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반과 그녀>>
가을비 오는 오후였다. 우산을 써도 좋고 안 써도 좋을 만큼 비는 가늘었다. 상념에 잠겨 아파트단지 공원을 산책하는데 벤치에 누군가 앉아있는 사람이 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 반가워서 얼른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감기 걸리시겠습니다.”
힐끔 뒤돌아본 그녀는 완연히 반가운 기색을 띤다. 검게 염색한 파마머리, 정성들여 그린 눈썹, 붉은 립스틱에 파운데이션,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공들여 화장한 얼굴이었다. 세월의 흔적을 가리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이렇게 늘 자신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녀는 오늘도 멋진 바바리코트를 차려입었다.
“아이고! 원장님이세요! “원장님은 미장원에서 머리 깎고 나시니 더 젊어지셨네요.” 며칠 전 그녀를 미장원에서 만났었다. 미장원 원장이 할머니가 화장도 예쁘게 잘 하시고 신세대 파마를 좋아하시는 멋쟁이라고 추켰고 나도 우리 병원에 오시는 분 중 제일가는 미인이라고 장단을 맞춰드렸다.
1년 전쯤 어느 날이었다. 진료실로 이마에 피를 흘리는 할머니 한 분을 젊은 부인이 부축하고 들어왔다. 그날도 여전히 할머니 입술에 립스틱이 붉게 칠해져있었다. 구부러진 허리로 진료의자에 간신히 앉은 할머니는 무언가에 홀릴 듯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온 이는 며느리가 아니라 며느리의 친구라 했다. 꽃꽂이를 배운 후 며느리보다 먼저 집에 갔더니 할머니 혼자서 이마에 피를 흘리시며 식탁을 잡고 있더라고 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강제로 잡아가려 한다고 하면서!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며 무거운 식탁을 잡고 실랑이 중이었다는 설명이었다.
“할머니 이제 병원에 오셨으니 안심하세요. 누가 할머니를 데려가려 했어요? 기억할 수 있으세요?”하고 연거푸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원장님 괜찮아요. 이젠 됐어요.”라고만 했다.
곧 이어 며느리란 사람이 달려왔다.
“이 양반이 늘 어지럽데요! 참! 왜 이렇게 어지럽다고만 하는지?” 잘 차려입은 며느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뚱뚱하시면서 허구한 날 영양제주사만 좋아한다니까요…….” “정말 큰일 날 뻔 하셨군요.” “이 양반이 체중을 줄이라고 하니 얼굴 주름진다고 싫다하네요!”
오십대 중반을 넘긴 말끔한 부인이 시어머니께 말끝마다 ‘이 양반’이란다. 듣고 있는 내 속마음이 몹시 마뜩찮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며느리가 자신을 ‘이 양반’이라고 불러도 아랑곳하기는커녕 저항할 힘조차 없는듯했다.
지난겨울엔 큰 아들이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날 할머니를 먼저 진료실 밖으로 내 보낸 후 아들은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놓고선 전혀 조용하지 않은 괄괄한 목소리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놨다.
“우리 어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이 양반이 늘그막에 영감하나 사귀어 지난 10년간 살림 차리고 밥해줬지 뭡니까! 이 양반이 그 영감과 다정하게 살다가 영감이 먼저 떠나고 보니 지금도 못 잊어서 저러는 거예요…….” 경찰서장까지 지낸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며느리처럼 아들 역시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이 ‘이 양반’이었다. 이 양반이라…….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그녀의 마음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고혈압 때문에 주기적으로 우리 병원을 찾아왔다. 어지럽다고도 오시고 힘이 없다고도 오셨다. 오실 때마다 번번이 파티에라도 나가듯 정성껏 옷매무새를 다듬고 오셨다. 나는 사랑을 잃은 가엾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다정하게 대해드렸다. 영양제 주사를 맞으실 때 침대 옆에 다가가 조용히 손을 잡아드리면 곧잘 눈물을 글썽이셨다. 차츰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돼갔다. 미국에 있는 딸과 지방에 사는 작은 아들이 돈을 보내와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으나 큰 아들 내외와 불편한 관계라는 것을 조심스레 내비치셨다. “내돈주고 병원에 다니는데 웬 간섭이 그리 많은지 몰라.” 허리가 아프다고 하시기에 비만에 골다공증이 와서 그럴 수 있으니 체중을 줄이고 골다공증 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체중을 빼는 것은 피부에 주름이 생길 테니 싫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진단은 상실감으로 인한 우울증, 그로인해 환청과 환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중요한 상실(significant loss)을 경험한 노인에게서는 종종 자존심 저하와 우울증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것을 잃으면서 늘그막에 얻었을 새로운 배우자의 죽음을 경험했으니 우울증이 심했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용기 있게 택했지만 유교적 가치관에 젖어 살아온 한국여성이니 일종의 죄책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울증에 의한 환시 환청은 정신병적 발현 양상으로 공포와 불안장애까지 보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원래 소아과의사이다. 아파트단지 안에 자리 잡은 지 20년이 넘었다.
