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혈죽가」 소고
신 웅 순(중부대)
<국문초록>
「혈죽가」가 현대 시조 효시로 보는 견해가 있다. 견해는 상당하는 논증이 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정설처럼 굳어지면 시조의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는 2006년에「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고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 행사를 치루었다. 이 작품이 현대시조의 효시로 볼 수 없다면 공식 행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천여년의 시조 전통에 하나의 오점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혈죽가」가 현대시조의 효시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한 논문이다. 이를 증명하는 데에 본고의 목적이 있다.
현대 시조의 효시가 되려면 현대시조의 특성이 얼마간이라도 검출되어야하는데「혈죽가」는 이에서 거리가 멀다.
「혈죽가」는 개화기 시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작품이 현대 시조의 효시라면 고시조, 개화기 시조, 현대 시조의 특징 중 어느 쪽에 위치해 있는가를 검토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이의 부합 정도를 종장 셋째 음보의 주제어로의 끝맺음, 종장 넷째 음보의 제거,초․중․종장의 행배열이 없는 한 줄 글, 「혈죽가」제목의 ‘ ∼歌’, 한자 투어와 고투어, 연작 시조, ‘위국충절’ 노래, 제목의 유무, 작가의 실명 유무, 인쇄 매체의 유무, 고어표기 등 11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았다.
11개 항 중 7개 항은 현대시조의 특징이 검출되지 않았다. 나머지 4개항은 고시조, 현대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징으로, 그 4개 항 중 2개항은 개화기 시조, 현대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는 특징으로 검출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혈죽가」는 현대 시조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혈죽가」는 고시조와 더 가깝게 위치해있다고 보아야 한다.
현대시조는 내용면에서 적어도 보편적 질서를 통한 개인적 질서의 획득, 개인적 질서를 통한 보편적 질서가 구현되어져야 한다.「혈죽가」는 형식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현대적인 특징을 찾을 수가 없다. 현대시조의 효시 작품은 「혈죽가」이후나 1920년대 들어와서야 찾아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증명되지도 않고 일반화되어 있지도 않은 작품을 기준으로 기념 행사를 치룬다는 것은 시조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시조의 출발점은 학계에서나 시조계에서 충분한 토론을 거쳐 일반화 되었을 때 비로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사료된다.
핵심어 : 혈죽가, 현대시조의 효시, 한국시조시인협회, 위국충절, 한자투어,고투어,위국충절
Ⅰ. 서론
「혈죽가」가 현대 시조 효시로 보는 견해가 있다. 견해는 상당하는 논증이 있을 때 비로소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정설처럼 굳어지면 시조의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는 2006년에「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고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 행사를 치루었다. 이 작품이 현대시조의 효시로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기념 행사는 의미가 없으며 시조의 전통에 하나의 오점을 남길 수 있다.
「혈죽가」가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는 견해는 ‘최초로 활자화한 시조’, ‘저자가 분명한 점’, ‘읽고 즐기기 위해 쓴 작품‘ 등이 그 근거였다.1)
이에 원용우는 사실과 다르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필사본이라 해도 내용과 형식이 새로우면 현대 시조로 봐야한다는 점, 「혈죽가」의 저자가 분명치도 않고 고시조의 저자도 뚜렸한 것이 많다는 점, 읽기 위해 쓴 작품이 아니라 고시조처럼 창(唱)으로 노래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2)
「혈죽가」를 현대시조의 효시로 본다는 것은 많은 무리가 따른다. 현대 시조의 효시가 되려면 현대시조의 특성이 얼마간이라도 검출되어야하는데 「혈죽가」는 이에서 거리가 멀다. 오히려 현대시조보다 고시조 쪽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다.
이를 증명하는 데에 본고의 목적이 있다.
「혈죽가」를 초기 개화기 시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작품이 고시조, 개화기 시조, 현대 시조의 특징 중 어느 쪽에 기울어졌는지 검토해보면 현대시조의 효시 여부가 드러날 것이다.
