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이 살아난 사회를 꿈꾸는 시인
―이승하 시인을 만나다
ꡔ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ꡕ라는 아홉 번째 시집에 이어 ꡔ피어 있는 꽃ꡕ이라는 시가 있는 서간문집을 발간한 이승하 시인을 만나보았다. 2006년 말에 낸 ꡔ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ꡕ도 그의 아홉 번째 문학평론집이다.
차분한 외모만큼이나 편안한 만남이었다. 시와 평론을 줄기차게 쓰는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묻자 남의 시를 읽고 감상문 쓰는 일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이고 시를 쓰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며 밝게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면 시인의 사명은 무엇일까? 영상문화의 시대인 21세기에 죽은 시인이 살아난 사회를 꿈꾸고, 인간과 뭇 생명체의 상생을 꿈꾸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듣던 대로 올곧은 성품을 가진 이승하 시인다운 말이었다.
시 공부는 언제부터 했으며 시는 주로 언제 쓰는지를 묻자 지난 설 연휴 끝날 돌아가신 어머니 얘기를 했다. 시골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그나마 사표를 내자 어머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점을 하며 가계를 꾸려갔다고 한다.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손은 깊은 계곡이다
물 흐르지 않는
내 손은 약손 승하 배는 똥배
배 쓸어주시던 손길 참 부드러웠는데
어머니의 손은 지금 황폐하다
첫사랑을 잃고 서럽게 울었을 때
손수건 꺼내 내 눈물 닦아주셨는데
어머니의 손은 지금 자갈밭이다
30년 동안 공책과 연필을 파신
그 손으로 무친 나물의 맛
그 손으로 때린 회초리의 아픔
이제 곧 동이 터 오면
세 번째 수술을 받으시는 날
잠든 어머니의 손을 잡는다.
―「어떤 손」 전문
그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아버지의 폭력이 지긋지긋해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그만둔 이후 가출을 일삼았고, 세 차례 자살기도의 후유증으로 각종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는 10대 후반기를 보내는 동안에도 책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때 읽는 책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동기라고 시인은 말하지 않았지만 검정고시를 거쳐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이후 본격적인 습작기를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시는 서정주와 구상 시인에게, 소설은 김동리와 신상웅 선생에게 배워 시는 대학 4학년 때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소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다.
남들은 쉽게 등단한 줄 알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서정주 선생한테 수업시간에 수도 없이 “이건 시가 아닐세”, “앞으로 이런 시는 제발 쓰지 말게”라는 충격적인 말을 거듭해서 들었고 신상웅 선생은 “앞으로 소설은 쓰지 마”라는 폭탄선언을 했지만 40여 회 투고와 낙방을 거듭하면서 칼을 갈아 신춘문예 양대 장르 제패의 꿈을 이룬다.
시인은 씩 웃으면서 말한다. “제가 신춘문예 시조와 희곡, 문학평론 최종심에 올라갔던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죠. 습작기 때 시를 필사한 노트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었습니다.”
시와 평문은 주로 한밤에 쓴다고. 새벽잠이 없지만 교직원버스로 중앙대 안성캠퍼스로 출퇴근하는 동안 1시간씩 자면서 잠을 보충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바람이 불면 날려갈 듯 깡마른 몸이다. 청빈한 학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시인과 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무엇을 했을까?
“직장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로 오기 전 쌍용그룹 홍보실 소속 사사편찬실 등에서 정확히 10년 동안 일했는데, 제 딴에는 상사의 인정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실성은 타고난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일제 말기에 경성여자사범학교에 다녔습니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수석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었다고 해요. 하지만 세 자식 학비에 남편의 용돈 조달, 까다로운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30년 동안 문방구점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필자는 개인적으로 시에 드러난 시인의 인간성을 존경한다. ꡔ욥의 슬픔을 아시나요ꡕ ꡔ뼈아픈 별을 찾아서ꡕ ꡔ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ꡕ 등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이 흐르고 있다. 「아들은 가렵다」 같은 시에서 시인은 아토피성 피부염을 앓는 아들에 대한 깊은 슬픔을, 「면회」 같은 시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누이동생에 대한 사무친 혈육의 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가 최근에 펴낸 ꡔ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ꡕ는 조선일보에 ‘슬픔마저 웃음인 광대여…’라는 제목으로 크게 기사화되었다. 문예지 서평도 여러 군데 실린 것을 봤는데 왜 광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어렸을 때 동춘 서커스단의 공연을 보고 난 이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 마당극이나 탈춤을 보았고, 졸업 후에는 국립극장을 오르내리며 국악이나 춤판 공연을 보며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인간문화재가 되면 호구지책이 해결되지만 초야에 묻혀 있는 예술가들은 제자가 없어 전통기예의 맥이 끊기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광대들을 찾아다녔고, 나아가 종교적인 구도자와 옛 노래를 찾아내 이 모두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윤색했던 것이지요.”
말을 듣는 동안 이번 시집은 책상 앞에서 쓴 것이 아니라 발품을 팔아서 쓴 시집임을 알 수 있었다. 이승하 시인은 외양은 여린 듯하지만 시에 대해 강인한 집념을 불태우는 노력형 시인이라고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았다.
“이 땅의 소외계층 사람들 중 정신병원이나 요양원, 기도원 같은 데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면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지금도 영혼이 아픈 제 동생은 제 모든 시의 원동력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의 등단작은 말더듬이 화법으로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세기말적 상황을 묘사한 「화가 뭉크와 함께」가 아닌가.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시사저널 박섭례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