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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다가오고 있다. 멈춤없이 나아가는 세월이라는 기관차에 문득 노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태평스런 모습이지만 불안감을 주는 모습이다. 스멀스멀 복합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 퍼지고 있다. 그동안 내가 바라보던 노년이 지극히 객관적이었던 것부터 성찰하게 된다. 나는 나를 부정하고 싶다. 내 시선 어디에도, 심지어 부모의 늙음까지도 나 자신인 적 없었는데, 잘못된 노선처럼 믿기지 않는다. 그저 예를 갖추기만 하면 되는 딱 그 정도의 거리였는데, 내 생의 마지막 위대한 이야기라도 되는 듯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노년.
마치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삶이 역전하는 느낌이다. 멀리서 바라볼 때 느긋하기만 하던 그것이 지금부터는 속도를 내며 우리를 실어나를 것이다. 실린 이상 그 속도에 맞추며 옹색한 소원을 빌거나 현실에 만족하는 모습으로 안착할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지 않는 한, 진실로 관점을 역전시키지 않는 한, 지금까지의 이기심이나 자신만의 잣대에서 저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노년에 이르면 참으로 속절없이 드러날 것이다. 육신이 땅에 가까이 구부러져도 제 본성 버리지 못하던 것을 우리는 숱하게 목격해 왔다. 어느날 민낯으로 만났을 때 저와 같이 추레하지 않기를, 허영에 충만하지 않기를, 곤혹스럽지 않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한국 문학에서 노년의 삶을 다룬 두 편의 소설을 비교하며 읽었다. 일상에서 언제나 만나는 우리 주변의 노년이 거기에 있었다. 가족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하고 사회면 뉴스이기도 한 그런 이야기들. 그러나 곧 나 자신인 이야기들. 그저 소설이라는 이름이 얹혔을 뿐인 그것들은 그냥 인생의 이야기라 부를 만하였다. 상허 이태준의 <복덕방>과 정지아의 <봄빛>에는 그런 이웃 같은 흔한 노년의 풍경들이 펼쳐진다.
두 소설은 제목에서 이미 쓸쓸한 풍경을 전시한다. 노년을 상징하는 단어를 나열할 때 현실적인 공간으로서의 '복덕방'과 상징적인 이미지로서의 '봄빛'이 늙수그레 빛바랜 모습으로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표현방식과 관점은 사뭇 다르다. 상허 이태준 문학의 백미는 <문장강화>와 <무서록>이라는 산문집에서 빛을 발하여 후대 문인들의 교본으로도 통하지만, 단편이야말로 문학의 정수라 할 만하였다. 애잔하게 굽은 삶이 대화체 속에 두런두런 펼쳐지면 씁쓸한 인생 한 토막들이 얼기설기 차려진다. 화려하진 않지만 몸에 밴 구수함이 옹기 속 된장맛을 연상케 한다. 한편 소설가 정지아는 90년대 벽두에 장편 <빨치산의 딸>로 등장한 후, 지리산 자락을 주무대로 한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승화시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각기 다른 그들이 펼쳐내는 노년의 모습은 비교대상으로서도 흥미롭지만, 결국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인생의 모습들이다. 개별적 작품 선택도 중요하지만 가끔 비교론적으로 읽어보는 자세도 바람직할 것이다. 이야기 위주로 문장 자체를 되살리고자 노력하였다. 인생이 곧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태준 作 <복덕방>
‘복덕방’이란 이름에는 세상살이 소일하는 노년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코에 걸친 돋보기로 세상을 지그시 내려다보면 저마다의 사연들이 또 그렇게 매달려 있다. 화투놀이를 하거나 신문을 보는 것이 그들의 일과이자 세상을 향한 공공연한 간섭이다. 그렇다면 복덕방이야말로 노년의 일상을 지탱하는 무대가 아니겠는가.
상허 이태준의‘복덕방’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속 서울의 한 복덕방을 중심으로 소외된 노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복덕방에 모인 세 노인이란 서 참의와 박희완 영감 그리고 안 초시이다. 우선 이 복덕방의 주인인 서 참의는 젊은 시절 훈련원 참의를 지낸 내력으로 한번 호령하면 ‘산천이라도 물러설 것 같던’기개를 자랑했으나, 지금은‘한낱 가쾌로, 기생, 갈보 따위가 사글셋방 한 칸을 얻어달래도 녜녜 하고 따라나서야 하는, 만인의 심부름꾼’신분이다. 그러나 지난날에 대한 자부심도 높아, 행상을 하며 지나가는 옛 동료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쫌보라고 놀리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안 초시이다. 서 참의의 복덕방 한편에 기대 사는 신세지만, 소설을 이끄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서 참의와 대조적인 성격으로, 매사에 불만이 많아 말끝마다 젠장을 붙이고 산다. 세상은 그에게 호락호락 기회를 주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늘 한 방을 기다리는 포부를 잃지 않은 인물이다. 그에겐 무용가로 이름이 알려진 딸 안경화가 있지만, 사회적 체면이 중요한 딸은 아버지의 소원인 샤쓰 한 벌과 부러진 안경다리 고칠 용돈에는 인색하다.
