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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신부님은 탐정》
## 제87화 ― 「제의방의 낯선 수단」
은솔성당의 새벽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백 년 된 성당의 종탑 위로 희미한 여명이 번지고, 마당의 오래된 느티나무에서는 밤새 맺힌 이슬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새벽 다섯 시 오십 분.
김맑음 프란치스코 신부는 아침미사를 준비하기 위해 제의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걸음을 멈추었다.
“어……?”
평소에는 제의와 영대가 가지런히 걸려 있는 옷걸이 끝에 낯선 옷 한 벌이 걸려 있었다.
오래된 검은색 사제 수단이었다.
색은 세월에 바래 짙은 회색에 가까웠고, 소매 끝은 여러 번 수선한 흔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 수단이 어제까지만 해도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김맑음 신부는 가까이 다가갔다.
수단의 옷깃을 살짝 젖히자 안쪽에 작은 천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오래된 바느질로 이름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정우현 안드레아.
김맑음 신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우현 신부님……?”
그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삼십 년 전 은솔성당에서 사목했던 사제.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본당을 떠난 뒤, 오랫동안 은솔성당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노신부였다.
김맑음 신부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데 이 수단이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그때 제의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신부님, 미사 준비 다 되셨습니까?”
최병철 사무장이었다.
김맑음 신부가 수단을 가리켰다.
“사무장님, 이 옷을 누가 가져다 놓았습니까?”
최병철은 수단을 바라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왜 여기에 있습니까?”
“저도 그걸 묻고 싶습니다.”
그 순간, 은솔성당에 또 하나의 작은 수수께끼가 시작되었다.
### 1. 아무도 가져오지 않은 옷
아침미사가 끝난 뒤, 제의방에는 은솔성당의 익숙한 사람들이 모였다.
박복례 마리아.
최병철 베드로 사무장.
장태식 요셉 관리장.
오미자 안나 사목회장.
그리고 김맑음 신부.
오미자는 수단을 보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사건이에요!”
박복례가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 아침부터 또 시작이세요?”
“아니, 보세요. 아무도 모르는 옷이 제의방에 걸려 있다잖아요.”
최병철은 수첩을 꺼냈다.
“어제 오후 다섯 시에 제의방을 확인했을 때는 없었습니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확실합니까?”
“예. 제가 제의와 성작 보관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장태식이 말했다.
“저도 어제 저녁에 제의방 문을 잠갔습니다.”
“그럼 밤사이에 누군가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오미자가 물었다.
장태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문이 훼손된 흔적은 없습니다.”
최병철이 말했다.
“제의방 열쇠를 가진 사람은 신부님과 저, 그리고 관리장님입니다.”
오미자가 손뼉을 쳤다.
“그럼 세 분 중 한 분이네요!”
박복례가 눈을 흘겼다.
“회장님, 열쇠 가진 사람부터 범인으로 몰면 안 되죠.”
“범인이라고 한 건 아니고요. 용의자라고…….”
“그게 그 말이잖아요.”
김맑음 신부는 웃으며 수단을 바라봤다.
“누군가 옷을 가져다 놓은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는 아직 모르지요.”
그는 수단의 소매 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작은 흔적 하나를 발견했다.
오른쪽 소매 안쪽에 하얀 실로 십자가 모양의 바느질이 되어 있었다.
평범한 수선 자국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십자가 아래에 작은 숫자가 있었다.
1996\.
김맑음 신부가 중얼거렸다.
“삼십 년 전…….”
### 2.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
“정우현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김맑음 신부의 질문에 박복례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는 기억하지요.”
“어떤 분이셨습니까?”
박복례는 낡은 수단을 한참 바라봤다.
“말씀이 많지 않은 분이셨어요.”
“엄격하셨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반대였어요.”
박복례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교우들이 찾아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셨죠.”
“그런데 왜 은솔성당을 떠나셨습니까?”
박복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때 일이 좀 있었어요.”
오미자가 얼른 다가왔다.
“무슨 일이요?”
“오래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더 궁금하죠.”
박복례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어머니.”
그는 최병철을 바라봤다.
“사무장님, 당시 본당 기록이 남아 있습니까?”
“찾아보겠습니다.”
