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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추억여행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다 음
[오늘의 운세] 5월 4일 토요일(음력 3월 25일 庚午)
1277 (고려 충렬왕 3) 육연 스님, 강화에서 유리기와 제조 1886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기덕 출생 1951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 발표 전시연합대학 설치 1958 서머타임제 실시 1960 정부 일본인 기자의 무제한 입국 허용 1972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일성 주석 면담 2001 우리나라 성공회 역사 111년 만에 여성 신부(민병옥) 탄생 2001 시인 이성선 타계 2007 조선 황족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 2009 한국해군 해적에 쫓기던 북한 상선 구조 2009 경남 창녕 ‘우포늪 따오기’ 부화 성공 2011 어린이 행복지수, OECD國중 꼴찌 해 외 1814 나폴레옹 엘바섬으로 유배 1929 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Hepburn, Audrey) 출생 1945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군인 페도르 폰 보크 사망 1951 이란 석유 국유화법 성립 1955 영국-프랑스 원자력 정보교환 협정 조인 1955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브레게(Bréguet, Louis-Charles) 사망 1974 엑스포74 미국서 개최 1983 이란 공산당 해체 1986 일본 동경서 제12회 서방7개국 정상회담 개막 1989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호 에서 금성궤도선 마젤란 발사 1994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예리코시에 대한 자치협정 서명 1999 48시간 내 80%치사율을 보이는 살인 바이러스‘마르부르크’발생 1999 세계최고문자 새겨진 도기조각 파키스탄 하라파 유적서 발굴 2003 미국 우주비행사 러시아 우주선 타고 첫 귀한 2010 피카소 ‘누드…’ 1억650만 달러
2011 - 어린이 행복지수, OECD國중 꼴찌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주요 26개 회원국 가운데 꼴찌로 조사됐다. 조백건 기자 loogun@chosun.com /조선닷컴 2010.05.05 02:42 -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꼴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2009년 64.3점, 지난해 65.1점에 이어 3년 연속 OECD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주관적 행복지수’를 기록했다. 즉 전체 OECD국가의 청소년 가운데 스스로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청소년이 제일 적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어린이ㆍ청소년은 교육성취도와 생활방식을 측정하는 ‘교육’ ‘행동과 생활양식’ 항목에서는 각각 127.8점, 129.3점을 기록, 1위를 차지 하고 그밖의 모든 분야에서 고르게 중상위권을 유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물질적 행복’도 110.7점을 기록, 4위에 올랐다. 유일하게 주관적 행복지수에서만 꼴찌다. 주관적 행복지수란 ‘학교생활 만족도’ ‘삶의 만족도’ ‘소속감’ ‘외로움’ ‘주변상황 적응’ 등 6가지 영역에 대한 응답률을 수치화한 것이다. 이와함께 ‘행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나라 초등학교 4학년의 54.4%가 ‘가족’을 가장 많이 택했고, 그 다음으로 건강, 자유, 친구, 성적, 돈 순으로 답했지만 고학년이 될수록 ‘돈’을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답한 학생이 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은 행복의 필요조건으로 ‘가족’과 ‘돈’을 답한 학생의 비율이 각각 24.8%, 25.2%를 차지했지만 고등학교 3학년은 ‘돈’을 택한 학생이 26%를 차지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5-04 09:28:14 [사설] 불행한 어린이, 더 불행해질 우리 사회 우리 아이들에게 행복 여부를 묻는 것 자체가 민망한 일이다. 요람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친구들과 경쟁해서 이기도록 단련받게 되는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이런 물음을 6410명에게 던졌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23곳 아이들 조사 결과와 비교해, 주관적 행복지수는 추종을 불허하는 꼴찌였다. 오이시디 평균(100점)보다 34점이나 낮았고, 한국 다음인 헝가리와도 20점 이상 차이 난다. 3년 내리 이런 형편이니, 우리 아이들의 심리적 불안과 불만은 이제 체질화되는 듯하다. 특히 교육의 기회와 성취, 물질적 수준, 보건과 안전 등 객관적 지표에선 최상위권이었음에도 아이들은 불행하다고 느꼈다. 경주마처럼 내쫓기듯 살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결과다. 경쟁으로 촘촘히 짜인 구조 탓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학업성취 등을 따지는 교육지수와 학교나 가정생활의 만족도 등을 따지는 주관적 행복지수가 대체로 비례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교육지수와 주관적 행복지수가 정확하게 반비례했다. 인간관계 등을 포기하고 살인적인 성적 경쟁에 내몰린 결과일 터이다. 이는 전교조 조사 결과와도 일치한다. 어린이 스트레스의 80% 이상이 학원 다니기와 학업 성적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밖에 고학년일수록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돈을 꼽았다. 돈을 꼽은 아이일수록 행복지수는 떨어졌다.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이 성적, 성공, 돈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는 셈이다. 문제는 명료하다. 해결 방향 또한 선명하다. 정글과도 같은 경쟁 교육을 혁파하는 게 우선이다. 가족간의 유대, 친구들과의 우정과 협력을 증진하도록 교육과 삶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 다음이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이 불행하다면, 그 사회가 행복해질 순 없다. 어른들이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설] /한겨레 2011-05-04 오후 07:51:01
2010 - 피카소 ‘누드…’ 1억650만 달러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Nude, Green Leaves and Bust) /한겨레