“얘? 낡은 솜이 돼 그런지, 삯바느질이 돼 그런지 바지 솜이 모두 치어서 어떤 덴 홑옷이야. 암만해두 샤쓸 한 벌 사 입어야겠다.”
이것은 참으로 비루한 구걸이지만, 그의 딸은 아버지 보험으로 넣는 돈이 얼만지 아냐며 도리어 역정이다. 안 초시는‘보험료나 타먹게 어서 죽어달라는 소리’로 해석하면서도, 자식이 따지는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모든 것들은 속으로 삼킨다. 젠장을 달고 사는 노인의 눈치보기가 안쓰러우면서도 결국 수중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포부로 이어지는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박희완 영감은 훈련원 시절 서 참의의 친구로, 재판소에 다니는 조카를 빌미로 일본어를 외고 다니는 인물이다. 그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안 초시에게 부동산 투자정보를 알려주었으나, 자신의 땅을 처분하기 위해 부동산 임자가 벌인 연극임이 밝혀지고, 이는 결국 안 초시의 자살로 이어진다.
‘추석 가까운 날씨는 해마다의 그때와 같이 맑았다. 하늘이 천 리같이 트였는데 조각구름들이 여기저기 널리었다. 어떤 구름은 깨끗이 바래 말린 옥양목처럼 흰빛이 눈이 부시다. 안 초시는 이번에도 자기의 때묻은 적삼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소매끝을 불거나 떨지는 않았다. 고요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 더러운 소매로 닦았을 뿐이다.’
회한의 도구로 등장하는 때 묻은 적삼과 꿈처럼 아득한 흰 옥양목의 대비는 절망어린 죽음이 품었던 한때의 희망찬 미래를 대변한다. 모든 죽음이 쓸쓸하지만 가진 것 없는 노인의 죽음이란 결국 때 묻은 적삼자락이나 고치지 못한 안경다리처럼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도구이다. 그 소원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으며, 그것조차 이루어주지 않은 딸은 또 얼마나 환멸적인가. 인생이 아무리 거창하대도 사소한 것에서 행복과 불행이 구분되어진다.
남겨진 자식에게 궁색하게 부탁했던 소원을 이룬 것은 결국 장례식장에서다. 아버지의 자살이 알려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안경화의 체면을 이용한 서 참의의 조건이 그나마 호화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귀결된 덕분이다. 그러나 그토록 힘이 셌던 보험금으로 호화장례식이라는 허울을 쓴들 결국 자신의 지인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치이자 이미지에 불과하다. 서 참의는 그걸 깨닫고 박희완 영감이 가지고 온 부의금을 가로막는다.
“장례비가 넉넉하니 자네 돈 그 계집애 줄 거 없네.”
남겨진 두 노인의 분향 장면은 그 돈으로 거나하게 마신 술기운에 반어적 조사(弔辭)로 터져 나온다.
“나 서참윌세. 알겠나? 흥……자네 참 호살세 호사야……잘 죽었느니. 자네 살았으문 이만 호살 해보겠나? 인전 안경다리 고칠 걱정두 없구……아무튼지……”
노인들은 마지막 우정으로 안 초시의 묘지까지 함께 할 마음이었으나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아’술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통쾌할 것 까진 없지만 소심한 복수라도 있어야 자식 거두어낸 삶이 위로를 받을 것 같다. 노인의 정이 부모 자식간의 그것보다 궁색하지 않단 것을 잘 보여주었다. 해학적 상황과 담백한 이야기 전개로 노년 문학의 정수를 만난 기분이다.
정지아 作 <봄빛>
이태준의 ‘복덕방’이 노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그들의 이야기라면 그 대척점에서 바라본 소설이 정지아의‘봄빛’쯤 될 것이다. 늙어버린 부모의 무력함을 바라보는 자식의 고단함이자 과거와 현재의 화해라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테마다. ‘복덕방’이 자식(혹은 사회)에 대한 부당한 설움을 대화체 형식에 간결하고도 섬세하게 담았다면, ‘봄빛’에서는 치매에 걸린 노년의 아버지를 기억해가는 과정을 담았다.
원망과 화해 사이에 복원되지 못할 치매라는 강이 놓이고, 그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아버지라는 이름. 결국 기억(젊음)을 놓아버린 노년의 부모에게 자식의 기억은 아버지의 젊음이자 언젠가 만날 자신의 다음 모습이다.
‘봄빛’은 유순한 아기처럼 탐스런 햇살이기도 하지만, 볕바른 양지에 햇살놀이를 하는 노년의 모습 또한 봄빛에 어우러짐을 드러낸다. 개나리 노오란 꽃그늘 아래 아이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노니는 모습은 봄이라는 빛깔의 이중성이면서도, 아이가 된 아버지를 내 아이 안 듯 안을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반사적 기능이기도 하다.
