 더 원시적 풍습 밑에서 이혼이 남자의 권한이었고, 이런 기준은 어떤 민족들 사이에서 20세기까지 지속되어 왔다.
풍습이 진화함에 따라서, 어떤 부족들은 두 가지 형태의 결혼을 개발했다; 보통의 결혼은 이혼을 허락했으며, 사제가 맺은 결혼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내 사들이기와 아내의 지참금의 시작은, 결혼의 실패에 따른 재산 벌칙을 들여옴으로써 이혼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이 고대의 재산 요인이야말로 현대의 많은 결혼의 결속을 유지시킨다.
공동체에서 신분, 그리고 재산 특권이 주는 사회적 압력은 언제나 결혼 금기와 관습의 유지에 효력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결혼은 꾸준히 진보해 왔고 현대 세상의 진보된 기초 위에 놓여있다. 개인의 (새로운) 자유로운 선택을 무척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불만에 의한 위협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재산 요인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진보된 종족들 사이에서 이러한 적응의 격변은 갑자기 사회의 진화가 가속되는 결과로서 나타나지만, 그보다 진보하지 못한 민족들 사이에서 결혼은 계속 번성하며, 더 오래된 풍습의 인도 아래 천천히 개선되고 있다.
결혼에는 이상적이지만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사랑의 동기가, 더 낡고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재산적인 동기를 새로 갑자기 대체함으로서 불가피하게 결혼제도를 일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사람이 결혼하는 동기는 언제나 실제적인 결혼 풍습을 훨씬 능가했으며, 19세기와 20세기에 결혼에 대한 서양의 이상은,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고 겨우 어느 정도 통제된, 종족들의 성(性) 충동을 갑자기 껑충 뛰어넘었다. 어느 사회에서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큰 무리로 존재하는 것은 풍습이 일시 붕괴하거나 과도기에 있음을 가리킨다.
83:7.6 결혼의 진정한 시험은, 긴 세월을 통해서 내내 계속된, 모든 가족생활에서 불가피한 친밀성이었다. 온갖 허영에 탐닉하고 자존심을 충분히 만족시킬 것을 기대하도록 교육받고, 제멋대로 행하고 버릇없는 두 젊은이는 도저히 결혼하고 가정을 일으키는 일―자기를 감추고, 절충하고, 헌신하고, 아이들의 교양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일생의 협동 관계―에 도저히 크게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다.
현대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혼 성향이 증가하는 데에는 높은 상상력과 환상적인 로맨스가 큰 원인이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여성의 더 큰 개인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증가로 더욱 복잡해졌다. 쉬운 이혼은, 자기 통제력의 부족이나 정상적인 성격 적응의 실패의 결과일 때, 인간이 최근에 생겨난 그토록 많은 개인적 고통과 인종적 고통의 결과로서 허술한 사회 단계로 바로 돌아가게 할 뿐이다.
그러나 사회가 어린아이와 젊은이들을 적절히 교육하지 못하고, 사회 질서가 적당한 결혼 전 훈련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 또 현명하지 못하고 미숙한 젊은이의 이상주의가 결혼 진입을 결정하는 한, 이혼은 성행할 것이다. 사회 집단이 젊은이들에게 결혼에 대한 준비 교육을 충분히 마련해 주지 못하는 한, 그 범위까지 이혼에 대해서 사회의 안전밸브가 작용해야 하며, 이것은 진화하는 풍습이 급속히 성장하는 시대에,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방지한다.
옛사람들은 꼭 오늘날의 일부 사람들만큼이나 결혼을 진지하게 여긴 듯하다. 현대에 성급하고 성공하지 못한 많은 결혼은, 젊은 남녀가 짝짓는 자격을 갖추게 하는 옛 관습보다 크게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큰 모순은 사랑을 높이고 결혼을 이상으로 만들면서, 이 두 가지를 철저히 검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8. 결혼의 이상화 (理想化)
83:8.1 궁극에 가정으로 이끄는 결혼은 정말로 사람의 가장 고귀한 제도이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것이다; 결코 신성한 약속이라 불려져서는 안된다. 셋 족속 사제들은 결혼을 종교 예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에덴 이후 수천 년 동안 짝짓기는 순전히 사회적이고 법적인 제도로서 계속되었다.
