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설교자 스펄전의 부인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스펄젼의 아내가 먼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스펄젼은 오십대 초반의 나이에 먼저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평생을 살다 이 세상을 하직하는 위대한 설교자는 사랑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여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그토록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오"
요즘 우리 교회의 최대 이슈는 “웰빙” 입니다. “웰빙”이 무언지는 이런 저런 정의가 많이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줄여 간단히 말한다면 “잘 먹고 잘 살아보자”정도가 아닐 런지요. 이것은 스스로 자유하고, 평안한, 그리고 평화로운 삶을 갈망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웰빙”의 사회적 의미, 그 의의 등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은 다소 피상적이고, 따분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얼마나 자주 인용이 되는 부분입니까. 그러나 저는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음성으로 들릴 것임을 믿습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진정한 “웰빙”의 삶으로 초대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가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의 성령을 통해 하늘의 귀한 음성이 들려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본 론
1.주님에게 속한 자 되었을 때
인생에도 계절이 있다고 합니다. 때를 따라서 성장하는 봄의 계절이 있고,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가지며 사회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여름의 계절이 있습니다. 인생의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게 됩니다. 가을의 계절에는 인생의 열매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차분히 자신의 생을 마감하며, 언 땅에 스며들어 다음 봄의 새싹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줍니다.
그러나 추수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뒤를 돌아보고 허송세월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열매를 맺는 계절이 아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추수할 것 없는 계절은 꼭 5- 60세가 되어서만 오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젊어서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뒤만 돌아보는 사람은 열매 없는 덧없는 가을과 겨울에 사는 인간일 뿐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의욕을 가지고 오늘의 삶을 살지 못 한다면, 20대 이든 80대 이든 그 나이와는 상관이 없이 열매 없는 가을에 사는 인생입니다. 또한 하는 일마다 좌절감을 느끼고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이 곧 인생의 겨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생의 계절을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고, 생기가 넘치는 봄이나 여름으로 그리고 차분히 열매를 맺고, 뒤를 돌아보며 다음 봄의 새싹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도록 만들도록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과연 진정한 웰빙의 삶을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일 런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인생의 계절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에게 완전히 붙잡히고, 그 안에서 살며 우리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거저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지에게 동냥하듯 던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없는 데 이제 빈 양동이에 물을 붓듯이 채워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동행하며 살다 보면, 그리고 그에게 속한 자의 삶을 살다보면 우리의 전인적인 삶 속에서 나도 모르게 그냥 올라오는 겁니다. 온 몸과 마음이 불타버리듯이 마구 마구 솟구쳐 오르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예레미야 17장 7절로 8절의 말씀에서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이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을 매우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보며 예언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6장 11절에서 그는 고백하기를 자신의 몸속에 하나님의 영이 자신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어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주님께 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 후 하나님의 본래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떨어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계속되는 불안과 소외,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 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께서 특별히 선택해 주신 사람들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한 자가 되어 그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진정한 힘을 얻는 모든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로 말미암아.
인도의 어느 선교사가 주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힌두교(Hinduism)를 믿던 소녀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이 선교사는 그 하염없이 흐느끼는 소녀를 붙들고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이토록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참지 못하게 하여 우는 것입니다." 하면서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녀의 말을 들은 선교사는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러한 감격과 처음에 믿던 신앙의 열과 체험이 마비되었을까 하면서 자신의 무감각해진 신앙과 마비된 신앙의 체험을 안타까워하면서 회개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중 한명인 폴 틸리히는 인간의 원죄를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원죄”란 아담과 하와의 패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상징된 “소외”라는 것입니다.
태아가 양수 속에 있을 때는 어머니와 완전히 한 몸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장 완벽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사람이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머니의 몸과 그 DNA상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몸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처럼 우리 인간 역시 하나님의 본래적인 품속에서 살 때는 하나님의 품성을 받은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품성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부모님의 품을 그리워하고 인간 역시 하나님의 본래적인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세상 속에 각 종 사슬과 억압 속에서, 제도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소외된 상태,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완전하여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해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경제, 정치, 사회 등의 각 분야에서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구조를 만들고,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늘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사는 기득권층도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 그가 직접 체험하였던 거룩하신 분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 분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시고,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 분은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살아나셨습니다. 또한 그 분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어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그 분께서 흘리셨던 십자가의 피는 평화를 이루시고, 모든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악한 일로 그분과 멀리 떨어져 원수가 되었지만, 이제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 복음에 터를 굳건히 잡고, 소망에서 떠나지 말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붙잡히고 매인 몸이지만 진정으로 자유 하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신도들을 제일 앞서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는 다마스쿠스(다메섹)에서 거룩하신 분을 만났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이성, 오감을 총 동원해도 모자랄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 후 바울은 예수님께 완전히 붙잡힌 자, 그에 속한 자가 되어 당시 세상 끝이라고 불리 우던 시리아까지 복음 전달하기 위한 삶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그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5:6-7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화해를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를 통해 오늘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시 에덴 동산에 이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아픔의 기도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무언가 불완전하고, 불안정했던 생명의 근원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틀어졌던 첫 단추가 온전히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안정합니다. 우리는 늘 상처받고, 쓰러지며, 아파합니다. 실수투성이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도 많이 줍니다. 늘 예수님의 모습대로 살지도 못하고, 수많은 죄악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며, 불안정한 존재인 것입니다.
