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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맥주 판매를 허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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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판매부수가 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잡지이자 세계 최고의 영향력(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을 자랑하는 잡지인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맥주는 북한산 맥주보다 맛이 없다고 보도했단다.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한 대로 북한산 대동강맥주가 국내산의 어떤 맥주보다 맛이 좋다. 아니 더 좋다고 체험으로 느꼈다. 이건 개인의 기호나 습관과도 관련된 것이어서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얘기하긴 어렵지만 대체로 그런 것 같다. 요즘 시중에 널리 판매되고 있는 독일이나 아일랜드 등 유럽산 맥주들 맛을 가끔 보면, 확실히 국내산 맥주 맛엔 문제가 있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 유럽산이 좀 비싸긴 하지만 맛이 탁월하다. 이것 역시 뭐라 단정적으로 얘기하긴 어렵겠다. 그래도 나는 한국산 맥주가 더 좋더라, 하는 사람들이 있겠기에. 객관적 기준이 있거나 옳다 그르다로 가를 수 있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니까.
좌우간, 지난해 상반기까진가 지지난해 상반기까진가, 북한산 대동강맥주를 서울에서도 마실 수 있었다. 한강변 자유로 끝에 있는 임진각에 가면 그곳 가게에서, 좀 비싸긴 했지만, 대동강 병맥주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동작구 이수동 쪽에도 대동강 맥주를 파는 가게가 있다고 했다. 우연히 대동강맥주를 마셔본 뒤 가끔 자유로를 달려 임진각으로 갔다. 겸사겸사해서 갔지만 분명 대동강맥주 구입도 주요 목적 중의 하나였다. 마실 때마다 느낀 건데, 확실히 맛이 좋았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북한산 맥주가 더 맛이 좋다니!
중국산 맥주 칭따오가 독일쪽 제조설비와 기술로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아마도 대동강맥주 역시 유럽쪽과의 기술제휴, 유럽산 원료로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마셔 보면 알겠지만, 칭따오 맛이 한국산 맥주보다 낫다. 그런데 대동강맥주는 칭따오와 비교해도 맛이 더 우수했다. 병 모양과 포장 디자인 수준은 좀 떨어졌지만.
한국산 맥주와 일본산 맥주를 비교하면, 가격 차이는 엄청 큰데 맛 차이는 의외로 크지 않았다. 한국산 맥주는 일본산 맥주와 비슷한 맛이랄까. 그래서 이건 필시 맥주 제조방식이나 사용 원료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산 맥주는 일본산과 제조방식이나 원료가 같을 것이다, 라는 추측도 해봤다. 아사히나 기린, 산토리 맥주의 국내 수입가는 국내산 맥주의 2배가 넘는 것 같다. 기린과 아사히,산토리 맥주 가격은 유럽산 수입맥주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하지만 국내산 맥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일본산 맥주는 적어도 맛에서는 특별한 차별성도 없으면서 값은 엄청 비싸다는 느낌을 준다. 미국산 맥주는 가격대가 다양하지만, 적어도 내 체험으로는 맛에서 별 차별성이 없다. 한마디로 별로 맛이 없다. 차라리 그 중간 가격인 중국산 칭따오가 훨씬 낫다. 이 역시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지라,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좌우간, 적어도 내 개인적으론, 국내산 맥주보다 북한산 대동강 맥주가 훨씬 더 맛이 좋았다. 어떤 정치적 편견이나 선입견 같은 것이 맛의 감별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지레 짐작하는 분들도 있을지 몰라 미리 얘기해 두지만, 나는 북과 북쪽 사람들에게 동정적이긴 해도 북체제를 좋아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아주 문제가 많은, 실패한 체제로 인식한다. 특히 먹고 마시고 사는 의식주 관련 제품은 더더욱.
그건 그렇고, 그런데 지금은 시중에서 대동강 맥주를 살 수 없다.
