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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공유) 스크랩 정진홍,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여자의 유혹 남자의 착각/ 차
선종순 추천 0 조회 166 08.02.17 14: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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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정진홍(1963~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학석박사, 1998~ 동아일보 자문위원, 2003~ 중앙일보 논설위원)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릴케의 묘비명>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Rose, oh reiner Widersprl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아닌.

 

 

성묘를 오가며 늘 느끼는 바지만 우리네 묘비는 참 밋밋하다.

천편일률적인 모양과 크기는 그렇다 치고 각인된 내용마저 생몰연도와 이름만 다를 뿐 거의 똑같다.

성경 구절은 눈에 띄어도 정작 이 풍진세상을 살다간 사람에게 의당 있을 법한 ‘자기만의 한마디’는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반면에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의 묘비에 새겨진 말은 우리의 통념을 여지없이 깬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아무리 글 쓰는 것으로 평생 업을 삼았고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묘비에 이렇게 새겨놓기란 쉽지 않다. 확실히 버나드 쇼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근 100년의 세월을, 그것도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으며 산전수전, 심지어 공중전까지 다 치른 사람의 말이기에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그

렇다! 우물쭈물하다간 그냥 간다. 그러다 놓쳐버린 기회가 좀 많은가.

평범한 휴대전화 판매원에서 일약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가 된 폴 포츠의 데뷔 앨범명이 ‘원 찬스(One Chance)’다. ‘단 한번의 기회’란 뜻이다.

실제로 그는 영국판 ‘전국노래자랑’이라 할 만한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 예선 무대에 나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브리튼스 갓 탤런트’는 55%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폴 포츠 덕분이었다.

그가 열창하는 장면은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단 9일 만에 1000만 명 이상이 본 동영상으로 사상 최다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비록 폴 포츠는 부러진 앞니에 낡은 양복을 입고 다소 주눅 든 표정이긴 했지만 단 한번의 기회였던 그 무대에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낄 만큼 혼이 담긴 열창을 해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펼쳤다.

하지만 그의 인생역전은 우연도 요행도 아니었다.

그가 종양수술을 받고 교통사고로 쇄골이 부러져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어도

오페라 가수가 될 꿈을 움켜쥔 채 자기 삶을 또박또박 우직하게 밀고 간 결과였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고전이라 할 『오륜서』의 저자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는 진검승부에 임하는

첫 번째 자세를 “머뭇거리지 말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연습이 아닌 진검승부에서는 머뭇거리면 그대로 칼을 맞기 때문이다.

칼 맞은 후에 자세를 가다듬어 봐야 소용없다.

뒤늦게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몸 사리지 않고 공격의 리듬을 타 본들 이미 늦었다.

어차피 인생은 진검승부다.

머뭇거리면 칼 맞고, 우물쭈물하면 그냥 사정없이 밟혀 버린다.

묘비에는 예외 없이 시작과 끝을 일러주는 생몰연도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오래전에 세워진 묘비에는 죄다 한자로 적었지만 요즘은 대개 아라비아 숫자를 쓴다.

그리고 태어난 날과 죽은 날 사이에는 으레 ‘대시(-·dash)’를 넣는다.

결국 그 대시 안에 그 사람의 삶이 응축돼 있는 셈이다.

 짧든 길든 삶의 희로애락, 그 모두가 그 대시 안에 압축돼 있다.

사실 삶을 압축한 대시는 날마다 한 점 한 점 찍어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매일 자기 인생에 작지만 지울 수 없는 점을 찍고 있다.

그 점들이 모여 우리 인생을 만든다. 때론 엉성하게, 때론 촘촘하게. 추석 연휴다. 괜히 손에 잡히지도 않는 달만 쳐다보며 우물쭈물하지 말자. 인생의 진검승부 앞에서 머뭇거리지도 말자.

오롯이 내 삶을 이어갈 점들을 정직하게 또 다부지게 찍어가자. 후회 없도록.

정진홍 논설위원 2007.09.21 19:07 입력

 

여자의 유혹 남자의 착각

 

 

대부분의 남자들, 특히 권력과 지위가 있는 사내들은 지위나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남성적 매력으로 여전히 여자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물론 착각이다. 오히려 그 여자를 가지려는 욕구가 커질수록 그 남자는 점점 더 무력한 존재가 되고 사실상 그 여자의 노예가 된다. 변양균씨와 신정아씨의 관계도 이러했던 것 같다. 물론 신정아씨는 결코 변씨만의 여자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단 여자의 유혹에 포박당한 남자의 착각은 여자의 환심을 사는 것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아무리 무리해 보이는 일도 해치울 만큼 괴력을 발휘하며 해결사 역할을 자임케 만든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이른바 ‘신정아 게이트’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남자란 너나 할 것 없이 평생 ‘강한 수컷’으로 보이고 싶은 강박감에 포박당한 어쩔 수 없는 존재다. 파울로 코엘료는 남성들의 평균 섹스 지속시간이 11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11분’ 마저 길게 느껴지는 위기의 남자들에게조차 강한 수컷의 이미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자 꿈이다. 결국 남자의 위기는 강한 수컷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표출된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고(故) 미당 서정주 선생. 물론 그가 자신의 시 ‘자화상’에서 말했던 바람이 단지 남자들의 속된 바람기를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 역시 평생 졸업할 수 없던 것이 다름아닌 ‘여자’라고 했다. 얼마 전 ‘내 남자의 여자’라는 방송 드라마로 또 한번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작가 김수현씨는 그 드라마가 종영될 즈음 ‘여자의 가장 큰 공포는 남자의 변심’이라고도 말했다. 그렇다면 남자의 가장 큰 공포는 뭘까? 다름 아닌 ‘여자의 외면’이다. 신정아라는 35살 난 여자가 온 나라를 뒤흔들고도 남을 만큼의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배경에는 바로 그 여자의 시선에서 외면당하지 않으려는 이 나라 사내들, 특히 위기의 남자들의 애절한 몸부림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첫 번째로 불거진 변씨는 1949년생으로 아직 50대다. 그런데 변씨보다 한 살 많은 홀거 라이너스라는 독일작가가 『남자 나이 50』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50대 남자의 외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달콤하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독약도 없다고! 사실 남자에게도 폐경기가 있다. 월경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남자가 폐경을 맞을 일이 있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35년간 심리치료사로 일해온 제드 다이아몬드는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한다. 신체적으로 피로가 밀려오고, 성관계에 자신을 잃으며, 심리적으로 짜증이 늘고, 우울한 기분에 자주 사로잡힌다면 남자의 폐경기를 의심해 봐야 할지 모른다. 이때는 왠지 모를 고립감에 빠지고, 불안감이 증가하며 젊은 여성과의 불륜을 상상하거나 실행에 옮겨 자신의 시들어가는 남성성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변씨도 그러했을 것이다.

남자의 인생에는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첫 번째 인생의 봉우리에 오르려면 ‘사춘기’라는 계곡을 건너야 하고 두 번째 인생의 봉우리에 오르려면 ‘폐경기’라는 협곡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일까? 15세 전후의 사춘기 소년과 50대의 장년 남자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고 철없는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에 벌이는 일은 기껏해야 가출이지만 폐경기에 벌어진 일은 수습이 안 된다.

