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골이야기-감람골 길가소나무100222.doc
동로골이야기-감람골
“감람골”이라는 곳은 우리 마을에서 읍내 방향으로 신작로를 다따 1km 정도를 내려가면
갈치(마을 이름)입구 삼거리가 나오고 좀더 내려가면 옹기를 굽는 “점촌”이 나오는데
그 마을에는 한 20여미터가 족히 되는 그릇 굽는 가마가 몇 기가 있었다. 그릇을 굽는
날이면 가마 아궁이에서 올라간 장작 불빛이 중간 중간의 숨 구멍 사이로 비집고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검붉은 불빛속에서 시뻘겋게 익어가는 옹기그릇을 보면 내
가슴이 화끈거리곤 했다.
그 점촌 앞을 돌아나가면 신작로가 굽이지기 시작한다. 신작로가 홱 굽어지는 곳 안쪽으로
오래된 적송 두 그루가 가지를 늘어뜨린 채 늦은 오후면 신작로까지 칙칙한 그늘이 내려와
있었다. 소나무는 사람 키 정도되는 높이에 상채기 입어 껍질이 절반정도는 벗겨져 있었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6.25때에 그 곳에다 사람을 묶어놓고 총살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에는 그저 그렇겠다 했지만 어느 때부터 그곳을 지나칠려면 마음을 단단히 추스려야했다.
특히 내 바로 윗형이 “월락리”에 있는 월락국민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는 중학교를 진학할려면
진학할 학교를 지원하고 시험에 합격을 해야 갈 수 있었다. 우리 동네에도 중학교 시험에 떨어진
선배가 있었으니 말이다. 내 옥수형이 “고죽리” 종규형네에서 자취를 했었고 나는 간혹 반찬을
배달해주는 역을 맡았다. 반찬 배달이라는게 다름 아니고 어머이가 반찬을 만들어주시면 걸어서
“고죽리”까지 갖다주고 다시 걸어서 되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이가 아무리 서둘러도 농사일을
하시다보면 초저녁이 되기 일쑤라 갈 때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감람골” 나에게 당산고개
만큼이나 부담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운좋은 날이면
내 형이나 종규형이 감람골을 돌아지나칠때까지 멀리서 지켜봐주었으니까.
우리 아버지로부터 듣은 이야기는 우리 동네 앞으로 지리산을 행해 많은 인민군들이 신작로 양쪽으로
나누어 행군을 했었고 간간히 예쁜 여군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감람골에서 총살이 있었는가, 너무 늦었지만 사실이라면 대상이 누구인지도 좀 더 알아보고 싶다.
“감람골” 늙은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주유소가 들어서면서 음침한 느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세상은 우리가 보고 듣고 아끼던 것들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 몫은 고스란히 우리가 해야만 한다.
“감람골”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이름도 아름답다. 그곳에 까마득히 잊어버린 경남이와 두식이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 또래 아이들은 기억을 할까? 눈빛이 퀭하도록 빛났던 그 친구들 모습이 아직껏
내 마음에 있다.
첫댓글 마을이 선명하게 그려지네요..머리속에..
앞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연습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