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훈은 11월 5일(토) 대전문인총연합회원들과 함께 김유정 박인환을 찾아 떠나는 문확기행을합니다***
** 김유정문학촌에 대해 알기**
가. 출생 환경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부(春川府) 남내이작면(南內二作面) 증리(甑里-실레) 427번지,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서 부친 김춘식(金春植) 모친 청송(靑松)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출생, 10대조 김육(金堉)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실학(實學)의 선구자였으며, 9대조 김우명(金佑明)은 현종(顯宗)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였고 숙종(肅宗)의 외할아버지였다.
고조부 김기순(金基恂) 때 춘천 실레마을로 이주했다. 증조부 김병선(金秉善)은 실레마을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거유(巨儒)인 김평묵(金平默)을 초빙, 학당(學堂)을 열고 자제들을 교육케 했다.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 학풍(學風)을 이어받은 조부 김익찬(金益贊)은 춘천 의병(義兵) 봉기의 배후 인물로 재정 지원을 했다.
조부때 6천석 추수를 하는 춘천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음직(蔭職)으로 도사(都事)벼슬. 김유정이 탄생하는 그해에 춘천의 2차 의병봉기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기세가 드높았다.
나. 김유정의 삶
유정은 1908년 2월 12일(음력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자주 횟배를 앓았다. 또한 말더듬이어서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으나 늘 그 일로 과묵했다.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결석 때문에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때 김유정은 당대 명창 박녹주에게 열렬히 구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야학운동을 벌인다.
1933년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1933년 처음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다. 이어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활발히 작품 발표를 하고,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작품활동을 벌인다. 왕성한 작품 활동만큼이나 그의 병마도 끊임없이 김유정를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한다.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편지 쓰기(필승前. 3.18)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양력) 그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1938년 처음으로 삼문사에서 김유정의 단편집 <동백꽃>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우직하고 순박한 주인공들 그리고 사건의 의외적인 전개와 엉뚱한 반전, 매우 육담적(肉談的)인 속어, 비어의 구사 등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1930년대 한국소설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작품은 우리 가슴 속에 깊은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의 모습 또한 깊이 각인되어 앞으로도 인간의 삶의 형태가 있는 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다. 유정의 사랑
........저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미완성 장편소설 '생의 반려' 중에서
김유정이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여읜 슬픔은 그의 자전적 소설 '생의 반려' 속에 잘 나타난다. 매일매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던 김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김유정의 첫사랑 박녹주이다. 그때부터 김유정은 박녹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으나, 그의 애절한 마음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당대의 유명한 명창이자 기생이었던 박녹주가 네 살 연하의 김유정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우리는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를 통해 김유정과 박녹주의 그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이산 저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고향마을에서 김유정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고향에서도 김유정은 나이 많은 들병이들과 같이 어울리며,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눈다.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 12편의 작품이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박녹주 : 1906.2.15~1979.5.26 판소리 명창.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출생.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宋萬甲), 정정렬(丁貞烈), 유성준(劉成俊), 김정문(金正文)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박봉자: 시인. 박용철의 동생이다. 잡지 <조광>에 '사랑의 편지'란 공동 제목으로 김유정과 나란히 글이 실린 것이 인연이 되어 김유정으로부터 30여 통의 편지를 받았으나 답장은 일절 없었다. 차후 김유정과도 알고 지내던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하여 김유정을 또 한 번 좌절케 했다.
라. 구인회
1933년 결성된 문단작가 모임이다. 시인 김기림, 소설가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극작가 유치진, 조용만, 소설가 이태준, 시인 정지용, 소설가 이무영이 결성하였다.
얼마 후, 이종명, 김유영, 이효석이 탈퇴하고, 소설가 박태원, 이상, 시인 박팔양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 조용만 대신에 소설가 김유정, 평론가 김환태로 교체되어, 항상 9명의 회원을 유지하였다.
1930년대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당시 순수문학의 가장 유력한 단체로 활동하였으나 4년 만에 해체하였다. 이상과 박태원이 중심이 되어 <시와 소설> 이라는 동인지를 펴냈다.