떠들썩한 신정아 게이트 뒤에는 바로 이런 폐경기 위기의 남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들의 사그라지지 않은 수컷 본능과 그것을 겨냥한 이브의 유혹이 빚은 크고 작은 해프닝들이 모여 결국은 해일처럼 이 나라를 덮치고 있는 셈이다.

 

 

차에서 내려라

 

우리는 걷는 만큼 산다. 걸을 수 있으면 살 수 있다. 이 말은 의학적 소견을 넘어선 체험적 진실이다. 사람에게 걷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일이다. 걷기가 생활화되면 사람의 몸은 스스로 최적화된다. 우리 몸은 본래 걷는 것을 전제로 프로그래밍돼 있기 때문이다.

본래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첫째 요소는 직립해 걷는다는 데 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즉 척추를 곧추세워 걷는 사람이다. 그것이 가능했기에 손이 자유로워져 ‘만드는 사람’, 곧 호모 파베르(Homo faber)가 될 수 있었다. 아울러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하고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두뇌와 지력은 획기적으로 증진했다. 그 덕분에 생각하는 사람,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 전진해 올 수 있었다.

걷는다는 사실 자체에는 바로 이런 사람됨의 역사가 응축돼 있다. 우리가 아주 쉽게 생각하고 때로 천하게까지 여기는 걷기는 바로 사람됨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걷지 않았다면 아예 사람이 못 됐다. 걸음으로써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됨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걸을 일이 없어진다는 데 비극의 단초가 있다.

우리로 하여금 걸을 일이 점점 더 없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자동차다. 19세기에 발명된 자동차는 20세기 최고의 상품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자동차는 여전히 유용한 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보다 사람다운 삶과 조화를 이뤄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자동차는 사람을 매연과 교통사고로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덜 걷게 해 조금씩 조금씩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동차 자체가 문제일 순 없다. 굳이 차를 타지 않고도 갈 수 있는 길마저 애써 차를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타성이 문제다.

하지만 이제는 벼랑 끝이다. 살고 싶거든 차에서 내려라. 내려서 걸어라. 걷는 만큼 산다. 걷는 만큼 살도 내린다. 물론 그만큼 공기의 질은 오른다. 사실 이런 말들이 날마다 자기 두 발로 ‘뚜벅이’ 신세인 사람들에겐 생뚱맞은 것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차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사장이든, 회장이든, 그 무엇이든 지체 높은 사람들부터 내려서 걸어라. 일주일에 한두 번은 차 없이 출근해 보라. 5분 거리도 안 되는 식사 장소에 굳이 기사를 앞세워 차를 타고 가는 것부터 바꿔라. 남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당신을 위해서다. 지게 지고 종일 걷는 머슴이 가마 타고 수레 타는 주인보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

10일은 서울시가 정한 ‘차 없는 날’이다. 하지만 정작 본래부터 날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걷던 사람들에게는 ‘차 없는 날’이 오히려 낯설다. 되레 ‘차 없는 날’ 지하철과 버스만 더 붐비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차편으로 아이들을 친정이나 시댁, 혹은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맞벌이 부부에겐 번거롭다 못해 대책 안 서는 날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사장·회장, 높은 자리에 있는 양반들은 기사 달린 자동차에 앉아 차량 통제된 종로만 피해 쌩쌩 달린다? 욕 나오는 상황이 불 보듯 그려진다.

결국 ‘차 없는 날’이 일년에 한 번 있는 이벤트로 치러지는 한 ‘차 없는 날’은 불편한 날, 외출을 포기하는 날, 혹은 대책 없이 난감한 날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벤트로서의 ‘차 없는 날’은 역설적이지만 하루속히 없어져야 한다. 그 대신 시민 스스로 차에서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걷기를 즐기며 느림과 낭만, 그리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일상의 작은 혁명이 일어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에코(eco·환경) 리더십’의 과제다.

 

 

도야마 유조와 지바 도시치

 

얼마 전 운파(雲波) 임원식(1919~2002) 선생 5주기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운파 선생은 1919년 평북 의주 생으로 하얼빈제일음악학교와 일본 도쿄음악학교를 거쳐 미국 줄리아드 음악대학에서 지휘와 작곡을 공부한 국내 음악계 1세대 ‘거목’이었다. 특히 그는 일찍이 예술 영재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던 우리나라 예술교육계의 원로였다.

그런데 2003년 이후 해마다 열린 운파 추모음악회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일본인이 있다. 바로 NHK교향악단의 종신지휘자인 원로 음악가 도야마 유조(外山雄三)다. 그는 자신의 연습실에 두 사람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운파 선생이다. 운파 추모 음악회에서 연미복을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단정하고 단아했다. 지휘하는 그의 몸짓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고 마치 사무라이 같은 단호함과 간결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추모 음악회의 마지막 순간, 운파 선생의 생전 모습과 글이 스크린에 재현되는 동안 혼신을 다해 지휘를 끝낸 도야마 유조는 조용히 악보를 가슴에 대고 한동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청중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여전히 가슴에 악보를 대고서 말이다. 그것은 먼저 간 운파 선생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표한 모습이었고 그것을 지켜본 관객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운파 선생과 도야마 유조 간의 지속적인 혼이 담긴 관계를 바라보면서 또 다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안중근(1879~1910) 의사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권총 3발을 명중시켜 즉사시킨 안 의사를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얼빈 현장에서 잡힌 안 의사가 여순형무소에 수감돼 사형당할 때까지 5개월여를 함께했던 일본헌병 출신 간수 지바 도시치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반 없다.

1910년 3월 26일 새벽, 여순 감옥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 의사는 여느 날과 다름 없이 몸가짐을 정제한 후 어머니가 보내 준 순백의 한복으로 갈아입고 기도를 올렸다. 사형 집행의 시간이 다가오자, 안 의사는 지바를 향해 “일전에 내게 부탁했던 글씨를 지금 씁시다”라고 말했다. 지바는 정성껏 비단과 필묵을 준비했다. 안 의사는 자세를 가다듬고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 쓰고 왼손 약지가 절단된 손의 수장까지 찍어 지바에게 건네 주었다.

그후 지바 도시치는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했던 안 의사에게 감복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안 의사 영전에 치성을 올리며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 아내에게 “안 의사의 유묵(遺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과 안 의사의 위패를 함께 모셔 조석으로 공양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지바의 아내 기쓰요 역시 1965년 7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유언을 그대로 이행했고 79년에는 지바 도시치와 기쓰요의 유족들이 안 의사 탄신 백주년에 맞춰 그동안 가보로 소중히 보관해 온 안 의사의 유묵을 안 의사 숭모회에 전달했다. 참으로 혼과 정성이 담긴 최상의 숭모가 아닐 수 없었다.

운파의 추모일은 지난달 26일이었고 내일은 바로 안 의사의 탄신일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세월이지만 운파를 추모하며 보여 준 도야마 유조의 모습과 안 의사를 숭모하길 대를 이어 계속했던 지바 도시치의 사례에서 우리는 또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도리를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 내 극장 ‘용’에서는 작지만 특별한 음악회가 열렸다. 마에스트로 정명훈과 그의 막내아들 민이 함께한다 하여 사람들 사이에 이미 입소문이 난 음악회였다. 그런데 정작 그날의 진짜 주인공은 정명훈도 그의 막내아들도 아닌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 단원들이었다.