미술품 경매 최고가 경신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이 4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650만달러(약 1188억원)라는 역대 최고가로 팔렸다. 종전 최고 기록은 지난 2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억430만달러에 팔린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사람Ⅰ’이었다. 최고가를 기록한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Nude, Green Leaves and Bust)은 1932년 연인 마리테레즈 발테르를 모델로 그린 작품으로, 그림이 완성됐을 때 발테르는 22살, 피카소는 50살이었다. 미술품 수집가인 브로디 부부가 1951년 폴 로젠버그의 뉴욕갤러리에서 1만9800달러를 주고 산 이후, 이 그림은 한번도 공개 전시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마크 포터 크리스티 미국 소장의 말을 빌려 5800만달러에서 호가가 시작돼 아시아, 미국, 유럽 등에서 온 모두 9명이 적극적으로 응찰에 나섰다고 전했다. <시엔엔>(CNN)은 이 가운데 경매 현장과 전화로 응찰한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그림 값은 8800만달러까지 올랐지만, 신원을 밝히지 않은 전화 응찰자가 무려 700만달러나 많은 9500만달러를 부르면서 결판이 났다고 전했다. 경매소 쪽에 내는 비용을 포함하면 그림 가격은 1억650만달러가 된다. 피카소의 작품으로 가장 고가에 팔린 작품은 1905년 작 ‘파이프를 든 소년’으로 2004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1억410만달러를 기록했다. 강태호 기자 kankan1@hani.co.kr, 사진 로이터 연합뉴스 /한겨레 2010-05-05 오후 07:23:04
2009 - 경남 창녕 ‘우포늪 따오기’ 부화 성공 산란 1달만에 새끼 한 마리 탄생…중, 일 이어 세계 세번째 성공 세계적 멸종위기 조류로 중국에서 기증받아 경남 창녕 우포늪에 정착했던 따오기 한 쌍이 알을 낳은 지 한달만에 부화에 성공했다. 경남도는 수컷 양저우(洋洲)와 암컷 룽팅(龍亭) 등 따오기 한 쌍이 낳은 알 6개 가운데 인공포란 중이던 한 개가 지난 3일 오후 6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해 4일 밤 11시28분께 부화를 완료했다고 5일 밝혔다. 지난해 10월 17일 창녕군 유어면 세진리 둔터마을 따오기복원센터에 정착한 따오기들은 지난 2월초 짝짓기에 성공했으며 지난달 룽팅이 알 3개를 먼저 낳았고 1주일 뒤 다시 3개를 낳았다. 처음에 낳은 유정란은 부화동으로 옮겨져 인공포란했고 추가로 낳은 알 3개는 따오기가 직접 품고 있어 이달 중순께 추가 부화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써 따오기는 지난 78년 판문점 부근에서 확인된 이후 30년만에 우포늪에 정착하고 산란에 성공한데 이어 부화까지 성공, 개체수를 점차 늘려 완전한 복원까지 이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복원팀을 이끌고 있는 경북대 박희천 조류생태환경연구소장은 "중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따오기 산란에 성공했으며 30여 년전 멸종된 따오기 복원기술을 축적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 북한, 러시아, 몽골에 따오기 복원 기술을 제공하는 한편 따오기 한국 텃새 개체군 조성기반을 구축하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경남도와 창녕군은 2006년부터 따오기 인공증식과 복원기술 도입을 추진해오다 람사르총회를 앞둔 지난해 5월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따오기 기증의사를 타진했고 이어 8월에 후진타오 주석이 방한해 양국 정상 간 따오기 기증 및 증식.복원 협력강화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바 있다. 경남도 등은 또 따오기 도입에 대비해 지난해 7월부터 창녕 우포늪에 따오기 복원센터를 착공해 검역동, 부화동, 사육시설 등을 완공했으며 2명의 사육 전문인력을 중국에 파견, 따오기 사육기술을 연수 받도록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앞으로 경남도와 창녕군은 2012년까지 총 65억원의 사업비로 연구·관리동, 야생 적응시설 등을 연차별로 확충해 나갈 예정이다. 도는 이번 산란 성공으로 따오기 복원사업의 1차적인 목표를 달성했다고 평가하고 앞으로 부화한 새끼가 정상적으로 성장, 야생에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5~7년 이내에 야생방사를 목표로 따오기 50개체 이상을 확보하고 근친교배 방지용으로 따오기를 추가로 도입하는 등 중장기 목표를 수립하고 있다. 김태호 경남지사는 "따오기 복원프로젝트는 '저탄소 녹색성장'의 상징적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멸종위기종의 복원기술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라며 "따오기 부화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경남이 생물종 복원의 메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집중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학구 기자 b940512@yna.co.kr (창녕=연합뉴스) /한겨레 2009-05-05 오전 11:18:21
2007 - 조선 황족 이우, 야스쿠니에 있다 민족의식이 강했던 의친왕의 둘째 아들,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뒤 합사된 사실 최초 확인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인 이석(67)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4월3일, 그를 만나러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한겨레21> 취재진은 황망한 걸음으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랬을 수도 있을 거야. 이우 형님께서 돌아가실 때 일본 군인 신분이셨으니까. 야스쿠니신사라고 했나? 고약한 일이구만.” 이석씨는 헛기침을 했다. 늦은 오후, 전주 한옥마을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야스쿠니 100년사>에 짧은 기록 남아 다른 친인척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의친왕의 손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혜원 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우 삼촌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긴 한데, 확인해본 적은 없습니다. 오랜 전 일이지 않습니까. 정확히 잘 모르겠네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조선 황족들은 없을까? 