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마시기 내기의 추억
1940~60연대를 산 한국 남자라면 당시 술과 담배는 거의 필수품이었고 그걸 할 줄 알아야 남자로서 대우를 받았다. 사회생활을 하기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윤활유 역활을 하는 술과 담배는 필수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술과 담배는 가까히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특히 담배는 어려서 머리에 난 기계충 흉터로 힘들어 할 때 담배진을 바르면 낳는다는 고모부의 말을 듣고 담배진을 발랐다가 곤욕을 치른 후에는 평생을 멀리했다. 그래서 나이 먹어 담배 끊을려고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보면, 어려서 멋모르고 한 고생이었지만 너무나 고마웠다.
술도 이런저런 이유로 즐기기는 했지만 젊어서 한번 멋모르고 소주마시기 내기를 해서 혼이 난후에는 절대로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아 술로 인한 실수등은 없었다.
1968년 4월1일, 우리 ROTC 4기는 소위로 임관한지 2년 만에 중위로 진급했다. 보병 52연대의 동기생 24명은 정말 오랜만에 연대 본부에 모여 연대장한테 진급신고를 했다. 그리고 하루 주어진 특별 휴가를 어떻게 보낼가를 두고 설왕설래 하면서 부대문을 나섰다. 비록 같은 연대지만 근무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전체가 이렇게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 근무지가 민간인을 거의 볼 수 없는 GOP부대의 GP나 CP등의 최전방에서 침투하는 적과 죽고 죽이는 힘든 시간을 보내다 오래간 만에 후방의 민간인 지역에서 만나니 딴 세상 온 기분이었다. 군 주둔 산골마을이라 간대야 술집과 다방뿐인 이곳에서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 하다기 끼리끼리 패가 되어 흩어졌다.
오래간만에 다방에 느긋하게 앉아서 오래 간만에 보는 젊은 레지아가씨와 잡담을 나누는 패도 있었고, 대낮부터 술집에 앉아서 오래 못 먹은 술맛을 즐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 다방도 가고 술집에서 객 적은 잡담 등으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에는 몇 집 안 되는 여관으로 모여들었다. 대부분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고, 술을 사가지고 들어와 뒷풀이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여러 동기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늦닷 없이 동대출신의 김용대 중위가 엉뚱한 제의를 해왔다.
제의인즉슨 술 마시기 내기를 하자는 것이였다. 나는 아버님이 술로 인하여 돌아가셔서 항상 어머니가 절대 술 과하게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 분위기를 맞추기 위하여 입에 대는척 하던지 먹어도 조금 먹는 시늉만 해왔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진급도 했고 오랬 동안 전방에서 술 구경을 못해 조금은 먹고 싶었다. 또 평소에는 근무지가 멀리 떨어져 있고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전방이어서 어울리기 힘든 동기들과 오랜만에 만나 어울린 분위기를 쉽게 깨기 싫었다.
취중이라 객기가 동했는지 나는 선선히 응해 내기를 하기로 했다. 세상에 가장 미련한짓이 먹기 내기고 그중에서도 제일 미련한 짓이 술 먹기 내기라는데 그 술 마시기 내기를 하기로 하다니. 방법은 간단했다. 김중위가 제의한 조건은 막소주 큰병 하나를 안주도 없이 맥주잔에 따라서 마시대 마시다 먼저 떨어지는 사람이 지는것으로 하자고 제의를 해왔다. 당시에는 지금도 없지만 큰병에 담긴 진로소주가 없었고 우리가 있던 전방산골에는 4홉 짜리 도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객적은 잡담을 해가며 김중위와 한 잔 한 잔 비워 나갔다. 큰 병에든 막소주가 반쯤 비어졌을 때 김중위가 비실비실 하더니 큰대자로 뻗어버린다.
이런 병의 소주는 대개 밀주여서 도수가 상당히 높아 거의30도 인걸로 기억된다. 나도 대취해서 그대로 누었다. 새벽에 화장실 생각이 나서 일어나려니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정말 사람들이 말 하는것 처럼 방, 천정, 담벼락이 빙글 빙글 돌아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엉금엉금 기어서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침에 일어나려니 일어나기는 하겠는데 머리기 지끈지끈 아퍼서 도저히 바로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누었다가 간신히 몸을 추수려 부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3일을 누워서 지냈다. 이렇게 한번 혼이 나고 난후 오늘날까지 나는 소주는 거의 마시지 않고 부득이 한 경우에는 사이다등으로 칵테일을 해서 조금 마신다.
소주에 맛들인 친구들은 칵테일해서 마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고 그것도 술이냐고 핀잔을 주지만 소주에 되게 혼난 나는 원액 소주는 도저히 마실수가 없어 그런 핀잔을 즐겁게 감수한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것은 그뒤 토닉워터 같은 본격적인 칵테일용 음료수가 나와 나를 즐겁게 했고 부득이 소주를 상대해야 되는 장소에서도 자연스럽게 토닉워터를 청해 어울린다.
이런 습관은 러시아교육원장으로 나가서도 계속되어 그 독한 보드카를 물마시듯 하는 러시아 사람들 속에서도 칵테일 보트카로 어울렸는데 내가 나간 1993년에 이미 한국의 토닉워터가 진출하여 일부 그 사람들도 애용하고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비율에 따라서는 오히려 소주보다 보드카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러시아사람들도 특히 여자들이 토닉워터 칵테일을 즐겨 야외로 놀러갈 때는 필수품으로 챙겼다. 한번은 화창한 봄날 불라디보스톡에서 다차에 소청을 받아 갔더니 보드카와 토닉워터를 박스째 사다놓고 즐겨 마시는것을 보고 놀란적도 있었다. 으레 탁자에 보트카와 함께 토닉워터를 준비해 마시는 사람이 자기 취향에 맞추어 마실수 있게 했던 광경이 러시아 사람들 하면 그독한 보드카를 물마시듯 한다는 선입견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것을 느꼈다. 지금도 화창한 봄날이 되면 그날 토닉워터 칵테일로 마셨던 보드카의 기분좋은 추억과는 반대로 그 옛날 1968년 4월1일 날 마셨던 막소주의 아픈 추억이 씁쓸하게 한다.
첫댓글 다음 모임 때는 한만희원장님에게
소주 한 잔 권해 보겠습니다
혹시나 그 옛날 숨은 실력이 아직도 나올려는지
누가 알겠어요 ..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