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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평준화]
고교 평준화하면 경쟁력이 떨어지나?
[길잡이]
경기·강원교육청은 2012학년도부터 일부 지역에서 고교 평준화(신입생 추첨 배정) 제도를 시행하겠다며, 교과부령 개정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교육과학기술부는 “평준화 실시 뒤 오히려 사교육이 늘고 학교가 서열화했다”며 개정에 반대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기·강원교육청이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고교 평준화를 시행하려는 이유는 무엇이고, 교과부는 왜 그것을 막으려는 걸까요? 양쪽의 주장을 알아봅시다.
-기획·편집 정종법 기자
[교과서]
교육을 받을 권리 오늘날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교육이다. 헌법에서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즉,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또 모든 국민은 그가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 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고등학교 <법과사회> (교육인적자원부)
[이슈]
교과부, 고교평준화 확대 ‘제동’
경기·강원 고교 평준화 교과부 반대로 무산
경기도교육청과 강원도교육청이 현재 중학교 2학년 학생이 고교에 들어가는 2012학년도부터 6개 시에서 실시하려던 고교 평준화(학교별 입시 폐지)가 교육과학기술부의 반대로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교과부 고위 관계자는 11일 “경기·강원 도교육청이 요청한 경기지역 3개 시(광명, 안산, 의정부)와 강원지역 3개 시(춘천, 원주, 강릉)의 평준화 전환에 대해 검토한 결과, 결정을 유보하기로 방침을 정했다”며 “이들 6개 시에서 2012학년도부터 고교 평준화를 실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평준화에서 평준화로 바뀐 지역에 대한 교과부 차원의 정책연구를 거쳐 신중히 결정하겠다는 뜻”이라며 “이명박 정부 들어 평준화로 전환된 지역이 없다는 점도 감안했다”고 덧붙였다.
경기·강원 주민들, 평준화 압도적 찬성
경기·강원 도교육청은 지난해 교과부가 평준화 전환을 위해 요구하는 절차인 외부 연구용역과 학부모·학생 여론조사 등을 거쳐, 지난해 10월과 12월에 각각 교과부령인 ‘교육감이 고등학교의 입학 전형을 실시하는 지역(평준화 지역)에 관한 규칙’을 개정해달라고 교과부에 요청했다. 6개 시에서 실시된 주민 여론조사에서는 최소 59%에서 많게는 78%가 평준화 도입에 찬성했다.
해당 교육청은 납득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행정절차를 허술하게 했던 한 곳에서 1년 동안 평준화 전환이 보류된 것 말고는 시·도 교육청이 요청한 평준화 도입이 유보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강원도교육청 관계자도 “여론조사와 실태조사, 연구용역 등 모든 절차를 마쳤기 때문에 결정을 유보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학업성취도와 정서 측면에서 평준화가 더 유리
이에 대해 교과부 관계자는 “평준화 실시 뒤 오히려 사교육이 늘고 학교가 서열화했다는 지적도 반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용일 한국해양대 교수(교육학)는 “비평준화지역에서 학교 서열화가 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평준화 때문에 사교육이 늘었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평준화 도입을 요구해온 경기지역 시민단체들은 12일 교과부를 항의방문할 계획이다. 김시경 ‘경기도 평준화 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사교육 증가 등 교과부가 평준화의 부작용이라고 든 현상들은 평준화 탓이 아니라 현 정부의 경쟁 위주 교육제도 탓”이라며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정서 측면에서 평준화가 더 낫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검증된 바 있다”고 말했다.
-이유진, 이재훈 기자, <한겨레> 2011-01-12, 기사
[자세히알기]
강원도 교육감 민병희 “평준화 유보땐 학부모 저항”
고교 입시제도는 시·도교육감의 고유 권한
교육과학기술부가 경기·강원지역 고교 평준화 추진에 제동을 걸려는 것과 관련해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은 17일 “평준화를 유보한다면 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17일 열린 새해 첫 기자회견 자리에서다.
민 교육감은 이날 이주호 교과부 장관을 겨냥해 “혹시 ‘특정 교육감들’이 추진하는 일에 제동을 걸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만약 그렇다면 또다른 방향에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작심한 듯 말했다.
민 교육감은 이날 오전 강원도 춘천시 강원도교육청 브리핑실에서 연 회견에서 “고교 평준화를 비롯한 고교 입시제도는 시·도교육감의 고유 권한으로, 시·도교육감의 비평준화 해제 요청에 교과부가 제동을 건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어 “아직 공식 결정된 바 없다는 게 교과부 입장이지만, 평준화 유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평준화 시행을 유보한다면 큰 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으며, 학부모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평준화 관철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
앞서 경기도교육청(교육감 김상곤)과 강원도교육청은 2012학년도부터 경기도 광명·안산·의정부시와 강원도 춘천·원주·강릉시 등 6개 시에서 고교 평준화를 추진하기로 하고, 각각 지난해 10월과 12월 교과부에 관련 규칙 개정을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교과부가 규칙 개정은 미뤄둔 채 평준화 실시지역 지정 절차를 더 까다롭게 적용하는 쪽으로 관련 법령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해당 지역 시민사회와 교육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민 교육감은 “설문조사 방식의 여론조사와 공청회, 연구용역 등 고교 입시제도 개선을 위해 밟아야 할 과정을 모두 거쳐 평준화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며 “교과부가 규칙 개정 요청을 거부할 만한 결격사유가 전혀 없는 만큼, 평준화 관철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인환 기자, <한겨레> 2011-01-18, 기사
[자세히 알기 2]
고교평준화(高校平準化)
1974년부터 시행한 제도입니다. 일정 지역에서 정해진 고등학교 정원만큼 시험이나 내신으로 선발한 뒤 해당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에 추첨을 통해 나눠 배정하는 방식입니다. 지역별로 입학생을 뽑기 때문에 학교별로 시험을 치르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고등학교 사이의 학력차를 줄이고, 대도시에 집중되는 일류 고등학교 선호 현상을 없앨 목적으로 도입했습니다. 과열된 고교 입시에 따르는 중학생들의 과중한 학습 부담과 학교 서열화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목적이었습니다.
[배경]
평준화, 도전과 응전 40년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변천사는 너무 복잡해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힘들지만, ‘평준화’라는 철학적 태도에 대한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는 말로 줄일 수 있다. 해방 뒤 원시적 자율 방임 상태에 놓여 있던 교육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1967년 11월7일이었다. 그때까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홍역 같은 입시 지옥을 돌파해야 했다.
중학교 무시험에 이어 고등학교도 평준화
그날 오후, 서울 시내 130개 공·사립 국민학교 교장들은 대한교련(지금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에 모여 2시간 반 동안 마라톤 토론회를 벌인 끝에 “앞으로 (중학 입시를) 무시험 추전제로 실시하도록 문교부에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에서 중학교 무시험 추첨이 실시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69년 2월5일의 일이다.
평준화가 고등학교에까지 확대된 것은 중학교 무시험제가 실시된 지 5년이 지난 1974년이었다. 그해 2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서울 배명중학교를 졸업한다는 사실을 입에 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고교 평준화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각 고등학교마다 입시가 치러졌고, 그 결과 ‘일류’와 ‘명문’이라는 것들이 생겨났다. 서울의 남자 명문고는 경기·서울·경복·용산·경동 등 5대 공립과 중앙·양정·배재·휘문·보성 등 5대 사립을 합친 10곳이었고, 여자 명문은 경기·창덕 등의 공립과 이화·숙명·진명·정신 등의 사립 여고였다. 1974년 1월26일치 <조선일보>를 보면, 1면 톱으로 “서울·부산 인문고 학군 확정’이라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문교부는 서울을 경기·서울·경복 등 일류 학교들이 몰려 있는 도심(광화문 비각 반경 4km)의 공동학군과 그 외 지역의 일반 5개 학군으로 나눴다. 공동학군에는 서울 시내 중학생이라면 누구나 원서를 넣을 수 있고, 입학자는 추첨을 통해 ‘뺑뺑이’로 배정됐다. 어려운 시험을 쳐 입학한 선배들은 뺑뺑이로 입학한 ‘58년 개띠’들을 후배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해 3월 지만씨는 사립 최고 명문고로 꼽히던 중앙고에 입학한다.
강북 인구 분산, 해결책은 학교 이전
그러는 사이 서울은 확장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이면,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던 시절이다. 그 시절 서울은 곧 강북이었고, 강남은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이어지던 허허벌판이었다. 박 대통령은 늘어만 가는 서울 인구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를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은 전쟁이 터지면 이 많은 인구를 데리고 어떻게 강을 건널까 하는 문제였다. 그 때문인지 고교 평준화가 이뤄진 이듬해 대통령의 서울시 연두순시 지시사항 1호는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이 된다.
강북 인구를 강남으로 옮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서울 도심의 명문고들을 강남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서울시는 1972년 10월 종로구 화동(지금의 정독도서관 터)에 있던 경기고를 강남구 삼성동 91번지 3만2253평으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경기고 동문들의 강력한 반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혁명 주체’의 핵심인 구자춘 전 서울시장에게는 무서울 게 없었다. 그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6년 이를 실행에 옮겼다. 2004년 2월 나온 서울대 지리교육학과 최은영씨의 박사학위 논문 ‘서울의 거주지 분리 심화와 교육환경의 차별화’를 보면, 70년대 이후 도심에서 이전한 학교 20곳 가운데 15곳이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이른바 강남권으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셋째 권에서 “고교 평준화는 돈이 없어 과외 공부를 시킬 수 없는 많은 학부모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적었다.