야스쿠니신사에 강제 합사된 조선인들의 사연을 취재하던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옛 조선 황족 가운데 일부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됐다. 이따금 언론에 동정이 소개되는 황족 후손들을 중심으로 취재가 진행됐다.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증언은 대부분 전언이어서 신뢰하기 힘들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왕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군인·군속 246만여 명의 영령이 일본의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다. 이 가운데 조선인 출신 합사자는 2만1천여 명, 대만인 출신 합사자는 2만7천여 명에 이른다. 조선 황족 가운데 일본 군복을 입었던 사람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897∼1970), 영친왕의 형 의친왕의 장남 이건(1909∼91),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1912∼45) 등 3명이다. 이 가운데 이우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법적으로는 운현궁의 후손이 된다. 이우는 제2 총군사령부 교육담당 참모(중좌·우리의 중령)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피폭돼 다음날인 8월7일 숨졌다.1945년 8월9일치 <매일신보>는 1면에서 ‘이우공 전하, 7일 히로시마서 어(御)폭사’라는 톱 기사로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우공 전하께서는 재작 6일 히로시마에서 작전임무 어(御)수행 중 공폭에 의하야 어(御)부상하시어 작 7일 어(御)전사하시었다.” 조선 황족 중 누군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면 그 가능성이 제일 높은 사람은 이우인 셈이다. <한겨레21>과 민족문제연구소는 문서 등 기록자료 분석에 들어갔다. 해결의 실마리는 뜻밖에도 쉬운 곳에 있었다. 1869년 도쿄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란 이름으로 역사에 첫 모습을 드러낸 야스쿠니신사는 1987년 6월30일 세 권짜리 분량의 책 <야스쿠니 100년사>(비매품)를 펴낸다. 이 책의 506쪽에서 이우의 야스쿠니신사 합사와 관련된 짧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이우공 합사제 서류 포함) 소화34년 10월 ~소화35년 10월 이우 공은 소화 20년 8월7일 히로시마에서 전몰했다. 34년 10월7일 초혼식을 집행하여 상전에 합사하였고 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 군속과 함께 본전 정상(正床)에 합사하게 되었다. 본 철은 이에 관한 자료가 중심이 되고 있다. 기록은 이우가 1959년 10월17일 4만5천여 명의 육해군 군인들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구체적인 합사 경위는 ‘영세부 봉안 제 서류철’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까지 확인할 순 없었다. 이석씨는 취재진이 이런 사실을 전해주자 “조국이 해방을 맞은 게 벌써 62년 전인데 형님이 야스쿠니신사에 억눌려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은 기막힌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은 국내 학계에 알려진 바 없다.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 받지 못했다 작가 정범준씨는 조선 황족들의 역사를 다룬 책 <제국의 후예들>에서 “이우는 아버지(의친왕)처럼 호방한 성격을 지녔고 일본을 증오했다”고 적었다. 1912년 11월15일에 태어났고, 모친은 수인당 김흥인이었다. 1915년 경성유치원, 3·1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종로소학교를 거쳐 1922년에는 여느 일본 황족들처럼 일본 유학을 떠나 귀족학교인 학습원에 입학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뒤져보니 “이우가 탄 자동차가 행인을 치었다”거나 “말에서 떨어져 작은 부상을 당했다”거나 “도쿄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등 자잘한 단신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지금의 기준으로도 “잘생겼다”는 감탄사가 터져나오는 옥골선풍의 귀공자였다. 그는 조선 황실에서 드물게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명확한 민족의식을 가진 청년이었다고 한다. 생전에 이우를 접했던 지인들의 전언이 이를 증명한다. 정범준씨는 <제국의 후예들>에서 1988년 9월15일 ‘히로시마 쥬코트’라는 방송사가 이우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 ‘민족과 해협’에 소개된 이우의 지인들의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인 동기생 아사카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공은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지요”라고 말했고, 운현궁의 가정교사였단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므로 일본 육군에서도 두려워했다”고 증언했다. 역사학자 이기동은 1974년 5월치 월간 <세대>에 쓴 글 ‘이우공, 저항의 세대’에서, 이우가 일본의 정략 결혼을 피해 조선인 박찬주(후작 박영효의 손녀)와 결혼을 밀어붙여 뜻을 이루고 마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영세부봉안제서류철’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 있을까. 이에 대한 암시를 주는 기록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카자와 시로우가 쓴 <야스쿠니신사>(이와나미서점, 2005년 7월20일 출판)를 보면 이우의 합사 문제를 처리하면서 일본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고민들을 읽을 수 있다. 숨질 때 이우는 일본의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던 조선의 왕공족이었다.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신사의 공식 의견은 “죽은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죽는 시점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는 (합사 자체가 부당한 일이긴 하지만) 일본 황족과 동등한 취급을 받고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어야 한다. 1959년 10월6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옛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신노(北白川宮 能久親王)와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오(北白川宮 永久王)는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는 궁내청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 황족을 따로 모실 수 있는 미타마시로(御靈代·야스쿠니신사의 영령이 깃든다는 거울)를 새로 만들어 혼백을 모셨다. 