어느때부터 임진각 가게 주인은 대동강맥주를 팔 수 없다고 했다. 왜냐? 갖고 있는 물량, 말하자면 재고가 바닥났다는 것이다. 그런대로 잘 팔린다면, 재고는 채워 넣으면 될 것 아닌가? 그게 그렇지 않다, 현 정부 들어서고 나서 북한산 수입 통로가 점점 좁아지더니 천안함 사태 나고 나서는 아예 딱 끊겼다, 그 동안엔 그래도 미리 입수해 놓은 재고품을 팔아 왔는데, 이젠 그것마저 다 떨어졌다, 새로 수입할 길도 없다.
아니, 맥주도 막아?
알고 보니, 맥주만 그런 게 아니라 모조리 다 막아버렸다.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음식은 화끈하고 괜찮은데 맥주는 따분하다, 신통찮다는 평가를 내렸단다.
왜 그런가? <이코노미스트>가 들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듯하다. 하나는 카스와 하이트 양대 브랜드 독과점으로 중소 업체들 진입이 어려워 맛 경쟁을 할 필요가 없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맥주를 좀 더 맛있게 하려면 원료인 보리누룩을 많이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양대 업체가 가격담합만 하면 사실상 경쟁자가 없으니 비싼 보리누룩 원료를 많이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대신 값싼 쌀이나 옥수수 원료를 쓰는 맥주도 있다고 했다.
또 한 가지는, 북한산 대동강맥주와 비교하면서 든 것인데, 대동강맥주는 영국에서 수입한 장비로 제조돼 훨씬 더 맛이 좋다는 것이다. 이건 의외다. 독일산 장비가 아니라 영국산 장비라니. 어쨌든 북한산 맥주가 유럽쪽 장비와 기술로 만드는 건 맞는 모양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영국산 장비를 강조한 데는 영국 애국주의 내지 내셔널리즘도 얼마간 작용했을까. 장비가 영국산이라 맛이 더 좋다는 건 좀 억지 아닌가? 장비만 좋으면 더 좋은 맛이 나나? 독일산 맥주가 맛 좋은 것도 장비가 좋아서 그런감?
영국 맥주 맛을 본 적이 있지만 인상에 팍 남을 정도로 맛이 좋다는 느낌은 없었다. 많고도 많은 영국 맥주 중에 몇 가지만 맛보고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결론은 보류했다. 템즈 강가 맥주집에 가 볼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마신 맥주는 펍에서 마신 맥주와는 달랐다. 상당히 괜찮았다. 더 다양한 맛을 아일랜드산 맥주 쪽에서 경험했는데(아일랜드엔 가본 적 없다. 국내 가게에서 파는 맥주들 얘기다), 그 중에는 기가 막히게 맛이 좋은 것도 있고, 비싸지만 우리, 아니 내 입맛에는 영 맞지 않는 맥주도 있었다.
<이코노미스트> 보도가 나가자, 한국 맥주업계가 발끈하며 반박하고 나섰다. 맥주의 특성이 다를 뿐 질적인 수준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보리누룩을 적게 쓴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어느 업계 관계자는 “과거 하이트맥주의 전신인 조선맥주의 ‘크라운’은 쓴맛이 강한 유럽식 맥주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지 못했다”며 “이후 미국식 맥주 스타일의 부드럽고 깔끔한 ‘하이트’를 출시해 히트를 쳤다”고 했다. 문제는 한국 맥주당들의 취향에 맞추느냐 아니냐는 것이지, 품질 차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크라운이 유럽식 맥주의 쓴맛 때문에 실패했다는 주장이 다 맞는 얘기도 아닌 것 같다. 아일랜드산 기네스 같은 건 쓴맛이 강하지만 유럽 맥주가 모조리 쓴맛을 내는 건 아니며, 미국 맥주 스타일의 하이트가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하이트가 유럽 맥주보다 품질이 뛰어나거나 한국인들 맥주 취향이 유럽쪽보다 미국쪽이라는 결론이 자동 성립되는 것 또한 아니다. 미국 맥주 별로던데. 한국 맥주당들에겐 하이트가 크라운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그것이 하이트의 절대우위를 입증하는 건 아니다. 쓰지 않으면서도 하이트보다 맛 좋은 유럽산 맥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맥주가 세계 각국의 기후적 특성, 소비자들의 선호도 따라 고유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그 관계자의 말은 맞지만, 그렇다고 맥주들은 특징이 다를 뿐 품질 차이는 없다는 얘기가 참일 순 없다. 맥주들 사이엔 분명 품질 차이가 있어 보인다.