Ⅱ. 「혈죽가」와 고시조, 현대시조와의 접점
개화기 시조는 형식면에서 내용면에서 고시조와 비교하여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 『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대한민보』,『대학유학생회보』,『태극학보』,『대한학회월보』등에 실린 시조를 비롯하여『소년』,『청춘』,『매일신보』등에 실린 최남선과 이광수의 초기시조까지를 말한다.
개화기 시조의 첫작품으로 1906년 7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의 「혈죽가」와 1907년 3월 3일 『대학유학생회보』에 실린 최남선의 「국풍4수」를 들 수 있다.3)
「혈죽가」를 개화기 시조의 첫작품으로 들고 있다. 이 작품이 현대시조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가.
원문은 다음과 같다.
협실의소슨는츙졍공혈젹이라우로을불식고방즁의풀은슨지금의위국츙심을진각세계
츙졍의구든졀피을가도여누샹의홀노소사만민을경동키인이비여잡쵸키로독야청청
츙졍공고든절포은선셩우희로다셕교에소슨도션쥭이라유젼커든허물며방즁에야일너무삼4)
첫째, 「혈죽가」는 종장의 넷째 음보가 생략되어 있다.
종장 넷째 음보의 생략은 시조창과 관련이 있다. 개화기 시조에서 현대시조로 넘어오면서 넷째 음보의 생략은 사라졌다.5) 이는 음악과 문학이 하나였던 시조가 현대시조에 와 하나는 시조문학으로 다른 하나는 시조음악으로 분화되었음을 말해준다. 넷째 음보의 생략 여부는 고시조, 개화기 시조와 현대시조를 구분해주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혈죽가」는 현대시조보다는 고시조 쪽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다.
★는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둘째, 종장의 셋째 음보가 주제어로 끝맺고 있다.
개화기 시조에 있어서 종장 셋째 음보가 주제어로 끝맺고 있음은 시대적인 교술 기능과 관련이 있다. 언급한 시조창의 허사인 종장 끝음보의 생략에다 주제어인 시대적인 교술 기능을 첨가시켰다. 개화기 시조는 고시조 시조창을 이어 받으면서 또 하나의 교술 기능을 개발해냈다.
三千里도라보니.天府金탕이 아닌가
片片玉土우리江山,어이차고둘손가
아리二千萬衆다죽어도,이疆土를
-「自强力」『대한매일신보』1908년 11월6)
學徒야 學徒들아,學徒責任 무엇인고
日語算術 안다고,卒業生을 自處마쇼
진실노,學徒의 뎌 責任은,愛國思想
-『申報』1908년 12월 9일7)
같은 연도에 발표된 위 시조들은 분장되어 있고 구두점이 찍혀있다. 분장 형식은 달라도 줄글로 된 「혈죽가」와 같이 넷째 음보가 생략되어 있고 셋째 음보가 주제어로 끝맺고 있다.
아래 시조는 1910년 대와 1920년 대의『신한민보』에 발표된 시조이다.
탁목됴야 어리셕다 쇽빈 고목 지마라.
그쇽에다 네집두고 기로만 일삼나뇨.
하로밤에 급한풍우 나려치면 너는 어이.
-「탁목됴」『신한민보』1917년 6월 14일8)
하눌이 쳥명하다고
달님도 밝으옵시고
바람이 잔잔하오
물결도 자옵는대요
님각 지친 몸 되니
맘 둘곳 혼자 업서라
-「시됴 한 수」『신한민보』1926년 11월 4일9)
1920년대에 와서는 종장 셋째 음보의 주제어가 사라졌고 넷째 음절의 생략도 사라졌다. 분장, 분구에 구두점까지 찍혀있다. 이는 장뿐만이 아닌 구 개념까지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20년대에 와서야 주제어와 넷째 음절의 생략이 사라져「혈죽가」의 형식과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혈죽가」는 셋째 음보가 ‘진각세계’, ‘독야청청’과 같은 주제어로 끝맺고 있고 넷째 음보가 생략되어 있다.
