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류귀종(萬流歸宗)-5-통권89화
벌써 한 달이 다 되도록 백호나한은 거처에서 나오지 않았다. 백호나한의 거처는 원래 위병대장 홍대보의 저택이었다. 홍대보는 진토인들을 싫어해 집에 진토인들을 두지 않았고 덕분에 그의 저택은 남례성에서 유일하게 남례일족의 시야에서 벗어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주인이 백호나한으로 바뀌었어도 저택의 하인들은 바뀌지 않아 남례일족의 대야 하수는 저택 안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백호나한이 저택으로 칩거한 후 그는 한 번도 저택을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난 한 달 간 저택을 출입한 모든 존재의 행적을 축적, 조사하였으나 그 어디에도 백호나한이 저택을 빠져나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대야를 괴롭히는 사실이 있었으니….
“대야,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난 한 달 간 저택을 출입한 주요 인사가 거의 없습니다.”
“으음.”
“흑장들이야 도남 전역에 흩어져 있으니 그렇다 해도 봉수태수부의 하남천원군 관리들도 저택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발걸음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야는 충성스런 시화(柴禾)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남례일족에는 한 명의 대야와 다수의 소야만 있을 뿐 그 외의 인물은 특별한 지위가 없었다. 그래서 시화에게도 대야의 사람이란 것을 제외하고는 지위가 없었다. 그런 시화의 의견에 대야 하수는 생각에 잠겼다. 상식적으로 오는 봄에 대함대를 이끌고 남상으로 가야 하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고 바쁠 때였다. 여러 가지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으나 대야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 이상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남례일족의 대야 하수는 백호나한에 대하여 조사하면 할수록 그가 두려워졌다.
‘그러나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할지라도 대야(大爺)가 죽이고자 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
금군교위(禁軍校尉) 무골후(武骨侯) 호장(虎壯)은 한때 숭무공(崇武公) 원공반(猿孔磻)이 나서기 전까지 수인 제일 고수로서 군림했다. 비록 원공반에게 수인 제일 고수의 지위를 넘겨주기는 했지만 수인들 가운데 손꼽히는 장수로서 그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무골후라는 관작명이 말해주듯 그는 무학에 관심이 많았고 무림의 강자들과 교류하길 좋아했다. 그런 무골후가 일개 금군으로 인세의 고수 둘을 간단히 제압한 존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존재의 비무연(比武宴)이라는 기행(奇行)과 천하제일성 철혈사자성의 대공자를 꺾고, 수인 제일 고수이자 관부 제일 고수인 원공반에게 승리함으로써 관부 제일 고수가 되었다. 그러니 강자를 좋아하는 무골후에게 백호나한이란 존재는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황이 용황에게 선양(禪讓)을 받아 천지신명(天地神明)에게 천자로 고하는 의식을 치르는 원단(元旦)에 상경에 있던 백호나한이 중경으로 오자 가장 먼저 그를 만나보았다. 그리고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고, 실제로 만나본 그의 성품은 참으로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폐하, 봄이 되는 즉시 의백으로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가합니다. 신 또한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상대는 흑막의 정예 기병. 징병령으로 창을 처음으로 잡아본 자들이 태반인 군졸들을 사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천림왕 전하, 그럼 의백성을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내 무골후 자네의 말을 모르는 바 아니나 상대는 흑막의 기병들일세. 그런 그들을 상대로 이제 막 무기를 만져보았을 보군을 보내봐야 피해만 늘지 않겠는가?”
“전하, 본디 전쟁이란 군사들의 사기로 승리하고 사기로 패하는 것입니다. 원군을 보내는 것은 의백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사기와 민심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무골후.”
무골후와 천림왕의 논쟁을 가만히 지켜만 보던 호황이 열변을 토하는 무골후를 제지했다. 호천궁의 대전(大殿)에는 호황가의 인물들이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백성의 일이 거론되었고 무골후 호장과 천림왕 호천린이 극명한 입장 차로 인한 논쟁이 벌어졌다.
“의백성을 도와야겠지만 천림왕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 일은 지금 논할 때가 아닌 것 같으니 둘은 그만 하라.”
“예, 폐하!”
사실 호황의 말처럼 이 문제는 천원 회의(天元會議)에서 다루어질 문제이지 여기서 논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리 입장을 정리해두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는 했다.
“폐하!”
“짐에게 할 말이 또 있는가? 무골후.”
“예, 다름 아닌 북지성과 의백성의 문제입니다.”
“….”
“의백성에는 의백최문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외와 교역을 톡해 막대한 부와 세력을 축적한 가문인데, 의백성에서 후려의 반적 강무세가와 같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으음.”
“최근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에게 반적 웅랑들이 마수를 뻗치고 있다 합니다.”
호황 또한 의백최가의 힘을 모르지 않았다. 웅랑의 대군이 그들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징병령을 내려 각지에서 군사를 모으는 중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호황의 생각을 무골후 호장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기주와 을주에서 대군을 모으고 있지만 북지성에 서해수군의 거점을 만들어두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북지성에 거점을?”
“예, 그리고 지금 북지성은 복마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다행히 서해수군통제사 라혼 대장군의 내자 되는 이가 장동의 관군을 이끌어 반적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차제에 그에게 관직을 내려 힘을 실어주고 북지성에서도 군사를 모을 수 있게 하소서….”