그 햇살에 무기력하게 나앉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은 다정스러움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부자간의 사연은 어머니의 지청구와 아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드러난다. 부모의 기대치에 값하지 못하던 지난날, 대학공부를 포기하려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것배끼 안되는 놈’이라는 말로 서운함을 표한 후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열 살에 아버지를 잃은 후 평생을 가장 노릇하며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한스러움이 자식에 거는 기대로 옷을 갈아입었단 것도 아들의 기억에서 차츰 드러난다. 이 땅의 부모세대가 자식에게 맹목적인 것은 자신이 놓쳐버린 희망에 대한 대리만족 아니던가.
그러나 기대를 저버린 데서 오는 주눅과 조금씩 익숙해져버린 생의 무력함을 안은 자식의 상처도 깊다. 하물며 과거를 놓아버린 부모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 자식됨의 도리를 안아야 한다. 과거는 기억하는 자의 몫이다. 흐릿해진 노인의 세대는 기억을 놓아버림으로써 육신의 모든 고단함을 내려놓게 된다. 그것은 자식에게 나를 맡긴다는 생의 은퇴이자, 고스란히 지난날의 베풂을 투정처럼 안기는 우리 인생의 이치일지도 모른다.
‘느그 아부지 눈은 호랑이맨치 불을 뿜어야. 눈만 봐도 사지가 오그라든당게.’
그랬던 아버지가 형형하던 눈빛을 잃고 자식 앞에 어린아이가 되어 작아져 있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하고 모든 부모가 그렇게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다. 인생은 끊임없이 습작하다 느닷없이 노년을 만나는 두 단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알면 알수록 두려운 것이 인생이라 했던가.
‘그가 넘어서기도 전에 세월이 야금야금 그 거대한 산맥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한 생명을 만개시켰던 시간이라는 것이 악덕 고리대금업자처럼 제가 주었던 모든 것을 냉정하게 회수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만나야 할 인생의 노년기. 우리의 젊음은 결국 악덕 고리대금업자 세월에 잡아먹힐 빚이라는 것이 아닌가. 통렬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젊음도 짧았는데 어느덧 기로에 서서 그 젊음을 회수해간다고? 이처럼 서글픈 깨달음을 던지기 위해 인생은 지금까지 온갖 실험에 우리를 내던져 놓았던가.
‘봄빛’속에서는 무기력한 아버지보다 실은 어머니의 다부진 저항을 눈여겨보게 한다. 약자라고만 믿었던 어머니의 억센 변화는 생의 수사로 현란하게 넘쳐난다. 기 한번 펴지 못한 채 주눅 들었던 삶은 노년에 이르러 단련된 무기처럼 날이 서있다.
“아이, 나가 참말로 못살겄다. 느그 아부지가 날이 갈수록 이상해져야. 얼둥애기맨치 반찬타령이나 해쌓고, 씻도 안헐라고 허고, 그러니 나가 젼뎌나겄냐? 느그 아부지 뒤치다꺼리하니라고 하루가 모자란당게. 내가 아조 몸이 열 개라도 못 버티겄다. 자개만 늙고 나는 안늙가니 무신 몸종 부리디끼 부린단 말이다.” 이상하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라고, 서로 늙어서 그런 것을 어쩌겠느냐고, 그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소설 속 어머니가 쏘아대는 역정이나 지청구들이 지리산 자락 아래 구수한 사투리로 귀에 착착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남편에 대한 어머니의 성토가 가장의 위태로움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미에 느끼게 된다. 미우나 고우나, 언제 싸웠냐는 듯, 머리 맞대고 잠을 자는 두 노인. 결국 수만 갈래 길을 돌아도 부부 일심동체임을 증명해 보인 훈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죽음보다 더한 치매선고를 받고도 잠들 수밖에 없을 만큼 부모님의 몸이 늙었음을 깨달은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기가 촉촉이 눈에 고였다.… … 고리대금업자 같은 비정한 세월이 자신으로부터도 수금을 시작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노년의 삶은 결국 자신의 모습이다. 지금의 내 나이 또한 부모의 노년기를 바라보는 자식이라는 입장과 자라나는 자녀들에게서 조금씩 물러서는 법을 배우는 어디쯤에 서있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젊음이라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친숙해질까. 씁쓸함도 떫음도 입맛에 필요하기 마련이더라. 내가 맞을 노년이 먼 미래가 아니라는 생각과 그것을 미리 학습하는 것마저도 눈이 아리는 스산한 마음. 노력하여도 얻어지지 않는 게 많은 인생에, 이것만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온다는 것이 조금은 속상하여, 지금은 그저 남의 얘기라면 좋겠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_()_
상, 반대 되는 이야기를 너무 잘 표현 해 주어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더욱이 치매가 남의 얘기가 되었으면 좋을 만큼 나에게는 피했으면 하는 마음 공감하며
노인의 우정과 애물단지인 자식들의 싸가지가 복덕방이란 작품에 흥건히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슬믈 거리네요 인선샘 감사 ^^
새해 첫 독후감이 노년이라 그리 편치만은 않았는데..
'복덕방'이 든 책은 이태준과 박태원의 단편집인데 해방전후 작품을 감상할 수 있을 듯하네.
단편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중요한 작가들이란 생각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