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야 할 때
최운숙
39층으로 이사한 나는 가끔 멀미를 한다. 높은 곳에 대한 현기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멀리서 달려오는 바람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거실의 창문을 열어젖히면 허공과 땅 사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바람의 손짓을 느낄 수 있다. 바람의 온도는 내 체온보다 약간 낮아서 막 세수를 끝낼 때의 느낌 같기도 하고 세상을 이별한 어머니의 얼굴을 만졌을 때의 느낌 같기도 하다. 그 느낌에 젖어들면 멀미가 난다. 그리움의 멀미다. 아니, 멈춤이 가져온 멀미다. 운 좋은 날에는 비를 만날 수도 있다. 탁탁! 지붕 위에 떨어지는 양철 소리를 내기도 하고 처마 밑 돌 이우는 소리를 내기도 한, 비의 소식은 잠든 내 의식을 깨운다.
그랬다. 어머니는 종종 혼자의 시간으로 사셨다. 새벽녘까지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를 어둠과 함께 기다리셨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 시간을 즐기셨는지도 모른다. 무심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 안의 또 다른 어머니와 분풀이를 하셨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기다림은 할머니의 물레처럼 길어졌다. 잠결에 일어나 더듬더듬 화장실을 가다 보면 방 한 쪽에 검은 물체가 꼼짝 않고 있었다. 흠칫 놀라 자세히 보면 그 물체는 어머니였다. 어린 나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앉아있는지 궁금했다.
주중 낮 시간, 듬성듬성 영화관에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한잔의 차를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무엇을 챙기고 무엇을 버리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처럼 시간에 속해 시간을 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외로워지라고 했던 어느 교수님 말씀이 생각난다. 외롭다는 건 곧 내려놓는다는 것이며 내려놓기 위해선 멈춰야 한다. 무엇을 쟁취하고자 뛰며 달려왔던 지난 시간이 39층 높이보다 아스라이 멀다. 이제 좋은 글을 쓰고자 멈춤을 시도한다. 아니다. 나를 바로보기 위해 멈춤을 한다. 우두커니 앉아 있어 보고, 잠깐 숨을 미뤄보기도 한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밖의 세계가 뚝 끊기고, 멀리서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가 허공과 하나 됨을 느낀다. 그 소리는 비에 젖지도 바닥에 내려앉지도 않는다. 다만 고요히 사라질 뿐이다. 밤을 지키던 어머니처럼, 영화관의 시간을 쥐고 있는 홀로인 그들처럼, 나도 성장을 버리고 있음을 느낀다. 버리고 있을 때, 기를 못 펴던 내 하나의 촉이 드디어 일어서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어머니는 혼자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긴 기다림 후의 자유, 홀로의 자유를 만나 멈춰 서고 말았다, 아마 어머니 옆을 지키던 새벽녘 어둠도 함께 멈춰 섰으리라. 그때 어머니는 무엇을 버렸을까, 치매라는 이름의 자유를 가지면서 말이다. 어쩌면 어머니는 멈춤을 통해 자유를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몇 번쯤 혼자의 시간을 가져봤던가, 떨어지는 낙엽을 찬찬히 본적이 있었던가 물어보고 싶은 날이다. 어쩌면 걸어온 시간보다 가야할 시간이 적게 남아있는 사람에게 멈춤이 간절한지도 모른다.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이며 사랑이다. 멈추고 가벼워짐으로서 나는 나다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겨울에 옷을 벗는 나무처럼 말이다.
약력
* 2018년 2월 수필과 비평 등단
* 무심수필문학회, 충북수필문학회, 딩아돌하 운영위원.
첫댓글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가족이며 사랑이다. 멈추고 가벼워짐으로서 나는 나다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겨울에 옷을 벗는 나무처럼 말이다.' 결미 부분이 참 좋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엇습니다.
slow life....최근들어 더욱 실감납니다...
그동안 멈추지 못하고 지내오신 어머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십니다.
나의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감동글 잘 읽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좋은 글 쓰셨네요.
요즘 저도 무척 바빴어요.
담시 멈추고 쉬는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저는 마음이 아립니다. 어머님을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 아버님, 정말 밉습니다. ㅠㅠ
선생님 글을 읽으면 정서가 다라가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형상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