“좋아! 할 수 있는 것은 해야겠지.”
호황은 무골후의 의견에 선선히 허락했다. 호황이 라혼에게 이렇듯 호의를 보이는 이유는 라혼이 천자 호황의 심복인 호영을 통해 자신은 호황가의 충복임을 알렸고, 호황이 원하면 언제든 주작의 깃털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호황은 백호나한이란 별호로 알려진 라혼에 대한 세밀한 조사를 벌였고, 묘가의 손이라는 천상천화에 대한 점이 걸리기는 했으나 청류파(淸流派) 인사로 분류되는 사관산(獅官山)에게 주목받고 금군교위(禁軍校尉) 호장(虎壯)이 직접 끌어들이려 한 것까지 알아냈다. 호황이 판단하기에, 라혼은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비밀스런 관계는 천하의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것이기에 그 묘용이 더욱 컸다. 그래서 라혼에게 더더욱 힘을 실어주는 행보를 계속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원주에서 수군을 모집하겠다는 다소 엉뚱하기까지 한 부탁까지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천상천화라 알려진 그의 내자에게 맡긴 군권은 언제든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일단 여인의 몸이고, 남편이 조정의 장수인 이상 군권을 회수할 명분은 차고도 넘쳤다.
***
성질대로 하는 행동은 당시에는 후련할지 모르나 언제나 큰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소궁주의 방에서 일어난 소란은 지근 거리에서 호위하던 여인천궁의 검녀들을 불러들였고 라혼은 자신의 알몸을 그녀들에게 전부 내보인 꼴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모든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난 라혼은 오히려 담담한 태도로 그녀들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나가.”
라고…. 라혼의 담담한 말에 묘한 위압감을 느낀 검녀들은 무슨 큰 죄를 지은 양 방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은 설화는 서방님에게 칼질하던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는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라혼 또한 설화가 태어난 이후 최초로 보여준 과격한 행동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설화가 준비해놓은 옷을 찾아 입고는 설화 앞에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러나 라혼 또한 뭔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물을 말은 많았다. 무엇 때문에 공격했는지? 그리고 얼마 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라혼이 처음 꺼낸 말은….
“날씨가 꽤 춥구나. 원주하고는 또 다르지?”
“예? 예.”
“….”
침묵.
“뜨거운 차나 한잔할까?”
“예, 금방 준비할게요.”
침묵.
후루루룩!
“….”
“좋구나!”
어색한 침묵의 연속 속에서 마시는 향기롭고 뜨거운 차 한 모금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고요한 어조로 라혼은 입을 떼었다.
“설화야.”
“예, 서방님.”
“내게 할 말이 있느냐?”
“….”
라혼은 자신의 물음에 아무런 말을 찾지 못하는 모습의 설화의 다소곳한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라혼에게 새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나 생기발랄한 어린아이 같던 설화에게서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손을 뻗어 설화의 앞머리를 쓸어넘겨주었다. 그러자 설화는 북받치는 설움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서방님의 넓은 가슴에 몸을 던졌다.
“으아아아앙~! 서방님!”
“….”
라혼은 설화가 돌연 울음을 터뜨리자 일순 당황했지만 설화가 안기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설화의 자그마한 등을 쓸어주어 어린 아내를 안심시키며 울음이 잦아들자 턱을 감싸들어 길고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것으로 설화의 불안한 마음은 봄볕에 사그라지는 눈과 같이 녹아내렸다.
“….”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라혼은 설화의 깊고 투명하기 그지없는 눈을 마주 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설화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도는 듯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리고 라혼은 설화에게 자신이 그동안 계획하고 실행한 여러 가지 일들을 자랑하듯 이야기했고, 설화도 그간 있었던 자질구레한 일들과 속상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원래대로의 관계로 돌아온 것이다.
“와! 그렇게 많은 황금이 있었어요?”
“그래, 물경 2천만 냥이야! 대단하지.”
“그럼 서방님은 천하제일의 부자이겠네요.”
“그래!”
“천하제일 고수에 천하제일대부(天下第一大富), 정말 대단해요.”
“한 가지가 더 있지.”
“또 뭐가 천하제일이에요?”
“내게는 천하제일 아름다운 아내가 있거든.”
“맞아요! 그게 가장 중요한 거죠.”
“…!”
설화는 그동안 그토록 불안해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서방님이 자랑스레 말하는 모든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나와 잠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예? 여행이오?”
“그래, 네게 소개시켜줄 분이 계시거든.”
설화은 서방님의 말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렜다. 그러나 지금이 순간 여인천궁의 소궁주인 자신의 신분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사실 여인천궁의 소궁주의 신분이 아니더라도 이곳에 모여드는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설화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서방님의 제안에 마음이 동하는 설화였다.
“이레에서 열흘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그 정도라면 시간을 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글쎄? 네 어머니와 관계 있는 사람.”
“어머니요?”
라혼은 태회진의 건설을 귀림 드워프들에게 의뢰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대규모의 철장(鐵場)과 조선소도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북지성에서의 광산도 발굴할 필요가 있었다. 이미 드워프들에게는 드래곤 본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가가 지불되었기에 라혼은 아무런 부담 없이 그러한 것들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생각한 라혼은 설화를 보고 그전에 마음먹었던 주작의 무녀 가니아를 설화와 만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설화에게 여행을 제안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