마. 작품 포인트
1) 만무방이 살았던 농촌과 김유정
김유정이 살았던 농촌에서는 일본의 식민통치 초기부터 1910년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 [산미증식계획]의 명목으로 침략전쟁의 뒷바라지와 차질 없는 식량공급을 강요해왔다.
1920년 경제공항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일본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등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켜 한국을 더욱 강압적으로 약탈하고 상품시장으로 만들었다.당시의 농촌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지주와 마름, 그리고 소작농민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번이 마름이란 욕 잘하고 사람 잘치고 그리고 생김생기길 호박개 같애야 쓰는거지만 장인님은 외양이 똑됐다. 작인이 닭마리라 좀 보내지 않는다든가 애벌논때 품을 좀 안 준다든가 하면 그해 가을에는 영낙없이 땅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면 미리부터 돈도 먹이고 술도 먹이고 안달재신으로 돌아치든 놈이 그 땅을 슬쩍 돌아안느다. 이 바람에 장인님집 외양간에는 눈깔 커다란 황소 한놈이 절로 엉금엉금 기여들고 동리사람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면서도 그래도 굽신굽신 하는게 아닌가 ---봄봄 중에서, 김유정 전집. 1987
소설 '봄‥봄'에는 읍내 사는 배참봉댁 마름인 봉필영감이 등장한다. 그리고 '봄·봄'과 '동백꽃' 이 외에 작품에서도 마름과 소작인의 관계가 드러난다. 지주는 토지 소유자로 농지가 없는 소작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심복이라 할 수 있는 마름을 시켜 소작 농민을 감독하고, 소작료를 징수했다. 그런 과정에서 마름은 소작농민을 노예처럼 함부로 다루었고, 지주와는 별개로 수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지주는 수리조합비·비료대 등의 각종 부담까지 소작농민에게 전가하여 80%의 소작료를 수탈하였다. 소작료 이외에 노력봉사·경조사 비용 등 각종 명목을 소작농민에게 부담시켰다. 소작농민은 지주에게 신분적,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노예나 다름없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관념적 피상적 농촌소설과 달리 김유정은 실감나는 농촌소설을 썼다. 그것은 체험과 관계가 깊다. 그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했다. 또 소박하면서도 황소고집이었다. 그것은 산골에서 직접 살며 농촌 분위기를 가까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 시대의 가난한 농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영원한 산골 나그네
1930년대가 평론가 안함광과 백철에 의해 재기된 한국 농민문학이 농촌 혹은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 한설야의 "탑", 김남천의 "생일전날", 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흙의 노예"와 "제1과 제1장", 김동리의 "산화", 현덕의 "남생이", 박영준의 "모범경작생"과 "목화씨 뿌릴 때" 그리고 김유정의 "동백꽃"과 고향을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 심훈, 이무영 등의 작품이 일제의식민지 농촌의 수탈현상이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그 속성으로 안고 있는 취약성, 또는 한국농업이 처해있는 역사적 생산 조건 따위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으므로, 많은 문학적 결함과 이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소재를 찾는 일종의 소재주의 위험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김유정의 문학은 이런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일정한 문학적 성과를 일구어 냈다. 당대의 농촌을 모르고서 한국의 사회현실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또 그 현실에서 태어난 문학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김유정의 문학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농민의 고단단 삶이 작품 속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3) 고통을 감싸는 웃음과 해학
