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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뜻하지 않은 관정 대법사님 초청
굉원(정원, 대구 미타선원)
1) 관정 대법사님과의 첫 만남과 법명 굉원
정토삼부경을 보고 환희심과 극락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정토도량으로 출가하기 위해 염불하는 스승을 찾았다. 당시 이미 진행되고 있는 만일염불회를 알아보았더니 대구 수산 큰스님께서 처음 결성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바로 대구 지산동 염불선원에 계시던 수산 큰스님(1906~1996)을 찾아가 정토 도량으로 출가하여 수행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현재 은사 스님이신 우리 절에서 모시고 있는 보국 스님을 찾아가라고 추천해 주셨다. 그래서 정토도량인 미타선원으로 출가하여 지금까지 보국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정토수행을 하고 있다. 보국 스님은 일찍이 11년 동안 수산 큰스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던 스님이시다. 현재 97세인 보국 스님은 지금도 수산 큰스님을 모셨던 이야기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지장사에 가서 수산 큰스님을 처음에 뵈었을 때는 얼굴이 까맣고 너무 초췌하셨다. 그래서 늘 대구 서문시장에 가서 마, 추자, 두부를 사가지고 와서 산에서 주은 작은 알밤을 까서 시루에 쪄 함께 밥을 해드렸더니 6개월 만에 얼굴이 하얗고 좋아지셨다.”
은사스님께서는 수산 큰스님을 법의 스승으로 높이 섬기셨기 때문에 우리 절에서는 늘 수산 큰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법회 때 아미타경을 읽고, 아미타불 정근을 한 뒤, 법장비구의 48가지 바람(願)을 한 가지 한 가지 욀 때마다 한 번씩 절을 하여 모두 48번 절을 한다. 법회를 모두 정토의식에 따라 하는 것이다.
사미니계를 받고 은사스님을 모시며 아미타불 염불을 정진하던 중 1996년 가을 수산 큰스님께서 입적하시게 된다. 정토계에서 가장 큰 별이신 수산 큰스님이 입적하게 되자 염불을 수행법으로 삼으려고 했던 나로서는 실로 큰 기둥이 무너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1997년 2월 ‘극락을 다녀오신 중국 스님이 한국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신도 한 분이 대구 보현사에서 법회를 한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법회가 있는 날 저녁 대구 보현사로 달려가 법회에 참석하였다. 법회에서 관정 대법사님을 초청하신 스님께서 관정 대법사님을 한국에 모시게 된 과정을 설명하시고, 이어서 관정 대법사님이 극락세계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극락을 가기 위해 염불수행을 하는 불자로서 극락 다녀오신 이야기를 직접 듣는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이고, 거기에 더해 극락 수행법인 정토선 수행법을 배우게 되었을 때는 정말 환희심이 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얻은 것 같았다. 법회가 끝나고 법보시로 마련한 「극락세계 유람기」 책도 받아가지고 와서 자세하게 읽어 보았다
며칠 뒤인 2월 24일 대구 법계사에서 열리는 법회에 다시 찾아가 법문을 들었다. 법회가 끝나자 스님들은 개인 친견이 가능하다고 하여 나도 용기를 내서 관정 스님을 찾아뵙고 삼배를 올렸다. 절을 받으신 대법사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라고 하시며 굉원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셨다. 이때부터 마음속으로 관정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정토선 수행법으로 열심히 정진하여 극락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당시 법명을 받았지만 무슨 큰 의식이 있고 격식을 갖춘 계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종이 쪽지에 스님이 주석하고 계신 적수암사 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나의 법명을 적어준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정토수행을 하기 위해 출가한 나에게는 정토수행의 핵심인 염불수행 방법을 전수 받은 중요한 징표이기 때문에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3번째 대법사님을 뵌 것은 3월 4일 영주 약수암(경북 영주시 부석면 보계리)에서다. 이번에는 은사님이 가보고 싶다고 하셔서, 택시를 대절해서 모시고 함께 다녀왔다. 은사스님도 평생 염불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극락을 다녀오신 이야기와 정토선 수행법을 들으시고 크게 환희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뜻 깊은 법회였다고 하셨다.