잠시 후 최병철은 오래된 인사 기록철을 가져왔다.
거기에는 정우현 신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우현 안드레아 신부.
은솔성당 사목 기간: 1993년 2월\~1996년 9월.
그 아래에는 간단한 전출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설명은 없었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최병철이 말했다.
“몇 년 전 은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때 장태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번 찾아뵌 적은 있습니다.”
모두가 그를 바라봤다.
“언제요?”
“오 년 전입니다.”
“어디서요?”
“청주에 있는 은퇴 사제관에서요.”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그때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장태식은 잠시 생각했다.
“은솔성당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성당 마당의 느티나무가 아직 살아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 3. 소매 안쪽의 작은 십자가
그날 오후.
김맑음 신부는 다시 낡은 수단을 살펴보았다.
그는 오른쪽 소매의 하얀 십자가 자수를 손끝으로 만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수단 전체의 바느질은 오래되고 거칠었지만, 십자가 자수만은 비교적 선명했다.
“누군가 나중에 수선했군.”
그는 왼쪽 소매도 살폈다.
그곳에는 작은 천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다.
천 안쪽에는 희미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안드레아 신부님께.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김맑음 신부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박복례를 불렀다.
“어머니,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박복례는 글씨를 읽더니 눈빛이 흔들렸다.
“이 글씨…….”
“아시는 분의 글씨입니까?”
“예.”
“누구입니까?”
박복례는 잠시 망설였다.
“이정숙 세실리아 자매님 같아요.”
“지금도 은솔성당에 다니십니까?”
“아니요.”
“그럼요?”
“몇 년 전에 딸이 사는 곳으로 이사하셨어요.”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그분이 정우현 신부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습니까?”
박복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된 인연이 있지요.”
### 4. 삼십 년 전의 약속
이정숙 세실리아는 올해 일흔여덟 살이었다.
지금은 은솔시 외곽의 작은 아파트에서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김맑음 신부는 박복례와 함께 그녀를 찾아갔다.
문을 연 이정숙은 두 사람을 보고 반가워했다.
“아이고, 신부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김맑음 신부는 인사를 나눈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매님, 정우현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십니까?”
이정숙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분의 수단이 은솔성당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정숙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단이요?”
“예. 혹시 자매님께서 수선하신 옷입니까?”
김맑음 신부는 휴대전화에 찍어온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정숙은 사진을 보자마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옷…….”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고친 옷이 맞아요.”
“언제 수선하셨습니까?”
“삼십 년 전이요.”
“그런데 소매 안쪽의 글씨는요?”
이정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제가 적었어요.”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녀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오래전 이야기를 꺼냈다.
1996년 봄.
은솔성당에는 어려운 일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본당에서 봉사하던 한 교우가 큰 병을 얻었다.
그 교우는 이정숙의 남편이었다.
당시 이정숙의 가족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남편이 일을 하지 못하면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때 정우현 신부가 가족을 찾아왔다.
“세실리아 자매님, 너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정숙은 고개를 저었다.
“신부님, 성당에도 어려운 분들이 많잖아요.”
정우현 신부는 조용히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본당 교우들과 상의해 병원에 오갈 차편을 마련하고, 가족에게 필요한 도움을 연결해 주었다.
그러나 이정숙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은 돈이나 물건이 아니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정우현 신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병실을 찾아왔다.
그리고 남편의 손을 잡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이정숙이 말했다.
“신부님,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우현 신부는 웃었다.
“제가 해드린 게 뭐가 있습니까. 함께 있었을 뿐이지요.”
그날 이정숙은 신부의 수단 소매가 낡아 찢어진 것을 보았다.
“신부님, 이 옷 좀 고쳐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요. 소매가 다 해졌잖아요.”
정우현 신부는 웃으며 수단을 맡겼다.
이정숙은 밤늦도록 바느질을 했다.
그리고 오른쪽 소매 안쪽에 작은 십자가를 수놓았다.
그 아래에 적은 숫자가 1996이었다.
그해 가을.
정우현 신부는 다른 본당으로 발령받았다.
이정숙은 수선한 수단을 돌려주며 말했다.
“신부님, 언젠가 꼭 다시 은솔성당에 오세요.”