부산 소년의 집. 1969년 설립돼 현재 미취학 아동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서 적절한 보호를 받기 어려운 450여 명이 모여 사는 곳이다. 재단법인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부산 소년의 집은 전 국가대표팀 골키퍼였던 김병지 선수가 고교 시절 선수생활을 했던 곳 정도로 세간엔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 놀랍게도 79년 창단한 관현악단이 있다. 미국인 신부 알로이시오 슈왈츠 몬시뇰이 소년의 집 현악합주단을 만든 게 모태가 된 이 관현악단은 부산 소년의 집 부설 알로이시오중학교와 전자기계고교 재학생 및 졸업생들로 구성돼 있다.

처음에는 미사를 위한 성가 반주용 정도로 시작했다. 그런데 90년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을 시작으로 관현악단 아이들이 크고 작은 음악경연대회에서 자꾸 상을 타오는 게 아닌가. 여기에 99년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가 부산 소년의 집을 방문해 협연한 것을 계기로 아이들은 자신감을 갖고 실력을 다질 수 있게 됐다.

마침내 2000년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감동의 탄생’이었다. 검게 그을리고 다소 꺼칠해 보이는 아이들이 손에 바이올린과 비올라와 첼로의 활을 쥐고 입술에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을 대기까지 얼마나 많은 운명의 곡절이 그들의 삶을 휘저었겠는가를 한번 상상해 보라. 더구나 그 아이들을 그곳에 놓아둘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어미와 아비의 한 많고 곡절 깊은 삶의 운명 교향곡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라.

으레 있는 집 아이들이나 할 법한 바이올린과 플루트 등의 관현악을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결코 간단치 않았을 삶의 곡절과 운명을 떠올리다 보면 그 아이들의 손동작 하나하나에 가슴이 떨리고 목이 메기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음악회의 1부에서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지휘로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자 객석에 있던 나는 복받쳐 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측은지정의 발동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바닥에서 일으켜 명품으로 재탄생시키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찬사의 발로였다.

음악 평론가들은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이런저런 평을 할는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그들이 내는 소리 자체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니, 그들이 내는 악기의 소리가 아니라 곡절 많은 삶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만의 소리를 내겠다며 혼신의 힘을 다하는 영혼의 몸부림이 나를 울렸던 것이다. 그들이 손에 쥔 바이올린과 비올라, 또 그들이 입맞춘 플루트와 오보에엔 그들 자신의 처지와 삶의 질곡 같은 운명을 넘어서려는 애절한 몸부림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베토벤의 ‘운명’을 연주하는 동안 그들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악기는 비록 명품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기 인생을 명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명품 인생은 타고난 지위와 물려받은 재산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운명에 맞서며 자기 삶에 대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진한 애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 아이들은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준 셈이다. 그래서 그들이 펼친 연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회였다.

 

 

하늘이 두 쪽 나도...

 

“하늘이 두 쪽 나도 내 땅 아니다.” 한나라당 대선 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말이다.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이 담긴 말이겠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는 애당초 입에 담지 말았어야 했고, 또 담지 않았어도 될 말이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애초에 검찰을 경선판에 끌어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진영이었다. 결국 스스로 불러들인 검찰의 덫에 걸려 “하늘이 두 쪽 나도…”를 자기 입에 올리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경선판에 스스로 검찰을 끌어들여 그 검찰에 당했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그런데 자고로 “하늘이 두 쪽 나도…”를 입에 올린 사람치고 제대로 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지난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부인 한인옥씨가 당 소속 국회의원, 지구당위원장, 광역 및 기초단체장 부인 연찬회에서 “하늘이 두 쪽 나도 대선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권은 잡지도 못한 채 결국 하늘만 ‘진보의 하늘’과 ‘보수의 하늘’로 두 쪽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두 쪽 난 하늘 아래서 나라는 갈 길 몰라 헤맸고, 그 와중에 이래저래 죽어난 것은 다름 아닌 국민이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는 억울함과 절박함의 극단적 표현이다. 본래 그것은 억울하고 절박한 심정을 그 어디에도 호소할 길 없는 민초들이 유일하게 기대는 하늘마저 두 쪽 나더라도 결코 물러설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다는 절절한 심정의 분출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가장 강력한 경선 후보 중의 한 사람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제 아무리 억울하고 절박해도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적어도 “하늘이 두 쪽 나도…”라고 극언하듯 해선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늘이 두 쪽 나도 부동산만은 잡겠다”고 말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솔직히 “하늘이 두 쪽 나도…”에는 절박함과 억울함을 넘어서 왠지 모를 오만이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정치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적 표현을 스스로 삼가야 한다. 함부로 맹세하고 “하늘…” 운운하는 것은 유치한 정치다. 진짜 정치는 함부로 맹세하지 않는다. 도망갈 구멍을 마련해 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설사 내가 제 아무리 투명하고 깨끗하다 해도 국민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겸손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실이면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국민이 다 안다. 하지만 거짓이라면 아무리 분 바르고 치장해도 국민이 비웃고 외면한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검찰이 시시콜콜 수사해 이렇다 저렇다 말해 주지 않아도 헤아릴 줄 아는 상식으로 미루어 안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이다. 큰 지도자라면 그 천심 같은 민심을 믿고 그 앞에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한다.

이제 한나라당 경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진행된 한나라당 경선 과정을 바라보면서 정말 놀라운 것은 다름 아닌 ‘국민의 인내심’이다. 진흙탕 개싸움보다도 더하게 그토록 물고뜯고 싸우다 못해 경선에 검찰까지 개입시킨 한심한 작태를 국민들은 이 염천 더위 속에도 참고 또 참으며 아직도 지켜보고 있다. 왜 그럴까? 이유는 하나다. 정권교체에 대한 결코 놓을 수 없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두 경선 후보 중 누가 이기고 지든 간에 이 한가지는 명심해야 한다. 이제까지 참고 인내하며 지켜봐 준 국민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인내심 앞에 무엇보다 겸허해야 한다는 것을. 국민이라는 바다 없이는 배를 띄울 수 없고, 그 국민이란 바다가 한번 노하면 언제든지 배는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관심의 전쟁, 무관심의 참화

 

지금 우리는 ‘관심의 전쟁’ 중이다. 오늘 현재 한국 사회에서 관심의 최전선은 남북 정상회담과 영화 ‘디 워’다. 하나는 오프라인에서, 또 하나는 온라인에서 보다 강세다.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인질로 억류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하룻밤 사이에 폭락했다. 신문도 방송도 인터넷도 하루아침에 기사가 바뀌었다. 놀라운 속도다. 그런가 하면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든 말든 온통 관심의 초점은 영화 ‘디 워’에 쏠려 있는 듯싶다. 한쪽에서는 찬사가 또 다른 한 쪽에서는 경멸이 쏟아지는 영화 ‘디 워’는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가위 ‘관심의 블랙홀’이다.

