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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독서: 시편 139편>
신비가의 노래 이연학 요나(수사 신부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오늘 기도할 시편 은139는아주 특별한 시입니다. 어쩌면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신비롭고 관상적인 본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현존의 시편이라거나, 지식(gnosis) 또는 관상(contemplatio)의 시편이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기도로써 하느님의 사랑스런 눈빛, 그 안전眼前에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 젖힌 채, 본문을 천천히잘 낭송해 보시기 바랍니다.
1.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2.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6.저에게는 저무나 신비한 당신의 예지 너무 높아 저로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7.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8.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13.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14.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소합니다. 당신의 조물들은 경이로울뿐, 제 영혼이 이를 잘 압니다. ....16.제가 아직 태아일 때 당신 두 눈이 보셨고 이미 정해진 날 가운데 아직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 당신 책에 그 모든 것이 쓰여졌습니다. 17.하느님, 당신의 생각들이 제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것들을 다 합치면 얼마나 웅장 합니까? 18.세어 보자니 모래보다 많고 띁까지 닿았다 해도 저는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23.하느님, 저를 보살피시어 제 마음을 열어 주소서. 저를 꿰뚫어 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주소서. 24.제게 고통의 길이 있는지 보시어 저를 영원의길로 이끄소서.
보시다시피 인명이나 지명 따위가 하나도 등장하지 읺습니다. 다른 시에 약방의 감초 격으로 꼭 나오는 예루살렘더, 성전도, 모세도, 다윗도, 심지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는 이름은 오직 하나, '주님'뿐입니다. 이 시편의 공간적 배경이 온 우주라면, 시간적 배경은 '지금 여기'에서 샘솟고 있는 영원입니다. 지금 존재의 신비에 형언할 수 없이 젖어든 나머지, 이 광대무변의 우주, 대적광 大寂光의 시공간에 신비가가 되어버린 시인의 목소리만 메아리치고 있음을 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첫 연(1-12절)은 모든 것을 알아 보시는 '하느님 현존의 신비'에 관한 묵상입니다. 둘째 연(13-18절)은 "정녕 당신께서는....엮으셨습니다"라는 첫 시구가 알려 주듯, '내 존재의 신지'에 관한 묵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째 연(19-22절)은 얼핏 노래의 전체 분위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부분처럼 느껴지는데, '악의 신비'가 그 주제입니다. 마지막 연(23-24절)은 '나 자신의 성찰'이란 주제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네 연의 주제가 이루는 흐름을 타고 묵상해 보겠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보살피어 아십니다"(1절). 시인은 노래 첫 마디부터 자기를 보고 계시는 어떤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는 지금 하느님께 '무엇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바로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그분의 현존이, 그 두렵고도 고요하고 다정한 현존의 빛이 시인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신음과도 같은 진실의 노래를 이끌어 냅니다. 시인의 가슴 깊은 곳에 감춰진 진실을 들여다 보시며 가슴으로 함께 공명하시길 권합니다. 시인이 마주하고 있는 '그분'을 함께 마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서도 가장 깊은 내 진실의 노래를 길어 올리실 수 있게 마음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올바로 접어들었음을 알려 주는 표지 중 하나는 , "주님,당신께서 저를 아시나이다"라는 말이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참된 기도의 체험에서 내가 하느님을 찾고 뵙는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찾고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첫 단추를 꿰는 순간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알아 차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분을 알게 되는 첫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관상이란 "하느님을 뵙기' 전에, '하느님께 보이기'란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요한복음 서두의 나타나엘 이야기(요한 1,43-51)가 의미심장합니다. 나타나엘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먼저 알고 계셨다는 체험을 하고 난 뒤에야 비로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요한 1,49)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말씀에 나타나엘은 ㅁ몹시놀랐습니다. 그것은 사실 "네 엄마 뱃속에서 꼼지락거릴 때부터 나는 너를 알고 있었다"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알고 계셨다는 말씀과도 진배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몰래 만들어질 때, 제가 땅 깊은 곳에서 짜여질 때, 제 뼈가 당신께 감추어져 있지 않았습니다"(15절)라는 구절이 바로 그런 체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해 보자면, 주님의 시선은 내 어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내가 지니던 모습(父母未生全 本來面目)을 보고 계시는 그런 시선입니다. 어떻든 이렇게 그분께서 먼저 나를 아신다는 사실을 알고나야 내가 그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신앙인의 체험입니다(1코린 13,12 등 참조). 사람은 이런 시선 앞에서 당연히 깊은 경외감을 느낍니다. 자칫 우리 존재가 이 시선 앞에 온통 불타 녹아 버리고 말 것이라 느끼며 두러움에 떨 수도 있습니다. "당신 얼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 피해 어디로달아나리이까?...'어둠ㅂ이 나를 뒤덮고 내 주위의 빛이 밤이 되었으면!' 