두 황족을 위해 따로 만든 거울은 신사 왼쪽에, 기존의 미타마시로는 오른쪽에 안치돼 있다. 숨진 이우는 일본 황족과 같은 대우는 받지 못한다. “히로시마에서 피폭 사망한 옛 왕족(대한제국의 왕가로 한국 병합 후에 황족에 준하는 지위로서 편입했다)의 이우공의 합사 처리는 야스쿠니신사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옛 왕족인 이우공을 특별 ‘일좌’(一座)로 합사된(새로 미타마시로를 만들어 따로 혼백을 모신) 옛 황족의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등 2주와 동등하게 취급할지 말지라는 문제다.”(<야스쿠니신사>) 일본에 안 가려고 설사약까지 먹어 논의 끝에 이우는 일본 황족처럼 일좌로 합사되지 않고, 수백 명의 육해군 군인과 같은 수준에서 합사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달리 취급한 이유는 불명하지만, 여기에도 궁내청 쪽에서 암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책은 적고 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우는 그날 오후가 돼서야 히로시마 혼가와 상생교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변한 채 발견됐다. 그날 밤 이우는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라는 섬으로 후송됐고, 해군 병원에서 의식을 조금 되찾았지만 이튿날 새벽 고열로 신음하다 숨을 거뒀다. 이우는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전 운현궁에 머물면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일본에 가지 않기 위해 설사약을 먹으면서까지 버텼다고 한다. “남에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에도 일본의 패망은 기정 사실인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조선 해방도 뒷수습이 큰일입니다.”(김을한 <인간 영친왕>) 유해는 1945년 8월8일 서울로 운구됐고, 의무관들에 의해 방부 처리됐다. 일주일 뒤인 1945년 8월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은 라디오에서 새어나오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우의 장례식이 열린 것은 일왕의 ‘옥음 방송’이 끝난 직후인 8월15일 오후 1시,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인 경성운동장에서였다. 조선 신궁의 궁사가 제주로 동원된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이었다. 젊은 미망인과 어린 두 아이의 모습이 도드라져 침통하고 구슬픈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한겨레 21 [2007.05.04 제658호]
2001년] 시인 이성선 타계 시인 최명길은 "그는 온몸을 붓대로 하여 시를 썼던 사람"이라면서 "생명의 불꽃을 시에 다 주어 버리고는 그가 경배하는 대상이었던 설악산 품속으로 들어갔다"고 추모했다. 그는 강원도 고성 출생으로 고려대를 졸업한 뒤 고향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내며 산, 달, 별 등과의 교감을 노래해온 `자연의 시인`이었다. 1970년 ‘문학비평’으로 등단한 이래, 시집 ‘시인의 병풍’ ‘빈 산이 젖고 있다’ ‘산시’등을 발표하며 정지용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을 수상했다. 1996년에는 속초, 양양, 고성 지역 환경운동연합을 결성해 공동의장을 역임하는 등 남다른 자연사랑을 실천해 왔다./조선
2001년] 우리나라 성공회 역사 111년 만에 여성 신부(민병옥) 탄생
1999년] 세계최고문자 새겨진 ‘도기조각’ 파키스탄 하라파 유적서 발굴 도기조각에 새겨진 나무 모양의 삼지창 무늬기호가 약 5천500년전의 것으로 추정돼 1998년 이집트 남부 전갈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고대 문자(BC3200-3300년)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고 리처드 메도우 하버드대학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고대 문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어느 문자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 이전까지는 BC 31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리아인들이 기록한 문자가 최고의 문자로 알려져 왔다./조선
1999 - 48시간 내 80%치사율을 보이는 살인 바이러스‘마르부르크’발생
1986년] 일본 동경서 제12회 서방7개국 정상회담 개막
1979 -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 서울 방문 유엔 사무총장의 한국 방문은 흔치 않았다. 1979년 발트하임 사무총장이 처음으로 온 뒤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총장이 두 차례,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두 차례 한국을 찾았다. 이들이 연임한 경우를 감안하면 재임 기간 중 한 차례 방한하는 게 관례였다. 유엔 사무총장의 방한은 한국과 유엔 간의 만남을 뜻하는 중요한 외교 행사 중 하나로 여겨졌다. ... 김수정 기자 [sujeong@joongang.co.kr] /중앙일보 2008.06.29 03:23 유엔 사무총장 내한 * 제작연도 : 1979-05-11 * 상영시간 : 01분 21초 * 출처 : 대한뉴스 제 1237호 /e-영상역사관 대한뉴스
1972 -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일성 주석 면담 김일성이 손 내밀자 주저주저 1972년 남북회담이 시작되면서, ‘공식 밀사’가 상호 방문을 하게 된다. 적십자회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소속이던 정홍진과 노동당 조직부 소속인 김덕현이 정치적 대화를 시작했고, 각각 서울과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5월2일 정홍진이 갔던 경로로 평양을 방문했다. 방북 이틀째인 5월3일 이 부장은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의 2차 회담을 마치고 모란봉 초대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1시쯤 그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옷을 입고 급히 가자는 것이었다. 김일성 주석 관저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목적지를 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서 내리자, 김일성 주석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김일성이 손을 내밀었는데, 이후락은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날은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이후락을 태운 차는 지름길로 오기 위해 비포장 산길을 달려왔다. 이후락은 여차하면 입에 넣으려고 서울에서 준비해온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김일성과 악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청산가리 캡슐이 녹아 손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다시 넣어 캡슐을 떼고 나서야 악수를 할 수 있었다. 이후락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내 태도가 수상했던지 김일성이 멈칫합디다”라고 말했다. [정상회담 막후의 밀사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한겨레21 2008년05월01일 제708호
