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교지나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과 숨결이 느껴져 후손을 자랑스럽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폐부를 찌르는 깊은 신음과 함께 서려 있기도 하다.
해미 성지는 다른 어떤 순교지보다도 당시 참혹했던 핍박의 흔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백 년의 박해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그 서슬이 무뎌지지 않았던 해미는 수천 명의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웅덩이와 구덩이로 내몰린 채 생매장당한 기막힌 사연을 갖고 있다.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처소를 둔 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반 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던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할 때뿐만 아니라 해미 진영은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이 박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에 있었던 두 채의 큰 감옥은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어 갔다. 또 더욱 잔인하게 돌다리 위에서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돌에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기도 했고, 여러 명을 눕혀 두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견하면 횃불로 눈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쟁이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 한다.
한 명씩 처형하는 데 지친 관헌은, 특히 1866년 병인년에서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시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수십 명씩 끌고 가 아무 데나 땅을 파고 구덩이에 산 채로 집어넣고 흙과 자갈로 덮어 버리는 참혹한 행위가 수없이 되풀이 됐다.
이렇게 스러져 간 순교자들은 그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이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고 있으나 그나마도 불확실하고 나머지는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한 무명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숨져 간 유적지는 현재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교우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의 입을 통해 '여숫골'이라는 이름으로 전해 오는 생매장 터인 진둠벙 주위로 십자가의 길 14처와 노천 성당이 조성되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 읍성(사적 제116호)에는 동헌과 교우들이 갇혔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였던 호야나무(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무심히 남아 있다. 이 나무 위에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1956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 보존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에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1월 8일 해미 생매장 순교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서문 밖 순교지에는 현재 자리개 돌다리 모조품과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우뚝 서 있다.
1935년에는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 순교 터인 생매장 순교지의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다.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외길이지만 압송로 표지 리본이 눈에 잘 띄게 달려 있어 별 어려움 없이 순례할 수 있다.
해미 성지는 3000여 명의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새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소성당과 대성당은 무명 순교자들의 생매장 구덩이를 상징하는 원형구조로 건립되었고, 실내 장식과 외부 건물 또한 죽음을 통해 영원한 안식에 이른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쉼터의 이미지를 갖도록 했다. 성당 뒤편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하였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우선 순교자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순교한 뒤 매장되는 과정을 복원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읍성 곳곳에 세웠다. 이어서 성지 인근의 사유지를 매입해 순례자의 숲, 연못, 청소년 수련관 등을 세우고 성지 주변 해미천도 순차적으로 정비할 계획이다.
해미 성지는 교통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시원스레 뚫려 있어 다소 거리는 멀지만 당일이나 1박 2일로 순례하기는 안성맞춤이다. 인근에는 수덕사로 유명한 덕산 도립공원과 가야산, 덕산 온천, 태안 해안 국립공원 그리고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볼 수 있는 안면도 등이 자리하고 있어 주말 가족 순례 코스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황새바위와 해미 생매장지 - 남형으로 숨져 간 순교자들의 넋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이들의 순교 터가 되어 온 곳은 공주와 해미, 그리고 홍주였다. 이 중에서 해미는 병마절도사의 읍성이 있는데다가 내포 지역과 가까웠으므로 1799년에 인언민(마르티노)과 박취득(라우렌시오)이 순교한 이래 박해가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특히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3구)는 1817년에 해미 포졸들이 몰려와 신자들을 해미로 끌고 가서 처형한 애환을 담고 있는 교우촌이다. 또 그 이웃에 있는 '용머리'(현 삽교읍 용동리의 주래)는 인언민의 생매장지로, 1991년 이래 삽교 본당 신자들이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조성한 사적지가 있다.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주 감영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다른 어디보다도 많았다. 지금의 공주시 반죽동 사대부고 자리에 봉황산을 뒤로하고 감영(監營)이 있었는데, 순교자들의 처형은 이곳이 아니라 교동에 있는 금강변의 '황새바위'(옛 공주 형무소 자리, 일명 항쇠(項鎖)바위)에서 행해졌다. 또 영장이 주재하던 홍주에서는 주로 관아(현 홍성읍 오관리) 인근의 형지나 옥 안에서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에서 순교자들에게 내린 판결은 원칙적으로 정법(正法), 곧 참수형이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교수형을 당해 순교한 경우와 문초를 받다가 장형(杖刑)에 못 이겨 순교한 경우도 많았다. 교수형은 일반적으로 구멍이 있는 큰 돌(일명 형구돌)이나 벽에 뚫은 구멍에 줄을 넣고 순교자의 목을 얽어 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는 방법이 있었고, 한 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할 경우에는 두껍고 큰 널 가운데로 여러 구명을 뚫고 줄을 꿴 다음, 신자들의 목을 구멍에 넣도록 하고 양쪽에서 줄을 당겨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 1866년 11월에 홍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선양(요셉) 등 17명의 교우가 이 형벌로 순교하였다.
한편 홍주와 해미는 공주 감영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한국 행형사(行刑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남형(濫刑)이 자행되었다. 사람의 머리를 쇠도리깨로 치거나 큰 형구돌 위에 머리를 놓고 쳐서 죽이는 자리개질이 있었고, 사람의 머리를 누인 뒤에 대들보 형틀을 내리쳐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해미와 홍주에서 있었던 생매장이었다.
