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탕비실'이 다음 중 어느 것을 뜻하는지 골라 보세요.
㉠ 간첩(공비)을 소탕할 목적으로 만든 정부 내 기구
㉡ 한의원에서 한약(탕)을 달이는 방
㉢ 경비실의 다른 이름
㉣ 물을 끓이거나 식기를 세척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
'탕비실'의 의미가 전혀 와 닿지 않아 ㉠㉡㉢ 중 하나를 찍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회사 등 건물에서 '탕비실'이란 표지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의미는 어렴풋하나마 정답인 ㉣을 골랐을 것이다. '탕비'나 '탕비실'은 일상생활에선 거의 쓰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무척이나 생소한 단어다.
건물 복도나 사무실 한쪽 구석에 '탕비실'이란 표지가 붙어 있는 곳이 있는데, 물을 끓이거나 식기를 세척할 수 있도록 만든 작은 공간을 일컫는다. 청소 도구를 갖추어 둔 작은 방에도 '탕비실'이라 붙어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이 표지를 처음 대할 때 '별 희한한 단어도 다 있네'하면서 고개를 갸웃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탕비실(湯沸室)'은 한자 '끓일 탕(湯)' '끓일 비(沸)' '방 실(室)'자로 이루어진 단어다. 차 또는 커피 등을 준비하기 위해 물을 끓이고 식기를 세척할 수 있게끔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간단한 조리 기구와 배수시설이 갖춰진 곳이다. 청소 도구를 갖춰 둔 방에 '탕비실'이라 붙여 놓은 것은 아마도 '탕비실'의 '비(沸)'자를 설비를 뜻하는 '비(備)'자로 착각한 때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탕비'나 탕비실'은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다. 일본식 한자어다. 일본에서는 주전자를 '유와카시(湯沸かし·ゆわかし)'라 하며, 가스온수기를 순간탕비기(瞬間湯沸器)'라 부르는 등 '탕비'란 단어가 쓰이고 있다. 사전에도 없는 일본식 한자어인 '탕비실'이 우리나라에서 버젓이 사용되는 이유는 이 용어가 법률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소방이나 건축 관련 법률 조례 등에 '탕비실'의 설치 규격, 안전관리 사항 등의 내용이 나온다. 이를 따라 '탕비실'이란 용어가 일반 건물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본 법률을 베끼면서 묻어 온 '탕비실'이란 용어가 우리 법률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각종 법률이나 규정에 들어 있는 '탕비실'이란 말을 바꾸어야 한다. '간이 조리실'등 적당히 쉬운 말로 하면 된다. 법률 용어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힘들겠지만 마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사안이다.
배상복 기자 sbbae@joongang.co.kr
배상복 기자의 [우리말 산책] 블로그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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