강남, 새로운 교육 특구로 떠올라
학교는 평준화됐지만, 부모들의 경제력 차이까지 평준화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강남은 어느새 우리나라 상류층들의 배타적 주거공간으로 변해갔다. 상전벽해한 강남에서 경제력을 갖춘 부모의 지원을 받는 아이들이 경기·서울·휘문 등 전통의 명문과 상문·현대·청담·단대부속·반포·서초 등 신설학교 쪽으로 대거 입학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8학군으로 불리던 이 학교들이 서울 주요 대학의 신입생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고교 입시는 없어졌지만, 평준화의 틀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두환 정권, 과외 금지, 본고사 폐지, 내신 도입
‘대망’의 1980년대는 광주의 피 위에서 시작됐다.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정권은 하루빨리 민심을 휘어잡아야 했고, 그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1980년 7월29일 오전 9시, 서울 삼청동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회의실에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중장)은 나중에 ‘7·30 교육개혁안’이라는 이름이 붙은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을 보고받는다. 대책안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과외 금지, 본고사 폐지, 내신 도입이었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과열 과외를 “전 국가적인 문제이자 사회의 암적 존재”라고 지적했다. 신문들은 “교육 정상화의 길”(동아일보), “한국 교육의 혁명적 전기”(서울신문), “전 국민적 호응을!”(조선일보), “획기적인 교육개혁”(중앙일보), “영단적인 교육혁신”(한국일보) 등의 기사를 뽑아내며 새 정책에 열광했다.
‘내신 중시’와 ‘고교 평준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강남 학교들을 견제하고 실질적인 평준화를 이루기 위해 도입된 것이 ‘고등학교 내신성적제’다. 강남권 명문고 수석 졸업자와 지방의 평범한 고교 수석 졸업자가 비슷한 실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게 내신과 고교 평준화의 정신이다. 대입에서 내신의 비율을 높이는 것은 평준화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고, 낮추는 것은 사실상의 서열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내신성적제를 처음 도입했을 때 서울 주요 대학의 대입 반영비율은 10~20%밖에 되지 않았지만, 1994년부터 40%로 높아졌다.
내신 비율 상승에 대학들 남몰래 고교등급제
내신 비율이 높아지자 불만을 갖게 된 것은 서울의 주요 대학들이었다. 그들은 내신의 실질 반영률을 2~3%로 낮추거나 고교등급제를 도입해 평준화 정책을 무력화시킨다. 2004년 고려대를 필두로 한 서울 주요 대학들이 남몰래 고교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줬다. 이후 참여정부의 ‘3불 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은 하나의 정책 모델로 굳어져갔고, 보수 언론들은 “평준화 해체만이 살길”이라는 기사를 쏟아내기에 이른다.
서울시장 시절 ‘자립형 사립고’ 제안
2003년 11월3일 이명박 서울시장은 서울시 출입기자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교육자가 손을 뗐으면 (이미 한국은) 세계 최고의 입시제도를 가졌을 것”이라고 말했고, “윤덕홍 교육부총리는 시골 출신으로 진정한 서울의 교육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서울시 뉴타운에 자립형 사립고를 만들겠다고 제안해, 교육 평준화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대한민국에서 평준화가 교육 정책의 근간으로 자리잡은 것은 올해로 39년째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는 40년 동안 이어진 한 나라의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공약을 내건 셈인데, 그 이유로 “사교육비를 잡기 위한 것”을 꼽았다. 사교육을 잡기 위해 시작된 평준화는 사교육을 잡지 못했고, 평준화가 잡지 못한 사교육을 잡기 위해 평준화를 깨겠다는 공약을 보는 일은 진정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3권(2003년) 참조
-길윤형 기자, <한겨레21> 2007-10-18, 기사
[관점]
‘자율’ ‘선택’ 이라는 말의 함정
신자유주의, 교육 양극화 부추겨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발달한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 시장화, 민영화, 자율화, 소비자주권 등의 가치가 강조되고, 사회적·공공적 책임에 있어서 국가 역할은 축소되는 특징을 가졌다.
우리나라도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영향을 받아, 통합, 평등, 대중 중심적 가치보다는 구분, 차등, 소수 중심적 가치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됐다. 이런 가치는 보수주의 관점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어, 교육에 있어서는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으로 구체화했다.
대표적인 특징을 꼽자면 교육에서의 소비자주권과 학교 자율화다. ‘주권’과 ‘자율’이라는 말이 그럴듯해서, 마치 교육체계가 진정한 발전으로 도약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학생들을 구분 짓고 차등하며, 엘리트 위주의 ‘잘하는 자’와 ‘가진 자’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줘 교육 양극화 현상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수준별 수업’과 ‘학교 선택’에 현혹돼
그런데 왜 대중들은 거부감을 갖지 못했을까?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른 책략, 즉 차등과 무한경쟁 그리고 선택을 통한 학생의 학력 향상, 학교 만족도 증가, 사교육비 경감,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선전에 현혹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학생의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을 구분하고 차등하여 가르치는 것이 더 낫다는 논리로 나타난 ‘수준별 수업’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학교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는 논리로 나타난 ‘학교 선택’이다.
이 두 가지 교육정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이렇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이 같은 반(또는 학교)에서 함께 수업하면, 교사는 중간 수준에 맞추게 되고, 그렇게 되면 공부 잘하는 학생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서 수업이 무의미해지고, 공부 못하는 학생은 그것조차 이해가 안 되어서 수업이 무의미해진다. 얼마나 교육적 낭비인가. 그러니까 학생의 수준에 맞춰서 반(상위반, 중위반, 하위반)이나 학교(일류, 이류, 삼류 고등학교)를 따로 배정하고, 교사가 해당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수업하면 모든 학생들이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학생들의 학력이 향상되고 학교 만족도가 높아지며 사교육비도 경감될 것이다.”
‘수준별 수업’이 오히려 교육효과 떨어뜨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솔깃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사람들은 사교육비가 과거보다 줄어들기는커녕 더 증가하기만 해서 힘들다고 느낄 것이다. 구분 짓고 차등하는 교육체제일수록 그 구분의 상위 그룹에 들기 위해 사교육비가 더 들고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실제 주요 연구들을 보면, 학생들의 학력은 극소수의 최상위 그룹 학생을 빼면 오히려 학생들을 구분 짓지 않고 함께 가르치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그럴 때 학생들의 행복감도 더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교육정책인가? 학교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학생들에게 오로지 성적만이 최고라는 비교육적인 가치를 가르치는 데 열중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위반 또는 일류 고등학교에 들지 못한 학생들의 인권과 존엄성은 발 디딜 틈이 없다.
학력 신장이 경쟁만 조장해
현재의 교육정책은 학력 신장이라는 소모적인 명목으로 경쟁만 조장하고, 사교육비를 더 부추기며, 강제적인 일제고사를 치른 결과를 공개해 학교 서열화를 부채질한다. 또한, ‘자율’과 ‘선택’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국민들을 현혹해 학생들을 구분 짓고 차등하며 특권계층 학생들에게 유리한 특목고와 자율형사립고를 확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마치 사교육비 문제와 중·고등학교 입시지옥 문제로 인해 평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이전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역사의 교훈마저 망각한 채 공교육을 약화시키는 데 몰입하는 것이 내 아이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김달효 동아대 교육학 교수, <한겨레> 2010-11-15, 칼럼
[자세히 알기]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 neoliberalism)란?
신자유주의는 시장기능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론입니다. 신자유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국가권력이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계획하는 사회주의경제체계의 비효율성과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현대 복지국가에 대항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 경쟁을 하고, 시장논리에 따라 경제가 움직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능력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스펙을 키우거나, 자기계발서에 치중해 독서하는 경향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 소수자, 약자들이 어떻게 정당한 경쟁을 할 수 있냐”며 강하게 비판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나라에서 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해고와 감원을 더 자유롭게 하는 것), 작은 정부(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 자유시장경제의 중시(각자의 능력에 따라 경쟁할 것), 규제 완화, 자유무역협정(FTA) 중시, 공기업 사유화, 의료 사유화, 방송 사유화 등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화]
입시경쟁 없는데도 대학 경쟁력은 으뜸
대학 입시를 경쟁 없이 준비
지난 9월21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의 교정에서 만난 라라 리컨스(19)한테 “이 학교를 왜 선택했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황당하리만치 단순했다. “평판도 좋지만 집에서 가까워서요.” 위트레흐트 대학교는 중국의 상하이교통대학이 해마다 발표하는 세계 대학 순위에서 지난해 47위에 올랐으며 1999년에는 이 대학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 교수와 마르티뉘스 펠트만 명예 교수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명문 중의 명문인 셈이다. 따라서 라라의 말은 곧 “서울시 관악구에 살아서 서울대에 왔다”는 말과 같다.
그는 “졸업시험을 보는데 10.0 만점에 6.0점만 넘으면 졸업장(Diploma)을 받을 수 있다”며 “전국의 모든 학생이 치르는 졸업시험에서 꼭 좋은 점수를 받을 필요는 없고 졸업장이 있으면 웬만해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졸업시험의 평가도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다. 네덜란드 학생들은 대학 입시 준비 과정을 통틀어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네덜란드에는 학생들의 입시 경쟁과 더불어 대학의 ‘학생 선발권’ 또한 없다. 네덜란드 대학은 학생을 선발하지 않고 우리나라 평준화 지역의 고교들처럼 대학 입시 사정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학생정보관리위원회·IB-Group)에 의해 학생을 배정받는다. 위트레흐트 대학의 국제 교류 담당자인 카스파르 더복은 “네덜란드 대학은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며 “의대 등 지원자가 많은 몇몇 학과 역시 담당 기관에서 학생을 선발하고 배정할 뿐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가가 대학 입시에 개입할 수 있는 이유는 네덜란드 대학이 모두 국가의 예산으로 운영되며 우리나라의 국립 대학과 같은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세계적 경쟁력 지닌 네덜란드 대학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최고의 점수를 받지 않은 학생들이, 대학의 선발 의지와 상관없이 입학하지만 네덜란드 대학의 경쟁력은 세계적이다. 상하이교통대학의 ‘2008년 세계 대학 순위’를 보면 200위권 안에 11개 대학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 수재들이 선발되는 서울대는 151~200위권에 올랐고 학생 선발권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서울의 몇몇 사립대들은 한 곳도 들지 못했다. 미국의 주간지 <뉴스위크>가 2006년에 발표한 세계 100대 대학 순위에도 네덜란드는 5개 대학이 올랐다. 우리나라 대학은 한 곳도 없었다. 네덜란드에는 연구중심대학(Research University) 14곳과 고급 직업 인력을 양성하는 응용과학대학(University of Applied Science) 41곳이 있다.
