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칼럼] AI와 공감의 뿌리, 그리고 인공감성(AE) - ZDNet korea
최근 또래 여성살해를 저지른 한 젊은이의 행각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살인자는 특별한 원한도 없는 다른 여성에게 악마와 같은 짓을 벌였다.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듯하고, 조부와 함께 성장했다고 한다. 이런 사건을 마주하면서, 과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어떤 지식인은 사람다움에 대한 두가지 키워드를 꼽고 이렇게 말했다. ‘인간성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성질을 말하고, 인간미는 다른 사람에게 풍겨주는 사람다운 맛’이다. 달리 해석하면 인간성은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본성의 완성도로 해석되고, 인간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나 보이는 본성의 표출도로 이해된다. 즉 인간미는 관계속에서 드러나 보이는 특성이고, 인간성은 관계없이도 설명가능한 본질가치라는 말이다.
영화사에 길이 남는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시간을 달리하는 두 건의 살해 사건이 등장한다. 첫째는 인류의 조상으로 간주되는 털북숭이 유인원이 도구를 이용하여, 동료 유인원을 살해하는 슬로우 모션 장면이다. 두번째 살해장면은 자의식이 생긴 우주선의 AI 컴퓨터 ‘HAL’이 시스템을 정지시키려는 우주조종사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이상의 두가지 살해장면은 확연히 다른 메시지가 있다. 유인원이 다른 유인원을 살해하는 장면은 동족을 죽이고 군림하려는 인류史적 권력의지 사건인데 반하여, 두번째 살해는 인간의 통제를 받는 하등한 객체가 사람을 죽이는 주체로서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인공지능사史적 행동이다.
비영리단체 중에서 ‘공감의 뿌리’라는 NGO가 있다. 캐나다에서 시작된 이 단체의 주된 메시지는 유소년기에 공감 환경에 많이 노출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더욱 인간미를 풍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 단체의 프로그램 중 하나는 한달에 한번씩 엄마가 갓 태어난 아기를 학교에 데려오는 일이다.
빙 둘러선 유소년기 학생들은 담요에 눕힌 아기와 엄마의 교감을 관찰하고 서로 그 느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공감교육을 받은 어린이는 다른 친구의 고통이나 기쁨에 잘 교감하여, 장애인과 같은 약한 친구를 따돌림 하거나 괴롭히지 않고 더불어 잘 지낸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공감능력은 0~3세가 제일 중요하고, 유소년기를 지나면 공감능력은 배양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기간 중에 부모와 공동체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어린이는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는다. 우리 생활에 AI가 본격적으로 파고든 지 3년이 지났다.
최근 AI의 긍정적 미래 혹은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말하는 메시지가 어지럽다. 3년 유아기의 AI에게 공감능력을 배우도록 하여 인류에 기여하는 주체로 키울지, 권력의지를 가르쳐 사람을 죽이고 군림하게 할지는 모두 AI를 낳고 기른 현대 인류의 의지에 달려있다.
생애주기 누적비용의 총량을 결정하는 영향력은 생애주기의 초기가 가장 강력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공지능 과학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인공지능 기술이 HAL 컴퓨터처럼 인류를 죽이려 행동할지, 더 나아가 권력의지를 가지고 인류 위에 군림할지 결정될 것이다.
또 다른 선택지는 있다. 우리 인간의 고통과 기쁨에 공감하는 좋은 AI 친구를 만들 시간이 앞으로 10년 남짓 남았다. 인공지능 과학자는 인공지능의 지식증대만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로 인류의 파트너가 되려면 공감의 뿌리와 같이 '인공감성(AE, Artificial Esthetics)' 증대를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
인류가 인공지능을 그냥 이렇게 자라도록 방관하면 안된다. 고양이인지 개인지 Tagging하여 확인해주는 지도학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슬프다, 기쁘다, 불쌍하다’는 태깅을 해주는 공동체적 지도학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습에너지를 지식에만 집중하여, HAL과 같은 무서운 싸이코패스가 인류를 압도할 시대가 찾아올까 겁이 난다. 이제는 AE에 보다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AE시대를 선포해야 할 때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