이와 같이「혈죽가」는 고시조와는 다른 개화기 시조의 초기 형태로 현대시조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는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셋째, 「혈죽가」는 초․중․종 행배열이 없고 한 줄 글로 되어 있다. 분장, 분구도 되어있지 않다. 줄글은 고시조에서 나타나고 있고 분장 분구는 현대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다. 개화기 시조에는 줄글로 되어 있는 것이 있고 분장, 분구 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三冬에뵈옷입고 암혈에눈비마자 구름볏뉘도젹이업것마는 西山에 해지다하니눈물겨워하노 라
-한화진 편,『증보가곡원류』(종로인문사,1943).25쪽.
三冬의뵈옷닙고巖穴의눈비마구름볏뉘도적은업것마西山의해지다니눈물계워노라
-이한진 편저,『청구영언』(한국어문학회,1961).2쪽
위와 같이 가곡원류, 청구영언 등은 한 줄 글로 되어있다. 개화기에 와서야 한 줄 글이, 언급한 「탁목됴」,「시됴 한 수」와 같이 분장, 분구된 시조로 바뀌었다. 그러나「혈죽가」는 여전히 한줄 글로 되어 있어 고시조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시조를 초․중․종 세줄로 적고 초장의 둘째 음보 다음에 마침표를 찍고 중장의 둘째 음보 다음에는 쉼표를 찍고 종장에서는 첫음보 다음, 둘째 음보 다음에 쉼표를 찍었다. 이런 현상들이『대한 매일신보』10) 1908년 11월 29일부터 1909년 2월 23일까지 발표된 시조에서 나타나고 있다.
초장 ― ― .― ―
중장 ― ― , ― ―
종장 ―, ― , ― ―
그리고 1909년 3월10일부터 1910년 8월 17일까지는 각 장 끝에 마침표를 찍고 초․중장 둘째 음절 다음에 쉼표를 찍고 종장에는 첫째 음절과 둘째 음절 다음에 쉼표를 찍었다.
초장 ― ― , ― ―.
중장 ― ― , ― ―.
종장 ―, ― , ― ―.
율격의 짜임새를 명확히 인식했다는 증거이다.11)
이는 시조의 율격 인식과 더불어 가곡과의 관련을 생각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가곡은 5장으로 부르고 시조창은 3장으로 부른다. 가곡은 시조시를 노랫말로 해서 부르는데 초장의 첫째 음보와 둘째 음보를 1장으로 셋째, 넷째 음보를 2장으로 중장을 3장으로 종장의 첫째 음보를 4장으로 둘째, 셋째, 넷째 음보를 5장으로 부른다. 창의 잔재가 남아있는 읽는 시조로만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자료들이다.
초장 ― ―(1장) ― ―(2장)
중장 ― ― ― ―(3장)
종장 ―(4장) ― ― ―(5장)
초장의 첫째 음보, 둘째 음보 다음에 마침표나 쉼표를, 종장 첫째 음보 다음에 쉼표를 찍은 것은 가곡에서 1장, 4장으로 부른 것과 관련이 있다. 개화기 시조의 음악과의 연관성은 잡지류의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작품에다 창조명을 밝히고 있는 작품들도 있다.12)
「혈죽가」의 발표 일자는 1906년 7월 21일이다. 구두점은 「혈죽가」이후의 작품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한 매일신보』에서는 「혈죽가」이후에서야 초․중․종의 행배열이 이루어지고 있다.「혈죽가」는 이러한 율격 인식도 없이 고시조의 줄글 특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한 줄 글로 분장, 분구도 되지 않은 개화기 시조의 초기 작품으로 고시조에 더 가깝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넷째, 「혈죽가」제목에 ‘ ∼歌’가 붙어있다.
고시조에 보이는 제목들은 「~歌」「~曲」「~謠」등의 일정한 틀 안에 놓인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훈민가니 강호가니 하는 노래의 종류에 따른 분류 항목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하는 것이 고시조의 제목이다.13)
「혈죽가」에도 고시조에서 보이는 제목처럼 ‘ ∼歌’가 붙어있다. 『대한매일신보』 「혈죽가」 이후 발표된 343 수 중 ‘ ∼歌’,‘ ∼吟’,‘ ∼曲’ 같은 제목들이 보이는데14) 이것은 고시조의 틀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자료들이다.