 이런 와중에도 정치권에서는 이명박 후보 측과 박근혜 후보 측이 서로 물고 뜯는 한나라당 경선이 계속되고 있지만 경선 일자가 다가옴에도 관심은 이래저래 많이 준 느낌이다. 또 범여권에서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고 나흘 만에 다시 열린우리당과의 합당을 공식화했다지만 사람들은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9일 대선 출정식을 한 손학규 전 지사는 잡는 날마다 일 터진다는 측근들의 푸념처럼 그 전날 발표된 남북 정상회담 소식 때문에 아예 광이 나지 않았다. 턱수염까지 말끔히 깎고 나섰는데도 말이다. 어찌 보면 ‘관심이 생명’인 정치권이 요즘에는 관심의 전쟁에서 최전선이 아닌 최후방으로 밀린 느낌이다.

 관심의 전쟁은 총칼로 피 터져라 싸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참화를 초래한다. 바로 ‘무관심의 참화’가 그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소식이 알려지면서 아프가니스탄에 인질로 억류된 사람들의 가족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질들의 생사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사람들 뇌리에서 최소한의 관심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우려해서다. 사실 그것은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남북 정상회담 소식이 알려지면서 탈레반에 억류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사그라졌다. 한마디로 ‘관심의 전쟁’의 최전선이 아프가니스탄 인질 억류 사태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영화 ‘디 워’로 옮겨간 까닭이다. 그러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인질로 억류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말 그대로 ‘무관심의 참화’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대통령 특사로 아프가니스탄에 갔다던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이 8일 오전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발표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보면서 가장 황당했을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인질들의 가족이었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러 갔다는 대통령 특사가 단 한 명의 인질도 살려내지 못하고 이렇다 할 대안조차 없이 슬그머니 입국하자마자 아프가니스탄 인질 억류 사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함구한 채 텔레비전에 얼굴 내밀어 남북 정상회담 소식을 알리면 대체 어쩌자는 건가. 도대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은 거죽이고 실제 속마음과 속생각은 온통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콩밭에 가 있었다는 말인가.

 사건이 사건을 덮는다는 말이 있다. 신문 지면과 방송 뉴스 시간도 한정돼 있고 인터넷 포털 전면에 노출될 수 있는 것도 제한이 있다. 그러다 보니 어제의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 터지면 앞의 사건들은 덮여 버리고 만다. 하지만 정부에서마저 사건이 사건을 덮어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제대로 매듭짓겠다는 각오로 해야 한다. 빌라도가 손 씻듯이 “나는 이제 모른다. 지금 내 앞엔 새 과제가 있다”고 한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다.

 장마가 끝나고도 퍼붓다 개었다 하는 알 수 없는 날씨마냥 관심의 기상도는 예측불허고 관심의 최전선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이 ‘관심의 전쟁’ 뒤편의 ‘무관심의 참화’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손학규의 턱수염

 

10여 년 전 여름 한 철 동안 수염을 길러본 적이 있다. 제법 긴 여행을 하던 중에 깎는 것이 번거로워 내버려두니 자연스레 수염이 길러졌고 그것을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넌지시 “추석 전에는 깎을 거지?” 하시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잔소리가 아예 없으시던 어머니가 그 정도로 말씀하신 것은 그 수염이 몹시 마음에 걸리셨다는 얘기다. 그 한마디를 듣고 나는 그날로 수염을 깎았다. 어머니는 그 뒤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지만 내심 수염 깎은 나를 더 반기는 분위기였다.

사실 부모·자식 간에도 그 사람의 용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 조심스러운 법이다. 하물며 남의 용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분명 결례다. 하지만 그 결례를 무릅쓰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턱수염에 대해 할 말이 좀 있다.

먼저, 손 전 지사의 측근 중에서는 턱수염이 그에게 부족한 서민적 이미지를 보강해줄 것이라고 했다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서민이라고 모두 허름하고 거친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책상물림들의 자기도취요, 꽉 막힌 우물 안 사고다. 서민들이 진짜 바라는 것은 그저 내 처지, 내 몰골하고 닮은 사람이 아니라 내 처지를 좋게 하고 내 몰골을 환하고 웃게 만들 사람이다.

둘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에이브러햄 링컨이 턱수염을 기르게 된 까닭은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11세 된 소녀가 링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저씨의 얼굴이 광대뼈가 나오고 턱 선이 너무 길고 뾰족하니 수염을 길러 보세요”라고 권유한 데 있었다. 실제로 그 턱수염 덕분에 링컨의 차가운 인상이 따뜻하고 친근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그 뒤 링컨의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런데 손 전 지사가 이른바 1, 2차에 걸친 ‘민심 대장정’ 기간 동안 작업복 입고 고추 따고 포도 딸 때야 자연스레 수염 기른 것이 어울릴 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와 양복 갖춰 입고 온갖 만남과 행사를 치를 때는 왠지 ‘어설픈 시위’처럼 보여 감동은커녕 되레 안쓰러웠다.

셋째, 혹자는 손 전 지사가 경기고-서울대-옥스퍼드대 박사라는 책상물림과 샌님 이미지를 벗으려고 턱수염을 길렀다고도 한다. 하지만 턱수염 기른다고 샌님이 호걸 되나? 심지어 손 전 지사 캠프 안에서 턱수염을 “깎자, 놔두자”하며 논전이 붙었다고도 한다.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그럴 시간 있으면 정책연구 한번 더 해야 맞는 것 아닌가. 물론 자기 조직 역량을 집중시킬 만한 곳에 집중 못하게 만든 리더의 잘못이 더 크다.

한때 손 전 지사가 일반 여론조사에서는 지지도가 5% 선을 넘지 못하는 와중에도 유독 대학교수·언론인·기업인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 계층에서는 가장 앞선 지지를 보였던 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하나다. 손 전 지사가 경기지사 시절 보여 줬던 실질적인 비즈니스의 성과 때문이다. 외국에 나가 자본 끌어오고 공장 유치하며 세련되게 실적으로 승부하던 그 모습에 점수를 줬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손 전 지사는 뭘 하고 있나? 어설픈 턱수염으로 위장한 얄팍한 서민 이미지로 승부하려는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그나마 손 전 지사가 9일 대선 출마 선언의 성격을 띤 ‘비전 선포식’을 갖고 턱수염도 깎는다고 한다. 늦었지만 잘한 결정이다. 이제 턱수염 깎고 맨 얼굴로 국민 앞에 서라. 스스로 석연찮은 탈당의 도덕적 부채도 지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라. 특히 지난 대선 당시 흑색선전의 주범을 상황실장에 앉힌 것이 턱수염을 깎으면서 함께 밀어내야 할 비양심의 털임도 잊지 마라. 나는 수염 없는 맨 얼굴의 손 전 지사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볼 참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한국인들의 리더격인 배형규 목사가 살해당했다는 비보를 듣는 순간, 뇌리를 스친 한마디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이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죽음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673명이 죽는다. 그중 17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179명이 암으로 세상을 뜬다. 산업재해로도 하루 평균 7명이 죽고, 34명이 자살한다. 미국에서는 총기사고(자살·살인 등)로만 하루 평균 81명이 죽는다.

