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반의 탤런트를 직접 보면 보성의 명물(名物)이라 불러도 누가 시비걸 만한 사람이 없을 게다. 보성 득량면 비봉리2구 선소(船所)마을의 김유남씨(71). 2004년 가을, 소리꾼 찾으러 벌교장으로 가던 기차간에서 처음 만났다. "순천으로 공연간다"고 하던 어르신은 "우리 동네 가구수는 백다섯, 성씨는 열 서이, 홀엄씨는 스물 서이"하면서 좌중을 웃기더니 "이장도 해보셨겄네?" 여쭸더니 "이장 반장 된장 다 해부러"하며 빼어난 애드리브(ad lib)를 과시했다.
*남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어보면 의외로 생채기가 많다. 김유남 어르신의 경우도 그렇다. 위로 두 형이 여순반란 사건과 연루돼 비명횡사했다. 큰형에게서 난 두 조카를 키워냈고, 한쪽 수족을 못쓰는 누이동생까지 같이 살면서 시집보냈다. 부인 황점례 여사(65)의 증언이다. "어매 아버지 땀새 자기 인생이 끝난 사람이여. 우리 새끼들에다 조카 둘이, 몸 안좋은 시누까지 거두고 살았소. 부모 모시고 사니라고 공부도 못하고, 남의 집이 품팔이해서 어매 아베 밥해 믹이고, 말도 못하게 고상을 많이한 양반이요.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해가꼬 지금은 골골골 해."
*온몸에 고생이 박힌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예 담담하다. 수많은 동시대의 민중들처럼 김유남 어르신도 빈곤에 찌들려 사느라 어려서 글을 익히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쌀이 없어 이웃집에서 사잣밥 하라고 쌀을 갖다줬을 정도였다. 대신 남의 집 살이를 예사로 하면서 '동냥소리'를 좀 배웠다. "열일곱 살에 1년 동안 보성 회천에 가서 일해주고 동냥공부 배왔제. 심바람도 해주고 농사도 해주고 그래. 돈있는 사람은 돈주고 배우고 돈없는 사람들은 일을 해주고 배와. 남들 배우면 곁에서 들어보고 따라서 해보고 그래. 팽이야 동냥소리제 동냥소리." 김유남 어르신이 <보성소리>의 완성자로 알려져있는 보성 회천면 도강리 송계 정응민댁에서 소리 배운 내력이다.
*묻는 말마다 기막힌 재담으로 받아치는 솜씨 내력도 궁금했다. "내가 어렸을 때 솔찮이 재양스러웠어. 재양스런께 배우제. 시골에 약폴러 댕긴 노래쟁이들 안 있다고? 그 사람들이 와서 하는 것을 찬찬히 들어봐. 듣고 외와. 그래가꼬 집에 오먼 이녁이 자습을 해. 그때가 스물 다섯 여섯 그랬을 땐디 그때 모도 배운 것이제." 오로지 독학(獨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못배운 대신 만담(漫談)과 소리를 머리에 쟁여둔 재주는 멀리까지 소문이 나서 중앙방송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때는 전화가 없어논께 편지가 늘 왔어. 서울KBS 방송국에서. 서울서 사는 우리 종씨들이 이런 사람 데려다 코미디언 시키라고 그랬는갑입디다. 그란디 이 양반이 효자여라우. 없는 가정에 삼시로 글도 안 배왔는디 내가 그런데 가서 부모하고 조카를 띠어놓고 살어야 그럽디다. 집안을 못 잊어서 못 갔어요" 부인 황점례씨의 말이다. 그때 KBS에 갔었더라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장소팔 고춘자를 능가하는 일급 코디미디언이 되었을까. 당신은 지금도 안가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그때 우리 부모들이 밥먹을 형편만 됐으먼 내가 서울 갔제. 서울 갔으먼 김유남이는 진작 죽었을 것이네. 돈벌어가꼬 가이나들(여자들) 다 줘불고 술먹고 그래가꼬 병신이 되았든지."
*사실 당신의 소리는 여느 농촌의 들노래 앞소리꾼과는 달리 재담이 많이 섞여있다. '김유남 더늠'이라고 해야 할까. 국악인들이 보기엔 옆길로 많이 샌 것이고,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입장에서 보면 퍽 매력적인 것이다. 당신이 즐겨부르는 단가 <편시춘>을 보자. "...기천년 미귀혼이/너도 또한 슬프련만/천고상심 우리 인생들은/봄이 돌아오면 수심이라.."이런 사설을 김유남 어르신은 이렇게 부른다. "기천년 미귀혼은/너도 또한 슬펐구나/천고상심 인생도/봄이 오면 수심도 온구나..." 아무래도 당신의 경쟁력은 '소리'보다는 '만담'인 듯하다. 사람들 반응이 시원찮다 싶으면 바로 만담으로 방향을 잡는다. "자, 치자(字)부터 들어갑시다/멸치 갈치 병치 준치 모래무치 꽁치 한사치 복어치/요래 갖고 치잡니다/자 어(魚)자를 한번 들멕여 보자/숭어 농어 병어 잉어/개오리 까지 오징어 낙지/서대 양태 기(게) 고동 문저리 전어...(중략)요놈들을 딱 믹여논께는/천병이 딱 걸려부렀어 많이 퍼 먹어갖고/대갈(머리) 난 건 천창/눈에 난 건 안창/코에 난 건 비창/입에 난 건 감창/등에 난 건 등창/손에 난 건 수창/발에 난 건 족창/붕알에 난 것은 낭창" 기어이 그것까지 들멕이고서야 만담을 맺는다.

*그 정도의 재담꾼이 자식들까지 다 여워놓은 마당에 농사짓고 살 까닭이 없다. 부부 먹을 것, 자식들 6남매 식량할 여섯 배미 농사도 놉으로 짓는다. 대신 전남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여소리>를 한다. 젊은 시절에 들어서 외워둔 노래 밑천 덕택이다. "보통 얼마 드릴 것잉께 오씨요 하고 전화가 와. 여수 순천 광양 구례 곡성 장흥 화순 능주 안 가본 디가 없어. 사람들이 김유남이를 보먼 환장을 한당께. 재미지게 잘한다고. 어쩌다 가난한 집이서 전화가 오면 무료봉사도 해주제. 내가 생이(상여)를 메고 확성기로 노래를 하는디, 네시간이고 다섯시간이고 해도 하던 놈을 안해. 내가 2천 자리 이상을 외제."
*이제 밥먹고 살만한 세상이라 온갖 고생한 기억도 잊혀져 간다는 김유남 어르신. 값싼 소리북 하나에 북채 하나면 당신에게 병(病)이 자리잡을 일이 없을 것 같다. 누구든 마을 앞 득량만에 쭈꾸미가 나올 철에 선소마을에 가서 "어르신 쭈꾸미 얻어먹으러 왔어요" 한번 해볼 일이다. 모르긴 해도 그분의 넉넉한 인정이라면 쭈꾸미 한 대접 푸짐하게도 먹여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