정우현 신부가 웃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겠습니다.”
“약속하셨어요.”
“예. 약속하지요.”
그러나 그 약속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 5. 떠난 이유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정우현 신부님께서는 왜 그 뒤로 은솔성당에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정숙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바쁘셔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요?”
“몇 년 지나서야 들었지요.”
“무엇을요?”
“신부님께서 은솔성당을 떠나실 때 마음이 많이 아프셨다는 걸요.”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기다렸다.
이정숙이 말을 이었다.
“그때 성당에 새 교육관을 짓는 문제로 교우들 사이에 의견이 많이 갈렸어요.”
일부 교우들은 낡은 성당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교우들은 교육 공간이 부족하다며 새 건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우현 신부는 양쪽의 의견을 듣고 조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갈등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어떤 분들은 신부님이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다고 서운해했어요.”
“그랬군요.”
“신부님도 많이 힘드셨겠지요.”
이정숙은 한숨을 쉬었다.
“전출이 결정되자 몇몇 분들이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예. 나중에는 다들 후회했지요.”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그런데 그때 신부님께서 무슨 잘못을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까?”
이정숙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옳고 그른지 지금도 제가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어요. 다만 서로의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던 것 같아요.”
김맑음 신부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사람은 때때로 큰 잘못 때문에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마음 때문에 멀어지기도 했다.
### 6. 누가 수단을 가져왔을까
은솔성당으로 돌아온 김맑음 신부는 최병철을 불렀다.
“사무장님, 제의방 출입 기록을 다시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최병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녁 교육관에서 청소 봉사가 있었습니다.”
“참여하신 분들은요?”
“여섯 분입니다.”
“그중에 이정숙 세실리아 자매님과 관계있는 분이 있습니까?”
최병철은 명단을 살폈다.
그러다가 한 이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이은경 데레사.”
“누구입니까?”
“이정숙 자매님의 딸입니다.”
김맑음 신부가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최병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분이 수단을 가져오신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겠지요.”
“왜 몰래 가져다 놓으셨을까요?”
김맑음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수단의 옷걸이를 살폈다.
옷걸이에는 작은 종이표가 붙어 있었다.
은솔성당 100주년 기념행사.
초대 예정.
김맑음 신부는 종이표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 7. 딸이 준비한 초대
이은경 데레사는 마흔여덟 살의 직장인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주말마다 은솔성당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김맑음 신부가 그녀를 만났을 때, 이은경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신부님, 무슨 일이세요?”
“데레사 자매님, 제의방에 걸린 오래된 수단에 대해 여쭤보려고 합니다.”
이은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자매님께서 가져오셨습니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부님.”
“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혼내려고 묻는 것은 아닙니다.”
김맑음 신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옷을 가져오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은경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오래된 상자를 정리하셨어요.”
그 안에서 낡은 사진과 편지, 그리고 수단 한 벌이 나왔다.
이정숙은 정우현 신부가 은퇴할 무렵, 예전에 수선해 드렸던 그 수단을 기념으로 돌려받아 보관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 옷을 보시면서 한참 우셨어요.”
“왜 그러셨습니까?”
“정우현 신부님께서 다시 은솔성당에 오시는 걸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은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뭐라고요?”
“그때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제대로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 드렸다고요.”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수단을 가져오셨군요.”
“예.”
“그런데 왜 제의방에 몰래 걸어두셨습니까?”
이은경이 난처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사무장님께 말씀드리고 100주년 기념행사 자료로 보여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요?”
“어제 청소를 하다가 제의방에 잠깐 들어갔는데, 그 자리에 옷을 걸어두면 꼭 신부님이 다시 오신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다른 봉사자분이 부르셔서 나갔고, 옷을 걸어둔 걸 잊어버렸어요. 집에 돌아가서야 생각났는데 너무 늦어서…….”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다음에는 꼭 먼저 말씀해 주세요. 제의방은 미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공간이니까요.”
“예, 신부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예?”
“정우현 신부님을 직접 초대할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이은경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가 몇 번 편지를 쓰셨는데 보내지 못하셨어요.”
“왜요?”
“혹시 신부님께서 은솔성당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으실까 봐요.”