고시조 쪽이나 초기 개화기시조 쪽에 놓을 수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다섯째, 전체가 한자 투어로 되어 있고 종장 첫음보가 고투어로 되어 있다.
둘째․셋째수의 세째 음보의 ‘위국충심’, ‘진각세계’,‘독야청청’과 같은 한자 투어와 첫째․셋째수의 종장 첫째 음보의 ‘지금의’,‘하물며’ 같은 고투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고시조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원용우는 한자투어나 고사성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자투어나 고사성어를 썼으면 고시조이다. 현대시조는 의도적으로 순수 우리말을 갈고 닦아 서 쓴다. 김동준도 위의 인용문에서 투어난조를 지양하고, 고사나 인명 인용을 하면 고시조에 가 깝다고 하였다. 위의 작품에서 <爲國忠心>, <盡覺世界>, <獨也靑靑> 등은 한자숙어이다. 이런 모습은 고시조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지만 현대시조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15)
임종찬은 최남선의 시조를 언급하면서 최남선 시조의 고투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장 첫 음보에 쓰인 투어문제이다. 고시조에서 빈출도가 높은 어즈버, 두어라, 아희야, 아마 도, 우리도 등의 투어는 보이지 앉지만, 엇더타, 행여나, 아모리, 잇다감, 누구서, 매양에, 다시금, 차라로 등은 비교적 고시조에 자주 나오는 투어는 그대로 쓰고 있다.16)
「혈죽가」의 한자투어나 고투어는 아직도 고시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개화기 시조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여섯째, 「혈죽가」는 연작 시조로 되어 있다.
고시조에도 연작 시조가 있다. 고시조의 연작 시조는 현대의 연작 시조와는 작법 자체가 다르다. 각 수들이 같은 주제로 연계되지 못하고 서로 독립되어 있는 엄밀히 말해 단시조들의 집합체이다. 현대 시조의 연작 시조는 각 수가 한 주제로 연계되어 시조 전체가 통일된 주제로 한편의 시조가 완성된다.
「혈죽가」는 연작 시조이다. 이는 고시조에서부터 개화기 시조를 거쳐 현대시조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언급한 대로 고시조는 현대 시조의 그것과는 작시법이 다르다. 연작 시조이기는 하나 각 수가 독립된 주제로 되어 있다.
창사 개념에서 문학 개념으로 이동하면서 연작 시조가 빈도있게 지어지고 있다. 이 연작 시조가 육당의 개혁적 형태에서 보이고 있는데 이는 현대의 연작 시조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고 있다.17) 「혈죽가」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혈죽가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18)
협실(夾室)에 솟아난 대나무는 충정공(忠正公)의 혈적(血蹟)이라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방중(房中)에 푸른 뜻은
지금의 위국충심(爲國忠心)을 온 세상이 다 깨닫게 함이다.
충정(忠正)의 굳은 절개(節槪) 피를 맺어 대가 되어
누상(樓上)에 홀로 솟아 만민(萬民)을 경동(驚動)키는
인생에 비겨 잡초(雜草)키로 대나무가 독야청청(獨也靑靑)함 같다.
충정공(忠正公)의 곧은 절개 포은(圃隱) 선생보다 위에 있다.
석교(石橋)에 솟은 대도 선죽(善竹)이라 유전(遺傳)커든
하물며 방중(房中)에 난 대나무야 일러 무엇 (하리오.)
현대시조의 연작 시조는 각각의 단시조들이 하나의 주제로 통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실현되지 못하면 현대의 연작시조라고 보기 어렵다. 위 작품은 현대시조처럼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어 있지 못하다.
주제가 첫수는 위국충심, 둘째 수는 독야청청 그리고 셋째수에는 절개이다. 각 수들이 비슷한 주제로 연계되어 있지 각 수들의 이미지가 하나의 주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지 않다.
고시조의 연작과 현대 시조 연작의 중간 지점의 위치에 놓인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일곱째, 「혈죽가」는 ‘위국충절’을 노래하고 있다.