맥주는 대맥(보리, 호프)을 발아시킨 맥아(이걸 보리누룩이라고 하나보다)를 맥주효모로 발효시킨 알콜 음료인데, 어디 자료를 보니 지금 세계 맥주의 대세는 라거(Lager), 그 중에서도 체코 필젠(Pilsen) 지방에서 시작된 필스너 스타일이란다. 라거는 낮은 온도(섭씨 10도 이하)에서 비교적 오랜 기간 숙성시킨 것인데, 19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세기 라거 유행이 시작되기 전에는 맥아를 상온(섭씨 20도 전후)에서 단기간에 발효시킨 에일(Ale)이 주류였단다. 에일은, 발효단계 마지막에 효모가 바닥에 가라앉는 라거와는 달리, 효모가 표면에 뜬다. 그래서 제조방식에 붙은 이름이 다르다. 효모가 바닥에 가라앉는 라거는 하면발효, 표면에 뜨는 에일은 상면발효. 지금 세계에서 제조되고 있는 맥주 대부분이 필스너 스타일이란다. 우리도 일본도 필스너 스타일? 옥토버페스트라는 서울의 독일식 맥주가게에 가서 마셔 본 독일맥주 바이스나 필스너는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그런데 왜 한국산, 일본산 맥주 맛은 그 모양이지? 이건 그저 개인 기호나 입맛 차이 때문인가?
어쨌든 대동강맥주가 한국산 맥주보다 맛이 좋다는 내 오랜 생각이 그다지 잘못되진 않았다는 게 <이코노미스트> 기사로 검증받은 것 같아 개운하다. 아니 개운하지 않다. 외국인들이 봐도 한국산 맥주 맛이 북한산 맥주보다 못하다니, 기분이 개운할 리 있나. 더더욱 기분 꿀꿀하게 만드는 것은, 남북간에 맥주조차 거래할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현실,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는 답답한 정치적 상상력, 그런 빈곤한 상상력 비판을 '종북'따위의 허사로 위험시하기까지 하는 꾀죄죄한 하찔(下質)의 정치인들 행태다. 그런 그들이 맛없는 맥주를 마셔야 하는 건 자업자득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왜 다른 사람들까지 맛 없는 맥주를 마시게 하나. 아니, 정작 그들은 독일맥주 마실지도 모르지.
대동강맥주 판매를 허하라!
남북간 교류 물꼬를 터는데도 그만이고, 맛 없는 국내산 맥주 질을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지 않은가. 이대로 가다가는 필시 지금 마구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유럽산 맥주들에게 국내 맥주시장마저 넘겨줘야 할 날이 올 것이라는 걱정을 아니 할 수 없다. 대형 마트나 편의점들에선 요즘 유럽산 맥주들 바겐세일을 하고 있다. 일정기간 30~40% 이상 값을 깎아 파는 행사다. 그리고는 곧 정상가로 돌아가는데, 싼 값에 유럽산 맥주 마셔본 국내 맥주당들 입맛이 유럽산에 한 번 물들면 사태는 되돌이키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코노미스트>뿐만 아니라 국내에 들어온 일본인, 미국인, 캐나다인들한테 물어봐도 한결같이 “한국 맥주 맛 없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 맥주회사들, 어차피 지금같은 태평성대의 독과점 지위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다시 한번,
대동강맥주 판매를 허하라!
남북은 힘 겨루기, 무기 경쟁 하지말고 차라리 맥주 경쟁, 아니 맥주 전쟁이라도 벌여라!
내 평소 음주량은 형편 없다. 가계 전체가 유전자상으로 알콜성분 분해능력에 결함이 있다. 이런저런 맥주 맛을 본 건 상당부분 가게 진열장들에 알록달록 늘어서 있는 수많은 맥주들을 보고 동한 호기심 때문이다. 홀짝거린 정도다. 따라서 이건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가 체험한, 소박하기 짝이없는 맥주 맛 감별기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