김맑음 신부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마음은 직접 여쭤보면 어떨까요?”
### 8. 돌아오지 못한 노신부
며칠 뒤.
김맑음 신부는 정우현 안드레아 신부가 머무는 은퇴 사제관을 찾아갔다.
정우현 신부는 올해 여든두 살이었다.
흰머리가 성성했고 걸음도 느려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어서 오게, 맑음 신부.”
“안녕하십니까, 신부님.”
“은솔성당에서 왔다고?”
“예.”
정우현 신부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김맑음 신부는 조심스럽게 낡은 수단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우현 신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옷…….”
“기억하십니까?”
“그럼.”
그는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세실리아 자매가 고쳐준 옷이지.”
“예.”
정우현 신부는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아직도 가지고 있었구먼.”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신부님, 은솔성당에 다시 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정우현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후에야 말했다.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가겠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내가 사람들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어.”
“교육관 문제 때문입니까?”
정우현 신부는 놀란 듯 김맑음 신부를 바라봤다.
“그 일도 알고 있나?”
“조금 들었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지.”
그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모두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 말았지.”
“신부님께서도 상처를 받으셨겠지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정우현 신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미처 듣지 못한 사람들의 말이 더 생각나더군.”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말했다.
“신부님, 은솔성당에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겠지.”
“그분들 중에는 신부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 분들도 계십니다.”
정우현 신부의 눈가가 붉어졌다.
“아직도?”
“예.”
“삼십 년이나 지났는데?”
김맑음 신부는 미소 지었다.
“감사한 마음에는 유효기간이 없지 않겠습니까.”
정우현 신부는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9. 보내지 못한 편지
김맑음 신부는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정숙이 부탁한 편지였다.
“신부님, 세실리아 자매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편지를 펼쳤다.
존경하는 정우현 안드레아 신부님께.
신부님, 오래전 은솔성당에서 신부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이정숙 세실리아입니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합니다.
남편이 아파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신부님께서는 바쁜 일을 뒤로하고 저희 곁에 앉아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감사하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신부님께서 은솔성당을 떠나시던 날에도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이제는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부님,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은솔성당은 아직도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번만 다시 와주세요.
그때 못다 한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편지를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안경을 벗었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김맑음 신부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정우현 신부가 말했다.
“맑음 신부.”
“예, 신부님.”
“그 성당 마당의 느티나무는 아직 있나?”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예. 아주 잘 자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나무였는데.”
“지금은 성당 지붕만큼 커졌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는 편지를 곱게 접었다.
“나도 한 번 가봐야겠구먼.”
### 10. 삼십 년 만의 귀향
그다음 주 토요일.
은솔성당 마당에는 작은 환영 자리가 마련되었다.
거창한 행사는 아니었다.
오래전 정우현 신부를 기억하는 교우 몇 사람과 현재 본당 식구들이 함께하는 조촐한 만남이었다.
장태식은 느티나무 아래 벤치를 깨끗이 닦았다.
최병철은 손님을 맞을 의자를 준비했다.
박복례는 따뜻한 차와 떡을 마련했다.
오미자는 행사 순서를 적은 종이를 들고 마당을 오갔다.
“자, 신부님 오시면 제가 먼저 인사드리고, 그다음에 꽃다발을…….”
박복례가 말했다.
“회장님, 그냥 편하게 맞이하면 안 돼요?”
“삼십 년 만에 오시는데 그럴 수는 없죠!”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하지 말자는 거예요.”
그때 차 한 대가 성당 앞에 멈췄다.
김맑음 신부가 차 문을 열었다.
정우현 신부가 천천히 내렸다.
그는 성당을 바라봤다.
오래된 붉은 벽돌.
높은 종탑.
마당의 느티나무.
그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정우현 신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많이 변했구먼.”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그래도 그대로인 것도 많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느티나무를 바라봤다.
“저 나무는 정말 많이 컸네.”
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정숙 세실리아였다.
“신부님…….”
정우현 신부가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아 자매?”
이정숙은 두 손을 모았다.
“신부님, 저 기억하세요?”
정우현 신부는 웃었다.
“그럼. 내 옷을 고쳐주던 자매 아닌가.”