1970 - 미국 주 방위군, 반전운동 시위를 벌이던 켄트대 학생들에 발포해 4명 사망
총에 맞은 학생 옆에서 한 여학생이 울부짖고 있다. 이 사진은 1970년대 반전운동의 상징이 됐다. /조선 미국 켄트대학 학살 사건(1970) 1970년 5월 4일 미국 오하이오주 방위군이 월남전 반대 시위를 벌이던 켄트대학 학생들에게 13초동안 61발의 기총사격을 가해 4명의 학생이 숨지고 9명의 학생들이 크게 다쳤다. 당시 켄트대를 비롯한 미국 전역 250개 대학에서는 격렬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등 베트남전이 점차 확대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학마다 들불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켄트대학에는 학군단 건물이 불에 타는 등 반전시위가 사흘동안 치열하게 진행됐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주 방위군이 캠퍼스에 진입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날의 사태는 미 전역에 학원분쟁을 불러왔다. /조선
1968 - 덕수궁에 세종 큰 임금 동상 세움
1955 -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브레게(Bréguet, Louis-Charles) 사망 브레게 [Bréguet, Louis-Charles, 1880.1.2~1955.5.4] 프랑스의 비행기제작자, 국영항공사인 에어프랑스사의 설립자. 그가 제작한 많은 비행기들이 세계기록을 수립했다. 콩도르세 리세, 카르노 리세, 고등전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브레게 가문 소유의 공업회사인 브레게사에 입사해 전기분야의 수석 공학자가 되었다. 1909년 자신의 비행기를 최초로 제작했으며, 1911년 10㎞ 비행에 대한 속도기록을 세웠고, 그해에 루이 브레게항공기제작회사를 설립했다. 1912년 자신의 수상 비행기를 최초로 제작했고, 1917년 헬리콥터의 전신인 오토자이로(고속 회전비행기)를 설계하고 비행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군용기를 제작했는데, 특히 브레게-XIX기는 주목할 만했다. 1919년 항공운송회사를 설립했으며 이 회사는 나중에 에어프랑스사가 되었다. 1927년 브레게의 비행기 중 1대가 최초로 남대서양 무착륙 횡단비행을 했고, 다른 비행기는 1933년에 7,200㎞ 대서양 무착륙 비행을 했는데 이 기록은 당시까지의 최장거리 비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군용기를 제작했으며, 그뒤 일련의 대형 4발 수송기를 생산했다. /브리태니커
1951 -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 발표, 전시연합대학 설치
피란지의 노천학교, 야외학교의 모습 /조선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 발표, 전시연합대학 설치 정부는 1951년 5월 4일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을 발표하여 `전시연합대학`을 부산, 전주, 대구, 광주, 대전, 제주 등에 설치 운영하는 한편 대학생에 대한 징집연기 조치를 취했다. 전시연합대학은 1950년 11월과 12월 두 달간 서울에서 운영된 적도 있었으나 학생들의 징집, 전쟁의 장기화 등으로 계속되지 못했었다. 세계교육사상 전례가 없는 전시연합대학은 백낙준 당시 문교부 장관이 "전쟁 중이라해서 교육을 중단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전시연합대학은 1년 후 해체되고 각 대학이 개별적으로 대학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의 지방 국립대학은 대부분 전시연합대학이 모체가 되어 설립된 것이다. 이처럼 6·25전쟁 중에도 교육열은 식지 않았고, 피란지의 노천학교, 야외학교의 모습은 눈물겨웠다.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스지 보도. "남한에서는 정거장, 약탈당한 건물안, 천막, 묘지에서까지 수업을 하고 있다. 어느 시골에 가도 나무 밑에 학생들이 모여 앉아 나무에 흑판을 걸고 책을 돌려가며 공부하고 있다." /조선
1949년] ‘육탄 10용사’ 사건 18연대 소속 서궁덕 상사 등 용사 10명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아군초소를 탈환하기 위해 폭탄 한 개씩을 짊어지고 낮은 포복으로 적군에 접근해 일제히 토치카 안으로 돌입, 토치카를 폭파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 산화했다. 이를 국군에서는 ‘육탄 10용사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이 와중에 장병 3백여명이 표무원 소령의 거짓 정보에 의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표 소령은 장병들에게 "적에게 포위됐다. 투항 만이 살길이다"며 월북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조선
1945 -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군인 페도르 폰 보크 사망 페도르 폰 보크(Fedor von Bock, 1880년 12월 3일 ~ 1945년 5월 4일)는 제2차 세계 대전중 독일 육군의 원수이다. 생애 프로이센 왕국의 퀴스트린(Küstrin, 현재는 폴란드령)에서 태어났다. 1898년 제5근위보병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참모장교로써 종군하여 1918년 4월에는 프로이센의 최고위 프루-르-메리트 훈장(Pour le Mérite)을 수상했다. 