생매장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가해진 특이한 방법으로, 각지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참수하기가 어렵게 되자 지방 관아에서 제멋대로 행한 것이었다. 해미의 경우를 보면, 읍성에서 조금 떨어진 조산리(造山里) 숲 속으로 끌고 가서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산 채로 묻어 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은 훗날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가 진행되었고, 1935년 4월 1일에는 마침내 그 현장이 발굴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병인년 해미에서 있은 대박해의 진상은 벌써 70년이나 되는(1935년 현재) 옛적 일이므로 소년이나 청년 중에는 그런 일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노인 몇 분이 아직 생존하여 보고들은 바를 자세히 말해 주었으므로, 틀림없는 역사를 발견하여 천주의 영광과 치명자의 승리를 전하게 되었다.
노인들의 증거에 따라서 모든 사정을 자세히 조사한 후, 금년(1935년) '조산리'에서 치명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 없이 몇 십 명이 되나, 아직 남아 있어 수습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 된다. 병오년(1906년) 큰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아니하였지만, 증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똑똑히 안 후에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해미 치명자 유해", [경향잡지] 제29권 815호-제30권 822호).
혹독했던 병인박해와 관련된 순교 터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적지로 조성된 곳은 해미로, 대전교구에서는 1975년 10월 24일 이곳에 순교 탑을 건립하였으며, 1983년 12월에는 생매장지를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사적지 조성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1995년 9월에는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되어 있던 생매장 순교자들의 유해를 순교 탑 아래로 옮겨 안치하였다. 다음으로 공주의 황새바위 순교 터는 교동 본당과 중동 본당에서 그 터를 매입한 뒤 1985년 11월 7일에 순교 탑과 기념 경당을 건립하였다. 또 황새바위 순교자 중에서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출신의 배문호(베드로)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였으며, 1990년 겨울에 그 무덤이 확인된 후 지금까지 사적지 조성 사업이 진행되어 오고 있다.
순교자들이 겪은 시련은 혹독하다 못해 처참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천상의 행복과 신앙 후손들에 대한 희망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 "순교자의 피가 또 다른 순교자를 낳고, 그들의 피가 공동체의 모퉁잇돌이 된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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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1737-1800년)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알렉시오)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때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얼마 후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언민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로 인해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 옥에서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고,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전혀 변함이 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언민 마르티노에게 갖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는 거야.”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1773-180년)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황모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약간 고집스러운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에는 어떻게나 난폭하였던지 아무도 그를 억제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20세가 좀 넘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프란치스코의 누이였다.
진리를 깨달은 뒤 얼마 안 되어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소행을 고치고 본성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결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모친의 권유에 순종하기 위하여 결혼을 하였다. 그런 다음 교리를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 황심과 함께 충청도 연산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5년에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셔다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프란치스코의 열심은 날로 증가하였다. 그는 보속과 고행에 열중한 나머지 산중에 들어가 힘들게 생활한 적도 있었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프란치스코는 박해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는 날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그들에게 들려주면서 “신앙을 고백하고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박해가 시작된 지 한두 해가 지난 어느 날,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오래지 아니하여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술을 대접하면서 ‘이것이 마지막 잔치’라고 말하였다. 과연 이틀 후에 포졸들이 연산 땅에 나타났고, 그는 즉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연산 관장은 포졸들에게 끌려온 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교우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도록 하면서 배교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만물의 대군(大君)이신 천주님께 대해 말한 책을 관장에게 맡길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화가 난 관장은 포졸들로 하여금 그에게 혹독한 매질을 하도록 한 다음 옥에 가두었다.
얼마 후 프란치스코는 충청 감사의 명에 따라 그의 고향 덕산을 관할하는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형벌 가운데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들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님께 있으니, 어찌 그분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절 이상이나 프란치스코는 갖은 고문을 당하였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옥으로 끌려간 뒤에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함께 갇힌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해미 관장은 할 수 없이 감사에게 프란치스코의 처분을 문의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아무것도 자백하지 않으면 매를 쳐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고, 이에 따라 그는 다시 한 번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관장이 사형 선고문을 내밀자, 기쁜 표정으로 거기에 서명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며칠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는데, 그토록 많은 형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으며, 이를 직접 목격한 비신자들 여러 명이 입교하였다고 한다.
김진후(金震厚) 비오(1738-1814년)
충청도의 내포 평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면천의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난 김진후 비오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비오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비오의 나이는 50세가량 되었었다.
그러나 김진후 비오는 처음부터 천주교 교리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세상의 권세와 쾌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은총의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없었다. 특히 그는 감사 밑에서 작은 관직 하나를 얻게 되자, 자식들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이후에도 비오의 자식들은 부친을 개종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점차 예수 그리스도께 기울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관직을 버리고 비신자 친구들과의 관계도 끊어버리게 되었다. 이후 그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감으로써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비오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처음으로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그는 이후에도 네다섯 차례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곤 하였다. 또 1801년의 신유박해 때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후 해배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진후 비오는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비오는 사형 판결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지내야만 하였다. 그 동안 그는 점잖고 품위 있는 성격으로 인해 해미의 관리와 옥리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게 되었고, 드러내놓고 신자의 본분을 지킬 수도 있었다.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비오는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이미 그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무리 신앙으로 인한 인내심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디기 어려운 나이였다.
이때 비오가 병으로 죽었는지, 굶주림이나 또 다른 고통으로 인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생전에 받은 박해와 옥중에서의 신앙생활 때문에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올 뿐이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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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서산행(10분 간격, 1시간 40분 소요)을 타거나 대전 동부 터미널에서 서산행(20분 간격, 2시간 30분 소요)을 탑니다. 서산 공용버스 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시외버스를 이용(10-15분 간격 운행, 15-20분 소요)하여 해미순교성지에서 하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