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동리산 태안사라고
적혀져 있다
6.25를 겪으면서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불탔지만 이 일주문과
능파각 만이 불길을 피해갔다)
동리산의
천년고찰 태안사
가정역 주변의 풍치를 뒤로 하고 구례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섬진강과 보성강이 만나는 오곡면 압록리가 나온다.
맛객의 머리 속에는 3만여 평의 백사장이 펼쳐진 압록유원지 보다
이곳의 먹거리, 은어와 참게가 먼저 떠오른다.
깨끗한 물이 흐르는 조약돌 위에서만 사는 은어.
고여 있는 물에서는 죽어버리는 게 은어다.
초고추장에 먹는 회도 좋고, 소금만 뿌려서 숯불구이 하면
비린내도 없이 담백한 은어.
내가 어렸을 적 살았던 탐진강 상류에도 참 많았던 은어.
지금은 귀한 몸이 돼버렸다.
압록 참게...
간장게장도 좋지만 이곳에서는 참게 매운탕이 별미.
갖은 양념과 들깨를 갈아 만든 물에 시래기와 참게를 넣고 푸욱 끓여내는데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입맛을 살린다.
그 많은 참게가 모두 자연산일리는 없겠지만 양식인들 또 어떠리.
수입산이 판을 치는 세상에.....
은어구이와 참게매운탕이 식도락가들을 즐겁게 하는 곳 압록.
아쉽게도 일정상 그곳을 그냥 지나쳤다.
들판에 흐드러진 분홍빛 배롱나무 꽃이 아쉬움을 달래준다.
죽곡면에 접어들었다.
천여 년이 넘도록 오랜 세월을 버텨 온 천년고찰 태안사는
곡성에서도 다소 외진 곳인 죽곡면 원달리에 자리 잡고 있다.
고을 이름처럼 대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선
죽곡면 동리산 자락에 들어서니
포장도로가 끝난다.
태안사는 2km 남짓 계곡을 따라 들어가야 있다.
인적이 드문 이 계곡은 한여름에는 녹음으로 뒤덮이며
가을에는 오색단풍이 수 놓인다.
동리산 태안사는 '구산선문' '구선문'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학자들의 분류일 뿐
나같은 사람에게는 귀에 설은 이름일뿐이다.
한때 인근의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큼 거찰이었던 태안사.
그도 그럴 것이 신라 말 고려 초, 땅에 풍미하던 풍수도참 사상이 바로
태안사 스님들 동리산파에 의해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고
그들로부터 정치적 명당을 점지 받으려던 호족들의 시주와 비호가 이 절을
항상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풍수의 집대성자 도선대사도 동리산파에 속한 스님이고
제2대 조사였다.
(능파각 밑으로 미인의 걸음걸이처럼 아름다운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주차장을 지나면 첫 번째 마주하는 건물이 능파각이다.
동리산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을 건너기 위해 만들어 놓은 능파각은
태안사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데 빼 놓을 수 없는 누각이다.
'능파(凌波)'란 미인의 걸음걸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 누각 밑을 굽이쳐 흐르면서 기포를 일으키는 물길을
가리킨 말인 듯 하다.
그만큼 아름다운 물줄기다.
계곡의 양쪽에 있는 자연암반에다 낮은 석축을 올리고 길다란 통나무 두 개를
잇대어 걸친 위에 놓인 능파각은 정면 1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맛배 지붕의
건물이다. 난간에 걸터앉아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면 천년의 세월도
찰나 같기만 하다.
세속의 번뇌를 이 다리를 건너면서 던져 버리고 불계로 입문 한다고 한다.
태안사는 6.25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건물이 불타고 말았다.
그때 이곳에서는 지리산 빨치산과 경찰간의 격전이 벌어져
많은 경찰들이 희생되었기에 절 한 모퉁이에 추모탑을 세워
그들을 기리고 있다.
능파각은 태안사 건물 중 '일주문'과 함께
불타지 않고 남아있는 건물이다.
(능파각, 미인의 걸음걸이란 뜻이 담겨있다)
이 건물은 신라 문성왕 12년(850)혜철선사가 창건하고
고려태조 24년(941) 광자대사가 중수 하였으며
그 뒤 파손 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43년(1767) 에 복원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능파각의 모습과 달리 복원되었다.
계곡에 가로질러 놓은 통나무도 현재처럼 각진 게 아니고 원목을 절반으로 나눈
반원형 이었다. 처마를 받치는 기둥도 전봇대처럼 매끈하게 깎은 직선이 아니고
자연목 그대로 사용해서 곡선미를 한껏 살려낸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능파각을 지나 산길을 오르노라면 '동리산 태안사' 라고 쓴 일주문 현판이 맞이한다.
봉황이 먹고 산다는 오동나무 열매가 열리는 숲답다.
일주문의 기와지붕 위에 막 자라기 시작하는 오동나무 한그루...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방문객을 환영한다.