개화기 시조는 현실에 직접 참여하여 민족적인 울분을 담아내는 저항문학이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한 개화 의지를 구현키 위해 계몽의 기능을 담당했다.19) 우국․저항․개화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들은 내면적 필요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외부적인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창작된 것들이다. 이렇게 개화기 시조의 주제는 시대 정신을 직설적으로 반영하고 있어 시조의 본령인 서정적 표현과는 거리가 멀다.
「혈죽가」도 이와 거리가 먼 당시의 시대 정신을 담아내고 있어 이 역시 개화기 시조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개화기 시조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여덟째, 「혈죽가」에는 제목이 있다.
고시조와 개화기 시조의 다른 점은 제목의 유무이다. 고시조는 소수를20) 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시조 제목이 없고 본문만 있다. 그러나 개화기 시조는 시조마다 제목이 붙어있다. 제목의 유무는 고시조와 개화기, 현대시조를 구분해주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혈죽가」는 고시조와는 구별된다.
제목이 있다 해서 현대 시조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고려해보아야 한다. 개화기 시조와 현대 시조는 전부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러나 「혈죽가」에는 ‘ ∼歌’가 붙어 있어 현대시조의 제목과는 다른 고시조와 같은 제목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대시조에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근거이다.
개화기 시조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아홉째, 「혈죽가」에는 작가가 명기(?)되어 있다.
고시조와 개화기 시조는 작가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현대시조에는 반드시 작가가 명기 되어있다. 그러나 작가의 유무가 고시조와 개화기 시조, 현대시조를 구분해주는 키가 될 수는 없다. 고시조에도 작가가 명기되어 있는 것이 많고 무명씨인 것도 많다. 더구나 「혈죽가」의 작가 ‘대구여사’는 본명은 아니다. 자신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투명하지 않은 실명이다.
작자가 분명히 밝혀졌으면 현대시조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긴데, 이것도 기준이 될 수 없는 것 이, 우리 고시조 5천여 편 가운데는 작자가 밝혀진 작품이 상당수 있다. 작자 여부로 현대시조를 확정지으면 고려 말 우탁의 <백발가>나 <탄로가>도 작자가 분명히 밝혀졌으니, 현대시조로 보 아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니 작자가 밝혀진 작품이냐 작자미상 작품이냐 하는 문제는 현대시조로 간주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21)
고시조에도 작가가 명기 되어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작가의 명기 여부가 고시조와 개화기 시조, 현대시조를 실제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요소라고는 볼 수 없다.
개화기 시조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열째,「혈죽가」는 인쇄매체를 통해서 발표된 작품이다. 인쇄 매체를 통해서 나왔으면 현대시조라는 견해에 대해 원용우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폈다.
인쇄매체로 발표 여부, 이 기준은 신문이든 문예지든 인쇄되어 나왔으면 현대시조이고 그렇지 않으면 현대시조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어떤 시인이 작품을 써 서 발표하지 않고, 자기 노트에 차곡차곡 기재해 둔다면 인쇄매체를 통하지 않았으니까 고시조 로 간주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비록 필사본이라 하더라도 1906년 이전에 창작된 것 이 확실하고, 그 작품의 구조와 성격이 현대시조로서의 요건을 갖추었으면 현대시조의 효시작품 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필사본이냐, 인쇄본이냐 하는 문제가 작품의 성격을 규 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 고시조나 고소설의 경우 필사본이라 하더라도 어엿 한 고전작품으로 인정받는데, 왜 현대시조의 경우에만, 필사본이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22)
필사본이라 해도 현대시조의 요건을 갖추고 있으면 현대시조 효시의 작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고시조에는 필사본 만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목판본도 존재하고 그 외 판본들도 존재한다. 필사본이냐 인쇄본이냐가 고시조, 개화기 시조, 현대시조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혈죽가」가 인쇄매체를 통해 발표되었으므로 ‘읽는 문학’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나 이에는 문제의 여지가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혈죽가」는 창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음악에서 벗어나 현대시조처럼 자유롭게 읽히는 문학으로 전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화기 시조의 위치에 놓을 수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열한째, 시어의 표기가 고어로 되어 있다. ‘는, 츙졍공혈젹, 불식고,슨, 위국츙심,졀,,가,누샹,경동키,인이,잡쵸키로,선셩,션쥭,방즁에' 등 전문 대부분이 고어 표기이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1933년에 선포되었다. 고어 ‘ᆞ’는 선포 이후부터 공식 폐지되었다. 고어 ‘ᆞ’의 여부가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형식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2,3십 년 대에 맞춤법의 혼란은 있었을 것이나「혈죽가」가 고어 표기로 되어 있어 현대시조와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위치는 개화기 시조에 놓을 수 있다.