‘수월성’ 제대로 살린 중등교육 시스템 효과
학생의 지원 자격이나 학업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네덜란드 대학이 우리나라 대학보다 더 경쟁력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수월성’을 제대로 살린 중등교육 시스템이 대학 대신 학생의 자격과 능력을 보증하는 데 있다.
네덜란드는 중·고등학교를 통합해 운영하는데 학생들은 능력과 적성에 따라 직업준비중등학교(VMBO, 4년 과정), 일반중등학교(HAVO, 5년 과정), 대학준비학교(VWO, 6년 과정) 등 세 가지 유형의 학교에 진학한다. 직업준비중등학교에서는 직업 교육을 받고 졸업한 뒤 바로 취업을 한다. 일반중등학교 졸업자는 응용과학대학에 진학할 자격이 주어지며 연구중심대학에는 대학준비학교 졸업자만 진학할 수 있다. 각 학교의 진학은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국가가 치르는 학업적성검사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나라에서라면 VWO에 진학하려고 입시 경쟁이 있을 법도 하지만 학업적성검사를 준비하는 사교육도, 경쟁도 없다. 네덜란드에 10년 동안 살면서 자녀들을 초등학교, 중등학교, 대학까지 보낸 정현숙(46)씨는 “시험은 성취도 평가가 아니라 능력 평가이기 때문에 대비할 수도 없을뿐더러 네덜란드의 학부모들은 자녀가 HAVO나 VMBO에 간다고 해서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능력과 적성 살린 ‘차별화’ 교육
이는 곧 네덜란드 학생들의 중등학교 진학이 성적순으로 우열을 가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의 탁월한 능력과 적성을 고려해 적합을 따지는 일이다. 따라서 꼴등에 대한 차별 대신 공부가 아닌 다른 능력을 지닌 학생에 대한 ‘차별화’한 교육이 있다. 헤이그 대학(The Hague University of Applied Sciences) 국제교류처의 요세프 핀탄 모린은 “몇몇 나라에서 일해 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우수한 학생을 확보하는 가장 성공적인 길은 조기에 학생의 적성을 발견해 자기한테 맞춤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것에 있다”며 “네덜란드 대학 경쟁력의 핵심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중등교육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자기가 하고 싶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학생들로 구성된 학교는 교육의 질이 좋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HAVO를 졸업하고 응용과학대학을 나온 이들이 초·중등학교의 교사로 진출할 정도로 실무 교육의 수준이 높다. 또 우리나라에 세계 축구 4강이라는 기적을 선사한 휘스 히딩크는 직업학교인 VMBO를 나왔다고 한다. VWO에는 연구자로서 탁월한 점이 있는 이들이 진학하므로 VWO 졸업자를 신입생으로 받는 연구중심대학은 굳이 대학에 적합한 학생을 뽑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각자의 탁월한 점을 북돋워 주는 게 수월성 교육의 옳은 개념이라면 네덜란드의 교육이 바로 그렇다.
경쟁력은 줄세우기에서 나오지 않아
네덜란드교육진흥원(NESO KOREA)에서 주최한 네덜란드 대학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위트레흐트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을 둘러본 김상률 숙명여대 대외협력처 처장(영문학과 교수)은 “학부 과정을 교양 정도로 생각하고 진짜 연구는 석사 과정에나 가서야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대학은 연구에만 초점을 둔 네덜란드의 연구중심대학에 견줘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학생과 학교를 서열화하지 않고도, 학생과 학교의 경쟁을 부추기지 않고도 훌륭한 교육적인 성과를 낸다. 한 여당 의원은 수능 성적 원자료를 공개해 전국의 학교를 줄세우겠다고 부르댄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교육의 경쟁력이 높아지면 좋으련만, 네덜란드의 사례를 보면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다.
-글·사진 진명선 기자, <한겨레> 2009-10-11, 기사
* 수월성(秀越性, excellency) 교육
교육에 있어 수월성이란 개인의 잠재적 능력과 적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며, 개인의 자아실현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육의 질적 향상과 비슷한 의미로 써 왔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엘리트 교육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현재 많은 국가들이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교육의 수월성 추구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미국의 교육개혁입니다. 1983년 레이건 대통령 시절 ‘국가의 위기’를 선언하면서 교육의 수월성 추구를 위한 교육개혁을 추진한 이래, 부시 대통령은 자율과 책무성, 그리고 학교선택권을 강조하는 ‘낙오자 없는 교육정책(No Child Left Behind)’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2005년 12월22일 발표한 ‘창의적 인재 양성을 위한 수월성 교육 종합대책’은 우수한 인재를 발굴·육성해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개별화 맞춤식 교육을 지향합니다.
[고교 평준화]
1교시 : 주제문 논술하기 - 제 3회 청소년 시장경제 글쓰기 대회 문제 -
문제 : 정부의 고교평준화정책에 대해 교육시장 참여자인 학생, 교사, 학부모, 대학, 사설학원 등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고 있다. 다음의 제시문을 참고하여 고교평준화정책에 대해 자기생각을 중심으로 논술하시오.
* 원고분량은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200자 내외로 작성하시오
#. <제시문 가>
한 나라의 경쟁력은 천연자원과 자본,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경쟁력 있는 인재육성과 적재적소 배치만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경쟁력 있는 인재육성이 선택 아닌 필수 요소인 것이다. 21세기는 인재 한명이 10만 명, 10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천재를 키우지 않고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이제 세계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경쟁’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평준화에 매달려 엘리트 인재양성을 소홀히 해온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하향평준화와 교육의 질적 저하만 가져왔다고 말한다. 교실 안에서의 공교육은 무너졌고 교실 밖의 사교육만 번창해 왔을 뿐이다. 입시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전쟁을 방불케 하고, 중고교는 물론 초등학교, 유치원생까지 학원에 의존할 정도로 공교육은 무너지고 있다. 이에 더해 많은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미국 캐나다 호주 등 해외로 유학이나 연수를 보내고 있다. 학원 강사는 최고의 직업으로 부상하고 있고, 연봉이 10억-20억 이상의 스타강사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모두 평준화정책의 여파다. 최근 심각한 사회현안이 되고 있는 부동산광풍도 주원인이 교육문제에서 빚어졌고, 고교평준화 정책의 부산물에 다름 아니다. 평등화와 평등교육은 인류가 추구해야할 주요가치의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교육이념일 뿐이다. 현실과 맞지 않고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경쟁교육은 이제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다. 고교 선택권을 이미 크게 확대한 지역의 고등학교가 크게 발전하고 있음을 직시해야한다. 학교 간 경쟁으로 학교와 교사의 노력이 배가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치열한 경쟁으로 단련되지 않고서는 국제사회에서의 무한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평준화의 틀을 깨야 할 것이다.
#. <제시문 나>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뜨거워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처음에 평준화가 시작되었는지, 또 평준화에 변화가 오면 어떤 결과가 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평준화가 처음 실시된 이유는 입시준비 과열, 청소년의 건강, 교육의 기회균등 문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은 입시에 대한 과중한 부담으로 자정을 넘어서까지 과외수업을 해야 했고, 한밤중에 귀가하면서 여러 가지 사고가 많이 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의 서열화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은 학교의 교복과 모자를 쓰기 싫어하는 경향이 만연했다. 과외학습에서 오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사회정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너무 지쳤다. 누가 보아도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위기위식이 사회에 팽배하였다.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평준화가 실시된 후 이런 현상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이번에는 학력수준의 저하, 국가경쟁력의 손상, 학생의 학교 선택권 박탈, 특정지역의 아파트 값 상승 등의 문제가 계속 논의되어 왔다.