이곳에서 처음 진료했던 꼬마들은 벌써 성인이 되었다. 젊은 아기 엄마들은 이제 내게 딸처럼 보인다. 환자는 자기 나이또래의 의사에게 가장 신뢰감을 보인다고 한다. 그들도 나이든 나보다 예기하기 편한 주위의 젊은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선호하는 게 현실이다. 비(非)역세권에 산이 가까우니 지금은 소아보다 노인이 많은 곳으로 변했다. 이제 불혹을 넘어 천명이 뭔지도 모르고 지천명을 지났다. 늘어나는 내 나이와 함께 연수교육 때는 노인의학을 배우는 것이 천명(天命)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노인들은 단돈 몇 푼이 없어서 병원에 오지 못하거나 오더라도 참고 참았다가 오곤 한다. 요즘 고령화로 노인병도 문제지만 건강한 노인들이 고독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노인들의 성(性)문제도 사소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 프랑스의 한 사회학자는 향후 인간의 수명연장으로 일생 두 번 이상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가 오리라고 예견한다. 옛말 중에 임금이 꼭 보살펴야 할 사궁(四窮)으로 환과고독(鰥寡孤獨)이 있다고 했다. 국가복지정책으로 꼭 보살펴야 할 4가지 일로 늙은 홀아비, 늙은 홀어미, 부모 없는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를 말한다. 그 중에서 면환(免鰥)이란 홀아비를 장가보내는 것을 말하며 효도로 칭송 받아왔다. 환(鰥)이란 물고기가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지낸다는 뜻이라고 한다. 노년의 외로움은 같은 노인이 가장 잘 이해할 것이다. 홀 아버님의 외로움을 면환해드리는 것이 효도이라면 그 고마운 상대역인 홀 어머님의 외로움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그것을 수치로 여기는 이가 우리 중에 <그녀>의 큰아들뿐일까? <그녀>가 딴 살림을 차린 동안 그 댁 며느님도 고부갈등 없이 잘 지냈을 테니 고맙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을!
잎이 큰 단풍나무인 왕고로쇠나무 잎들이 작은 공원을 붉게 색칠한다. 그 중의 몇 개는 그녀가 앉은 벤치 곁에 툭툭 내려앉고 있다. 입술이 붉은 <그녀>가 오늘따라 애절해 보인다. 나라도 <이양반>같은 돼먹지 않은 호칭 대신 <그녀>라는 다정한 호칭을 오래오래 사용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면서 <그녀> 곁에 다다가 가만히 손을 잡아본다.
첫댓글 어떤 작품공모에 응모했다가 떨어졌다. 아주 꽝은 아니고 입선하여 20만원 상풍권으로 만족했다. 참 아쉽다. 다음에는 정진하여 꼭 추천이 아니고 입상등단을 이루고 싶다.
추카추카! 상품권이라? 혹 김칫국을 너무 일찍? 따스하네 글이~ 계속 정진하시게~
요새 돈이 궁하여 아르바이트하려다가 망했다! 그러데 뉘시요?
80 넘은 '그녀' 곁에 다가가 가만히 손을 잡아보며....<이양반>같은 호칭 대신 <그녀>라는 다정한 호칭을 오래오래 사용할 그대...참으로 아름다운 인술을 펴고 있네. 나도 곧 자네를 만나러 갈 것인데(예정?)...나는 무엇으로 불러 줄까, 궁금하네.자네의 글솜씨는 정말 대단하네. 여러번 이갸기했지만....정진하여 단단한 곳으로 등단하시게.
신원장 대단하다 글도 참 정겹겨 잘 쓰네그려!! 이제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지 않으니 이를 어째지?
내가 병원에 자주가서 그런지 그림이 그려진다. 그 분에게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면 어떨까?
일을 하면서 작품 소재를 구할 수 있고 글솜씨도 훌륭하니 꾸준히 글을 모아 책을 내셔야 되겠네. 잘 읽었네.
늙으면 반드시 겪어야 할 우리들의 행로다.누가 그랬지,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주변의 누구라도 나를 어떻게 대하드라도 탓하지 말고 자신이 하고픈 데로 살면된다.그거이 가능한 것이 늙으면 어린애수준의 단순한 사고로 돌아가니.지금 우리의 나이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딱한 노후처럼보이나 우리 또한 할머니 나이가 되면 호칭이 무에 대수겐나.
신원장! 자네가 품고 있는 가늠할 수 없는 그 많은 것들을 자주 풀어 놓으시게나.... 문인이자 훌륭한 의사인 자네가 자랑 스럽네....
애들처럼 하고싶은데로 (본능수준) 하고 살다 가게 된다.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간단다.,배 안고프게 해주고 외롭지 않게 해주고 ,용돈 몇푼 받을 수있으면 된다. 그리고 같이 놀아 줄 동무(연인으로 보였을까?) 있으면 더할나위 없이 조코.
저도 그 할머니처럼 늙어서도 인터넷을 하고 독서 하며 곱게 화장하여 예쁜옷 입으며 살려고 하는데....공감 백배입니다. 종찬오빠 감동어린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 맘까지 따뜻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