3.진정한 자유와 평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자유한 삶이란 무엇입니까. 진정 평안은 무엇이고 평화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매주 예배 시간마다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회복기도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낙원 밖에서 살게 된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곤 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나쁘게 보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은 절대선인데, 인간은 악 하기만 하다고 보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수많은 악함과 죄악을 핑계와 함께 자기 자신을 뒤로 숨기고, 익명성에 의존하여 자신을 합리화 하는 모습에 대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우리가 정말 깊은 묵상에 들어가 거룩하신 그분을 만날 때, 다시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다른 듯하지만 하나이신 그 분을 만나게 될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황홀감 속에서 할 수 밖에 없는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간. 바로 나 자신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항상 한울이를 보며 많은 은혜를 받고는 합니다. 한울이를 보면 혼자서 좋아하며 온 교회당을 헤집고 다닙니다. 이러 저리 싸돌아다니고, 소리도 꽥꽥 지릅니다. 사모님께서 에휴~한울아..하고 한숨을 쉬실 때까지 어지르고 다니곤 하지요. 그러다가 혼자서 자빠지고, 부딪히고는 울며 옵니다. 이 때 사모님께서 가만히 계시면 그냥 계속 웁니다.
사실 18세기까지 교육학자들은 우는 아이를 달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잠도 따로 자고, 아이가 울며 젖을 먹고 싶다고 보채도 주지 말라고 하였지요. 이래야만 "사회성"의 성장에 문제가 없고, 의존적이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니 어릴 적의 심리적 불안감이 마음 깊은 곳의 무의식에 자리 잡히며, 사람의 인격이 사회가 개인주의를 넘어선 천박한 이기주의에 빠지고 되고, 각 종 범죄가 증가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19세기 이후에는 젖먹이 아이들의 욕구를 그 시기에 맞게 최대한 충족시켜 주라고 하였습니다. 젖도 충분히 주고, 꼭 껴안아 잠도 재워주고 말이지요.
한울이도 보면은 사모님께서 꼭 안아주고, 곁에 앉아 지켜보고 있어야만 평안해 합니다. 사모님께서 안 계신다면 목사님이라도 계셔야겠지요. 안 그러면 당췌 불안해서 견디지를 못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힘들어하고, 마치 거대한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돛단배인양 느끼며, 늘 한계와 벽에 부딪히는 것은 20세기 심층심리학자들의 의견처럼 단순한 회귀본능을 넘어서는,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선배들이 에덴동산이라는 소박한 이야기를 통해 고백했듯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본래성에서 벗어나 “원죄”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를 꼽자면, 학자마다 이견은 있겠지만 아무도 성 어거스틴을 빼놓지는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자신은 수 십 년간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말년에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탕자처럼 하나님 곁을 떠나 살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한 많은 죄인들 아닙니까..의인이 아니지 않습니까..결국 또 세상에 나가면 그냥 또 나 혼자 살게 되곤 하지 않습니까..목회자인 저도 그렇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한울이를 보세요. 우리가 보기에는 또 힘들 걸 아는 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또 엄마의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는 울며 돌아오고는 하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아버지의 곁을 떠나 살던 탕자가 돌아옵니다. 이 때 아버지의 모습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맨발로 뛰어 나가 얼싸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풉니다. 시기하는 형과는 달리 아버지의 사랑은 한없이 크고 넓으며, 따뜻하기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 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하나이신 분입니다. 아들께서는 자신을 내어 주심에도 모자라 자신을 먹게 하십니다. 자신을 밥으로 내어주시며, 세상에 썩어 들어가려고만 하십니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만 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때론 기득권자들에게 독촉의 칼이 되기도 하고, 민중에게는 따듯한 봄바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들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셨지요.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고, 하늘에서 말씀하신 대로 인간 본래 됨을 회복하여 구원받기를 바라셨지요. 민중들은 스스로 규정짓던 노예근성과 각 종 굴레를 박차 일어나고, 자기 해방을 이뤄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들께서는 그렇게..그렇게..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다가, 세상 적으로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범으로, 정치사형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본문의 아버지가 아들을 얼싸안고, 그 돌아옴을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던 모든 소외를 다시 당신과 이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들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를 겪었지만, 겟세마네 동산의 그 피맺힌 기도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본래성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누구든지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의 곁에 갈수가 없다" 그리고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
◈결 론
이제 저는 오늘 이야기의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성소를 다시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그 곳을 찾았다면, 그곳에서 만나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손길과 음성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인간 본연의 통함이 없이 세상의 모든 “웰빙”은 마치 발이 간지러운데 구두 위를 긁어 주는 듯한 꼴 외는 될 수가 없습니다. 영물인 인간은 단순한 명상(meditation)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 근원적인 소외, 불안, 떨어져 나옴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통 아줌마, 통 아저씨가 될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통"이란 통할 "통"입니다. 주님과 통하는 아줌마, 주님과 통하는 아저씨! 이것이 근본이며 시작이자, 마지막 도착점 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다시 봄과 여름의 기운으로 되돌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근원적인 통함이 가능하면, 인간끼리의 통함이 가능합니다. 인간끼리의 통함이 가능하면, 세상의 통함이 가능합니다. 이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은 이 모든 것과는 정 반대이지만, 진정 하나님과 통하게 된다면, 이상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현실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장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잠도 주무시지 않으시며 우리를 애타게 부르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일상의 은총을 느끼고, 생활이나 삶에 밑줄을 그을 수 있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훈련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계신 주님을 만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그러면 가능합니다. 억지로 하려 하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터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더욱 노력하고, 꾸준히 그분의 숨결 안에서 모두 통 아줌마, 통 아저씨로 살 때, 우리는 예레미야와 바울에게 넣어주셨던, 그래서 그들의 삶이 다시 하늘을 품은 삶이 될 수 밖에 없게 했던 그 성령이, 나와 내 이웃, 세상을 변화시켜버렸던, 조용한 혁명 아닌 혁명을 이루게 하셨던 그 성령으로, 오늘 바로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을 살아있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