그러면 현재 이 상태에서 고등학교의 평준화를 폐지하고 자유경쟁적으로 학생을 선발하였을때 과연 어떻게 될까.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도 중학생들의 과외가 문제가 되는데 입시가 있다면 훨씬 더 심각해질 것이다. 입시철이 되면 학교를 가지 않고 학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특목고 지원 중3 학생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입시에서 나타나는 고교 서열화도 중고교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증가시킬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우열이 갈라지는 경주라고 하지만 이런 구별을 고등학교 입시때부터 고등학교 졸업시까지 3년간 연기하려고 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인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이 지금까지 10세에 어린이들의 미래를 갈라놓았지만 미국식 종합학교의 도입 등 지속적인 교육개혁을 통하여 16세 또는 20세로 늦추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교육기회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것이다. 특목고 등 100여개의 특수학교가 생겨나면 이중구조의 학교제도가 생기는 셈이다. 한 달에 100만원이 넘는 학교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불평등은 미국의 소수인종에 대한 특별지원처럼 그 결과에서 오는 가치가 불평등에서 잃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에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충분히 거쳐야 한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학교가 이런 교육에 적합한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학력 저하 등의 문제는 그런 학교 체제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예시답안> 폐지론 : 경기여고 3학년 ***
경제는 근본적으로 인센티브와 관련된 활동이며 사람들이 인센티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통해 이루어가는 반사적 행위이다. 인간이 호모이코노미쿠스라 불리는 지금, 경제는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양식이며 사회 여러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더욱이 국가적 현안인 교육문제, 특히 고교평준화 문제에 있어 경제성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적용시키는 것은 시민들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1997년에 3274명이었던 조기유학생 수가 2003년에는 1만498명으로 4배로 뛰었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고교평준화로 인한 한국 고교의 신뢰도 하락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한다. 고교평준화는 상·하위권 학생들을 같은 환경에서 수업하게 하여 학생들이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들을 수 없고, 공부하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박탈시킨다는 허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고교평준화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논점인 평준화를 폐지하면 상위권 학생들만을 위한 특권적 교육제도가 될 것이라는 주장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평준화는 하위권 학생들에게서도 적정한 수준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제도는 학생들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못하여 학력의 하향 평준화를 야기한다. 20세기를 관망하는 학자들이 미래에는 경제적 측면의 국경이 없어지면서 각국의 주요 자산이 국민의 ‘기술’과 ‘통찰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 시점에서 국민 수준의 질적 하향 평준화로 인한 국가 경쟁력 약화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또한 고교평준화는 교사에게서도 여러 가지 의미의 인센티브를 앗아갔다. 교사는 후세 양성, 비전 제시, 정학한 지식의 전달 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학교의 수준이 동등하게 평가되는 지금, 교사가 열심히 가르치지 않아도 대세에 묻어갈 수 있고 아무리 뛰어나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부족해져 동기유발이 더디게 나타난다. 고교평준화가 교사를 나태하게 만들면 학생은 공교육을 신뢰하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공교육 붕괴의 한 원인으로까지 작용한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더 좋은 환경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인센티브를 발동시키게 된다. 좋은 고등학교가 곧 좋은 대학의 입학이었던 과거와 달리 유명 학원과 대학 진학률이 높은 고교가 밀집 해 있는 강남의 집값이 치솟는 것도 이러한 인센티브로 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제 집값 폭등은 서울만의 지엽적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심각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현 시대의 핵심 명제인 효율성과 경쟁력을 고려하지 않은 고교평준화는 재고되어야 한다. 평준화의 명목으로 이 제도를 계속 실시하면 구성원의 나태가 형성되고 장기적으로 국가의 존속 기반을 약화시켜 국민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 인적 자원의 바탕이 되는 교육제도에서 만큼은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예시답안2 > 유지론 : 민족사관고 3학년 * * *
21세기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채택되어야 하는 정책은 고교 비평준화가 아니라 평준화이다.
흔히 사람들은 고교 비평준화 정책이 경쟁력 있는 인재를 육성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고교 비평준화는 필연적으로 고교입시제도의 설치로 이어지고, 이는 대학입시제도로 인해 고등학생들이 앓고 있는 병을 중학생들에게까지 전염시킬 뿐이다. 중학생들은 과거 비평준화 정책이 실시되었던 70년대 때처럼, 그리고 명문대 입학을 위해 밤낮 공부만 하는 고등학생들처럼, 명문고에 입학하기 위한 주입식 암기식 교육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입시만을 위한 주입식, 암기식 교육의 폐해는 이미 대학입시를 겪는 고등학생들을 통해 증명되었다. 수능 점수 향상만을 목표로 교과서와 자습서를 달달 외우는 고등학생들은 막 만들어진 공산품처럼 서로 똑같을 뿐이다. 획일화된 바보만을 만드는 이러한 교육은 다원주의를 선호하는 세계화의 흐름을 역행한다. 결국 한국 최대 명문이라 불리는 서울대학교 조차 전 세계 대학 중 100위 안에도 랭킹 되지 못하였고 대한민국은 노벨 평화상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결국 고교 비평준화 정책은 대학 입시 에서 범한 교육부의 우를 고등학교 입시에서 다시 한번 범하는 일이다.
이에 반해, 고교 평준화는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부터의 탈피를 가능케 한다. 자유분방한 수업 분위기는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성의 무한한 발전을 독려한다. 고등학교 입시, 대학교 입시가 없는 일본의 일관교육 제도만을 보더라도 입시에서 벗어난 교육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득이 되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와세다 학교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한 분석과 토론을 통해 현대문학을 공부하지만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일방적인 수업과 자습서의 암기를 통해 공부한다. 전자는 개별성과 독창성을 존중하지만 후자는 획일성과 기존의 것에 대한 답습만을 강요할 뿐이다. 이러한 내실 있는 교육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주입식 암기식 교육만을 야기할 비평준화 정책이 달가울 수 없다. 우리는 평준화 정책의 유지와 무한한 발전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일 방안을 강구 해야 한다.
더 나아가 고교 평준화는 학생과 학부모의 입시 부담을 덜어준다. 사실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고 있는 지금도 서울은 '외국어고', '과학고' 입시 열기로 뜨겁다. 그러나 이는 소수 상위 학생들이 겪고 있는 문제로 중학생 전체의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만약 비평준화 정책이 채택되어 특수목적고 뿐만 아니라 일반 고교들까지 명문/비명문으로 나뉘게 된다면, 현재 소수 중학생들에게만 국한된 고등학교 입시 문제가 중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퍼질 수 있다. 대학 입시로 어차피 골머리를 앓게 될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고등학교 입시란 또 다른 짐을 얹어 주어서는 안 된다. 고교 평준화는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방지한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훌륭한 인적자원 개발에 달려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교 비평준화 정책을 채택하자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고교 비평준화는 입시 문제를 가속화시킬 뿐 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를 고교 평준화 제도의 철폐가 아닌 개선과 발전을 통해 모색하여야 한다. 비평준화 교육이 객관식 답 밖에 찍을 줄 모르는 바보를 만드는 동안 평준화 교육은 창의적인 천재를 양성하기 때문이다.
*논제 선정의 역사적 배경 :
2교시 : 읽기 자료
국가가 개인의 자유(학교선택권)를 규제할 것인가? 에 관한 논제
1.역사적 배경
19세기 근대시대 이후 개인과 민족의 자유를 확대하고 팽창하려는 노력은 사회적다윈주의의 날개를 달고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로 변질됩니다.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황금으로 무장한 고전적 산업자본주의는 고삐가 풀린 채 독점과 축적된 돈의 위력으로 제국주의와 함께 내달려온 것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무한히 발전하리라 믿었던 데카르트나 칸트 등 근대 철학자들의 주장들은 현실에서 도전받기 시작합니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지(루소의 일반의지)해 온 사회, 민족, 국가라는 전체들 간의 이해와 충돌로 인해 참혹한 전쟁으로 얼룩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새롭게 발전합니다. 20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복지와 공공의 이해, 가난한 자들을 위한 분배를 위해서는 때로는 강력하게 개인의 자유와 권한을 규제할 수 있게하였습니다. 민간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지요. 뉴딜정책으로 대표되는 수정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이후 많은 나라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를 내걸고 복지와 분배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고교평준화는 1974년에 박정희 정권 때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제시문 1)에서 주장한 여러 사회적 배경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교육으로 인한 사회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과외나 학원을 가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책이었던 것은 틀림 없습니다.
1990년대 이후 상황은 크게 달라집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개방정책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계의 붕괴로 냉전의 한 축이 무너집니다.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세계는 다자간 무역협상(UR 라운드)에서 WTO(세계무역기구)라는 거대 경제의 축을 만들어냅니다.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을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이 있고 자신감이 있으니까요. 그 들은 새로운 이론으로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신자유주의'이지요. 이제 또 한번 '자유로운 경쟁'의 전성시대가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도 시대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8년도 올림픽 성공 이후 자신감에 넘친 한국은 농축산물(쌀과 소고기)과 자본시장 개방을 조건으로 세계무역기구(WTO)와 선진국개발협력기구(OECD)에 가입을 하게 됩니다.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린 것입니다.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자본시장 개방과 경제 부실로 인해 우리는 국가부도사태(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IMF 외환위기)라는 참혹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국민의 노력으로 외환위기는 극복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은 엄청나게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세계 경쟁력이 화두이지요. 냉혹한 세계화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다가 미국 중심의 '테러와의 전쟁'은 100여년전의 제국주의의 시대적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지요. 그때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에 감추어졌었고, 자유로운 경쟁은 독점기업에 의해 왜곡되어져 갔습니다. 현재 자본과 문화의 국경을 넘은 세계화는 우리 생활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거대 자본이 지금 동네의 조그만 가게들을 사라지게하는 것도 , 기업 경쟁력을 위한 노동의 유연성만 강조되고, 고용은 불안하고, 실업 문제는 큰 사회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한미 FTA는 비준 직전에 있습니다. 결국 세계화 과정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러한 냉혹한 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고 준비해야 하는가 ? 고교 평준화의 문제의 핵심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평준화 폐지론자들은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체제에 걸맞는 경쟁을 통해 창의적이고 세계적인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유지론자들은 세계화로 인하여 부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교육 여건은 더욱 열악해지는데 평등교육의 보루인 평준화마저 폐지하면 공교육은 완전히 붕괴될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러 찬반양론에서 여러분들은 어느 입장이며 그렇게 주장하는 창의적인 논거는 무엇인지 묻는 것입니다. 시대의 과제를 논술 문제로서 학생들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트 교육이냐 평준화 보완이냐
[관점 1]
‘천재 양산 시스템’ 활성화가 국가경쟁력 강화의 길
세계 열강이 국가경쟁력 강화를 외치며 엘리트 교육에 열성을 쏟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교등급제·내신 부풀리기 논쟁은 다분히 소모적이다.
지금 우리 교육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인재를 선별할 평가제도를 만들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천재를 길러내는 일이다. 현행 평준화 제도와 특수목적고교로는 무한경쟁시대를 주도할 ‘일당백’의 인재를 키워내기 어렵다.