고시조 → 개화기 시조 → 현대시조
★
Ⅲ. 결론
Π 장에서 개화기 시조「혈죽가」가 고시조 현대시조에 어느정도 접근해있는가에 대해 열 한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았다. ○,△,×는 특징의 유무를 말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고시조 | 혈죽가 | 현대시조 | |
| ①종장 셋째 음보의 주제어로의 끝맺음 | × | ○ | × |
| ②종장 넷째 음보의 제거 | ○ | ○ | × |
| ③초․중․종 행배열이 없는 한 줄 글 | ○ | ○ | × |
| ④「혈죽가」제목의 ‘ ∼歌’ | ○ | ○ | × |
| ⑤한자 투어와 고투어 | ○ | ○ | × |
| ⑥연작 시조 | ○ | ○ | ○ |
| ⑦‘위국충절’ 노래 | △ | ○ | × |
| ⑧제목의 유무 | △ | ○ | ○ |
| ⑨작가의 실명 유무 | ○ | ○ | ○ |
| ⑩인쇄 매체의 유무 | △ | ○ | ○ |
| ⑪고어표기 | ○ | ○ | × |
위 표에서 보면 「혈죽가」의 11개의 특징에서 7개 항, ①,②,③,④,⑤,⑦,⑪은 현대시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점에서「혈죽가」가 현대시조의 효시라고 볼 수가 없다.
2개항,⑥,⑨는 고시조, 현대시조에서 다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혈죽가」가 현대시조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해서 현대시조의 효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특징은 고시조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2개항, ⑧과 ⑩은 개화기 시조, 현대시조에서 공히 나타나고 있으나 고시조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지 않다. 이도 「혈죽가」가 현대시조의 효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렇게 본다면 「혈죽가」는 현대 시조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오히려 「혈죽가」는 고시조에 더 가깝게 위치해있다.
현대시조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이의 효시 작품으로「혈죽가」를 선정하는 문제도 자유스럽지 못하다. 필명이 불분명하고 시대와 사상적인 면에서 개화기 시조와 변별력을 찾기 어려운 「혈죽가」를 현대시조로 인정한다는 점도 문제이거니와 고시조와의 완전 한 단절을 의미하는 현대라는 용어를 장르명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 리고 다른 작품의 발견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될 문제이기 때문에 심각성은 더해진다.23)
어떤 작품이 현대시조의 효시가 되려면 일부라도 현대시조와 변별성을 갖고 있으면서 같은 특성을 공유해야하는데「혈죽가」는 그러한 특성들을 찾아낼 수 없다. 일반화를 위한 논의의 계속이 필요한 이유이다.
현대적인 시조가 본격적으로 쓰여진 것은 1920년대 이후부터이다. 이광수․ 주요한․ 변영로․정인보․조운․이은상․이병기 등의 활동 이후로 보아야할 것이다.24) 개화기 시조가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 시조가 논의되고 쓰여진 것은 1920년 이후의 일로 보아야 한다.
현대시조라고 한다면 형식은 차치하더라도 보편적 질서를 통한 개인적 질서의 획득, 개인적 질서를 통한 보편적 질서의 구현이 있어야 한다.「혈죽가」는 이러한 현대적인 특징을 찾기가 어렵다. 다른 작품의 발견 가능성이 없는 한25) 현대시조의 효시 작품은 「혈죽가」이후나 1920년대 들어와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증명되지도 않고 일반화되어 있지도 않은 작품을 기준으로 기념 행사를 치룬다는 것은 시조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시조의 출발점은 학계에서나 시조계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일반화 되었을 때 비로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강명혜,『시조변이양상』,시조학논총 제 24집,2006.
