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평생을 되돌아보니 / 박 순 록
잉크가 마르지 않았나 확인하는데 석 달 열흘.
꽁꽁 잠겨져 있는 것이 노란 민들레, 보라색 제비꽃이 뜨락에 피어나고 벚꽃이 손짓하니 저절로 열린다.
이번 삼동에는 글을 좀 써야겠다고 결심을 했건만 작심삼일이 되고 말았다.
수업을 가야 하나. 숙제도 안 하고서. 오전 내내 말썽이다가 일단 참석 릴레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디지털교육기간 내내 수강생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던 말 < 남이 장에 가면 거름 지고 장에 간다 >는 말 예전에는 흉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빈 가방 들고라도 따라오면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웃음과 이야기를 담아가게 된다고.
숙제는 물론이고 합평할 문우님들의 글도 제대로 읽지 않은 상태로 참석을 해서 부끄러웠지만 자극을 받아야 동기부여가 될 테니까. 오늘부터 무조건 쓴다. 마중물이 필요하다. 펜을 들고 무작정 써 내려가 본다. 낙서글이라도 좋고 주제를 좀 벗어나도 좋다.
워밍업의 시간이니까.
계묘년 회갑년 버킷리스트 1순위는 건강관리다.
건보공단의 5년 생존 확인 대상자로 등록되어 있고 어머니께도 부탁을 드렸다. 그날까지 꼭 계셔달라고.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은 건강을 유지할 때 가능하니 자신의 건강부터 챙겨야 하지만 아직도 자식을 먼저 챙긴다.
설 연휴 직전 코로나 확진. 남편이 먼저 코로나 확진을 받았고 작은방 한 칸에 격리를 했다.
이튿날엔 아들과 나까지 확진을 받았다. 딸아이는 방학이지만 학교에 일이 있어 출근했다가 본가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2주간 이산가족이 되었다.
3년 동안 멀쩡했는데 석 달 동안 편하게 쉬려고 했더니 배려라도 해 주었던 것처럼 코승사자가 용케도 찾아왔다.
그나마 릴레이로 앓지 않고 세트로 앓았으니 다행이었다.
우선 먹을 식재료부터 확보를 해야 하니 남편과 칠성시장 및 마트에 조심스럽게 다녀왔다.
장바구니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는데 아들이 뚜껑 열린 듯 화를 내며 큰소리로 “엄마 아빠는 코로나 안전수칙을 지켜야지요. 한 번 더 외출하면 신고할 거예요."라고 벌금 1천만 원 내셔야 된다며 닦달을 했다. 아들이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하긴 코로나 초기 같으면 신문에 날 일을 했으니. 늘 기본에 충실하는 원칙주의자인 아들 앞에 그래 조심할게 하고 꼬리를 내렸다.
면역력이 떨어진 탓인지 후유증이 심했다. 의욕상실. 밥 먹고 약 먹고 자고 두 달을 집 안에 갇혀 있었다. 너무 오래 집에만 있으니 우울이가 스멀스멀 틈새로 스며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 내가 심리학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점령당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듣고, 유튜브 시청하고 아들이 추천해 준 드라마와 영화 몇 편을 넷플릭스에서 시청했다. 그중에서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다름을 이해하고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60 평생 중 어린 시절은 내내 어머니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옆에 누워 엄마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심장이 뛰는지 손 얹어 보고 그렇게 불안한 시절이었다. 혹시라도... 동생들이 걱정이 되어 교사의 꿈을 접고 여고 졸업하고 만 18세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할 때 아버지께서 제 손을 잡고 " 미안하구나. 평생 펜으로 먹고살아야지."
대학생 오빠(재벌집 아들 딸 과외하다 금지령 내려 고학생 된)랑 동생 2명과 함께 자취 생활을 하면서 그 많은 손빨래를 짤순이가 도와주었고, 연탄불에 새벽밥 지어 도시락 싸서 동생들 학교 보내고 5년을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 월급봉투는 화장대 옆 작은 서랍에 넣어두면 필요한 사람이 꺼내서 쓰고 월급날이 되기 5일 전이면 빈 봉투만 남아 있었다.
5년 동안 또순이처럼 집안일 혼자 다 떠안고 살다가 구세주를 만난 것이다. 비록 백수인 예비공무원이었지만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게 손 내밀어 준 오른쪽 남자. 아버지 앞에서 절대 눈물 내는 일 없이 평생 사랑하며 잘 살겠다는 그 맹세를 믿었다.
그런데 아이 둘을 낳고 아이들 어린 시절 새벽부터 밤중까지 내 시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작은아이는 업고 가서 이모님께 맡기고 첫째 아이는 데리고 출근했다. 운전을 배우면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 편리하겠지만 학원 다닐 시간이 없었다. 일중독 남편은 조기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였고, 종종 회식을 하고 새벽이슬 맞으며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설친 잠을 보충할 시간도 없이 출근하고. 노사연의 노래 <바램> 의 가사 그 자체였다.
우리 가족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놀이터 앞의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가끔씩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본다. 남편은 그 느티나무 근처에 가기를 좀 꺼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34년을 워킹맘으로 주경야독하면서 교육학을 공부했고, 교육학과의 슬로건인 <배워서 남 주자>를 실천하기 위해 정년을 8년 남겨두고 명예퇴직을 하고 자아실현을 위해 상담대학원까지 마쳤는데 살면서 공부하는 시간들이 참으로 행복했다.
평생학습시대에 공부하고 가르치고 하루하루 보람되고 행복한 날들이다.
고난의 젊은 시절. 아무리 청춘이 좋다고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인생 숙제를 다시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머리숱 많고 에너지 넘쳤던 그 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의 장에 보관하고 싶다.
워킹맘으로 독박 육아를 하는 엄마의 삶을 보고 자란 탓인지 딸아이가 아이 낳아 기를 자신 없다고 결혼을 미루고 관심이 별로 없다. MZ세대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꺼리는 맞벌이 부부의 독박 육아는 역사 속의 전설로 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전자까지 정리가 되려면 아직은 멀기만 하다. 가부장 시절 목청 높여 외치고 관철시키지 못한 나의 무책임함에 대한 반발일까. 넌지시 물어보면 최수종 같은 남자 있으면 결혼하겠다고 한다. 그런 사람 어디 가서 구하지요.
남편은 주변 친지나 친구들의 자녀 혼사에 다녀올 때면 부러워하면서도 딸아이에게 결혼에 대해 거의 언급을 안 하는 것을 보면 미안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수할 보호자가 없는 딸아이의 보호자 노릇을 언제까지 하려는지.
인생 숙제는 자녀 혼사까지 끝내야 마치는 것이라고 하지만 언덕에 올라보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겠지.
인생사 시험당하며 견디고 버티고 모난 돌이 조약돌이 되는 과정인 것을 회갑이 되어 제대로 알게 되었다.
오랫만에 뚜껑을 열었으니 잉크가 마르기 전에 60 평생 살아온 그림을 그려보니 산전수전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꽃비가 내리는 아침. 뜨락에서 단비를 머금은 앙증스런 민들레와 제비꽃이 나를 행복의 길로 인도한다.
첫댓글 샘 , 오랫만입니다.
잘 계시네요.
인생이 늘 봄날 같으면 좋은데...
네. 회장님 잘 지내시죠
화요수필 조용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