 분쟁지역에서는 어떨까. ‘이라크 보디 카운트(Iraq Body Count)’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이라크전쟁에서 사망한 민간인 숫자는 4만여 명에 달한다. 4월 중순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조승희씨 총기 난사사건이 일어났던 날에도 이라크에서는 차량테러로 하루 동안 민간인 200여 명이 숨졌다. 2007년 6월 17일에서 23일까지 한 주간 동안 언론에 보도된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 수만도 자그마치 763명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17개월 동안 민간인 1700여 명이 사망했다. 한 달에 100명꼴로 죽은 셈이다. 물론 배 목사의 죽음도 숫자상으로는 그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충격은 그 모든 사망자 숫자를 합한 것보다 더 컸다. 특히 그가 한두 발도 아닌 10발의 총상을 입고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민다. 그가 목사라는 신분이 밝혀졌기에 더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정작 배 목사 자신은 그 총알세례마저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삼키고 움켜쥐며 최후를 맞았을지 모른다. 그것도 그 자신의 생일날 척박한 아프가니스탄의 이름 모를 외딴 곳에서 말이다. 더구나 그의 시신이 황량한 사막지대의 도로변에 내던져졌을 장면을 떠올려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안쓰럽다 못해 몸 안의 혈관이 끓어오름마저 느낀다. 도대체 그는 왜 거기서 그런 죽음을 마주해야 했을가. 그것이 정녕 신의 섭리인가. 내 영혼의 짧은 깊이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아프리카 스와힐리족 사람들에겐 ‘사사(sasa)와 자마니(zamani)’라는 독특한 시간관념이 있었다. 누군가가 죽었더라도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여전히 ‘사사’의 시간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던 사람들마저 모두 죽어 더 이상 기억해 줄 사람이 없게 되면 이때 비로소 그 죽은 이는 영원한 침묵의 시간, 즉 ‘자마니’의 시간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결국 기억되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셈이다. 배 목사 역시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살아 있다.

 일부 네티즌은 가지 말라고 버젓이 경고판까지 붙여놓은 곳에 구태여 찾아가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자초하고 나라 전체를 곤경에 빠뜨렸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고인을 향해서든 그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에 갔던 22명의 젊은이를 향해서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좀 더 치밀하게 안전을 위해 대비하지 못한 점은 지적될 수 있겠지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그들을 비난하거나 비아냥거릴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생각해 보라. 그들의 처지를!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무모하리만큼 순진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렇게 겁 없이 아프가니스탄이란 사자굴로 들어간 것 아니겠는가. 종교와 종파를 떠나서, 그 어떤 시시비비에도 우선해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젊은이 22명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온 국민이 마음의 힘을 합해야 할 때다. 그들의 무사생환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진짜 키는 돈과 협상, 혹은 무력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하나된 간절한 마음일지 모른다. 거듭 그들의 무사생환을 간절히 소망한다

 

 

쇼쇼쇼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TBC)의 간판 프로그램 중에 ‘쇼쇼쇼’가 있었다. 춤과 노래와 코미디가 결합된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였다. 진행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씨. 본래 후라이보이는 공군 출신이었던 곽씨가 ‘나는 아이(fly boy)’라는 뜻에서 지은 예명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당시 세간에선 속칭 ‘후라이친다’고 하면 곧 ‘거짓말한다’는 뜻으로 통했다. 그래서 후라이보이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이란 뜻으로 와전됐다. 그 덕분에 후라이보이가 펼쳐 보였던 쇼쇼쇼는 실제 방송된 내용과는 무관하게 ‘그럴듯하게 포장된 그 뭔가’를 상징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막을 내린 지 수십 년이 지난 쇼쇼쇼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화려하게 리바이벌되고 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는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지만 그를 대신하고도 남을 ‘후라이걸’ 신정아씨가 나타난 것이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씨가 기껏해야 재담으로 사람들을 웃겼던 것과 달리 후라이걸 신정아씨는 가짜 예일대 박사학위를 들이대며 펄펄 ‘날았고(fly)’, 진짜 그 이상으로 후라이를 쳤다. 또 “박사가 대수냐, 미국 박사도 별것 아니야, 고졸이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하며 세상을 비웃듯 쇼쇼쇼를 펼쳤다. 그리고 아직 뭔가 또 보여 줄 요량으로 새로운 쇼쇼쇼에 대한 궁금증을 잔뜩 남겨 놓은 채 뉴욕으로 날아갔다. 이래저래 그녀는 후라이걸이었다.

 신정아의 쇼쇼쇼가 대박을 터뜨리자 이번엔 공영임을 자임하는 한국방송공사(KBS) 라디오 프로그램 ‘굿모닝 팝스’의 진행을 7년씩이나 맡아 왔던 영어 강사 이지영씨가 발 빠르게 쇼쇼쇼 2탄을 터뜨렸다. 중학교 3학년 때 영국으로 건너간 뒤 브라이튼대를 졸업하고 언어학 석사 과정도 수료했다던 이지영씨가 실제로는 전남 광양에서 초·중·고교를 마친 뒤 고교 졸업장을 받은 것이 전부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지영씨는 순천대에 들어갔지만 거의 학교를 다니지 않은 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부근 소도시 호브의 어학원에서 1년 남짓 공부하고 브라이튼에 있는 기술전문학교를 1년여 동안 다녔지만 학위는 없었다. 하지만 이지영씨는 연세어학당·이익훈어학원 등에서 인기 강사로 활동했고, 심지어 2004년 한국방송 텔레비전·라디오 부문 최우수 진행자상을 받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통쾌하고 기막힌 쇼쇼쇼 아닌가. “학력이 별거냐 실력 있으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들에겐 내심 ‘통쾌한’ 쇼쇼쇼이고, “그래도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며 7년씩이나 방송을 할 수 있지” 하는 사람들에겐 ‘기막힌’ 쇼쇼쇼였다.

 이런 쇼쇼쇼가 온통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다. 쇼쇼쇼의 최고 가치는 흥행이다. 학위와 학력은 쇼의 흥행을 위한 네온사인 간판처럼만 여겨진다. 그렇다고 ‘간판이 아니라 실력’이라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실 뭐가 진짜 실력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온통 세상은 거대한 쇼가 돼 버렸다. 신문에 기사 나고, 방송에 얼굴 내밀며, 인터넷에 뜨면 그것이 실력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네온사인 간판 내걸고 여기저기 얼굴 내밀며 흥행에 성공하면 고름이 굳어 살 되는 식으로 그것이 실력이 되고 명성으로 굳어지는 쇼쇼쇼의 나라. 이것이 오늘 우리의 숨길 수 없는 자화상이다. 쇼쇼쇼의 나라에서 흥행의 원리만이 판치는 한 가짜 박사는 앞으로도 수없이 나올 것이고, 학력 세탁과 위조는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아울러 어떻게 해서든 일단 뜨고 보자는 흥행의 묘한 심리는 제2, 제3의 신정아·이지영씨를 양산할 것이다. 이 천박한 흥행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내야 할 텐데 자칫 대선마저 흥행 원리에 휘말려 더 거대한 쇼쇼쇼가 될까 심히 두려운 마음이다.