최근 일부 상위권 사립대학이 2005학년도 입학수시전형에서 학생생활기록부 성적을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고 고교간 등급을 적용, 일부 고교에 특혜를 주었다 해서 적지 않은 논란이 일었다.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일부 대학의 입시전형에 대한 감사를 실시해 고교등급제의 정체를 어느 정도 밝혀냈다. 그리고 고교등급제 금지조치를 재천명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고교등급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현행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과 내신만으로는 우수한 학생을 선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교등급제를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고교간 학력 격차가 점점 심화되고 있기에 이를 반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다. 경쟁이 치열한 대학일수록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고교등급제는 지방 학교나 상대적으로 경제적 지위가 낮은 지역의 고교에 재학중인 학생을 크게 차별하는 정책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가난을 대물림하는 또 다른 ‘연좌제’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일부에서는 고교등급제가 민주적 평등을 깨뜨리는 아주 나쁜 정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일부 상위권 대학들이 입시전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응시자 중 동점 탈락자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학생생활기록부에 적혀 있는 모든 자료를 다 동원해도 타당하고 공정한 평가기준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수십 명의 학생이 모두 전과목 ‘수’를 받고 다양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어 누구를 뽑아야 할지 난처하다”는 것이 대학 관계자들의 호소다.
상식적으로 납득되고 전문적으로 타당한 기준을 찾아낸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결국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학교간 격차를 인정하고 이를 전형자료로 활용하려는 시도에서 고교등급제가 나왔다고 본다. 대학측의 이러한 고충을 이해한다 해도 고교등급제를 시행한 것은 그 객관성이나 신뢰성 또는 타당도 등을 고려하면 성급한 결정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모적인 고교등급제 논쟁이 아니라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별할 공정한 평가기준을 확립하는 일이다. 이념논쟁으로 비화된 고교등급제 논란은 교육에도, 국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국형 교육논쟁’에 머물러 있는 동안 세계 각국은 나라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 강화에 골몰하고 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정한 학생선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경쟁률이 높은 대학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학생들을 골라낼 수 있는 입시전형 방법은 무엇일까. 본고사나 논술고사가 아닌 또 다른 평가방안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과외나 학원 등 사교육 수요를 늘리지 않고 우수한 실력을 갖춘 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제도는 무엇일까.
수십만 수험생 중에서 상위 1% 또는 5% 이내의 학생을 선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정상권 대학들은 상위 0.1% 이내 혹은 그 이하 비율 안에 드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려 한다. 이러한 욕구도 충족시키면서 현재의 수능을 급격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환해 선진국에 버금가는 입학 제도를 마련할 길은 과연 없는 걸까.
고교등급제 대안 ‘표준화 평가’
지능검사 결과 나온 IQ 지수는 누구나 신뢰한다. 토플(TOEFL)이나 GRE시험 결과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사람의 지능이나 실력을 집단 내에서 비교할 수 있고 과거에 응시한 집단과도 비교할 수 있다. 어느 나라 사람의 지능이 더 높은지, 또 몇년도 응시자가 더 실력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검사가 표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신뢰도와 타당도가 높으며 가비교성이 대단히 높다.
지능이나 학력을 측정하는 표준화 검사는 고도의 전문적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많은 연구와 비용이 소요된다. 문항 하나하나가 척도이기 때문에 정밀하게 검증된 문항 난이도 지수가 있고, 관련된 수많은 변인을 고려하고 통계적 분석도 해야 한다. 문제은행식 출제가 아닌 표준화 검사는 하나의 검사가 여러 개 문항으로 구성돼 여러 개의 배터리로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다.
이러한 표준화 검사로 학생의 학력을 평가한다면 우리 입시제도는 큰 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모든 학년의 표준화 학력검사가 마련되면 홈스쿨링이나 검정고시 같은 제도에도 상당한 변화가 올 것이다. 학교의 학력관리는 물론 교육행정제도의 혁신을 통한 선진국 수준의 교육도 가능해질 것이다.
현행 수능을 표준화 학력검사로 대치하면 ‘학력관리 개선’과 ‘공정한 입시관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본고사, 논술 등 대학별 추가 학력평가의 진행 여부도 재론될 여지가 없다. 표준화 학력검사의 타당도와 신뢰도만 높이면 다른 학력평가의 필요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응시자가 학교설립 이념이나 개별분야의 특수한 요구를 충족하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면접과정을 거치도록 하면 된다.
학생의 내신성적과 표준화 학력검사 결과를 근거로 대학이 자율적 학생 선발권을 갖는다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표준화 학력검사 결과를 소수점 이하 두 자리까지 표시하면 1만명 가운데에서도 석차를 뚜렷이 알 수 있다. 통계적으로는 10만명 이상의 집단에서도 석차를 가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석차의 차이가 갖는 현실적 의미가 크지 않기 때문에 다른 변인들을 고려해 학생을 선발하도록 할 수 있다.
고부가가치 창출 교육
우리 국민 대부분은 학교에서 성실하게 생활하고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면 그것이 곧 출세의 길이라고 믿고 필승의 신념으로 정진해왔다.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했을 때 과거에는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만 하면 됐다. 농업이 주산업이던 시절에도, 공업이 주류를 이루던 사회에서도 성실과 근면은 최고의 덕목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말 이후 이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 없는 새로운 기술로 고부가가치를 지닌 신상품을 개발해내는 것이다. 이동통신, 반도체, PDP, 조선, 자동차 등 첨단기술 분야는 지금과 같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리 경제가 뒷걸음치지 않고 플러스 성장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든 힘이다.
이제까지 우리 교육은 조상들의 문화적 유산과 선진국의 문물을 전수하기에 급급했다. 전수와 계몽, 깨달음과 성숙 이 교육의 화두였다. 선진국의 제도를 도입하고 과학기술을 학습해 그것으로 산업을 일으키고 무역을 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는 신기술, 신상품, 신서비스를 개척하는 첨단 지식과 기술이 우리 경제를 지탱해주는 힘으로 자리잡았다.
발명과 발견이 소수 엘리트의 천재적 창조물이라 존경받던 시대는 가고, 그것이 다중(多衆)이 실천하는 일상적 활동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맞고 있다. 단순히 공부 잘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인재를 얼마나 길러내느냐에 교육의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 교육계는 아직 전근대적 시대의 꿈에 깊이 빠져 새 시대의 도전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교육경쟁력은 주로 우수한 대학 진학이나 각종 국가고시 합격, 일류기업 취업률 같은 것으로 평가돼왔다. 국내 학교간 경쟁이 전체 경쟁의 범위였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국제 경쟁사회로 변모했다. 교육도 세계 강대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그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은 아직까지 농업사회의 교육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공업화 이전에도 치열한 입시경쟁이 있었다. 초등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별을 보고 집을 나가 자정이 지난 뒤에야 집에 들어오는 처절한 입시경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 같은 입시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취한 정책이 결국 평준화로 계속 발전해왔다.
하지만 평준화는 입시과열의 병리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지,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은 아니었다.
평준화 제도 한편으로 국제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 마련한 정책이 바로 과학고, 체육고, 예술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시험을 잘 보는 인재, 취직을 잘 하는 인재를 얼마나 길러냈는가’가 기준이 된다면 이들 학교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공부 그 자체만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성취를 이뤄내는 것이다.
독일의 ‘엘리트 업’ 프로젝트, 월반(越班)을 허용하는 영국의 교육개혁안, 미국 시카고 교육위원회의 학교구조조정안 등 교육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교육개혁안들이 앞다퉈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 교육의 흐름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수월성’이라는 새 화두
고교등급제니 본고사 부활이니 하는 논란은 국가 비교적 전략 차원에서 보면 특별한 의미가 없는 소모적 논쟁이다. 내신과 수능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관료제도의 기능적 자율성 속에서 이뤄지는 관행적 업무의 반복일 뿐이다. 그러한 반복은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직면한 위기와 도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세계는 중국의 부상을 주목하고 있다. ‘중국이 한국을 삼키는 건 간단하다’는 조롱도 들려온다. 일본은 어떤 분야에서든 한국이 자기들보다 앞서가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다. 세계 열강의 틈에서 생존하고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키려면 모든 분야에서 국가전략을 새롭게 수립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의 13억 인구와 겨루어 이기려면 국민 개개인이 한 명당 30명 정도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 일본에게 이기려면 한 명당 3명 몫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선조는 ‘일당백’을 해내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일당천’을 감당하는 인재인들 못 길러낼 까닭이 없다.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 1만명보다 뛰어난 천재 한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시대의 교육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이 시대의 교육은 개인이 잠재능력을 실현하도록 돕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아울러 정치 경제 과학 교육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정상이 될 만한 새로운 것을 창출, 전세계가 이를 구매할 수 있도록 국가 비교 차원에서 수월성을 갖춰야 한다. 수월성을 추구하는 교육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잃어버린 신의 형상을 되찾도록 돕는 것이다. 결국 교육이 경쟁력을 갖추는 길은 수월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학교교육은 단순하게 지식을 전수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신사고, 신지식, 신제품, 신제도 등 참신한 것들을 창출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생 모두가 자아를 실현하고 각자의 잠재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학교의 당연한 임무다. 그동안 국내 교육계의 고질이었던 과외, 학원수강, 입시제도, 학교 붕괴 등의 문제는 농경사회나 공업사회의 틀에서 이루어진 교육적 인습이 반복되며 생긴 것이다. 신지식, 신기술, 신산업 사회에서는 천재를 양산하는 학교 교육체제를 얼마나 잘 갖추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명운이 달라진다.
천재는 결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새로 학습해야 한다. 새로 학습한다는 건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평생을 두고 해야 하는 일이다. 천재 양성은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하나의 통합체제로 움직일 때 가능하다. 또한 직장마다 천재성을 발견하도록 지원하는 체제를 갖출 때 새로운 문명의 꽃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 교육계가 서둘러 마련해야 할 과제는 바로 천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학교교육체제를 마련하는 일이다. 그 토대가 선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강대국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한 역사를 펼쳐나가게 될 것이다.