2) 제자의 간절함에 다시 한국에 오신 관정 대법사님
3번에 걸친 법회참석을 통해서 정토선 수행법을 배운 뒤 바로 정토선 염불을 하기 시작하였다.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에 2번씩 서로 번갈아 하는 염불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었다. 나 혼자서 할 때도 한번은 큰 소리로 2번 염불하고, 이어서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2번 염불하면 집중이 잘 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염불을 해나가면서 관정 대법사님을 우리 절에 직접 모셔 법회를 갖고 정토선 지도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법명을 받을 때 따로 적어주신 주소로 편지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구 한일극장 뒤에 있는 중국어 학원에 가서 특별히 부탁하여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대법사님의 안부를 여쭙고 한국에 방문하시면 우리 절에서도 한 번 꼭 모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중국에서 국제전화가 왔다. 한국말로 관정 대법사의 부탁으로 전화를 한다며 8월 25일 관정 대법사님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바람이 바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뛸 듯이 기뻤다. 제자 된 도리로 공항에 가서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김포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도착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모셨던 제자들이나 그 때 통역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나 혼자만 마중을 나온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고, 정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제자들에게도 연락을 해서 모두 마중을 나올 줄 알았지 나 혼자 대법사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정 대법사님께서 내 편지를 받으시고 제자의 간절한 마음을 들어주시기 위해 무작정 한국에 오신 것이다. 나에게는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기회였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책방에서 중국어 회화책 한 권을 사가지고 갔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국민항이 도착하고 손님들이 밀려나오는데, 어렵지 않게 법복을 입으신 관정 대법사님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관정 대법사님은 수행하는 제자나 통역이 없이 혼자 입국하셨는데, 내가 승복을 입었기 때문에 바로 나를 알아보았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양쪽이 마찬가지였다. 73세의 노령에 여행하는 자체가 어려우실 터인데, 나오는 중국사람들에게 ‘누구 한국말 하는 사람이 없냐’고 찾으셨으나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단둘이 남은 상황에서 다른 방도가 없어 우리 절로 모시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공항 밖으로 모시고 나와 그 당시 가장 좋은 모범택시를 타고 영등포역으로 와서 동대구 가는 기차를 탔다. 3시간 동안 새마을호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착할 동안 중국어 회화책을 꺼내 보여 드리면서 “음료수를 드시겠습니까?”라고 여쭈어 보았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그리고 몇 가지 대화를 했지만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동대구역에서 내려 바로 택시를 잡아 우리 절에 다다르니 저녁 7시가 넘었다.
내가 관정 대법사님을 모시고 온다는 연락을 받은 은사스님께서는 80살이 다 되가는 몸으로 대법사님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여 놓으셨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법사님께 급히 마련한 공양을 올렸는데 가리지 않으시고 잘 잡수셔 안심이 되었다. 공양을 드신 뒤 여행가방에서 선물로 가져오신 관세음보살 그림을 꺼내셔서 오른쪽 위에 ‘슬기로운 제자 굉원에게’라고 쓰시고, 왼쪽에 ‘1997년 8월 일 어리석은 스승 석관정이 대한국 대구에서 주다’라고 쓰신 뒤, 낙관을 찍어 주셨다. 제자를 슬기롭다고 높여 주시고 자신을 낮추어 어리석다고 쓰신 대법사님의 마음자리가 크게 와 닿았다.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인연을 나타내주는 관세음보살도는 지금도 요사채에 소중하게 모시고 있다. 이렇게 긴 하루가 가고, 대법사님께는 우리 절에서 한국의 첫 밤을 보내시게 되었다.
다음날은 다행히 우리 절에 다니는 화교인 류건민 신도가 통역을 해주어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기회에 신도들에게 연락하여 관정 대법사님을 모시고 법회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군위 압곡사 자해 스님께서 어떻게 연락이 되셨는지 오셔서 관정 대법사님을 시봉하시겠다고 모시고 갔다.
3) 드디어 우리 절에서 대법사님 법문을 듣다.
나는 자해 스님과 상의해서 몇 군데 법회를 주선하였다. 우리 은사스님이 잘 아시는 대전 관음사 일화 스님에게 연락하였고, 경주 미타사에서도 법회를 열었다. 모두 수산 큰스님 제자들이라는 인연 때문이었다. 나는 경주 미타사에서 열린 법회에 참석하고, 마지막에 우리 절에서도 법회를 마련하였다.
1997년 9월 7일 우리 절에서 법회를 하기 위해 대법사님께서 오셔서 하루를 묵으셨다. 다음날인 8일 아침, 우리 절에서 늘 해온 관례대로 콩죽을 끓여서 대접을 했다. 큰스님 모셔놓고 너무 대접이 불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은사스님이 몇 십 년을 해온 관례이기 때문에 바꾸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 대법사님께서도 콩죽을 아주 좋아하셨다. 알고 보니 중국에서는 아침에 모두 죽이나 두유를 먹는다고 한다. 공양을 마치시고 함께 오신 제자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먹을 갈아 ‘나무아미타불’이란 휘호 2장을 써 주셨다. 한 장은 우리 절 요사채 당호로 걸었고, 한 점은 액자를 해서 걸어놓고 늘 관정 대법사님을 생각하고 있다.