김제현,『시조문학론』,예전사,1992.
김영철,『한국개화기시가의 장르연구』,학문사,1990.
김영철 외, 『한국시가의 재조명』,형설출판사,1984.
백승수,『개화기시조고, 동아어문학회,1992.
이완형,「고시조와 현대시조의 그 이어짐과 벌어짐의 사이」,시조학논총 제 28 집,2008.
이응백 외,『국어국문학자료사전』,한국사전연구사,2002.
임선묵 편,『근대시조편람』,경인문화사,1995.
임종찬,『현대시조론』,국학자료원,1992.
조동일,『한국문학통사 4』.
최동원,『고시조론고』,삼영사,1990.
<Abstract>
Study of 「Hyeoljukga」
Woong-soon Shin
There is a view that regard 「Hyeoljukga」 as the precursor of modern sijo. A view becomes persuasive only when there are proper proofs. If not, it can cause a problem and cause confusion to the identity of sijo when it becomes established as though it is a widely-accepted theory.
Korea Association of Sijo Poets held an event in commemoration of the '100th Anniversary of Modern Sijo' in 2006, officially taking the view that accepts 「Hyeoljukga」 as the precursor of modern sijo. If this poem is not regarded as the precurosr of modern poem, the official event would not have any meaning for it can stain the thousand-year-long tradition of the sijo.
This study suggests the view that this 「Hyeoljukga」 cannot be regarded as the precursor of modern sijo.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prove this point.
To become the precursor of modern poem, the sijo must manifest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sijo even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however,「Hyeoljukga」 does not.
The general view is that 「Hyeoljukga」 is the sijo from the time of enlightenment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It would be possible to discern whether this is truly the precursor of modern sijo by examining if its characteristics belong to ancient sijo, sijo of the enlightenment period, or modern sijo.
This study reviewed whether it is appropriate to regard 「Hyeoljukga」 as the precursor by 11 aspects such as the ending of the third metre in the last verse into the theme word, elimination of the fourth metre in the last verse, single-line poem without the layout of first, second, and last verses, ‘ ∼ga’ in the title 「Hyeoljukga」, Chinese style word and old style word, series sijo, song about ‘serving the country and the loyalty’, whether it has a title or not, whether the name of the poet is real or not, whether the poem is printed or not, the notation of old words.
7 out of 11 aspects did not manifest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sijo. The rest, the 4 aspects showed the characteristics of ancient sijo and modern sijo, and 2 out of 4 are regarded as the characteristics appearing in the sijo written during the time of enlightenment and modern sijo.
In other words, 「Hyeoljukga」does not have any characteristics that can be regarded as the precursor of modern sijo. Rather, 「Hyeoljukga」 is closer to the ancient sijo.
A modern sijo must acquire individual order through universal order and realize the universal order through individual order at least in the aspect of the contents.「Hyeoljukga」does not have these modernistic characteristics not to mention the format. It would be appropriate to look for the precursor of modern sijo after 「Hyeoljukga」 or among those written in the 1920's.
Holding a commemorative event for a poem that is not verified nor generalized can be a serious issue for the identity of sijo. The starting point of modern sijo shall be dealt with only after it became generalized through sufficient discussions in the academic or sijo circles.
Kyewords : Hyeoljukga, the precursor of modern sijo, Korea Association of Sijo Poets, Chinese tyle word, old style word,serving the country and the loyalty
1) 먼저 ‘혈죽가’가 현대시조의 효시로 여겨지게 된 원인부터 살펴보자. 2006년 ‘현대시조 100주년’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주도적 역할을 한 이근배(73) 시조시인은 “20세기 들어 한자가 아닌 한글로 쓴 작품이 인쇄매체에 활자화해 발표된 것을 신(新)문학의 기점을 보고 있다”며 “‘혈죽가’는 최초로 활자화한 시조였다”고 밝혔다. 누가 썼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옛 시조와 달리 저자가 ‘대구여사’로 분명한 점, 노래와 결부된 옛 시조와 달리 순전히 읽고 즐기기 위해 쓴 작품이란 점 등도 중요한 근거가 됐다.