인간의 관계를 신성한 관계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결혼과 가정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연합은 진화 세계에서 행해지는 필사자의 물질적 기능이다. 정말로 남편과 아내가 진보하려고 인간으로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많은 영적 진전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결혼이 반드시 신성함을 뜻하지 않는다. 영적 진전은 인간의 노력이 다른 분야에 진지하게 적용될 때 따라온다.
결혼은 조절자와 인간의 관계, 또는 그리스도 미가엘과 인간 형제 사이의 친교와는 비유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결합에서 그 같은 관계들로 도저히 비교될 수 없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생각이 결혼의 지위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다.
어떤 필사자 집단들이 결혼이 신성한 행위에 의해 맺어졌다고 생각해 왔던 것도 또한 유감스럽다. 그러한 믿음은, 계약한 당사자의 상황이나 소망과 상관없이, 결혼이 취소될 수 없다는 개념으로 바로 이끈다. 그러나 결혼이 취소되는 사실 자체가 바로, Deity(신)가 그러한 연합에 관련된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두 물건이나 사람을 일단 함께 합쳐 놓는다면, 신성한 의지가 그들이 분리되라고 선포할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합쳐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제도인 결혼에 관해서 말하자면, 본질과 기원이 순전히 인간적인 것으로 볼 때, 누가 감히 인간의 결혼이 우주 감독자들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결합이라고 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높은 곳의 구체들에는 이상적 결혼이 있다. 각 지역 체계의 수도에는 하나님의 물질 아들과 딸들이, 결혼의 끈 속에서, 그리고 자식을 낳고 기르는 목적으로, 남녀가 연합하는, 최고의 이상을 보여준다. 결국, 필사자의 이상적 결혼은 인간적으로 신성한 것이다.
83:8.6 결혼은 언제나 현세의 이상적인 것에 대하여 사람이 가진 최고의 꿈이었고 아직도 그렇다. 비록 이 아름다운 꿈이 전부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어도, 그 꿈은 영화로운 이상으로서 오래 가며,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더욱 노력하도록 진보하는 인류를 늘 유혹한다. 그러나 가족생활에서 서로 관계를 가지는 가혹한 요구 속에 첨벙 뛰어들기 전에, 젊은 남녀는 결혼의 현실에 관하여 어느 정도 배워야 마땅하다. 젊은 마음에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결혼 전의 실망으로 누그러져야 한다.
결혼에 대한 젊은이의 이상이 좌절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꿈은 미래 가족생활의 목표를 시각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결혼, 그리고 그 뒤에 가족생활의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요구에 무감각해지지 않는 한, 자극이 되면서 도움이 된다.
결혼의 이상은 요즈음에 크게 진보했다. 어떤 민족들 사이에서 여자는 자기 배우자와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누린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가족은 자식을 기르는 조합, 그에 따라 성(性)의 정절이 뒤따르는 충성스러운 조합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형태의 결혼조차, 모든 면에서 personality(성격, 인격, 개인성)와 개별성에 대한 상호 독점을 보장하기 위해 극단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가정할 필요는 없다. 결혼은 단지 개인주의적 이상이 아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진화하는 사회적 협동 관계이고, 당대의 풍습 밑에서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이고, 금기에 제약을 받고, 사회의 법과 규제에 따라서 집행되는 것이다.
20세기의 결혼은 지난 시대의 결혼과 비교하여 높은 위치에 있는데, 여자의 자유는 지난 세대 풍습의 느린 진화에서 여자에게 아주 오랫동안 주지 않았던 권리였지만, 그럼에도 여성의 자유가 갑자기 확대되었고, 그렇게 사회 조직으로 갑자기 밀려온 문제들 때문에 가정 제도는 지금 벅찬 시험을 겪고 있다.
[유란시아에 주둔하는 세라핌의 우두머리가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