1930년대가 평론가 안함광과 백철에 의해 재기된 한국 농민문학이 농촌 혹은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 한설야의 "탑", 김남천의 "생일전날", 심훈의 "상록수", 이무영의 "흙의 노예"와 "제1과 제1장", 김동리의 "산화", 현덕의 "남생이", 박영준의 "모범경작생"과 "목화씨 뿌릴 때" 그리고 김유정의 "동백꽃"과 고향을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 심훈, 이무영 등의 작품이 일제의식민지 농촌의 수탈현상이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그 속성으로 안고 있는 취약성, 또는 한국농업이 처해있는 역사적 생산 조건 따위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으므로, 많은 문학적 결함과 이론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농촌에서 소재를 찾는 일종의 소재주의 위험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김유정의 문학은 이런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나름대로 일정한 문학적 성과를 일구어 냈다. 당대의 농촌을 모르고서 한국의 사회현실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또 그 현실에서 태어난 문학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김유정의 문학이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농민의 고단단 삶이 작품 속에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4) 만부방과 따라지, 그리고 돌뱅이들이 어우러진 강원도 아리랑
유난히 김유정의 작품에는 아리랑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아리랑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 가게
강원도 금강산 일만 이천봉
팔만 구암자, 재재 봉봉에
아들딸 날라구 백일기도두 말게구
타관 객지 나선 손님을 괄세두 마라
논밭전토 쓸만한건 기름방울이 두둥실
게집에 쓸만한건 적조간만 간다네
아주까리 동백아 흐내지 마라
산골 큰 애기 떼난봉 난다
네가두 날만치나 생각을 한다면
거리거리 노중에 열녀비가 슨다
네팔자나 내팔자나 잘먹구 잘입구
소라반자 미닫이 각장장판 샛별같은 놋요강
원앙금침 잣모베개에 깔구덮구 잠자기는
삶은 개다리 뒤틀리듯 뒤틀렸으니
웅틀붕틀 멍석자리에 깊은 정이나 들이세
-수필 '강원도 여성' 중에서
소설 '만무방'의 응칠이 입을 통해서 당시 시대적 상황, 즉 소작마저도 어려워 빚만 늘어나 야반도주를 하고, 수수 일곱 되에 같은 농민끼리 살인도 마다 않는 모습과 소설 '안해'에서는 아내를 들병이로 내보내려는 따라지와 만무방들의 모습을 애절하고 처절하게 보여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증긔차는 가자고 왼고동 트는데
정든님 품안고 낙누낙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낼갈지 모래갈지 내모르는데
옥씨기 강낭이는 심어뭐하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 소설 '만무방' 중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춘천아 봉의산아 잘있거라
신연강 배타면 하직이라......
- 소설 '안해' 중에서
팔라당 팔라당 수갑사 댕기
곤때도 안묻어 쥔애비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시에미 죽어선 춤추드니
방아를 찔적엔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 문인끽연실, 중앙, 1936.2에서
입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잘살고 못살긴 내복분이요
하이칼라 서방님만 아더주게유
입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 수필 '닙이 푸르러 가시든 님이' 중에서
작품에서 발견되는 아리랑은 삶에 대한 한이며 애착이다. 박녹주에 대한 사랑, 궁핍한 생활, 죽어가는 몸.... 그의 작품 대부분이 당시 농민과 도시 서민의 모습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으나,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 ‘아리랑’을 통해 슬픔을 감내하고 삶을 긍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죽는 날까지도 고향의 봄을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만무방, 따라지와 들병이가 불렀던 ‘아리랑’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 투영시켰던 김유정의 아리랑이 들리는 듯하다.
5) 김유정의 동백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의<동백꽃>중에서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은 남쪽 해안에 피는 상록교목의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꽃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혹은 산동백이라고 불러왔다.
「정선아리랑」의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의 올동박이 바로 생강나무 노란 꽃이나 까만 열매를 의미한다.
대중가요「소양강처녀」의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이 오면 / 돌아와 주신다고 맹세하고 떠나셨죠’에 나오는 동백꽃도 생강나무 꽃이다.