일제시대 교육 뛰어넘자
현재 우리의 교육관행은 대부분 일제 식민시대의 유전이다. 생활지도와 교과지도의 원형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교육에 있다. 숱한 변화를 겪고 발전도 이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과거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일본, 중국, 한국이 거의 동일한 교육 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하다. 황인종의 교육제도라고 불러야 할까, 사각문자인 한자문화권의 틀이라고 해야 할까. 문제는, 교육에만 관련해 보면 이 틀로는 세계의 정상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새 틀을 짜야 한다.
새 틀을 마련하는 것은 몇천 년을 두고 지탱해온 인습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다. 정든 옷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낯설고 불안한 새 지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미지의 땅에 미지의 적들이 언제 기습 공격을 해올는지 알 수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일이다. 그러나 승리는 포화와 창칼을 뚫고 험한 지리와 궂은 기후의 공격을 이겨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게 아닌가.
모든 사람을 천재로 길러내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뛰어난 천재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교육시스템이란 공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고 눈앞의 시련을 극복하려면 그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문명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창조력일진대, ‘천재 양산제도’ 외에 학교 교육체제의 대안이 또 있겠는가.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백만이라도 너끈히 감당할 ‘천재의 대량 배출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박성수 서울 명지고 교장
신동아 2004년 12월 01일(통권 543 호)
學力 죽이고 學歷만 키운 줄세우기 경쟁
‘횡적 확산’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 지향해야
몇몇 엘리트를 위해 모두가 줄을 서서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광경. 2004년 한국 교육의 슬픈 자화상이다. 교육의 결과에만 치중하는 사회구조는 고교등급제, 내신 부풀리기 같은 반칙과 편법을 양산했다. 두 패로 갈라진 교육논쟁은 애꿎은 평준화 제도에 문제의 원인을 환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육이 사회 문제가 된 건 어제 오늘이 아니지만, 요즘처럼 어지럽지는 않았다.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삶의 주제 중 하나다. 그런데 그 교육이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만 잔뜩 쌓여 있는 데다 정신없이 헝클어져 있어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가뜩이나 시난고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바람에 더 고통스럽다
우리네 삶터마다 생각이 나뉘고 편이 갈라졌지만 적어도 교육만큼은 이대로 둘 수 없다는 데 고개 저을 사람은 없다. 문제는 교육 현안을 다루고, 이야기하며, 바꾸고 고쳐가는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는 것. 문제가 문제인 만큼 다툼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교육문제를 놓고 싸우다가 정작 깊고 오랜 병에 시름시름 앓는 교육을 구하기는커녕 병을 덧들여 아예 죽음에 이르도록 몰아가고 있다.
교육에 끼여든 사회갈등
지금 교육을 놓고 벌어지는 다툼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시각이 맞부딪쳐 생겨났다. 한쪽에선 “웬 지역차별이냐, 고교등급제는 또 다른 연좌제다”며 팔을 걷어부치고 다른 쪽에선 “내신 부풀리기와 고교평준화가 학력(學力)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와 교육이 경쟁력을 잃어 나라 망쳤다”며 입에 거품을 문다.
그런가 하면 정작 교육담론 안쪽에서는 점잖게 “교육 논리로만 따져봐야 할 것을 왜 쓸데없이 교육 바깥, 이를테면 사회적인 갈등을 끌어들이냐”며 눈살을 찌푸린다. 이런 와중에도 언론은 여론을 앞세워 싸움을 부추긴다. 교육 문제를 사건, 사고나 사회문제로 몰아가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교육문제를 더 어렵게 하고, 교육 이야기를 더 고단하게 만드는 것은 그 답이 엄연히 있다는 사실이다. 입시, 사교육 따위의 그 하고 많은 교육문제마다 실은 이상적인 본보기가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의 틀, 구체적인 실제 방안까지 모두 다 나와 있다. 다만 그 방안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 험하기 짝이 없을 뿐이다.
교육부의 下策 개혁안
교육을 둘러싼 싸움의 앞뒤를 가늠해보면 대체로 이렇다. 지난 2월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는 거듭 그럴싸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 뜻은 뻔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인 입시 제도를 손보아 입시위주 교육으로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고 엉망진창이 된 교육현장을 바로잡는다, 또 첨단기술이 극한경쟁으로 치닫는 지식정보사회에 걸맞은 교육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방송강의로 학생들의 수능 준비를 도와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주겠다’ ‘대입전형제도 개선방안을 마련하되 주로 학생생활기록부의 실질반영 비율을 높여 내신위주의 획기적인 학생선발 개선방안을 찾아보겠다’는 내용이 그 뼈대다. 입시위주 교육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공교육을 내실화하겠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극한경쟁에서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쏟아 붓다가 몸과 마음이 망가진 교육대중의 하늘을 찌를 듯한 괴로움을 어떻게든 달래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얽힐 대로 얽힌 교육문제가 기존의 제도를 손보고, 몇 가지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단숨에 해결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숱한 개혁안이 발표되고 실천됐으나 교육이 앓고 있는 병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번 안도 별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수능방송은 무너지는 교실은 아예 포기하고 TV 모니터에 입시교육을 맡기겠다는 것으로 고육책 중에서도 하책(下策)이요, 대입전형제도 개선방안 또한 아슬아슬한 걸림돌이 즐비하다. 한여름 뜸하더니 입시를 앞둔 가을 들어 그예 터질 것이 터졌다. 지금까지 쉬쉬했던, 그렇지만 언젠가는 한번 터지고야 말 일이었던 ‘고교등급제’와 ‘내신 부풀리기’ 문제가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몇몇 이름 있는 대학이 수시모집 과정에서 특정 지역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을 선호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운 전형방식을 쓴 사실이 밝혀졌다. 불이익을 당했다고 여긴 많은 학생, 학부모들이 발끈하며 나섰고 교육단체들이 줄지어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대학들은 하나같이 “일선 고교의 내신 부풀리기 때문에 변별력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참고자료로 수험생의 출신 학교 등 뒷배를 고려했다”고 방패막이를 내밀었다.
급기야 “학력이 국가경쟁력인 지식정보사회에서 이런 막무가내 평준화, 평등주의가 나라 망친다”는 큰소리가 터져나왔다. 다양성 가운데 수월성이 빛나는 것이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을 개천에서 용만 쓰게 하는 경쟁주의는 오히려 사회악이라고 악을 쓰는 데까지 이르렀다.
학생은 안중에 없는 싸움
이제 논쟁은 좀 잠잠해졌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대체 누구를 위한 다툼이고 싸움이냐는 것이다. 서로 명분과 대의를 앞세우고, 때로는 현실과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문제의 초점인 자라나는 세대, 우리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직무유기를 하고도 수수방관하는 교육정책 당국. ‘에헴’ 하며 지당한 말씀만 늘어놓는 교육학자. 목 좋은 가게 장사 잘하려면 그 정도 반칙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아예 마음대로 좌판까지 벌일 수 있게 자율성을 달라는 대학. 대기업에서 요구하니 힘없는 하청업체는 부실한 제품이라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납품할 수밖에 없지 않냐며 신세 한탄이나 하는 고등학교. ‘금쪽 같은 내 새끼’ 어떻게든 공부 잘해 성공하고 출세하도록 뼛골 빠지게 애써왔는데 부모 못난 탓에 좀 못살고, 어려운 살림 한다고 웬 차별이냐며 한풀이 해대는 부모.
이들에게는 그저 제 앞가림과 끝없는 욕심, 대리만족을 위한 투사(投射)만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가장 아프고 힘든 건 자라나는 세대, 우리 아이들일 텐데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뒷전에 밀려나 버렸다. 만일 참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이들의 앞날을 걱정했다면 처음부터 문제를 아이들과 함께, 아이들 눈높이에서 차근차근 풀었어야 했다.
고교등급제는 반칙
제로섬 같은 살벌한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편법도 마다하지 않던 교사와 학부모는 급기야 내신 부풀리기라는, 누가 봐도 비교육적이지만 적어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편법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대학측, 그것도 이름깨나 있는 대학들은 이를 빌미로 학생 개인이 아니라 학교 또는 지역에 차별을 두는 반칙을 저질렀다. 이는 소수를 위해 다수를 다치게 하는 공세적이면서도 폭력적인 반칙이다. 게다가 수능시험과 상관없이 다양한 특기와 적성을 지닌 학생을 선발하자는 수시모집의 본디 뜻과 다르게 학력에 연연함으로써, 이른바 고등학교에 등급을 매기는 알량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사태는 대학의 잘못이 더 크다. 이쯤 되면 제발 대학에 모든 걸 맡겨달라는 자율성 요구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촌에는 다양한 본보기가 있다. 모든 대학이 자율적으로 나름의 기준을 정해 학생을 고르는 미국 방식과, 대학에서 공부할 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고등학교에서 알아서 구분해주면 대학이 이를 받아들이는 독일 방식이 대표적이다.
어느 쪽이건 간에 사회나 교육대중의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 이런 제도가 시행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편법이 판치는 한국에서 어느 한쪽에만 자율성을 줄 수 있겠는가. 그러려면 자율성이 제대로 발휘될지, 그럴 만한 채비는 갖추고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나 자신 대학에 몸담고 있지만, 그래서 누워서 침 뱉는 일이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한국의 대학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결국 교육 당사자, 대중들이 교육문제의 핵심을 찾고 해결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에둘러 갈 것이 아니라 차제에 교육문제의 핵심을 바로보자. 지금 우리 교육을 두고 두 가지 가치관과 세계관이 대립하고 있다. 교육은 마땅히 엘리트를 선발해 잘 길러 사회에 유효하게 써먹도록 하는 일이라는 생각과, 교육은 많은 사람에게 두루 기회를 주어 사람 노릇하고 살 수 있게 키우는 일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학력에 ‘올인’하는 사회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상호배제적인 관계가 아니다. 다만 한국사회가 그동안 유교 이념에 가위눌리고, 다른 한편 서둘러 산업화하고 근대화하면서 무엇이든 급하게 써먹고자 한 실증주의에 쫓겨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었던 건 사실이다.