대전후에도 군비제한을 당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폴란드 침공에서는 북부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했고, 1940년 서방전격전에서는 B집단군사령관으로 지휘를 맡아 그 전공으로 인해 같은해 7월 육군원수로 승진했다. 1941년 6월 22일에 개시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중부집단군사령관으로서 민스크, 스몰렌스크를 공략해 12월에는 예하부대가 모스크바 정면 30km까지 육박했으나,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과 맹렬한 추위로 인해 독일군의 공격은 둔화되어 그 책임을 물어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1942년 1월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가 병사하자,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여름 공세에 대한 작전지휘를 둘러싸고 또 다시 히틀러와 대립하여 7월에 다시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예비역으로 재편되어 현역으로는 복귀하지 못했으나, 1945년 4월 히틀러의 자살후 해군 총사령관으로 제국 대통령이 된 칼 되니츠 해군 원수의 요청에 의해 연합국과의 정전교섭의 임무를 맡았으나, 1945년 5월 3일에 키르 근교에서 탑승했던 차가 영국 전투기의 기총사격을 받고 중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했다. 폴란드 침공 작전 이후 히틀러의 방침에 의해 전선 후방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민간인 대량학살에 강력히 반대했었다. 한편 조카였던 헤닝 폰 트레스코브 육군 소장에게서 반 히틀러 활동에 참가를 타진받았으나 이것을 거절했었다. 1945년 5월, 킬 근교에서 영국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1929년] 미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Hepburn, Audrey) 출생
오드리 헵번 /브리태니커
역사속의 오늘]1929년 ‘은막의 요정’ 오드리 헵번 출생 ㆍ받은 사랑을 인류애로 갚다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한 요정이다.
1919년 5월 4일 중국에서 5·4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중국의 산둥[山東] 지역에 대한 권익을 일본에 양도하는 안이 승인되었다. 5월 1~3일 베이징[北京]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이 보도되자 중국 국민과 베이징 학생들은 4일 톈안먼[天安門]에 모여 친일 매국노인 차오루린[曹汝霖]의 집에 불을 질렀다. 시위가 확산되자 다음날 경찰총감과 베이징대학교 총장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협상을 통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돤치루이[段棋瑞] 정부가 강경하게 대처해 베이징 학생들의 투쟁을 더욱 격화시켰다. 결국 정부는 전국 각지의 압력에 밀려 친일파 관리 3명을 파면시켰고, 6월 28일 파리의 중국 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을 거부했다. 5·4운동은 각 계층 민중의 연대로 군벌정권과 제국주의와의 결탁에 정면으로 맞섰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브리태니커
1904년] 파나마 운하 착공 미국, 프랑스로 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권 인수 1903년 미국은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운하건설에 필요한 지역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사들이려던 계획은 콜롬비아 상원에서 거부되었다. 그 후 파나마는 미국의 지원으로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이듬해 5월 4일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하건설공사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다.
파나마운하 연혁 1881-00-00 - 프랑스의 레셉스, 대양간운하만국회사를 설립하고 수평식운하 건설 착수 1894-00-00 - 신(新)파나마운하회사 설립 1901-00-00 - 미국, 영국으로 부터 운하 건설 운영권을 인정받음 (2차 헤이-폰스포트조약) 1903-01-00 - 미국-콜롬비아, 미국이 운하를 건설하고 운영하는 것을 인정하는 조약 체결 1903-07-29 - 미국,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굴착권과 기계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 1903-11-03 - 미국의 도움으로 파나마 독립. 1903-11-18 - 미국-파나마, 파니마운하 조약(헤이-뷔노 바리야 조약) 체결 1904-05-04 - 미국, 프랑스로부터 신파나마운하회사의 운하 소유권을 인수 1906-00-00 - 파나마 운하 최종설계도 채택 1914-08-15 - 파나마 운하 완공 1977-09-07 - 신 파나마 운하조약 체결 1999-12-31 - 파나마 운하 통제권 파나마정부에 완전 이양
1886 - 한국의 독립운동가 강기덕 출생 강기덕(康基德, 1886년 5월 4일 ~ ?)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함경남도 원산 출생이다.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당시 그는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재학 중이었으며, 박희도, 이갑성을 통해 민족대표 33인과 연결된 뒤 학생 단체들과 모의하여 탑골공원 시위를 조직했다. 3·1 운동 거사 당일, 민족대표들이 당초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한 약속을 갑자기 바꾸어 태화관에 모여 있자 학생 대표로 태화관에 찾아가서 항의했다. 이들이 체포된 뒤에도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과 함께 중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후속 시위를 주동하다가 3월 5일 서울역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했다. 이후에도 1927년 함남기자연맹이 기자대회를 주최하려다가 경찰과 충돌하여 시위가 발생한 함남기자대회 사건에 연루되었고, 1930년대에는 신간회 회원으로서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입북한 것이 확인되었다. 1956년 6월까지 교화소 분소에서 구금되어 있다가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가 결성될 때 가담했으나, 이후 함경북도 방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 외에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위키백과
1825년] 영국의 생물학자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출생
1712 (조선 숙종 38) 북한산성 축성 북한산성에 대하여 성 벽 북한산성의 규모는 1711년 축성 당시와 현재가 거의 차이가 없다. 현재 성곽의 전체 둘레는 12.7km, 성벽을 둘린 체성 연장은 약 8.4km이며, 축성당시의 체성(體城) 규모는 지금의 북한산성 터 그대로를 연결하는 7620보, 즉 21리 60보(현재 圖上 11,541m) 였는데, 백운봉ㆍ만경봉ㆍ용암봉ㆍ문수봉ㆍ의상봉ㆍ원효봉ㆍ영취봉 등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북한산성은 체성과 여장으로 이루어진 성벽에 14개소의 성문과 각각 1개의 수문과 시구문, 그리고 장대로 이루어져 있고, 기타 성내에 행궁ㆍ창고ㆍ성랑과 사찰 및 암자 등이 있다.