 

 

프랭크의 거짓말 vs. 제이콥의 거짓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Catch Me If You Can)’을 다시 보게 만든 한 주였다. 디카프리오가 분한 극중인물 프랭크는 거짓말과 위장의 천재였다. 그는 단지 고등학생이었지만 자신을 파일럿으로, 의사로, 변호사로 쉼 없이 위장하면서 그것에 속아 넘어가는 세상을 한껏 조롱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픽션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에 근거한 것이다. 실존 인물 프랭크 W 아비그네일 주니어는 16세에서 21세까지 5년 동안 미국과 유럽 등 26개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위장하면서 250만 달러 상당의 위조 수표를 남발했다.

 사실 앳돼 보이는 그가 만든 위조 수표를 받아줄 은행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항공사 파일럿에게 은행에서 특별대우를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 프랭크는 파일럿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프랭크는 파일럿이 되기 위해 항공학교로 진학하기보다 곧장 항공사 유니폼 하나를 맞춰 입고 스스로를 파일럿으로 위장하는 손쉬운 길을 택했다. 그의 파일럿 행세에 깜빡 속은 은행 여직원의 손을 거쳐 프랭크의 위조 수표는 진짜처럼 통용되기 시작한다. 거대한 위장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일단 ‘위장의 맛’을 본 프랭크의 거짓 행각은 더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대학 근처에도 못 가본 그가 하버드 의대 졸업장을 위조해 아동병원의 의사로 취직했다. 그것도 모자라 결혼할 여인을 유혹하기 위해 변호사로도 둔갑했다. 결국 프랭크는 20여 나라를 넘나들며 거짓과 위장을 일삼다 1969년 프랑스에서 체포된 뒤 프랑스와 스웨덴, 그리고 미국의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수감생활 5년 만에 가석방됐다. 자신의 천재적인 위장술을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게 전수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속고 속이다 못해 그 속임수마저 전수받아야 하는 요지경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가 하면 로빈 윌리엄스가 열연한 ‘제이콥의 거짓말(Jakob The Liar)’이란 영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 내 유대인 게토지역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분한 제이콥은 야간 통행금지를 위반해 끌려간다. 그런데 거기서 그는 우연히 폴란드 가까운 지역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쳤다는 라디오 방송을 엿듣게 된다. 그 뒤 운 좋게 처벌을 면한 제이콥은 게토로 돌아와 라디오에서 들었던 ‘희망의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퍼뜨렸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퍼져나간 제이콥의 메시지, 즉 “폴란드 가까운 곳에서 소련군이 독일군을 물리쳤다”는 입소문은 사람들에게 살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사람들은 제이콥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라디오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기 시작했다. 물론 제이콥에게 라디오는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라디오가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게토 안의 모든 유대인이 제이콥의 있지도 않은 라디오를 통해 나올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고대하고 또 갈구하고 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이콥의 거짓말이 시작된다. 제이콥은 연합군이 나치를 물리치고 진격하고 있다는 거짓 뉴스를 중계하면서 게토 안의 사람들에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프랭크와 제이콥 둘 다 세상을 속였다. 하지만 프랭크와 제이콥의 거짓말이 어떻게 다른가는 삼척동자도 안다. 거짓말이 아예 없는 세상을 기대할 순 없다. 하지만 제이콥의 거짓말은 찾아보기 힘들고 프랭크의 거짓말만 난무하는 이 세상을 향해 우리는 뭐라 말해야 할까? 차라리 우리도 누구처럼 프랭크의 거짓과 위장술이라도 전수받아야 한단 말인가. 정말이지 세상은 갈수록 요지경 속이다.

 


 

혼이 담긴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떠 할 일이 없는 곳’. 작가 파울로 코엘류는 거기가 다름 아닌 ‘지옥’이라고 했다. 그런데 적어도 어제의 평창이 그랬다. 다 거머쥐었다고 생각했던 2014년 겨울올림픽 개최권을 러시아의 소치에 빼앗긴 평창은 졸지에 ‘아침에 눈을 떠 할 일이 없는 곳’이 돼 버렸다. 그래서 평창의 아침은 ‘해피(happy) 평창’이란 슬로건과 달리 ‘언해피(unhappy)’해 보였다.

 아침식사를 하려고 들어간 황태국밥집의 주인 아주머니마저 어깨가 축 늘어진 채 TV를 바라보는 눈에 기운이 빠져 보였다. 때마침 뉴스에서 평창 주변 여러 곳의 겨울올림픽 경기장 등 관련 공사들이 대부분 중단될 것이라고 보도하자 그녀는 곧장 채널을 돌려 버렸다. 황태국밥집에서 음식을 나르던 종업원 아가씨는 “이미 다 땅을 파헤쳐 놨는데 어쩌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그렇다. 여기서 그칠 순 없다.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고 여기서 포기해서도 안 된다. 다시 도전해야 한다. 파헤쳐 놓은 땅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그동안 바쳐온 간절한 염원과 그 노력들이 눈에 밟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 진정으로 혼이 담긴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 법이다. 두 번 안 됐다고 포기하면 애초에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세 번 아니라 될 때까지 하겠다는 각오로 다시 뛰어야 한다. 그 각오를 새롭게 할 때가 오히려 지금이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평창은 죽는다. 평창은 더 이상 강원도 산골짜기의 외딴 지명이 아니다. 서울 못지않게 전 세계에 알려온 우리의 혼이 담긴 이름이다. 그래서 평창은 우리의 자존심이고 우리의 순절한 혼의 대명사다. 그 평창을 죽여선 안 된다. 우리의 혼이 담긴 평창을 다시 살려야 한다. 평창을 살리는 길은 하나뿐이다. 패배를 패배시키는 것이다. 더욱 혼신의 노력으로 정성을 다해 준비해서 밴쿠버에게 빼앗긴 4년, 소치에게 빼앗긴 4년을 모두 한꺼번에 되갚아 줘야 한다.

 4년을 어떻게 더 기다리느냐고 볼멘 소리할 이유도 없다. 이미 그 이상의 세월을 묵묵히 준비하며 애타게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다. 더구나 혼신의 힘으로 다시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까마득하게만 여겨지던 2018년이 얼마 안 있어 바로 코앞에 다가올 것이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8년을 갑절로, 아니 그 이상으로 보상받을 날이 곧 반드시 올 것이다. 그 믿음이 지금 우리에겐 절실하다. 그러니 포기해선 안 된다. 결코 체념해서도 안 된다.

 평창은 아직 젊다. 평창의 꿈이 어제의 후회를 뒤덮는 한, 평창의 그칠 수 없는 희망이 회한과 탄식을 쓸어내는 한 평창은 결코 늙지 않는다. 범중화권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사랑받는 무협지의 대가 진융(金庸)이 2년 전 81세의 나이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을 떠났다. 이미 2005년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진융이었지만 그는 석사논문 예비심사 과정에서만 내리 세 번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3전4기한 덕분에 진융은 83세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박사과정에 도전하고 있다. 혼이 담긴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 법이다.

 겨울올림픽은 유치해야만 한다. 여름올림픽·아시안게임·세계박람회·세계육상선수권대회 등을 모두 유치한 대한민국에 마지막 남은 고지이며 분명하게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창은 다시 뛰어야 한다. 혼을 담아 다시 준비해야 한다. 낙담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자. 포기야말로 국민에 대한 배반이고, 낙담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배신이다.