몇몇 엘리트를 위해 모두가 줄을 서서 ‘교육을 통한 성공과 출세의 신화’에 맞장구를 치며 억지 춘향 노릇을 해온 것이다. 부모가 성공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자식에게 온갖 선망을 심어주면서 오로지 결과 중심의 교육에 목을 맨 사회를 만들었다. 학력(學力)은 형편없어지고 학력(學歷)만 중시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러자 모두가 학력(學歷)에 ‘올인’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고 병목 지점을 통과한 사람들의 과두(寡頭) 지배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비단 돈과 권력뿐 아니라 영향력, 문화 및 사회적 자본까지 독점하고 대를 물리는 계층 재생산으로 이어졌다. 권위주의 정권이 지배했던 시대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며 이를 모른 척했다. 바로 그런 집단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자신들의 기반을 다졌다.
다행히 민주화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이걸 고쳐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상징이 이른바 ‘평준화’다. 물론 평준화 제도는 권위주의 시대에 도입한 것이지만, 그것이 뿌리내리는 과정이나 내용을 채우는 일은 사회와 교육 민주화의 핵심과제다. 또한 교육을 둘러싸고 오늘날 벌어지는 다툼의 핵심사안이기도 하다.
평준화 제도를 통해 입시교육의 고통을 덜고 교육기회 균등을 도모하겠다는 의도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기회균등은 이룩했는지 몰라도 진정한 평준화에 필요한 조건의 균등, 특히 지역이나 계층을 아우르는 교육 인프라의 확대·투자·개발 등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로지 부모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비생산적인 입시교육에 매진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키워온 탓이다.
그런 복잡한 사정을 하나하나 따져보지 않고 당장 눈앞에 벌어진 상황만으로 결과를 제 마음대로 재단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비교육적인 태도다. 특히 평준화가 학력(學力)저하를 가져왔다는 확실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개인의 능력, 가족문화나 교육환경을 비롯한 사회적인 여러 조건, 또래집단의 영향 등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제도 하나에 학력을 환원시키는 것이야말로 논리의 오류다. 게다가 지난해 실시된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학업성취도 국제비교 연구(PISA)’ 등의 결과(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를 봐도 15세 기준으로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못하기는커녕 너무 잘해 걱정이다. 과학, 수학, 읽기가 각각 1위, 2위, 6위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걱정이란 말은, 공부는 잘하는데 정작 학문능력이나 직업능력 등 그 후의 진정한 학력에는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평준화를 잘못된 제도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이런 숙제를 풀어가며 바꾸거나 고치도록 해야 한다. 교육문제의 심각성은 곁가지를 건드려서 오히려 몸체를 덧나게 하는 데 있다. 문제의 본질부터 해결해나가야 한다.
세상은 달라졌다. 지금은 소품종 대량생산으로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팔아 이윤을 남기는 산업사회 시대가 아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대량생산 구조를 갖춰놓고 국가가 규정한 기준에 따라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인재를 양성해서는 모두가 그렇게 바라는 경쟁력을 키울 수 없다.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다양성과 특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경쟁 위주 엘리트 교육을 넘어
다양성과 특성은 학력만으로 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니 학력으로 경쟁해서 공부 잘하는 엘리트만을 가리고 기르는 교육체제로 돌아간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핵심사안인 평준화만 해도 경쟁 위주·시험 위주의 엘리트 교육체제가 아닌 횡적인 확산을 지향해야 한다. 학교체제의 다변화를 꾀해 교육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넓혀야 한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대학에 자율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을 주어도 괜찮다. 하지만 학력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가려 뽑는 게임의 법칙이 유지되는 한,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수능이나 내신처럼 모든 영역을 다 잘하는 사람은 범재(凡才)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다양한 보통사람과 특출한 천재가 어우러져야 한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죄다 범재로 만들어내는 교육을 바꾸지 않고는 어떠한 해법도 소용이 없다.
산업사회까지는 이른바 ‘방법의 지식’이 중요했다. 이를테면 아이가 배고프다고 칭얼댈 때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지식정보사회에서는 ‘상상력의 지혜’가 중요하다. “바다로 나가야 한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배를 만들어주거나,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이들로 하여금 바다를 미치도록 그리워하게 하면 된다”고 한 생 텍쥐페리의 이야기야말로 이미 우리 앞에 시작된 미래를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그런 그리움을 전해주려면 어른들이 그런 그리움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품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그리움을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요즘 벌어지는 교육의 다툼 한복판에서 괴로워하며 나는 이런 그리움을 애타게 그리워한다.
정유성 서강대 교육학 교수
3교시 토론
니케 논제 선정의 시대적 배경 : 시사에 관한 논제는 신문스크랩이나 칼럼, 심지어는 부모님 말씀도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1974년에 시작된 고교 평준화 문제는 거듭 변화되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정책입니다. 수월성 교육(우열반 편성)이나 특수 목적고(외고,과학고)등은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정책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중요한 이슈가 되는 이유는 세계화 시대의 국가 경쟁력이나, 신자유주의라는 사상적 흐름, 경쟁과 성장 중심의 시대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보완책으로 누더기가 된 고교평준화를 완전히 폐지하자는 주장과 지금도 황폐화된 교육현장에서 그나마 교육적 평등정책인 고교평준화를 없앤다면 고등학교 현장은 완전히 붕괴될 것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보수 논객이나, 한나라당 그리고 이 논술경연을 주최한 전경련은 어떠한 주장을 할까요?
니케 덧글 토론입니다. 평준화 유지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고 그 근거를 적어보고 서로가 반박하는 형식으로 이어지겠습니다.
julito 저는 고교평준화에 대해 반대합니다. 평준화 찬성 측이 들고 있는 교육적 평등을 위한 고교평준화는 단순한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제 생각에는 평등한 교육기회라는 명분 아래에서 행해지는 획일화된 교육강요일 뿐입니다. 저는 이러한 획일화된 교육이 성적지상주의, '사'자 들어간 직업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이공계(혹은 실업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까지 함께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교등급제를 시행될 경우, 상위권 학생에 대한 수준높은 교육이 제공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육 혹은 학습 분위기까지도 포함됩니다. 하위권 학생들은 등급화 과정에서 단순히 성적의 하위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전적 학습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 아니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허브 음.. 저도 평준화에 반대합니다. 평준화의 목적은 대학입시에서 고교를 차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엔 고졸은 반드시 대학에 들어간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거기에는 고질적인 학벌 지상주의도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수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 아니라 정책적인 문제일 뿐인 '대입'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평준화같은 편의주의적 정책은 사라져야 합니다.
니케 평준화를 반대하는 근거가 획일화된 교육이라는 것이지요. 성적지상주의나 이공계 기피현상 등도 평준화 때문인가요? 아니면 성적이라는 획일화된 잣대로 평가되어지는 사회적 인식때문인가요? 그렇다면 평준화는 유지되어야하지 않나요. 평준화의 반대 개념이 고교등급제는 아닙니다. 고교등급제는 현행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내신의 서열을 정하고 그 격차를 입시에 반영하는 제도입니다. julito의 학교는 특목교에 비해 차별을 받고 본인이 피해를 본다면 찬성할 것입니까? 혹시 본인은 엘리트 집단에 속해서 그런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요. 지금도 특목고나, 자립고 등 특성화 학교를 위한 중학생들의 입시를 위한 과열이 심하잖아요. 이제 평준화가 해제되면 지역마다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한 중학교 학생들의 교육 환경은 더욱 열악해질텐데요. 이런 현상에 대한 대책은 있나요?
니케 평준화에 대한 정확한 용어 정리가 필요합니다. 평준화는 인문계 고교에만 해당됩니다. 인문계 고교 진학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타학교로 배정받는 경우입니다. 당연히 대학을 전제로 하는 고교에 대한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고교입시에 대한 과열을 방지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부작용도 많이 생겼지요. 학교안에서의 학력 격차가 커졌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학교 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이라하여 수준별 학습을 통해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력이 수준이 하향평준화되었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수도권 평준화 학교의 학업성취도가 비평준화 지역 성취도보다 부족하지 않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미 엘리트 교육을 위한 특목고(외고,과학고)및 자사고 등 특성화 학교의 정원이 상당합니다. 이미 평준화 유지에 의해 우려된 엘리트 양성에 관한 대책도 시행되고 있습니다. 평준화 해제를 주장하기 위해 제시된 통계나 주장은 모순이 많습니다. 현 교육의 제 문제가 평준화를 해제한다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도와 다른 사회적 인식이나 편견같은 것이 원인인 것이지요. 괜스레 고교 평준화는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julito 우선 고등학교 때 공부하려는 마음을 먹은 학생들에게 고교등급제가 큰 피해가 될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방과후 수업과 고등편입활성화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본 같은 경우에도 고등학교를 임의가 아닌 방식으로 지원하게 하는 일종의 등급제를 실시하자 방과후 수업을 통해 많은 부분을 보충했습니다.
julito 하지만 등급제 피해가 저한테 올경우를 생각해 보라고 하신 말씀은 큰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육정책도 현재의 학생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면 그만큼의 기간을 가지고 시행되어야 합니다. 고교입시와 관련되었다면 현재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적용되어야 옳습니다. 오랜기간동안 지적받아온 교육부 정책의 문제점이죠.