축성 초기의 상황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717년)과 북한지[北漢誌: 1745년(영조 21)에 북한지를 편찬한 성능(聖能)은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에 승려들을 총 관리하는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었음]에 기록된 내용으로 살펴보면, 축성공사는 각 군문별로 영역을 분담하여 수행되었는데, 체성의 길이는 7,620보, 여장은 2,807첩, 성문 12개[대문 5(북한지에는 7)ㆍ암문 7ㆍ], 수문 1개, 장대 3개소, 성랑 143개소의 규모였고, 기타 성내의 시설물로는 행궁 1개소, 누각 3개소, 창고 5개소, 사찰 18개소, 암자 3개소, 교량 7개, 저수지 26개소, 우물 99개소 등이 위치하거나 새롭게 설치되었다.
북한산성의 성벽은 방비에 유리한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조건을 적절히 살려서 고축, 반축, 반반축, 지축여장으로 나누어 쌓았다. 즉 편탄한 평지부분은 비교적 높게 쌓았으나 산지의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높이를 낮추거나 자연암반에 그랭이질만 하여 성벽을 쌓기도 하고 아예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성곽을 쌓지 않기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여장만 설치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벽의 전반적인 규모는 고축(高築: 10척~14척) 2,746보, 반축(半築: 6척~7척) 2,906보, 반축의 반인 반반축(半半築: 3~4척) 511보, 그리고 체성을 쌓지 않고 직접 성가퀴(城堞)를 축조한 형태의 지축여장(只築女墻)이 1,457보의 형태였으며, 여장(높이 4척, 너비 3척)은 2,807첩에 이르렀다.
당시 공사를 담당하였던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은 각기 축성 영역을 분담 진행하였는데, 각각의 구간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訓練都監)은 수문 북변에서 용암봉까지의 2,292보(체성형태는 고축 1,052보, 반축 771보, 지축 여장 469보)로 수문ㆍ북문(홍예식)ㆍ서암문ㆍ백운봉 암문 등의 성문과 704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금위영(禁衛營)은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281보(체성형태는 고축 474보, 반축 1,836보, 반반축 511보)로 용암 암문ㆍ소동문(홍예식)ㆍ동암문ㆍ대동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1,107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어영청(御營廳)은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체성형태는 고축 1,220보, 반축 299보, 지축 여장 908보)로 대서문(홍예식)ㆍ청수문 암문ㆍ부왕동 암문ㆍ가사당 암문ㆍ소남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986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체성(體城)의 형태는 산성축성 직전의 도성 수축 경험을 토대로 보다 높은 수준의 축성기술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전에 축성된 여타의 산성과는 달리 체성을 축조하는 석재를 크고 반듯하게 하여 각 면과 모서리를 세밀하게 다듬은 정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하여 지세에 관계없이 평축(平築)으로 하였고, 매 단은 들여쌓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그리고 성문이 연결부나 일부 지역에서만 협축방식을 이용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지세를 이용하여 능선의 외벽만 석축으로 하고 내벽은 작은 석재와 진흙 등으로 채워서 붕괴를 막거나 지반 보강을 위한 보축(補築)을 쌓아 올리는 편축식(片築式)을 채택하였다. 여장(女墻: 城堞ㆍ여담ㆍ성가퀴)은 규격화된 견고한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체성 위에 자연석에 약간의 치석만을 가한 얇은 판석재를 진흙이나 회를 발라 쌓아 올렸다. 미석(楣石)을 두지 않고 약간 들여서 축조하였는데 평균 여장 폭은 3척, 높이는 4척, 길이는 10~12척 내외이다. 타( )의 길이는 3.3.m 내외로 한 타에 1개의 총안을 둔 곳도 있지만 3개의 총안(銃眼)을 둔 것이 일반적이며, 중앙에 근총안을 두고 양편에 원총안을 두었다. 총안의 규모는 15~18x18~22cm 정도이며, 규모가 큰 것은 포혈일 가능성도 있다.