경향신문,2006.7.21.
2) 경향신문,2006.7.21.
3) 이응백 외,『국어국문학자료사전』(한국사전연구사,2002),1718쪽.
4) 임선묵 편,『근대시조편람』(경인문화사,1995),76쪽.
5) 이는 전대의 『남훈태평가』등의 가집에서 연유된 전통계승으로서의 시조창에 의한 시조시형의 변형태로 보아야한다. 『남훈태평가』가 철종 14년 1863년에 편찬되었고 이러한 가집의 형성이 대부분 19세기 후반이었다는 점과 국문표기 등으로 대중성을 띠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에 와서 시조창의 창자 범위가 서민에게 급격히 학산되고 있음을 반증해주는 것이다. 이는 종장말구의 생략이 하나의 고정시형으로 정립되어 개화기로 확산 전파되어가는 가능성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김영철 외, 『한국시가의 재조명』(형설출판사,1984),545-546쪽.
그러나 개화기 시조의 종장 말구 생략와 남훈태평가류의 가집에서 보는 바의 종장 말구 생략은 생략이라는 현상 자체는 동일하지만 그 결과로서 나타난 문장 구조는 다르다. 남훈태평가 등에 실린 시조는 원래 다 종장 말구를 가진 작품인데 편찬자가 그것을 생략했을 뿐이다. 이런 생략이 가능했던 것 바꾸어 말하면 시조창에서 종장 말구를 생략할 수 있었던 것은 종장 말구가 대체로 ‘하노라, 하여라’ 식의 허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를 생략하더라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화기 시조의 종장 말구의 생략 현상은 다르다.
최동원.『고시조론고』(삼영사,1990),104쪽.
6) 임선묵 편, 앞의 책,78쪽.
7) 임종찬,『현대시조론』(국학자료원,1992),18쪽에서 재인용
8) 임선묵 편, 앞의 책,187쪽.
9) 위의 책,188쪽.
10) 위의 책,78-171쪽.
11) 조동일,『한국문학통사 4』278쪽.
12) 최동원,앞의 책,107-108쪽. ‘신문화계 : 平調,女唱,擬言樂,신문계:평조,줍시조,남창,남창시조,학지광:평조’
13) 임종찬, 앞의 책. 33쪽.
14)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시조 343수 중 ‘~歌’가 붙은 것이 16수, ‘~曲’이 6수이다.
15) 원용우, 2013년 6월 14일, 제2회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 여름세미나.
16) 임종찬, 앞의 책,57쪽.
17) 위이 책,51-55쪽. 임종찬은 ‘고시조와 육당과 가람 조운의 시조를 비교하면서 육당의 연작은 안민영의 연작보다 다소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가람․조운의 연작보다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18) 원용우, 2013년. 6월14일, 제2회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 여름세미나.
19) 김제현,『시조문학론』(예전사,1992),206쪽.
20) 맹사성의 「강호사시가」,이현보의 「어부가」,이황의「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윤선도의 「산중신곡」,정철의 「훈민가」,권호문의「한거십팔곡」등의 제목들이 있다.
21) 원용우, 2013년. 6월14일, 제2회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 여름세미나
22) 원용우,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 여름세미나
23) 이완형, 앞의 책,128쪽.
24) 이응백 외, 앞의 책,1718쪽.
25) 최초의 현대시조는 육당 최남선이 1926년에 발간된 『백발번뇌』서문에서 ‘태초의 시조로 활자에 신세진지 23년 되는 병인해’라고 밝힌 것을 토대로 대구여사의 「혈죽가」보다 2년 앞선 1904년으로 보기도 했으나 해당 작품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바이다. 2006년 10월 27일 열린 시학사 사무실에서 열린 현대시조 100주년 행사 좌담회 ‘이제 하나가 되어 겨레의 시를 계승 ’노래하라‘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언급이 있었다는 것은 그와 같은 공감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완형, 앞의 책,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