김유정은 소설에서, 붉은 동백꽃과 구별이라도 하려는 듯이 ‘노란 동백꽃’이라 표현하고 있다. 당시 강원도의 동백꽃이 생강나무라는 것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인데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라고 꽃 냄새를 절묘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6) 고향에 금병의숙을 세우다
박록주에 대한 구애가 거절당한 데다 연희전문에서 제적까지 당하자 유정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불현듯 고향 춘천의 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가 고향에 내려간 것은 남은 재산을 마지막으로 탕진하고 있는 형을 상대로 한 재산분배를 주장하는 소송을 내기 위한 일도 겸해 있었다. 형에게 병 치료와 생활비를 요구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둘째 누이와 함께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매형 정씨의 꾐으로 그런 일을 벌였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김유정이 고향산천을 찾아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항상 잊지 못하고 살아온 고향의 산골 정취가 다분히 감상적인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또한 김유정은 고향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그 시대 농촌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네들의 삶을 통해 그는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제적당한 울분이나 박록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시골 농민들의 가난한 생활을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가셔졌던 것이다. 박록주에게 열중했던 것처럼 그는 고향에서 자기 자신을 다 던져도 좋을 그런 신명나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금병산을 오르내리며 봄이면 잎이 나기 전 노랗게 피어나는 동백꽃(생강나무꽃) 향기에 취했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네들의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 속에 깃든 원초적인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네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김유정이 고향 마을에서 가장 정을 많이 준 사람들은 역시 자기보다 연상인 들병장수 여자들이었다. 박록주에 대한 미련이 여기저기 짚시처럼 떠돌며 술을 파는 들병이로 옮겨진 것이다. 들병이가 등장하는 작품 『솥』, 『산골 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은 거의 실화에 가깝다는 것이 뒷날 확인되었다. 들병이들을 찾아다니면 거의 매일 마시는 술로 치질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늑막염까지 겹쳐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유정은 고향집 언덕받이에 움막을 파고 한때 자기네 마름집 아들인 조명희, 조카 영수 등과 뜻을 맞춰 동아일보의 농촌계몽운동 교육교재로 야학을 열었다. 김유정은 대학 공부에 대한 미련을 안고 다음 해(1931년) 봄, 다시 상경하여 보성전문(普成專門)에 입학했으나 그곳에서도 곧바로 퇴학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실의에 빠진 유정은 매형 정씨의 주선으로 병 휴양 차 충청도의 어느 광업소 현장감독으로 내려갔으나 광부들과 어울려 매일 술만 먹게 되어 결국 건강만 더 망친 상태로 서너 달 만에 다시 고향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광업소에 있던 경험을 살린 작품으로 『금』이 있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 김유정은 먼저와는 딴판으로 사람이 달라져 야학 일에 열중하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와 부인회 등을 조직해 본격적인 농촌계몽운동을 벌인다.
거룩하도다 우리 집 농우회/손에 손잡고 장벽 굳게 모이었네
흙은 주인을 기다린다/나서라 호미를 들고
지난 엿새 동안에 힘 다해 공부하고/
오늘 일요일 또 합하니 즐거워라
삼삼오오 작반하야 교외 산보를 나가/
산수좋은 곳을 찾아 시원히 씻어보세.
* 당시 실레마을에서 불려진 농우회가 그 농우회를 금병의숙(錦屛義塾)으로 개칭하여 2년제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은 뒤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때의 금병의숙 앞에는 유정의 뜻을 기리는 「김유정기적비」(김동리 휘호)와 느티나무가 서 있다.
** 제11회 '박인환 문학제'에 대하야 알기
가. 박인환 시인 문학혼 잇는다
인제 내달 2일부터 제11회 박인환문학제 인제가 낳은 한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인 박인환(1926~1956년) 선생의 문학혼을 기리는 제11회 박인환문학제가 다음달 2일~10일 합강정 및 시비공원 일원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한국문인협회 인제군지부가 주관하는 올 문학제는 제5회 전국대학생문예작품공모 및 제21회 박인환추모백일장 시상식과 제주새별문학·문인협회군지부의 문학교류협약식, 시화전, 영상물 방영,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시낭송의 밤 등이 열린다.
특히 합강정과 시비공원에서 열리는 시화전에는 박인환의 시 27편과 1회부터 21회까지 추모백일장 수상작품, 대학생공모 수상작, 인제문인협회 및 제주 새별문학회원들의 작품 150여편이 전시된다.