1659 북벌계획 세운 효종 임금 세상 떠남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비(妃)는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1635년(인조 13년) 송시열과 윤선도 등이 대군사부(師傅)에 임명되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그중 송시열은 청나라의 침략을 당한 조선의 현실을 금나라의 침략을 당한 남송과 같이 보았고, 주자의 사상이 이를 극복하는 해답이라 보았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언급하자 효종은 '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주자이십니까'라고 반문했다 한다. [편집] 세자 책봉과 즉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왕족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꾀했으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인조가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및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강경 주전론자(主戰論者)들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선양(瀋陽)에 8년 동안 머물렀다.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했던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자 5월에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당시 대다수의 중신들은 원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을 내세운 인조의 강한 의지에 따라 윤6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5월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편집] 북벌 계획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金自點) 등 친청파(親淸派)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계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것은 군부국(君父國)인 명에 대한 신자국(臣子國)의 당연한 의무라는 복수설치(復讐雪恥)의 논리로 효종의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했다. 아울러 이러한 북벌론은 양란 이후 체제붕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층의 내실자강책(內實自强策), 즉 '국가재조'(國家再造)라고 하는 대내적인 지배안정책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의 친청세력이 역관(譯官)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일련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알려 청의 간섭을 유도함에 따라 즉위 초기에는 적극적인 군사계획을 펼 수 없었다. 1651년(효종 2)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多爾袞)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시켜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옥사(趙貴人獄事)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군비강화가 추진되기 시작했는데 효종은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 무신을 특채하여 군사양성의 실제 임무를 맡겼다. 이러한 군인사정책은 이전에 훈신·종척(宗戚) 등을 임명하던 예와는 다른 파격적인 것으로 효종의 북벌 군사강화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御營廳)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했으며, 금군(禁軍)의 기병으로의 전환, 모든 금군의 내삼청(內三廳) 통합, 수어청(守御廳)의 재강화 등 제반 군제개혁을 통해 군사강화책을 모색했다. 이와 함께 금군의 군액을 1,000,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시키고자 했다. 어영군은 많은 군사를 확보하고 3명의 보인제(保人制)를 통하여 재정적인 난점을 극복함으로써 군사 증강에 성공했으나, 훈련도감은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실패했다. 한편 1654년 3월 유명무실했던 영장제(營將制)를 강화, 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의 약화를 시정하는 한편,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1655년에는 능마아청(能兒廳)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 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長柄劍)의 제작,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 제작 등 무기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비강화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은 데다가 효종도 일찍 죽어 북벌을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으며 다만 청의 요청에 따른 2차례의 나선 정벌에서 군비강화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국가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는 막중한 일을 추진하면서 국제정치의 역학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은 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의 군사력을 가지고 만주 벌판을 달릴 허황된 꿈에 부풀어 있었다.[1] 효종을 비롯해 일부 지배세력은 북벌 문제에 관한 한 거의 이성이 마비되었지만 민중들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1] [편집] 정책과 경제 효종은 경제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진전(陳田)이 증가하고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한편, 농민들은 파산하여 유리(流離)하는 등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질서·사회질서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효종은 이러한 위기를 부세제도의 개혁, 농업생산력의 증대, 사회윤리의 강화로 극복하려고 했다. 우선 김육(金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지역을 확대해 1652년에는 충청도, 1653년에는 전라도 산군(山郡) 지역,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전세(田稅)도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한편 1655년에는 신속(申洬)이 편찬한 〈농가집성 農家集成〉을 간행·보급하여 농업생산에 이용하도록 했다. 한때 군비확충에 필요한 동철(銅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의 유통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편집] 생애 후반 문화면에서는 1653년 역법(曆法)을 개정,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국조보감 國朝寶鑑〉을 편찬·간행했으며, 1656년에는 소혜왕후(昭惠王后)가 편찬한 〈내훈 內訓〉과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경민편 警民編〉을 간행·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1657년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죽은 뒤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의 존호(尊號)가 올려지고 묘호(廟號)를 효종이라 했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寧陵)이다.
1636 (조선 인조 14) 정충신 장군, 후금과 화의하자 분사 충무공 정충신(鄭忠信)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부(府)에 예속된 지인(知印: 通引)을 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청하여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은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학문과 무예를 닦으라 권유했고, 또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이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훗날 정충신은 이항복이 유배를 가자 함께 따라갈 정도로 아버지로 모셨고, 이항복이 죽은 뒤에도 정충신은 3년동안 상주처럼 생활했다. 1621년(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하였으며,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淸)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고,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하여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죽은 뒤에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衣)로 하게 하였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하였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하였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 錦南集》·《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地谷面) 대요리에 있다. 1636년(인조 14) 왕명으로 건립하였으며, 1737년(영조 13)에 중수하였다. 1800년(정조 24) 5세손 곡성현감 정세환이 정미면 신시리로, 1897년(고종 34) 9세손 정재칠(鄭在七)이 13손 정종열 집 옆으로 이건하였다.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기면서 개축하였다. 사당과 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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