 

 

마감시간의 힘

 

2007년 올해가 오늘로 반환점을 돈다. 새해가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이지 시간은 쏜살같다. 또다시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세밑이 코앞에 올 것이다. 그러면 또 한 살 더 먹으며 늘 하듯 또 다짐할 것이다. 새해엔 정말 잘해 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오늘 같은 반환점에 다시 서게 되면 그동안 뭘 했나 하는 자괴감이 해마다 겪는 해일처럼 덮쳐올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한 해 두 해 살다 보면 어느새 꼼짝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혼자 힘으로 양말도 신지 못하게 되는 그런 삶의 종착역을!

너나없이 삶의 종착역이 있듯 누구에게나 마감시간이 있다. 어떤 이는 매일 또는 한 달에 한 번, 또 누구는 분기별로, 또는 일 년에 한 번 마감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삶 자체의 마감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매일, 매달, 매 분기, 매년의 마감시간은 그것이 언제인지를 알 수 있지만 정작 자기 삶의 마감시간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며칠 전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가슴 아픈 비행기 추락 사고는 우리 삶의 마감시간을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음을 새삼 절감케 한다. 비행기 트랩을 오를 때 그것이 마지막 가는 길이라고 알면서 오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예측 불가한 삶의 마감시간을 향해 우리는 너나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감시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신문사만큼 마감시간에 충실한 곳도 없다. 아무리 좋은 글, 좋은 기사라도 마감시간을 넘기면 소용없는 법! 그 마감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매일 발행되는 신문에서 기사가 채워지지 않은 채 군데군데 흰 여백으로 구멍 난 신문을 내는 경우가 없듯이 어떻게 해서든 마감시간에 맞춰 수많은 기사와 글이 속속 들어온다. 마감 10분 전까지도 안 될 것 같던 글들이 야구선수가 죽기 살기로 홈에 슬라이딩하듯 마감시간에 맞춰 슬라이딩해 들어온다. 바로 이것이 ‘마감시간의 힘’이다.

그렇다면 정작 마감시간이 갖는 힘의 원천과 비밀은 뭘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긴장감의 활성화를 통해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뛰게 만드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물론 사람이 너무 긴장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적절한 긴장은 그 사람을 윤기 나게 만들 뿐 아니라 일의 흐름을 촉진시킨다. 그래서일까? 마감시간에 쫓기듯 쓴 글이 여유 잡고 쓴 글보다 낫다는 속설도 있다. 정말 그렇다면 아마도 긴장한 가운데 자신의 잠재역량을 총동원해 젖 먹던 힘까지 다 불러내 쓰기 때문이 아닐까.

삶은 그 자체로 마감시간을 향해가는 열차와 같다. 때때로 이런저런 역들에 서기도 하지만 결국 언젠가 마주할 그 마감시간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마감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비장감 속에 더 열심히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 안의 위대함을 깨운다.

때로 우리 삶은 그 자체가 마감시간이 입력된 시한폭탄과 같다. 마감시간이 되면 터져 버리는 시한폭탄 말이다. 물론 어떤 경우엔 그 마감시간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닥쳐온다. 멀쩡히 살아서 타고 오른 비행기가 몇 시간 후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 나듯이 말이다. 그러니 별 수 없다. 매 순간순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사는 수밖에.

마감시간은 끝을 뜻한다. 하지만 끝에 서면 오히려 강해진다. 비장해지기 때문이다. 이 지루한 장마 속에 넋 놓고 있지 말고 시시각각 지금 이 순간이 마감시간이란 긴장감을 갖자. 그것이 우리 안의 숨은 위대함을 깨워 어제와 다른 삶을 우리에게 선사할 것이다.

 

 

 

남자가 우는 법

 

우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또 남의 시선이 두려워 속으로 고개 숙인 채 홀로 눈물마저 되삼키며 울고 있다.

먼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남자들. 취직하면 장가가겠다고 마음먹는다. 취직한 다음에는 전셋집 마련할 돈이라도 모을 만큼 조금 안정되면 가겠다고 차일피일 미룬다. 그러는 사이 그만 사랑하는 사람마저 놓쳐버린다. 정말이지 울고 싶다. 하지만 이미 떠난 사람, 아쉬워하며 대놓고 울지도 못한다. 왠지 운다는 것이 자존심 상하고 스스로를 두 번 바보 만드는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개 숙인 채 숨어서 울지 말고

20, 30대 남자들은 "결코 너 때문에 울진 않겠다"는 자존심과 오기가 뒤섞여 애써 울음을 감춘다. 반면 40대 남자들은 현실에 무릎 꿇고 만 것이 억울하고 부끄러워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얼마 전 이제 막 40대 초입에 들어선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술을 한잔 걸친 듯했다. 그는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뜻밖이었다. 만나면 늘 회사 이야기만 늘어놓아 주변에서 그만 좀 하라고 핀잔까지 듣던 후배였다. 청춘을 바쳐가며 그렇게 열심히 일해 평생 다닐 것만 같던 회사를 40대 초반에 그만뒀다니. 물론 후배는 애써 참고 있었지만 분명히 울고 있었다. 열심히 일해 이사도 되고 사장도 돼 보겠노라던 청운의 꿈을 접고 더 이상 발 디딜 곳조차 없게 된 현실 앞에 무릎 꿇은 것이 억울하고 분하고 또 부끄러워 속으로 울고 있었다. 그 후배는 아마도 아내 앞에서도 속 시원하게 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 앞에서도, 심지어 선배인 내 앞에서도 그는 울 수 없었다. 그는 애써 힘든 기색을 감추고 그저 속으로 울었던 것이다.

40대 남자들이 속으로 운다면, 50대 남자들은 고개 숙이고 운다. 여자에게만 폐경기가 있는 게 아니다. 남자들에게도 폐경기가 있다. 단지 정력이 감퇴됐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심리적인 문제다. 남자들의 폐경기는 한마디로 자신감의 상실이다. 뭔가 스스로의 당당함을 더 이상 찾기 힘들어지는 나이가 50대다. 새로 도전하고 확충한다는 것은 머릿속의 관념일 뿐 현실의 자기 모습은 점점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왠지 허탈해지고 앞으로 살아갈 길을 내다보면 체증 걸린 듯 속이 답답해지는 것, 그것이 남자들의 폐경기다. 그 폐경기를 거친 남자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운다.

60대 이상이 되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일선에서 물러나 놀고 있는 대부분의 남자는 숨어서 운다. 때론 산에 올라 운다. 좋은 자리에 있을 땐 여기저기서 밥 먹자, 공 치자 하며 속닥거리던 사람들도 어느새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아내와는 각방을 쓴 지 오래고, 자식들은 품을 떠난 뒤 자기들 앞가림하며 살기도 바쁘다. 정말이지 혼자라는 생각이 몸서리쳐지게 엄습하면 남자는 조용히 울 곳을 찾아 숨어든다. 그리고 혼자 꺼이꺼이 삶의 숱한 애환마저 되새김질하며 운다.

