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교사는 사랑과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 밑바닥에 항상 조선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민족적 울분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3학년 담임이었지만 5학년 조선어 수업도 겸해서 맡았다. 그는 상급반 학생들에게 “한글을 배워야만 조선인다운 조선인이다.”라고 민족정신을 일깨워주며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꼭 조선말을 쓰도록 하자.”고 당부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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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성적이 나쁘거나 사고뭉치인 제자들의 집을 자주 방문해 학부모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아무리 먼 곳에 사는 제자의 집도 빠뜨리지 않고 찾아갔다. 급장 주영배의 집은 문경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진 그야말로 산간벽촌이어서 장장 30리 길을 날마다 걸어 다니고 있었다. 선생님이 일요일에 자기 집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주영배는 기쁜 가운데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집에 달려가서 알리자 부모들은 “선생님이 이렇게 먼 곳까지 설마 찾아오실까?” 하며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자전거를 끌고 어김없이 제자의 집을 방문했다. 궁벽한 시골이라 대접을 못해드렸는데도 만족한 얼굴로 웃으면서 돌아가는 담임선생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주영배는 가슴이 벅차 눈물을 흘렸다 한다. 그 날의 감격을 마음속에 간직한 주영배는 공부를 더욱 열심히 했고 존경하는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 나중에 교육계에 투신해 초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측근들과 문경와서 주영배 제자에게 막걸리를 따라준 사진이 있어요
당시 주위에서 주영배님께 한자리 달라고도 이야기 했다지만
6촌인 주영배님은 통이 작은 사람입니다
오랬동안 교감 진급이 되지 않으니 평교사를 오래했으니
진급을 시켜달라는 작은 청을 했을 뿐....
결국 봉화 춘향 근처서 교장으로 퇴임 점촌에 기거 아들 상식이 있다
박통이 영배님의 고향집을 방문한 적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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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그 고향집에 곧 돌아가실 분이 있어 약 10년전에 가보았는데
딸기따서...
바둑판이 눈에 뛰었다
문입구가 생각보다 컸다
살구나무큰게 있었다
말라빠진 곶감을 할머니가 대접했다
곶돌아가실분이 끝까지 100원짜리 10원짜리 곶감을 갖고계시었다
남대접하려고
그분돌아가실때 울듯이 비가왔다
6촌형님 주영배 형님 점촌집에 가보았다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전화번호부에 이름을 삭제 했다고
아들이 결혼을 너무 잘한듯...그래서 너무 과한 아내를 만난듯,,,그래서 인생이 험난
군대가기전에 봉화 교장으로 있던 형님 찾아갔는데 주전자에 단촐한 살림 - 교육계를 걱정하는것은 좋은데 본인도 잘 살아야....하는 느낌
첫댓글 https://blog.naver.com/hrlee10102/222168974387
소년기에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고,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그런 소질을 확인한 터라 교사가 되어서는 그 꿈을 구체화시켰다. 교사로 부임한 첫해, 그가 담임했던 반의 급장이었던 주영배(초등학교 교장 역임)는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이 다음에 뭐가 될 낍니꺼?"
"나는 대장이 될란다. 전장에 나가서 용감히 싸워 이기는 대장이 될란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학교 앞산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편을 갈라서 전쟁놀이를 시켰다. 나무 막대기를 주워 와서 총으로 사용하도록 했고, 목검을 들고 '얏, 얏' 하면서 검도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가을 운동회 때 전쟁놀이를 단체 경기로 보여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일본군은 중일전쟁을 확대시켜 대륙의 심장부로 뛰어들고 있었다.
1938년 들어 만주군관학교에 시험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순아 여인의 하숙집에서 나와 학교 숙직실에서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시험공부를 할 시간도 갖게 되었다. 마침내 1939년 가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시험을 쳤다. 그 뒤 박정희 선생이 학교를 그만두고 떠난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다들 섭섭해서 학교로 찾아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