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하옵니다. 하눌이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날으는 몇 마리의 나비를 두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여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황야를 헤매던 봉두난발의 리어왕이 잠깐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쯤 입속으로 중얼거렸을 법한 시다. 신간 ‘나만의 미당시’(은행나무)를 펼쳤다가 미당 서정주(1915~2000)가 지은 ‘기도1′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20대부터 80대까지 시인 서른 명이 하나씩 고른 미당 시와 해설이 담긴 에세이. 시인 김사인은 ‘기도1′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운명에 떠밀려 난파한 화자가 하눌이여 마음대로 합소서, 이제 저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아무것도 아니나이다, 맘대로 합소서, 그 투명해진 탄식이 손에 잡힐 듯하다. ‘텅 비인’이 아니고 ‘텡 비인’이다. 빈 공간을 돌아 울리고 나오는 바람 소리의 허전한 여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