군은 지난해 인제읍 상동리 산촌민속박물관 진입로 100m 구간에 박인환 시인의 거리를 조성, 모두 8점의 거리 미술작품을 설치하고 박인환의 상이 부조로 들어가는 `만남-목마와 숙녀'를 시작으로 시를 새긴 여러 형태의 벤치를 만들어 박 시인의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또 인제군은 국·도비 등 총사업비 36억5,000만원을 들여 인제읍 상동리 415-1번지 일대 박인환시인 생가터에 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을 갖춘 연건축면적 948㎡ 지하1층 지상2층 규모의 문학관을 건립중이다.
나. 박인환의 생애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하였고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을 중퇴하였다. 1946년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1949년 동인그룹 '후반기'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49년 5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모더니즘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간행하였고 1956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1976년에 시집 《목마와 숙녀》가 간행되었다.
다.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라. 박인환 시인과 인제군(김경식)
가난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 인간의 진솔한 삶과 사랑의 시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간 시인이 있다. 남겨진 그의 시는 노래가 되고 낭송시가 되어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며 생활 가까이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시속에 민족을 사랑한 이념과 현실참여의 고뇌가 있음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그는 박인환 시인이다.
삭막하고 걱정많은 삶의 중압감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이 땅의 저 50년대는 희망이 없는 절망의 시대였다. 이런 고약한 시대에 살가운 그리움이 담겨진 사랑과 이별의 시적 이미지의 표현은 또한 박인환 시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른다. 먼저 ‘세월이 가면’이란 박인환시인의 시를 읽고 난후 그의 궤적을 찾아 떠나보려고 한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 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것만
- 박인환시인의 시 ‘세월이가면’ 전문
오월의 신록이 우리의 국토를 진녹색으로 물들이며 퍼져가던 날 박인환 시인의 고향마을을 향해 길을 떠난다. 박인환(1926~1956)시인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이다. 인제군은 강원도의 중동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영서북부 지역에 속한다. 서쪽 홍천군과 경계이며 동쪽으로 한계령과 미시령을 넘기 위해 이 지방을 거쳐야 한다. 산과 강이 아름다운 절경을 소유한 곳이 인제다. 산도 보통 산인가 내설악이다.
박인환 시인 시비 (세월이 가면)
소양강이 시작되는 북천의 푸른 물살을 보면 인근 숲속에 텐트를 치고 며칠을 머무르고 싶어진다. 또한 아름답고 순결한 흰 물결이 흐르는 계곡길을 따라서 걷고 싶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오래전에 군인생활을 한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처럼 교통이 불편한 첩첩산중이었다. 그러나 양평과 홍천을 거쳐 이어진 44번 국도는 고속도로 같다. 서울에서도 약 3시간이면 인제읍에 도착이 가능하다.
인제는 청정지역과 관광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먼저 인제군이 자랑하는 산촌민속박물관을 찾아갔다. 마침 문을 닫고 있는 중이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를 물었다. 매표원이 생가터까지 안내 한다. 조선족 말투인 50대 아낙은 “여깁니다” 한다. 결국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는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정원이 되어있다. 산촌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기 위해 건축한 집 옆 정원이 바로 박인환시인의 생가터다. 생가 표지판 하나가 없다.
답사 전에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윤형준 계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좀 서운하다.
아마 윤 계장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실망했을지 모른다. 윤 계장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박인환 시인에 관해 전문가다. 사전에 그는 인제군에서 박 시인의 생가터 약 450평을 매입하여 생가 복원 혹은 기념관 건립을 준비 중이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국도 44번의 4차선 도로와 인접한 생가터는 그렇게 ‘산촌민속박물관’의 오른쪽 구석 정원이 되어 있다. 토끼풀이 무성하고 붉은 단풍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곳이 생가터다.
듬성거리게 피어난 토끼풀꽃들이 작고 하얀 꽃송이를 흔들고 있다. 하늘에는 높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를 이렇게 쉽게 찾은 것이 너무 싱겁다. 저녁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인제읍은 골목이 깔금하고 골목길이 사뭇 넓다. ‘산촉민속박물관’을 배경으로 여러장의 사진을 찍는다. 결국 이곳이 모두 박인환 시인의 생가터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생가터를 확인한 것만도 큰 위안이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잠 잘 곳을 확보해야 한다. 서둘러 ‘합강정’에 있는 박인환시인의 ‘세월이가면’ 시비를 찾아 떠난다. 시비는 인제읍 합강 2리에 위치한 ‘합강공원’에 있다. 이곳에 서면 강물이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린천과 인북천이 이 지점에서 합류하여 소양강이 된다.