또한 고교 진학을 임의로 하는 방식은 등급제 실시시 폐지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또한 학교 내 학력격차를 수준별 수업으로 해결하고자 하지만 학교마다 수준별 수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 아니며, 고교등급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체계적입니다. 또한 수도권평준화와 비평준화 지역의 점수가 비슷하게 나왔다고 하지만 이는 통계 해석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대한 평가는 학생을 얼만큼 발전시켰냐는 것입니다. 즉, 그 학생들의 입학실력과 같은 시기의 점수가 비교되어야 옳지요. 만약 평준화 지역의 고교가 비평준화 지역보다 훨씬 더 중학교 성적 등이 높은 학생을 받았는데도 점수가 비슷하다면 그것이야말로 하향평준화겠지요.
julito 또한 특성화 학교 정원을 말씀하셨는데 그 인원은 아무리 많아도 어디까지나 일부입니다. 수준별 교육은 학생의 권리이라는 점에서 볼 때 모든 학생들이 대상이 되어야 옳습니다. 또한 특목고 입시 과열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은 일반계고에 가면 하향평준화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반계고의 등급제가 그런 문제를 해소할 여지도 갖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사회적 인식 편견은 획일화된 교육 때문에 생기는 성적지상주의의 개인적, 사회적 폐해 때문입니다. 즉 다양성을 제한하는 것이지요. 다양한 수준의 교육이 이뤄진다는 것은 다양한 방향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사회적 인식의 파괴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니케 julito! 고교 평준화 반대의 논리를 나름대로 잘 전개하고 있습니다.토론을 이끌어 가기 위해 반대의 논리를 더 전개하겠습니다. 예전과 달리 현재에는 평준화 반대 주장이 80~90%입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보다는 보수 신문 칼럼을 인용합니다. 평준화는 학력의 하향 평준화일 뿐 지금의 무한 경쟁 시대에 맞지 않는 평등주의 정책이라는 것이지요.인재 1%가 전체를 먹여살리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지않는 정책이라는 것입니다. julito ! 고교 등급제는 대학에서 전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서열화해서 그 학교 출신들을 제도적으로 우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통계의 기준은 최근 3년간의 대학 진학률입니다. 이는 매우 주관적인 통계이고 특목고 학생이나 서울 강남의 학생들을 우대하기 위한 편법입니다. 인생이 달려 있는 대학 입시가 주관적이고 매년 달라지는 기준에 의해 실시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니케 또한 통계 또한 잘 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고나 과학고와 평준화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의 학업성취도 평가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서울 강남의 학생들과 다른 지역의 성취도가 높은 것은 이미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차이가 나는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미 평준화는 해제되어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평준화 해제의 철학적 가치는 자유로운 경쟁이 보장되고 학습 능력이 성장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평준화 해제를 통해 국제 경쟁력이 있는 개성있고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하지만 사실은 대학입시의 과열을 고등학교로 내리는 결과일뿐이라면 ......
니케 julito ! 평준화가 다양성을 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입시 위주의 고등학교의 서열화인 평준화 해제가 이를 조장하지 않을까요? 현행 평준화 체제에서도 체육이나 음악 등 예체능 과목시간의 운영이 어렵고, 특별활동이나 동아리 활동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미국처럼 대학입시에서 특별활동이나 사회 봉사 활동에 대한 인센티브가 보장된다면 현행제도가 훨씬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이 가능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훌륭한 인적자원 개발에 달려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원론적으로는 경쟁을 통한 인재 양성이란 점에서 맞는 애기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미래를 고교 평준화 제도의 철폐가 아닌 개선과 발전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는 비평준화 교육이 객관식 답 밖에 찍을 줄 모르는 바보를 만들고, 평준화 교육이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리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니케 그래요 쉽게 생각했는데 아니지요. 평준화 를 반대하는 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 창의적이고 능력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교육여건입니다. 과학고나, 외고나 예술고교를 만든 이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고는 이공계 영재를, 외고는 어학 영재를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친구들이 그렇지 않은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평준화의 문제가 철학과 가치라는 학문적 영역이 아닌 도구적 상황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니케 그러면 니케는 고교평준화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덧글 토론으로는 평준화를 유지하는 쪽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사실 토론의 전개를 위해 상호 의견을 개진해 보았습니다. 사실 나의 의견도 평준화를 폐지하자는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나 보수 논객 논객들의 의견과는 달리 철학적인 가치기준으로 설명하려합니다. 내용이 많아 덧글로 올리겠습니다.
julito 아.. 니케 님의 반박에 철학적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거렸습니다. 확실히 많이 답답하더군요. 하지만 무엇보다 고교등급제의 기준은 개선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고교의 입시실적이 낮았다고 봤을 때 그것이 다음해에 영향을 줄 것이고 이러한 악순환은 치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표준편차와 성취도평가 혹은 시도교육청모의고사 등을 이용한 지표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니케님이 벌써 의견을 다셨지만.. 제가 준비했던 반박은.. 우리가 비평준화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경쟁이라는 우리가 평생만나야 할 사회체제를 한 발 더 일찍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전세계가 맞이한 경쟁체제에서 입시과열은 오히려 우리의 경쟁력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도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견에 대해 적잖이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와 과정'이라는 것의 비중에 관해선 또 하나의 새로운 토론을 해야 가능한 철학적 논제 같습니다.
언니 평준화를 해제한다고 해서 글로벌 시대를 이끌 인재를 육성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문계는 준화를 계속 유지하면서 실업계와 특수목적학교(과학고와 외국어고)를 목적에 걸맞게 내실있는 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교양있고 사고력이 있는 시민을 육성한다는 교육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모든 사람이 인재가 되고 지도자가 될 수 없으며 되서도 안됩니다. 지도자의 이끔을 따라서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있는 민중도 필요합니다. 각 학교가 설립목적에 따라 교육을 충실히 한다면 굳이 인문계 고등학교의 평준화를 해제하여 모든 사람을 입시 경쟁에 뛰어들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니케 언니! 반갑습니다. 이렇게 토론에 한번 끼어들면 맘대로 나가기 어려운 것 아시죠. 사실 메인 토론에서 다지적한 바 있습니다. 평준화 해제와 유지가 인재 양성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니라 했습니다. 아무리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합목적인 시스템도 현실과 타협하면서 도구화될 때 속수 무책일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의 여건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사실 고교 평준화는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1970년대 명문고의 정원을 현행 특성화 학교(특목고,자사고 등)의 정원이 훌쩍 뛰어넘고 있으며,입시 과열을 방지하고 지역간의 교육 양극화를 막아내기 위해 실시한 목적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신,수능,논술에 관한 사교육 열풍은 갈수록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평준화를 해제한다고 해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부정적 변화를 예상하는 것보다 열린사회와 무한 경쟁시대에 걸맞게 어떻게 해결하고 보완해야 할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julito ^ㅡ^ 언니님도 동참하신 건가요~~~ ㅋ^^
음... 하지만 전 언니 님의 의견이 지나치게 계급화된 사회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아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입학하게 될 고등학교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 결정된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언니 날라갔네 .......ㅜㅡㅜ
언니 어느정도 자신의 진로를 정한 고등학교에서 받은 교육이 사회적 역할을 결정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이미 공교육을 10년정도(유치원포함 중학교까지) 받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회화교육은 다 받은 것입니다.
만 계층을 구성하고 계층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사회의 계층 구조문제로서 다른 문제입니다.
좀더 과격하게 주장하자면 고등학교 입학할 때 계열별 지망릉 받은 후 평준화 정잭을 실시하면 좋겠다는 대안도 있습니다. 즉 인문계끼리, 실업계끼리, 과학고끼리, 외국어고끼리 지원을 받은 후 추첨에 의한 배정을 하는 것이입니다. 이는 몇몇 엘리트 양성을 위한 입시 경쟁에 모든 학생들을 밀어넣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국가적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효율성도 떨어지고, 경제적 낭비도 극심하며 또한 많은 학생을 좌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고교 입시경쟁은 어린 중학생 모두를 입시지옥에 빠뜨릴 것입니다.
평준화 해제에 앞서 기존의 학교들이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내실있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그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는 것입니다. 평준화를 해제하는 것에 대한 보완책으로
니케 언니! 이미 중학교에서 입시 경쟁은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안 다니던 학원을 몇개 씩 수강하잖아요. 그래요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그들은 좋은 대학교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잖아요. 전부는 아니라고요.하지만 나름대로 원하는 대학의 정원이 10배쯤은 필요할 걸요. 언니가 주장하는 것은 독일식 짐나지움 교육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좋지요. 독일의 경우는 길드라는 역사적 경험이 이 모든 것들을 당연케합니다. 독보적인 기술로 먹고 살기 위해서도 대학이라는 곳은 나와야 하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 실업계 학생들의 대학 진학율도 장난아니잖아요. 모두가 자기 자신을 만족하는 삶을 위해서 그런 사회가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니케 한국 사회는 능력이나나 기능보다 학벌이나 학위,신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동국대 신정아 가짜 박사 , 이지영 영어 강사 사건들이 그 단면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 아마도 강남의 학원가의 학력 위조 또한 많을 겁니다. 물론 고쳐져야 겠지요. 산업사회로릐 역사가 짧기 때문에 이들 뒷받침해 주는 건전한 도덕과 철학의 형성이 부족합니다. 인문학의 위기나 이공계 기피 현상이 하루 아침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가 복지와 평등의 이데올로기가기울어져 가고,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시대'가 당연시 되는 시대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1973, 74년도 신문 스크랩을 본적이 있습니다. 고교평준화 때문이죠. 그 당시 주장했던 평준화의 정당성은 교육의 천국을 만들 것 같더군요.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문제는 하나도 고쳐진게 없어요. 요즘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쟁을 바탕으로하는 이기적 욕망이라는 절대 명제를 부정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결과의 평등을 주장했던 이데올로기도, 복지의 천국을 주장했던 수정자본주의론자들도 이제 입지가 좁아져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