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여자들은 일방적으로 남자 친구의 옷장을 습격했다.
이제 불공평한 패션 침략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상호 교류의 시대가 도래했으니,
남자는 여자 친구의 신발장을, 여자는 남자 친구의 신발장을 탐할 때다.
“실험적인 남성용 패션이긴 하지만 이 신발들은 정말 끔찍하다. 난 클래식한 스타일을 고수할 생각이야.” “혹시 이 신발이 여성용 사이즈로도 나오는지 누구 아는 사람?” “크록스가 제짝을 만난 것 같군!” “완전 맘에 드는걸?” “대체 이게 뭐람?!”
식겁하거나 혹하거나. 1월 초 SNS는 J.W. 앤더슨 남성복 쇼의 아주 특별한 소품에 대한 상반된 의견으로 들끓었다. 성의 구분이 모호한 패션의 가장 현대적인 버전을 제시한 앤더슨 군은 70년대 디스코 슈즈를 쏙 빼닮은, 대략 7cm 정도의 플랫폼 솔이 부착된 레이스업 슈즈를 남자 모델들의 발에 신겼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5:5 가르마에, 팔에는 박스 테이프 뱅글을 주렁주렁 끼우거나 바구니 가방을 든 잘생긴 젊은이들이 나막신 같은 신발을 신고 어기적거리며 워킹하는 모습은 충격과 신선함이 충돌하는 패션의 순간이라 할만했다. 그리고 현실감각으로 똘똘 뭉친 남자들의 거부감을 추측할 수 있었던 것만큼이나 여자들의 폭발적인 호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판타지 속의 남자는 여자 신발을 신고, 현실 속의 여자는 남자 신발을 신는 패션 아이러니라니!
최근 패션에 관해 두려움이 없는 남자들의 움직임은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패션 판타지의 현실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말쑥한 수트에 스틸레토힐을 또각거리며 밤의 클럽을 누비는 복장 도착이나, 여성을 향한 폭력에 반대하는 사회운동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프랑스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는 41, 42 사이즈의 다크 블루 컬러 새틴, 혹은 적갈색 파이톤 소재 슬립온 슈즈를 사려는 남자들이 셀린 매장을 들락거린다(이 유행에 불을 지핀 이는 21세기 지구 최고 멋쟁이 퍼렐 윌리엄스. 레오파드 프린트 송치와 뱀피 소재 셀린 슬립온을 즐겨 신는 그다). “우리나라에는 38(250mm) 사이즈까지만 수입됐습니다. 실제로 매장에 왔다가 사이즈가 맞지 않아 허탕을 치고 돌아간 남자 손님들이 꽤 있죠.” 셀린 슬립온의 아름다운 자태에 가슴이 부풀었던 모 남자 디자이너 역시 좌절한 경험이 있다. 그는 ‘꿩 대신 닭’을 발견한 데 만족한 상태다. “에크루에 들렀다가 일본 브랜드 ‘앰배서더스’ 슬립온을 발견했어요. 셀린의 송치 버전과 아주 똑같더라고!”
때로는 불리해 보이는 조건이 계기가 될 때도 있다. 코오롱 FnC 마케팅 팀의 조성훈은 여자 신발 260 사이즈가 맞을 정도로 발이 작다. “작년 봄 시즌의 흰색 샤넬 운동화를 눈여겨봐둔 상태였죠. 지난가을 파리 출장 때 큰 기대 없이 매장에 갔는데, 벨벳과 스웨이드 소재가 섞인 검정 버전이 가을 신상품으로 나왔더군요. 신어보니 사이즈가 딱 맞기에 당장 그 자리에서 구입했죠.” 남자들이 선호하기 마련인 랑방이나 발렌시아, 지방시 스니커즈에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 눈치다. “전형적인 운동화 디자인이라 유행을 타지 않는 편이죠. 무엇보다도 대부분 남자들은 신고 싶어도 신을 수 없다는 데 매력을 느낍니다.” 산드로 매장 쇼윈도에서 본 호피 무늬 송치 슬립온(역시 여성용)도 갖고 싶었지만, 샤넬 스니커즈를 정상가에 구입했기에 통장 잔고도 고려해 그건 포기했단다.
그러나 앤더슨의 플랫폼 슈즈는 앞서 언급한 이들조차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게 사실(주먹코처럼 볼록한 토 라인, 발을 옮길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익숙지 않은 무게감). 오히려 이 깜찍한 기괴함에 열광해 마지않는 건 바로 여자들이다. 여자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신발에는 포멀한 남자 구두 디자인을 적당히 모사한 명확한 유니섹스 코드의 매력이 있다. 최근 20~30대 여성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여성용 구두도 유사한 맥락으로 어필한다. 디자이너 윤홍미의 레이크 넨은 섹시한 곡선이나 날렵한 실루엣 대신, 장난감 블록 같은 단순하고 구조적인 심미성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옥스퍼드나 로퍼 같은 남성화에서 디자인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윤홍미는 우아함과 동시대성을 브랜드의 디자인 키워드로 꼽는다. “동시대적이라는 것은 그 시대 여자들이 신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녀들의 삶의 방식에 적절한 신발이라는 의미죠.” 발 아치의 경사가 완만하고 벽돌처럼 두툼한 플랫폼(매우 가벼운 합성 소재)이 바닥을 받치는 디자인이 특징으로, 상당수 고객들이 한 번에 서너 켤레씩 사갈 정도로 부담 없고 편한 에브리데이 슈즈로 정착했다.
남자들이 여자 신발을 시도하는 것은 기존 세력에 대한 도전이나 굉장한 반란처럼 느껴지는 반면, 여자들이 남성화를 신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진행되고 있다. 여자들에게 옥스퍼드와 브로그 슈즈는 ‘뉴 발레리나 플랫’이다. “포멀한 팬츠 수트 등 매니시한룩의 여자 고객들이 많을 것 같지만 오히려 특정 스타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편입니다.” 남성 구두 편집매장 유니페어 관계자에 따르면 매장에서 소량 진행하고 있는 태슬 로퍼, 더블 몽크 스트랩, 스웨이드 풀 브로그 부츠 같은 일부 모델의 여성용 사이즈는 남자 친구를 따라온 여자들이 종종 사가곤 한단다. 발이 평균 이상으로 크기 때문에 남자 신발을 신는 경우도 있지만, 매장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여성용 남자 구두 사이즈는 230~240. 남성 슈즈 전문 브랜드에서 남성화와 똑같은 디자인을 좀더 밝거나 화려한 색으로 제작한 것들이다. “데님 팬츠 같은 캐주얼한 의상과도 잘 어울리죠. 여자분들은 굽이 낮은 만큼 편하게 신을 수 있는 신발, 이를테면 로퍼나 드라이빙 슈즈 같은 것에 대한 선호도가 높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남들이 봤을 때 아름답기보다 자신이 편한 것을 당당하게 추구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하이힐을 발명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여자들은 그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마릴린 먼로에서 “나의 패션 센스는 불편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라고 말한 길다 래드너적 자세로 옮겨갔다고 할까. 어쨌든 패션에 적극적인 남자들은 여성 컬렉션에서, 여자들은 남성 컬렉션에서 공감할 수 있는 유니섹스 아이템을 발견하고 시도하고 있다. 얼마 전 끝난 파리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서 샤넬과 디올은 섬세한 맞춤 드레스에 레이스와 시퀸 장식, 트위드 소재 스니커즈를 매치했다. 이 아름다운 스니커즈를 신은 남녀가 거리를 누비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이제 곧 거리에서 보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