그 순간 이정숙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신부님…….”
“왜 우나.”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정우현 신부도 눈가가 붉어졌다.
“미안하네. 너무 늦게 왔어.”
이정숙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오셨으니까 됐어요.”
### 11. 낡은 수단의 주인
환영 자리가 끝난 뒤.
김맑음 신부는 정우현 신부를 제의방으로 안내했다.
옷걸이에는 낡은 검은 수단이 걸려 있었다.
정우현 신부는 수단을 보자 걸음을 멈췄다.
“이게 여기 있었구먼.”
그는 천천히 다가갔다.
오른쪽 소매를 손끝으로 만졌다.
작은 십자가 자수.
그 아래의 숫자.
1996\.
정우현 신부가 조용히 웃었다.
“참 오래된 옷이네.”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신부님, 이 수단을 다시 입어보시겠습니까?”
정우현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맞지 않을 거야.”
“그렇습니까?”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는 잠시 수단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데 맑음 신부.”
“예.”
“이 옷을 보니 내가 사제가 된 처음 마음이 생각나는군.”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정우현 신부는 천천히 대답했다.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지.”
그는 소매의 낡은 바느질을 쓰다듬었다.
“누군가 기뻐할 때 함께 웃고, 슬퍼할 때 함께 있어주는 사제가 되고 싶었어.”
“지금도 그 마음이 있으십니까?”
정우현 신부가 미소 지었다.
“있지.”
잠시 후 그가 덧붙였다.
“다만 나이가 드니까 가끔 잊어버릴 뿐이야.”
김맑음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신부님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아나?”
“삼십 년이 지나도 그 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정우현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수단을 바라보며 오래 미소 지었다.
### 12. 뒤늦은 사과
그날 오후.
정우현 신부를 기억하는 몇몇 교우가 사제관 응접실에 모였다.
그중에는 삼십 년 전 교육관 문제로 정우현 신부와 의견이 달랐던 노교우도 있었다.
일흔여섯 살의 강문식 요셉이었다.
그는 한참 망설이다가 정우현 신부 앞에 섰다.
“신부님.”
“요셉 형제?”
“저를 기억하십니까?”
정우현 신부가 웃었다.
“그럼. 늘 성당 지붕 걱정을 하던 형제 아닌가.”
강문식은 고개를 숙였다.
“신부님, 그때 제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인가.”
“교육관 문제 때문에 신부님께 상처가 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는 제 생각만 옳다고 믿었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그랬네.”
강문식이 고개를 들었다.
“예?”
“나도 내 생각이 옳다고만 생각했어.”
정우현 신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서로의 말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강문식의 눈가가 붉어졌다.
“신부님…….”
정우현 신부가 손을 내밀었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다행이네.”
강문식은 그 손을 꼭 잡았다.
삼십 년 동안 마음에 남아 있던 말들이 그 짧은 악수 안에서 조금씩 풀어지고 있었다.
김맑음 신부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어떤 오해는 사실을 밝히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 마주 앉아 오래된 마음을 꺼내놓아야 비로소 풀리는 일도 있었다.
### 13. 두 신부의 대화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김맑음 신부와 정우현 신부는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성당 마당에는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우현 신부가 말했다.
“맑음 신부.”
“예.”
“이 본당에서 사목하는 게 쉽지 않지?”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재미있는 일?”
“예. 잃어버린 물건도 많고, 숨겨진 사연도 많습니다.”
정우현 신부가 웃었다.
“소문은 들었네. 탐정 신부라면서?”
김맑음 신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교우들이 붙여주신 별명입니다.”
“허허, 신기하구먼.”
정우현 신부는 잠시 성당을 바라봤다.
“그런데 한 가지는 잊지 말게.”
“무엇입니까?”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까지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되네.”
김맑음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현 신부가 말을 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겪은 일을 다 말하지 못할 때도 있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때도 있지.”
“예.”
“그러니 서두르지 말게.”
김맑음 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기억하겠습니다.”
정우현 신부는 미소 지었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웠네.”
“아닙니다, 신부님.”
김맑음 신부가 대답했다.
“오늘 신부님을 기다리던 분들을 보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분들이 기억하는 것은 신부님의 실수가 아니라 함께해 주셨던 시간입니다.”