박인환 시인 생가터
인북천은 대동여지도에는 서화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인제읍 북쪽을 흐르는 개울이란 뜻으로 인북천이라 불린다. 이곳의 물고기들은 북한과 남한을 오고간다는 이야기를 오래전에 들은 기억이 난다. 장마때는 북한지역 주민들의 생활도구들이 떠내려 올 때가 있으니 물고기들이 오고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합강정’은 인제 현감을 지낸 이세억(1675~1677)이 1675년에 세웠다.
이곳은 강원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였기에 ‘중앙단’을 조정하였다. ‘중앙단’은 조선시대에 가뭄을 비롯한 전염병 등 재난의 원인이 억울하게 죽어 원한 맺힌 신들의 행위라고 믿었기에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무엇보다 이 근방은 궁벽한 산골사람들이 뗏목을 만들어 잠시 머무르며 숨을 고르던 곳 아닌가. 바람결에 이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에 박인환 시인의 시 ‘세월이가면’ 시비가 있기 때문이다. 생가터만 있고 아직은 기념관도 없는 인제군에 그래도 가장 번듯한 상징물은 이 시비가 아닌가?
시비는 자연석에 박인환 시인의 ‘구름’이란 시의 이미지를 살려 제작하였다. 전면에는 박인환 시비(朴寅煥詩碑)와 뒷면에 ‘세월이가면’이 음각되었다.
처음에 군축령 및 아미산공원에 건립하였으나 98년에 도로 확장공사로 이곳에 이전 건립하였다. 뒷면에 새겨진 ‘세월이 가면’의 시비를 읽기가 수월치 않다. 자칫 시비를 읽다가 난간에 떨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제군민들의 성금과 세금으로 세운 시비가 대견해 보인다. ‘세월이 가면’을 읽으니 가수 박인희가 부른 노랫말이 되어 상념에 사로잡힌다. 그만큼 이 시는 필자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이 시와 ‘목마와 숙녀’를 암송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곳에서 그의 고향인 인제읍을 바라보며 메모해 간 그의 시 ‘고향에 가서’를 읽는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 시 ‘고향에 가서’ 일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에 관해 1951년 8월22일 쓴 이 시를 읽어보면 실제처럼 묘사했음을 알게 된다. 인제읍이 제대로 조망되는 곳에 서 본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그러나 인제읍도 선명하게 보이고 신록이 푸르른 산협사이로 강이 흐른다. 이제 오늘밤 숙박할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북천을 따라 약 5KM를 달리며 44번 국도와 46번 국도가 갈리는 한계리 삼거리다.
예전 인제군 지역은 산림이 유명했다. 조선시대에는 황장목이 벌목을 방지하기 위해 황장금표(黃長禁標)를 세웠다. 합강뗏목은 남한강의 영월뗏목, 압록강뗏목, 두만강뗏목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뗏목이었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 가네
우수나 경첩에 물 풀리니
합강정 뗏목이 떠내려 오네
- 인제 뗏목 아리랑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고나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에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어준
눈이여
나에게도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 ‘인제’ 전문
1956년 3월11일 박인환 시인이 영면에 들기 10일전에 조선일보에 발표한 이 시를 읽다보면 고향에 관한 그리움이 스며있다. 인제는 6,25의 격전장이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자신이 태어나 태를 묻은 땅은 자신의 죽음 직전에 어머니와 함께 가장 그리워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고 쓴 것이 아니지만 필자가 ‘박인환시인과 인제’라는 제목으로 문학기행을 기획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시가 이 ‘인제’라는 시를 읽고 부터다.