하여도 암흑인 듯 광면인 듯 어둠도 당신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빛나나이다" (7절, 11-12절) 하고 노래하는 구절은 이런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의 시선을 견딜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선은 근본적으로 따뜻하고 다정하다는 것이 또한 신앙인의 체험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그 아름다운 인간의 얼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시선이 그러합니다. 그 눈길은 '빅 부라더'처럼 비밀스레 모든 것을 지켜보는 감시자나 꼬장꼬장한 심판자의 그것이 아니라, 집 나간 아들의 고통이 마음 아파 짓물러진 눈으로 날마다 멀리 동구밖을 지켜보던, 너무 어잘기 때문에 어리석은 아버지의 그것입니다(루카 15,20참조).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실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측은지심에 휩싸이셨던(마태 14,14 등 참조) 예수님의 눈길도, 부자 청년을 사랑스레 들여다 보시던(emblepo, 마르 10,21) 눈길도 마리아의 보잘것없음을 굽어보시던(epiblepo, 루카 1,48) 눈길도 사실 모두 같은 것입니다. 북풍이 벗기지 못했던 나그네의 옷을 해님이 벗긴 것 같은 시선 앞에서, 십년 전에 유행했던 한 자락 노랫말처럼("너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어 버렸다. 거짓의 옷을 벗어 버렸다") 우리는 가면을 벗어 버리고 있는 그대로 벌거벗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어둠마저도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펼치기만 하면 , 구석구석 비추시도록 허용만 해 드리면, 내가 그분의 빛을 발산하는 장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나를 비추시는 그분의 빛은 이제 내 안에서 발산되는 빛이 됩니다. "주님은 나의 빛!" 이란 고백이 여기서 나오고, 나를 두고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마태 5,14)도 이렇게 알아듣게 됩니다. 이렇게 은총으로 씻긴 마음의 눈에 세상은 그 투명한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 이제 만사는 자기 안에 숨은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심지어 빈대처럼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 속에도 충만히 빛나는 (마이스터 엑카르트) 그분의 무한히 겸손한 현존을! 이 시편은 이렇듯, 첫 연만 잘 묵상해도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뵙는" 관상의 길목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뒤에서도 앞에서도 저를 에워싸시고 제 위에 당신 손을 얹으시나이다"(5절)라는 구절은, 당신의 진지하심돠 편재하심이 나를 감시하고 나를 추적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그것은 당신의 '눈동자'인 나를 보호하고 축성하며 늘 새로이 창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안수'가 뜻하는 바가 그런 것이지요). 언제 어디서나 나를 지켜보시는 당신의 시선을 내가 마주볼 때마다, 내 머리 위에 얹히는 당신의 '크고 부드러운 손'(박목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새로이 창조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놀라움과 기쁨에 가득찬 나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당신을 찬송하나이다.당신의 조물들은 경이로울 뿐 제 영혼이 이를 잘 압니다"(14절). 이 시편 전체에서 이 절은 마치 열쇠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 더듬거리는 가운데서도 '찬양의 말씀(doxologia)'을 진정으로 내쏟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 구절과 함께 오래 머무르며 깊은 경탄에서 우러난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바칯 수 있습니다. 놀라우신 분이 나를 놀랍게 만드셨다는 것,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 대한 이런 찬탄은 사실 나를 만드신 분에 대한 찬탄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가仙家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깨닫고 나니 뭐가 달라졌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잘 놀라게 되었네. 이제 내가 장작을 패고 있음이 놀랍고, 내가 물을 긷고 있음이 놀랍고, 내가 걸어가고 있음이 놀랍네." 나와 묻 조물에 대한 이런 경탄은 사실 창조주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이 구절이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19-22절은 좀 갑작스레 세상의 악에 대한 고통스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탄할 만하게 창조된 세상이지만, 너무도 뿌리 깊고 힘센 악이 꿈틀거리고 있는 현실을 도저히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과 폭력의 문제와 함께 지금도 10살 미만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는 데, 120억 명이 먹고도 남을 식량을 오로지 가격유지와 이윤 극대화를 위해 폐기 처분하는 부조리한 현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 시인은 분노하며 "주님, 왜?"라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은 결국 이 모든 것이 '남 탓'이 아니라고 깨닫습니다. 세상의 선인과 악인을 '흥부와 놀부' 또는 '콩쥐 팥쥐' 처럼 손쉽게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이분법은 사악하기까지 합니다. 나와 노선이 다른 사람들을 '악의 축'으로 몰아붙이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현존 앞에 나를 올바로 아는 사람들은 '똑바로!' 보다는 '내 탓이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빛으로 나와 세상의 신비를 체험하는 사람은 "이 땅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고(로마 3,23 등 참조), 스스로 100% '무공해 의인'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의화는 우리가 의롭지 않음을 인정하는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연은 "하느님,저를 살피시어 제 마음을 알아보소서. 저를 헤쳐보시어 제 생각을 알아보소서"(23절)라며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라 역시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영원의 길'을 걷는 나그네(23절)로 남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나그네 길은 사람들의 악을 심판하는 거룩한 의인이요 지도자이기보다, 그 악에 대해 내적으로 책임감을 느끼는 동료로 살며 사람들과 끝까지 동행하는 길입니다. 이 시편을 읽으며 우리가 체험하는 바로 그 시선의 육화이신 예수님쎄서 우리 여정에 그런 분위기로 동행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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