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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마힐로는 내설악 수렴동계곡을 걸었습니다.
계곡의 들머리에 백담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담사는 64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이지만 역사의 나이테가 켜켜히 쌓인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아닙니다.
너른 평지에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칠성각과 선원, 요사채, 관음전 그리고
만해기념관까지 두루 배치됐지만 사찰엔 연륜의 흔적이 묻어있지 않고 오랜 풍상(風霜)을
함께 겪은 잎이 무성한 아람드리 나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습니다. 무려 일곱번이나 화마(火魔)가 절을 집어삼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계사(寒溪寺)로 시작한 절은 비금사(琵琴寺), 운흥사(雲興寺), 심원사(尋原寺), 선구사(旋龜寺),
영축사(靈蓄寺), 백담사(百潭寺)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왠지 새 절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입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대청봉에서 시작한 계류가 백개의 담(작은연못)을
만들었다고 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이 절이 유명해진 것은 만해(卍海)한용운과 일해(日海) 전두환 전대통령 때문입니다.
만해는 일본경찰에 피해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유신론'과 '님의 침묵'을 집필했습니다.
하지만 절의 운명을 바꾼것은 전두환 입니다.
전두환은 퇴임후 망명과 낙향을 두고 고민하다가 1988년 11월 당시 조계종 서의현 총무원장의
주선으로 이곳으로 유배돼 이순자 여사와 769일을 머물렀습니다.
전두환은 그 이전까지 백담사라는 절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때 이후로 백담사를 알게됐을 겁니다.
<1988년 11월 백담사에 도착한 50대의 전두환과 이순자 내외>
집권 7년만에 권좌에서 내려온 전두환은 믿었던 노태우 대통령으로 부터 부정축재로 목이 조여오자 스스로
유배지로 택한 곳이 백담사 두평짜리 방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인생역정입니다.
그해 겨울 구둘장조차 내려앉고 문풍지에서 칼바람이 들어오는 비좁은 방에서 부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전두환은 겨울을 지낸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70일 가량 지나자 우리 내외를 괴롭히던 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마음이 평온해 졌다.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내얼굴이 맑아지고 빛이 난나고 했다"며
자신의 회고록에 썼습니다.
이순자 여사의 멘트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듯 합니다, "매일 기도를 하면서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덜어내기 위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전두환에 대한 공과(功過)를 떠나 현실 적응력이 남다르고 아주 둔감하거나 담대한 성격을 말해줍니다.
부부는 백담사에서 생활하면서 가끔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던 수렴동계곡을 걸었을 겁니다.
임기가 끝난뒤 역시 뇌물수수와 내란음모죄로 역사의 심판을 받고 죄값을 치렀던 오랜 친구 노태우 전태통령이
병석에 누워있는것과 달리 전두환은 8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건강합니다.
한여름 불볕더위에도 여전히 백담사를 찾는 사람은 많습니다.
왕복 5천원인 용대리~백담사간 마을버스는 쉴새없이 사람들을 실어나릅니다.
만해와 일해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절과 봉정암으로 올라가는 매혹적인 계곡은
누구나 꼭 한번 이상은 반드시 가볼만한 설악의 '명소'가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