정우현 신부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고맙네.”
### 14.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정우현 신부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성당 마당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오미자가 꽃다발을 건넸다.
“신부님, 다음에는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정우현 신부가 웃었다.
“알겠네.”
박복례가 작은 보자기를 내밀었다.
“신부님, 가시는 길에 드세요.”
“이게 뭔가?”
“떡하고 반찬 조금 넣었어요.”
정우현 신부가 웃음을 터뜨렸다.
“복례 자매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먼.”
“신부님도 식사 잘 챙기셔야 해요.”
최병철은 다음 방문 날짜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태식은 차 문을 열어드렸다.
하늘은 멀리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정숙은 마지막으로 정우현 신부에게 다가갔다.
“신부님.”
“응, 세실리아 자매.”
“이제 은솔성당에 자주 오실 거죠?”
정우현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정말요?”
“약속하네.”
이정숙은 웃었다.
삼십 년 전에도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약속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때는 떠나는 사람의 약속이었고, 지금은 돌아온 사람의 약속이었다.
### 15. 낯선 수단이 남긴 것
며칠 뒤.
은솔성당 제의방에는 다시 평소의 조용함이 찾아왔다.
낡은 검은 수단은 정우현 신부의 동의를 받아 깨끗하게 보존되었다.
수단은 제의방에서 옮겨져 본당 역사 자료실에 걸렸다.
그 옆에는 작은 안내문이 붙었다.
정우현 안드레아 신부의 사제 수단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은솔성당에서 사목했던 정우현 안드레아 신부가 입었던 수단.
오랜 세월 교우의 손길로 수선되고 보관되었으며, 삼십 년 만에 다시 은솔성당으로 돌아왔다.
이 수단은 한 사제의 옷이면서, 그를 기억하고 기다렸던 사람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김맑음 신부는 안내문을 읽으며 미소 지었다.
그때 박복례가 다가왔다.
“신부님.”
“예, 어머니.”
“이번 사건도 해결하셨네요.”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해결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왜요?”
“옷을 가져다 놓은 사람을 찾았을 뿐이지요.”
“그게 사건 해결 아닌가요?”
김맑음 신부는 낡은 수단을 바라봤다.
“정말 중요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으니까요.”
“무슨 일이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다시 만났습니다.”
박복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말했다.
“사람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입니다.”
박복례가 웃었다.
“그러니까 신부님도 성당에 오래 계세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꼭 고치세요.”
“무엇을요?”
“안경 잃어버리는 버릇이요.”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어머니, 이번에는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요?”
김맑음 신부는 자신 있게 안경집을 꺼냈다.
그런데 안경집을 열자—
안에는 안경이 없었다.
박복례가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신부님!”
김맑음 신부는 당황하며 얼굴을 만졌다.
그리고 멋쩍게 웃었다.
“여기 있네요.”
안경은 이미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박복례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못 말려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오래된 성당 복도에 퍼졌다.
그날 저녁.
김맑음 신부는 성당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마지막 햇살이 제대 앞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오늘 만났던 정우현 신부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까지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 되네.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주님, 제가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게 하소서.”
그는 잠시 기도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당 문을 닫으려는 순간, 바깥에서 느티나무 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들어왔다.
김맑음 신부는 낙엽을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삼십 년 전에도 이 나무는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 아래를 지나간 사람들은 변했고,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오래 남아 있었다.
낡은 수단 한 벌이 돌아온 것은 단순히 옷 한 벌이 제자리를 찾은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삼십 년 동안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마침내 돌아갈 곳을 찾은 일이었다.
김맑음 신부는 조용히 성당 문을 닫았다.
은솔성당의 종탑 위로 저녁노을이 내려앉았다.
― 제87화 끝 ―
### 다음 편 예고 ― 제88화 「미사에 오는 도둑」
매주 같은 자리에 앉아 미사를 드리는 한 남자가 과거 여러 차례 절도죄로 처벌받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그런데 성당에서 물건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의심은 일제히 그 남자에게 향한다.
김맑음 신부는 현장에 남겨진 작은 단서를 통해 과거의 잘못이 오늘의 죄를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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