오래도록 시인들을 연구하면서도 필자 스스로도 박인환 시인을 그저 통속적이며 허무주의자로 알았으며 그 넓이와 깊이의 앎을 포기하였다. 그저 유행가 가사를 작사한 시인으로 알고 슬그머니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의 도회지적 이미지에 손상을 입일 수도 있는 자기고백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도 모른 산간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질없고나
‘인제문인협회’에서 펴낸 ‘박인환 깊이읽기’를 읽고 그의 짧았던 삶을 약술해 본다. 박인환 시인은 1926년 8월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부친 박광선과 어머니 함숙형 여사의 4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인제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서울의 덕수공립학교로 전학했다. 우등생으로 졸업하여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지만 학업보다는 영화와 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결국 경기중학교 3학년 때 자퇴를 하고 아버지의 친척이 있던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고 졸업한다.
1944년 박인환 시인의 나이 18세 때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입학한다. 이듬해 해방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와 아버지를 설득하여 3만원, 작은 이모에게 2만원을 얻어 종로3가 2번지 현 탑골공원근방에 '마리서사' 라는 서점을 개업한다. 이국적인 이미지의 서점으로 화제가 될 수 있었던 분위기에 일조를 한사람은 화가 박일영의 도움이 있었다.
특별한 등단제도가 없었기에 1946년 ‘국제신보’ 주간으로 근무하던 송지영의 추천으로 이 신문에 ‘거리’를 발표한다. 1948년 ‘마리서사’를 폐업하고 김규동, 김수영, 양병식 ‘신시론’를 내고 이해 5월 덕수궁에서 이정숙과 결혼한다. 신혼집은 광화문135번지 지금의 교보문고 근방에 있던 처갓집이었으며, 이 집에서 장남 '세형'이 출생한다.
1949년(24세)때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하지만 이해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되기도 한다. 1950년 9,28 수복때까지 숨어 지내며 9월25일 딸 세화 출생한다. 12월8일 가족과 함께 대구로 피난 종군기자로 활동한다. 1951년 5월 육군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 부산광복동 골목에 두 평짜리 방을 얻어 피난생활 하였다.
1953년(28세) 동인들과 함께 ‘이상 추모의 밤’ 열고 시낭송회를 가졌으며, 5월31일 차남 세곤 이 출생한다. 7월 휴전협정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1955년(30세)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 여행, 3월5일 부산항 출발한 후 약 19일간의 아메리카 여행을하고 조선일보에 ‘19일간의 아메리카’의 기행문을 기고한다. 아시아 재단에서 제정한 ‘자유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서정주 박목월시인에게 1표 차이로 떨어진다.
1956년(31세) 3월17일 ‘이상추모의 밤’ 개최 이후 폭음으로 오후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9월19일 문우들이 힘을 모아 망우리 묘소에 작고 초라한 비가 세워진다.
박인환 시인의 일생은 짧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불꽃처럼 살았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과 6,25동란이라는 격동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철저하게 주관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결혼한 가장으로 그 자신 얼마나 걱정과 고민이 많았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박인환시인은 리얼리즘의 작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낭만과 모더니즘 작가로 알고 있다. 박인환 시인은 1946년 12월 (국제신보)에 ‘거리’로 등단 이후 6,25 전까지 쓴 대부분의 시들은 현실 참여시다.
가난한 사람들의 슬픈 관습과
봉건의 터널 특권의 장막을 뚫고
핏비린 언덕 너머 곧
광선의 진로를 따른다.
- 열차 부분
서울에 피의 비와
눈사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볕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어린 딸에게 부분
해방정국의 극심한 이념대립과 6,25의 동족상쟁의 엄청난 폭력 앞에 그 자신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았겠는가.
시(詩)라기 보다 일기 같은 글을 읽다보면 박인환 시인이 얼마나 6,25의 충격이 휩싸여 있는지 알 수 있다. 가족이 죽고 문단의 선후배들이 각기 이념의 칼날아래 적이 되어 서로를 죽이는 현장에 시인은 벌거벗고 노출되어있다. 그 감성 많고 정 많던 시인이 미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으리라. (김경식 씀)
첫댓글 좋은 문학기행인데 비가와서 어쩌죠? 여러모로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