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라예보 사건(Assassination of Sarajevo/萨拉热窝事件)
이 일어난 라틴다리에 닿았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의 밀랴츠카강변 도로에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부인 조피(Sophie Chotek)를 세
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 1894~1918)가 암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
계대전이 시작되었다.
▲ 사라예보사건이 발생한 밀랴츠카강의 쿠무랴다리와 라틴다리 근방지도
▲ 사라예보사건(1914.6.28삽화를 1914.7.2 이태리신문-라도메니카델코리에 실음)
▲ 사라예보사건장소의 기념명판(키릴어)과 범인의 발자국
▲ 사라예보사건장소의 기념명판(로마자)
▲ 사라예보 시내로 흐르는 밀랴츠카강 옆으로 시민들이 걷고 있다.
그 당시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고, 보스
니아-헤르체코비나는 오스트리아의 식민지 영토였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
로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분리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 그래
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군대의 사열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네델코 차브리노비치 및 4명의 젊은 학생들이 음모를 준비
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에서 게르만인과 슬라브인이 평등하게 지내게 하려는 계
획을 세우고 있어 세르비아민족주의 단체는 이러한 온건정책이 오히려 세르비아인의 결집의
지를 약화시킨다고 여겼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 슬라브계민족이 동등하게 동
맹에 참여할 수 있는 제3의 왕국을 수립하려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구상은 통일된 단일민족
국가를 열망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 1914년6월28일 사라예보사건의 현장인 밀랴츠카강에 놓여있는 라틴다리.
▲ 사라예보 시내 중심으로 흐르는 밀랴츠카강은 시내를 동서로 갈라둔다.
▲ 밀랴츠카강에 놓인 라틴다리에는 2개의 큰 구멍이 뚫어져 있다.
▲ 라틴다리 앞에 서있는 "사라예보사건"의 내용을 알리는 역사 박물관
-1914년 사건당시에는 카페였는데,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 사라예보의 밀랴츠카강의 쿠무랴다리(Cumurja Bridge)
황태자 부부가 탄 차는 밀랴츠카강의 쿠무랴다리 인근에 있던 네델코 차브리노비치가 던진
폭탄을 맞아 테러를 당했으나, 운전사가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차 뒷바퀴에 맞고 뒤따라오던
차 밑에서 터져, 16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고 모든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가려
고 루트를 변경해 지름길로 가려고 했으나, 실수로 운전사에게 미리 말하지않아 운전사는 길
을 잃고, 라틴다리 인근의 골목에 숨어 있던 프린치프가 달려 나와 총 두 발로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 사건이 있은 직후 시민들은 세르비아인을 습격하고 그들의 가게를 약탈하였다.
▲ 사라예보의 밀랴츠카강 라틴다리 코너에 자리잡은 사라예보박물관
▲ 사라예보박물관 안에 전시되어있는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밀랍인형 모습
▲ 권총으로 황태자부부를 사살한 범인 프린치프
▲ 사라예보박물관의 외벽에 부착되어 있는 사건 당시의 사진 <1>
▲ 사라예보박물관의 외벽에 부착되어 있는 사건 당시의 사진 <2>
▲ 사라예보박물관의 외벽에 부착되어 있는 사건 당시의 사진 <3>
▲ 사라예보박물관의 외벽에 부착되어 있는 사건 당시의 사진 <4>
사건이 발생한 사라예보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이었고, 프린치프 또한 오스트리아령 보스니아
에 사는 세르비아인으로 오스트리아국적으로 세르비아 국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왕국이 러시아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운동을 추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
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인 독일제국의 협조를 요청했고, 여기서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는 오스트
리아-헝가리 제국을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것은 1878년에 체결된 독오동맹(独
奥同盟=독일과 오스트리아 조약 /독어: Deutschland-Österreich Zweibund /영어 : Austro-German
Alliance)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 동맹은 독일제국이 주도하고 오스트리아-헝가
리 제국이 따르는 구조였음에도,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 이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주도하고 독일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었
다.
▲ 1914년 독일제국(파란색)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붉은색)의 유럽에서의 위치
▲ 1914년 당시의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과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 사라예보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요구조건을 제시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오스트리아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하여 전쟁이 시작됐다.
러시아는 발칸진출을 노리며 같은 슬라브계 민족인 세르비아를 지지하자 독일은 같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하러 뛰어들어 전쟁의 규모가 점점 커져갔다.
▲ 1914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하여 삼국협상국이 전면전을 벌였으나,
삼국동맹 중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키다가 이듬해(1915년)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1917년 미국이 참전하여 전쟁의 승패를 갈라 독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은 패전하였다.
▲ 1915년 독오양국은 제2차발칸전쟁으로 국토를 잃은 불가리아왕국을 설득하여 동맹국에
참전하여 세르비아를 침공하게 하였고, 1914년 8월 오스만제국은 독일과의 비밀조약으로
동맹국에 합류하여 전쟁발발과 동시에 참전하여 독일제국과 합동작전을 별였으나, 영국군
및 러시아군에게 중동전선과 코카사스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 구유고슬라비아연방은 6개 공화국과 2개자치주(보이보디나주와 코소보주)였으나,
2018년말 현재 6개 독립공화국과 코소보공화국(일부국가미승인) 7개국으로 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오스트리아제국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사건"
직후 한달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세르비아를 침공하였다면, 3~5일 이내에 세르비아의 전국토
를 함락하고 항복을 받았을 것이며,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지 않았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리고 독일이 영국을 연합국 편에 가담하지 않게 해양외교를 적극적으로 하였더라면,
미국도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지 않아 동맹국이 승리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쟁에 합류
할 때는 어떤 나라라도 승전국편에 붙어야 한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맞설 때는 역사에서는
항상 해양세력이 승리하였다.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거나 전쟁을 치른다
면 누가 우세할 것이며, 우리나라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당연히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
및 서유럽세력과 힘을 합해야 할 것이다. 전통병법인 원교근공지책(遠交近攻之策)이 적용된다.
▲ 두류봉은 사라예보의 구 시가지를 흐르는 역사현장인 밀랴츠카강변에 앉아있다.
▲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을 찍은 밀랴츠카강 주위에는 다양한 민족의 사람이 살고있다.
▲ 보스니아 독립전쟁의 와중에 많은 총탄을 맞은 호텔 유럽(Hotel Europe)
- 대부분의 유럽기자들이 묵었던 이 호텔은 주위건물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지금도 온전하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