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 아버스는 미국의 여류사진가다. 1971년 그녀가 자살한 이듬해 열린 회고전이자 최초의 개인전엔 27만이라는 사람들이 몰렸고, 그녀는 역시 자살한 미국의 여류시인 실비아 플라스처럼 천재적 사진가로 순식간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은 몹시 불편하다. 그녀는 장애인, 쌍둥이, 성도착증자, 난장이 등 비정상이거나 낯선 사람들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결코 행복한 모습이 아니다. 그들의 얼굴은 뭔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강한 불안과 거부감을 느끼게까지 한다. 물론 그녀 사진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실제로는 행복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은 사진가의 눈이 선택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전혀 객관적이 아니다. 그녀의 사진은 사진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지 보여준다.
특히 쌍둥이처럼 둘이나 셋의 사람들이 같이 있지만 묘한 부조화를 느끼게 하는 것은 무의식적 불안과 착란을 유발하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 내가 그녀의 '일란성 쌍둥이'라는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라는 공포영화를 떠올렸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쌍둥이 자매의 이미지는 너무나 닮아 있다. 큐브릭이 분명 이 사진에서 어떤 이미지를 차용했을 것이다. 쌍둥이를 통해 우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읽는다. 그렇다 그녀는 분명 정체성의 혼란이 강했을 것이다.
그녀는 미국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다. 5,60년대라는 풍요의 시기에 미국에서 자란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이렇게 편집증적으로 죽음의 징후에 천착했던 것일까? 내 대학 시절이 생각난다. 나도 한때는 죽음의 이미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일종의 패배감과 자괴감에서 나오는 자기 파괴욕구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특히 권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억압을 느낄 때의 반응이 자기 파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란 현실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안정되고 풍요로운 도시 중산층이 어떻게 억압적일 수 있겠는가? 아니다, 억압적다. 그것은 충분히 억압적이다. 도시는 멸균과 위생, 그리고 안락과 안정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뭔가 불안하다. 그래서 도시인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행복해도 되는가? 행복해야 하는가? 민감한 영혼은 심리적으로 자기 벌주기를 한다. 그것이 퇴폐와 타락,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편집증을 유발한다. 증거는 충분하지 않은가? 그녀의 사진은 자살에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그녀의 사진은 충분히 죽음을 예고해 왔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통해 도시인의 정체성 혼란과 잠재된 불안을 읽는다.
결국 길을 잃은 그녀는 죽었지만 그녀의 사진은남아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있다. 결국 그녀의 집착도 그녀 자신의 사진처럼 꿈이고 만들어진 것을....
<일란성 쌍둥이>(67년)
<수류탄 장난감을 들고 있는 아이>(62년)
<휴스톤가의 10대연인>(67년)
<무제>(70년)
<일요 산책을 나가는 블루클린의 젊은 가족>
지나치게 자극적인 사진은 빼었기 때문에, 이 사진들은 덜 충격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