막힌 속 터지게 당당하게 울자

물론 우는 것은 사람다운 것이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으면 그것이 쌓여 울화가 되고 울분이 되며 결국 나를 망친다. 하지만 울 때는 제대로 울어야 한다. 그러니 더 이상 숨어서 울지 말자. 고개 숙이고 울지도 말고 속으로 눈물 삼키며 울지도 말자. 이젠 이렇게 울자.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두 눈 똑바로 크게 뜨고, 눈물일랑 훔치지 말고 뚝뚝 떨구며, 아직 인생의 게임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두 주먹 불끈 쥐고, 이 악물고, 다음에 울 때는 기필코 기쁨과 환희와 감격에 겨워 울겠노라고 다짐하며 울자. 그렇게 실컷 울자. 막힌 속이 터지도록. 한국의 남자들이여, 진정 그렇게 울자.

 

 

 

하루의 힘

 

'블룸스데이'를 아시나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매년 6월 16일을 '블룸스데이'라고 부르며 축제를 벌인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이름을 딴 '블룸스데이'엔 블룸이 거닌 길을 따라 걷거나 그가 먹은 음식을 똑같이 먹는 이벤트를 펼친다. 그리고 더블린의 공영방송에선 아예 아침부터 30시간에 걸쳐 '율리시즈'를 낭독한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별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율리시즈'가 1904년 6월 16일 오전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 2시 반까지 하루가 채 안 되는 19시간여 동안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무대로 일어난 일들을 장장 800여 쪽에 25만여 단어로 담아낸 것임을 감지하는 순간 '블룸스데이'의 비밀 아닌 비밀이 풀리기 시작한다.

사실 말이 800여 쪽이지 그것은 영어 원본의 경우이고 '율리시즈'의 우리말 번역본은 해설을 포함해 1300여 쪽이 넘는다.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단 하루, 아니 19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을 묘사한 것이라니! '율리시즈'를 보노라면 하루, 즉 24시간=1440분=86400초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것들의 은밀한 압축이요, 함축인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고 경탄하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스탈린 시대 강제수용소에서의 단 하루의 일들로 한 권의 결코 만만치 않은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단 하루의 삶일지라도 그것은 한 권의 소설 이상을 탄생시킬 만큼 그 뭔가로 농축돼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율리시즈'에 묘사된 그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한평생의 숙제요, 존재할 이유이며 삶 그 자체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 앞에선 묘한 전율마저 느끼게 된다. 김종건 전 고려대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 시절 원어 강독 시간에 '율리시즈'를 만나 자신의 평생을 그것의 번역을 위해 바쳤다. 1968년 국내 최초로 '율리시즈'를 번역한 김 교수는 20년 후인 88년 다시 개정번역을 냈고, 또 한 해 모자란 20년 후인 올해 2007년에 세 번째 번역본을 내놓았다. 평생 고치고 또 고친 것이다.

어찌 보면 그는 자신의 평생을 소설 '율리시즈'에 묘사된 하루와 고스란히 맞바꾼 셈이다. 그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의 일을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으로 평생을 바친 것이다. 물론 노 교수의 학문적 투혼도 무서울 정도지만 25만 단어 이상의 사연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가 뿜어낼 수 있는 하루의 힘, 그 하루의 저력은 무섭다 못해 위대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루가 아까운 것이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사단칠정 논쟁을 펼쳤던 것으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의 13대 후손인 기세훈 변호사의 고택 사랑채 당호는 다름 아닌 애일당(愛日堂)이다. 애일당이라…하루를 사랑하는 집? 아니다. 애일당 툇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시간 가는 것이 너무 아쉬울 만큼 좋다. 결국 애일당은 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는 하루가 그저 지나가는 것이 아깝고 아쉽다는 함의가 깃든 집 이름이 아닐까.

하지만 하루가 지나는 것을 아깝게만 생각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아까운 하루를 최고의 하루, 위대한 하루로 만드는 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미스터리, 오늘은 선물!" 그렇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알 수 없지만 오늘은 분명히 선물이다. 그 선물인 오늘 하루를 최고의 날로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이다.

 

거역할 수 없는 매력

 

 

1953년 6월 2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됐다. 윈스턴 처칠 경을 포함한 각료들과 수많은 하객, 그리고 남편 필립 공과 다섯 살 난 찰스 왕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물여섯 살의 젊은 여왕, 그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이 탄생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그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얼마 전 있었다. 약 한 달 전 여왕이 영국인의 제임스타운 건설 4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이때 백악관은 여왕을 맞기 위해 건물에 흰색 페인트 칠을 다시 하는 등 부산을 떨었고, 부시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최상위 예우를 뜻하는 흰색 나비 넥타이를 맨 연미복 차림으로 만찬에 참석했다. 백장미로 장식된 만찬 테이블에는 황금으로 테를 두른 레녹스 접시 세트가 가지런히 정렬되었고, 여기에 백악관 주방장이 극진하게 준비한 다섯 코스의 요리가 선보였다.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만찬이 펼쳐진 것이다.

도대체 왜 초강대국 미국이 영국 여왕에게 이처럼 쩔쩔매며 최고의 격식과 예우를 다해 모시는 걸까? 영.미 간에 긴급하고 중대한 현안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다. 정치외교적 득실을 따지기에 앞서 엘리자베스 2세의 그 '거역할 수 없는 매력'에 포박된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엘리자베스 2세가 중국 고위 관리와 만찬을 했을 때의 이야기다. 서양식 테이블 매너를 잘 모르는 중국 관리가 식사 전 손가락 씻는 물을 담아 내놓는 그릇인 핑거볼(Finger Bowl)에 담긴 물을 그만 마셔 버렸다. 그러자 여왕은 태연하게 자신도 핑거볼의 물을 함께 마셨다. 물론 궁정예법, 즉 에티켓에는 어긋났다. 하지만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마음을 담은 최선의 매너가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상대방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그녀의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의 진짜 원천이 아닐까.

엘리자베스 2세가 썩 내켜 하지 않는 인물로 알려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마저 이임을 한 달여 앞둔 상황에서 여왕의 '거역할 수 없는 매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 총리 취임 당시엔 여왕과의 대화 자리를 전통적 관례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그 자리는 '지혜를 구하는 소중한 기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그렇다. 엘리자베스 2세의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은 단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아니라 경륜에 바탕한 지혜였다.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오른 지 올해로 55년이 된다. 앳되고 서툴러 보였던 젊은 여왕은 그 긴 세월 동안 윈스턴 처칠 경으로부터 마거릿 대처를 거쳐 토니 블레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10여 명의 총리와 함께 말 그대로 격동의 시대를 헤쳐 왔다. 그녀가 물려받은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 신음하며 가쁜 숨을 내쉬는 늙고 쇠락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매력이 무기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경륜에 바탕한 지혜'를 담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매력'으로 해체 위기에 놓였던 영연방을 수습해 유지하고 영국과 왕실의 위상을 다시 세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해 왔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 국민도 '거역할 수 없는 매력' 덩어리의 지도자를 갖고 싶다.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허울에 찬 권위나 국민을 짜증 나게 하는 아집이 아니라 진정으로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리더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할까.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경륜을 바탕으로 한 지혜로 무장한 그런 '거역할 수 없는 매력'의 탄생을 간절히 소망해 본다.

정진홍 논설위원

 
2007.06.01 20:1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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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09.22 12:49

    첫댓글 길고 지겹지만 참고 쭈~욱 읽어보면 재밌어요..."우물 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碑文이 많이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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