드디어 우리 절 미타선원에서 대법사님을 모시고 법회를 가졌다. 다른 절 신도들이 버스 한 대를 빌려 참석하였고, 우리 절 신도들까지 합해서 법당과 마당을 가득 메웠다. 나는 이미 4번이나 대법사님 법문을 들었고 염불도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에 법회가 시작하기 전에 참석한 신도들과 간단히 정토선 2회 염불을 해보았다. 내가 두 번하면 신도들이 두 번 따라서 하는데 단체로 하니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법회에서 극락에 다녀오신 이야기, 그리고 극락에서 하는 수행법과 염불법을 직접 큰 소리로 시범을 보여 주셨다. 법문을 끝내시고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아주 잘 해 주셨다. 한 신도가 고기를 먹은 사람도 염불하면 극락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에 염불만 열심히 하면 갈 수 있는데 다만 하품하생만 갈 수 있고, 계를 잘 지키면 더 높이 상품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비롯하여 보살에 대해 물었을 때도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칠판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써서 보여주면 통역을 맡은 류건민 신도가 해석해 주었다. 어떤 부분은 해석이 어려워 자해 스님에게 부탁을 해서 해석을 했는데, 아미타경에 나오는 문구는 보국 스님이 더 빨리 해석하기도 했다.
법문을 마치시고 참석한 모든 신도들에게 마정수기도 해 주셨다.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여 법문을 다시 듣고 처음으로 마정수기도 받았다. 벌써 5번째 듣지만 극락을 다녀오신 이야기는 대법사님의 높으신 법력과 극락세계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염불수행 하는데 촉매가 된다는 마정수기를 받을 수 있어 한없이 좋았으며, 많은 신도들이 마정수기를 받고 환희에 차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뿌듯했다.
두 번째 방문은 2000년 6월 7일 보성 대원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강진 백련사에서 하룻밤 묵으신 뒤 우리 절에 오셨다. 이때는 선용 스님, 대주 스님을 비롯한 여러 분이 스님을 모시고 왔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까이 사는 신도들에게 연락하여 저녁에 대법사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3년 전에 법문한 것을 비디오 테이프로 만들었는데, 이날 대법사님과 제자들에게 보여드렸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8일 미리 준비한 법회를 열어 법문을 듣고 참가자들이 마정수기를 받았다. 우리 절 법회를 마치고 경주 미타사로 가셨다.
4) 한 번 더 오신다더니 ...
관정 대법사님이 중국으로 떠나셨지만 정토선 염불은 놓지 않고 계속하였다. 처음에는 신도들과 함께 했는데, 나이가 많이 드신 신도들은 속도가 빠르고 음이 어려워 함께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신도들은 편한 대로 염불하게 하고 나 홀로 정토선 염불을 하고 있다.
그 뒤 강원에 다니며 4년간 공부하고, 연로하신 은사님을 시봉하다 보니 관정 대법사님을 찾아다니며 다시 뵙지는 못했다. 나중에 광덕사에서 중국 명찰을 순례하며 관정 스님이 중창한 사찰들도 탐방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참석하지 못했다. 거동이 불편하신 스님을 혼자 두고 어디를 갈 처지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2007년 어느 날 신도 한 분이 인터넷에서 관정 대법사님께서 입적하셨다는 기사를 보았다고 알려 주었다. 대법사님께서 주석하신 중국 사찰에서 거행되는 다비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송구스럽게 마지막 모습을 뵙지 못한 것이 지금도 못내 안타깝다. 언젠가 자유롭게 수행할 처지가 되면 꼭 대법사님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제 늘 아쉬움이 남지만 대법사님이 남기신 정토선 수행법이 있으니 그 수행법에 따라 열심히 염불하는 것이 제자로서 도리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이제 97세이신 은사스님께서는 기억력이 많이 안 좋아지셨지만 관정 스님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시다.
“관정 대법사님 오셨을 때 정말 환희심이 났다. 관정 스님이 오셨을 때 나무아미타불이란 글을 써 주셔서 스님 떠나시기 전에 그 글을 액자로 만들어 요사채 이름으로 걸었다, 기분이 좋았다. 감사하다. 한 번 더 오신다고 하시더니 못 오셨다”
극락 다녀오신 관정 스님이 우리 절에 오셔서 법문하시고 글을 써주신 것에 대해 자랑하시면서, 늘 “한 법 더 오신다고 하시더니 못 오셨다.”고 못내 아쉬워 하신다. 나는 속으로 말씀 드린다.
“스님, 지금처럼 놓치지 않으시고 계속 염불하시면 극락가시게 되고, 극락 가시면 관정 스님 그곳에서 계시니 만나시게 되십니다. 저도 마음 깊은 곳에 대법사님의 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 염불이 울려 퍼지고 있으니 틀림없이 극락에 가서 꼭 두 스님 만나 뵐 것입니다.”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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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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