(고려 초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 탑과 비, 아래쪽 사진은 광자대사 부도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 졌지만
갈수록 초라해진다. 태안사의 사세가 기운 탓도 있지만
화려했던 불교의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태안사의 사세가 줄어들면서 부도들도 단순해지고 초라해졌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부도 밭이 있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광자대사 부도탑과 비다. 고려 초에 만들어진 광자대사 부도는 전형적인
팔각 원당형의 부도인데,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느껴진다.
절 뒤쪽에 있는 적인선사 부도와 더불어 태안사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광자대사 윤다는 신라 효공왕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지만
과감히 왕건의 편에 섬으로써 고려왕조에 기여했다.
그렇기에 광자대사는 태안사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부도는 고려 광종 때(950) 세워졌고
벽촌임에도 공을 아주 많이 들인 섬세한 조각을 자랑한다.
광자대사부도 오른편으로 서있는 단순한 부도들....
불교의 쇠락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태안사 3층석탑, 유실된 부재가 있었으나 현 위치로 옮겨지면서 완전하게
복원되었다)
일주문 왼쪽으로 보이는 큼직한 연못.
못 한가운데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이 한기 서있다.
원래는 사찰입구 광자대사부도 바로 옆에 있었지만
언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는 불분명하다.
탑의 부재들이 낡은 것과 새것들이 섞여 있다.
이 탑에도 전쟁의 상흔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6.25 전쟁당시 빨치산이 탑을 향해 사격연습을 했고
탑 곳곳이 총탄에 파손된 흔적이 역력하다.
(태안사 경내, 근래에 들어
태안사는 중창불사가 활발히 진행되어 옛 영화를 서서히 복원해 가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강당건물이 나타나고 그 맞은편에
대웅전이 우뚝 서있다.
대웅전이 앉아있는 축대에 고색과 보수의 흔적이 보인다.
고찰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년고찰 세월의 흔적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대웅전만 둘러보고 내려가는 사람은
태안사의 진짜 보물을 놓치고 만다.
대웅전의 우축 후방 언덕위에 있는 태안사의 진짜 보물.
이 절의 제일 어른이랄 수 있는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와 부도비는
15계단 위의 배알문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천년여의
세월을 품고 있다)
적인선사 혜철은 15살에 영주 부석사에 출가하여 30살에
당나라에 유학했다.
55살에 돌아와 쌍봉사에 머물다 63세에 이곳에서 산문을 개창했다.
그의 문하에 모여든 승려들은 대부분 신라 말 고려 초
우리나라 불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명성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적인선사 부도이름은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이다.
옆에 있는 부도비가 세워진 872년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게 천년도 더 된 유물이라니....
구경하는 다른 사람들.
부도 옆의 동백나무에 정신이 팔렸다.
동백나무에 열린 열매를 신기 해 한다.
동백나무 나이 겨우1백여년
부도나이 천년이상.
적인선사의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의 한 전형을 이루는 팔각원당형.
8각의 기단석과.원형의 연꽃 받침을 한 중대석과 8각의 탑신 그리고
기왓골이 선명한 지붕들. 여기에 화려한 상륜부 등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부도가 특히 대단한 건 이 부도를 만들 당시 어떤 모델도 없었다는 것.
일주문 앞에 있는 광자대사 부도는 적인선사 부도보다 100년이나 뒤에
만들어졌어도 그 완벽함을 따라오지 못한다.
더군다나 광자대사 부도는 적인선사
부도라는 모델이 있었음에도.
(기단석에 새겨진 사자 상, 천여
년의 세월을 비웃기라고 하듯 금방이라도 살아서 튀어 나올 듯이 생생하다)
곡선과 직선의 완벽한 조형미와 균형미를 갖춘 적인선사조륜청정탑.
이름 없는 석공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과히 태안사의 보물답다.
부도 옆에는 부도 비가 있다.
부도 비의 상층부와 받침대를 제외하고 비문이 적힌 가운데 부분은 전쟁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나 누군가가 비문을 탁본해 놓은 게 있어서
비문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사찰에 가면 언제나 물을 마셔보는 습관이 있다.
물 한모금에 세속의 번뇌가 씻겨나갈리 만무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번뇌를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가 어떤 유물이나 문화재를 대할 때 현재의 생각과 시점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만들어진 그 당시 시대로 돌아가 그때 살고 있는 사람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지금의 기술이라면 눈 깜짝할 새 적인선사 부도보다 백배는 훌륭한
부도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진 부도를 보고 감동을 받을 수는
없다.그렇기에 그 시절의 눈으로 대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을 수가 있다.
적인선사 부도를 조심스레 만져보면서 느낀 그 감동
도시로 돌아가면 어디가서 찾을 수 있을까?
첫댓글 몇년전 태안사에 친구들과 갔을때 태안사를 좀더 알고 갔었더러면 더 많은 느낌을 얻을수 있었을탠데... 아쉬움으로 이글을 가져왔습니다. 다음에 갈탠 좀더 깊은 느낌과 깨달음을 얻길 원합니다.
넘 좋은 글 어디선가 본듯한 글... 여기와 있어도 보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