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세순의 용사일기 【2】
[2][1592년 고향을 등지고 피란을 떠나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개터 마을의 18세 소년 도세순은 성주군을 침략한 왜병을 피해 빌무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도세순을 비롯한 연로한 부모님 그리고 젖먹이 동생, 임산부가 포함된 40여 명의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였고, 피란 동안 내리는 비는 일행을 더 힘들게 하였다. 왜적의 성주성 점거로 빌무산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당시 성주군 관할]으로 떠난 피란길에서 열흘 동안 이어지는 동생 복일의 이질과 어머니의 부상 그리고 마을 주민 40여 명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험난하면서도 처절했던 상황을 알려준다.
·1592년 4월 13일: 이 때에 나와 집안 종친들은 피란할 것을 논의하였지만 의견이 분분해서 마땅이 갈 곳을 정하지 못하였다. 한 사람이 말하기를 “깊은 산이라면 적은 복병이 숨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반드시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얕은 산이라면 어찌 모두 수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얕은 산에 쥐처럼 엎드려 있다가 형세를 살펴가며 피란을 하는 것이 안전한 방책일 것입니다.”라고 하여 모두 좋다고 하고 빌무산으로 들어가기를 약속하였다.
·1592년 4월 20일: 고향을 떠날 생각에 눈물을 가린다. 개터의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마을을 굽어보고, 조상의 무덤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며 ‘대대로 내려온 집들이 장차 잿더미가 될 것이고, 조상의 무덤도 반드시 황폐한 구덩이가 될 것이다.’
·1592년 4월 29일: 성주성을 함락한 적은 사방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찾기 위해 수색하였다. 끼니도 해결하지 못한 일행은 적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 연로한 부모님과 젖먹이 어린 동생 그리고 임산부가 있던 일행의 움직임은 더디고 어렵기만 하였다. 피란 중 작은 동생 예일[1591년 4살]이가 칭얼대서 급히 젖을 물려 울음소리를 막았다. 배협은 노모가 있고, 그의 처도 임신 중이라 모두들 잘 걷지 못하였다.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하고 망극하여 두 눈에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다.
·1592년 4월 그믐: 연일 비가 내렸는데 옷은 마르질 않고 한기에 뼈가 사무쳤다. 잠을 자지 못한 지가 오래라 형님은 팔을 괴고 떨면서 졸고 있다. 대부분의 촌락이 흉한 불길이 들었으나 오직 홍 씨와 배 씨의 우막은 보존되었다. 사람은 많고 집은 좁아서 제대로 누울 수가 없다.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었다. 게다가 지붕이 새어 비가 물을 붓는 듯 하고, 또 마주할 불조차 없어서 그 곤란한 상황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중략]... 어머니는 “왜놈들은 젊은 남자를 죽이기를 좋아한다고 하니, 너희들은 각자 멀리 달아나서 몸을 보존하였다가...”라고 하셨다. 나는 “부모님을 떠나서 오래도록 산다 한들, 부모님과 함께 죽느니만 못합니다.”하니, 어머님은 더욱 비통해 하셨다.
·1592년 5월 28일: 속담에 숲 속에 들어간 새가 오랫동안 날지 않으면 화살촉의 환란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헛된 말이 아니다. 도호 아재와 함께 증산으로 향했다. ...[중략]... 저녁이 거의 다 되어서 증산 문예촌[현 김천시 증산면 황점리]에 도착하였다. 오직 몇 채의 집이 있었지만 이미 피란 온 사람으로 가득 찼고, 처마 밑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다.
·1592년 5월 그믐: 동생 복일이 이질에 걸렸다. 동생은 병술생으로 올해 일곱 살이다. 이질에 걸려서 낯빛이 파리하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바싹 말랐다. 왜적이 부항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1592년 6월 18일: 어머님이 복례를 업고 가셨다. 실족하여 넘어져 ...[중략]... 버들가지의 끝을 꺾어 엮어서 다친 팔을 싸고 버드나무 껍질로 묶었다. ...[중략]... 우리는 억지로 걸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쓰러졌다. 서로 마주 보며 통곡하였다. [1593년 어머니를 잃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량을 훔치는 자와 이를 지키는 자의 반목이 반복되었다. 열악한 거주 환경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노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1593년 6월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세상천지가 망망하고 그간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장례를 치른 일을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는 한 줄의 기록은 당시 도세순의 비통함을 대신해 주기도 한다. 1592년 일기의 내용이 피란처를 찾기 위한 내용에 집중되었다면 1593년의 일기는 굶주림이 시작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한 노력 등 깊어지는 전쟁에 사람들의 생활이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세순의 용사일기
1592년 12월 15일: 대청 아래 묻어 두었던 벼 서른 말은 동짓달 2일에 잃었다. 24일에는 찹쌀 열말과 바지 두 벌, 이불 한 벌, 옷 한 벌, 마 여섯 속, 나락 열 말을 잃었다. 또 12월 6일에는 올벼 24말을 잃고 23일에는 벼 13말, 삼베치마 한 벌, 깨 한 말을 도둑맞았다.
·1592년 12월 28일: 나는 본가로 들어가서 열흘이나 더 앓은 뒤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할머님과 어린 노비가 번갈아 전염이 되어 이로부터 전염병이 다시 치열해졌다.
·1593년 5월 1일: 아버님이 병환이 들었는데 무슨 병인지 이름조차 모르다가 10여 일이 지난 후에 일어나셨고, 이제는 형님이 번갈아 누워서 병환 중이라고 전한다. 여간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정신이 종잡을 수 없이 어지럽다.
·1593년 6월 1일: 돌아오는 길에 광대원에 들렀는데, 전염병이 돌고 있고 어머님은 이미 병환에 누웠다는 것이다. 11월 명복이 광대원에서 왔다. 세상이 끝나고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비로소 전한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세상천지가 망망하여 그간 예를 갖추지 못하고 장례를 치른 일들은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1593년 10월 7일: 전날 유기 쟁반을 팔려고 이대약에게로 갔다. 고작 가을보리 서 말 밖에 주지 않겠다고 해서 거래를 그만 두었다. 이것들은 내 스스로 들쳐 메고 돌아왔다. 운곡에 가서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1593년 윤11월 24일: 석수암 아래 이르니 승려가 있는데, 떡을 만들어서 길가에서 파는 것이다. 십여 명이 떡을 사 먹고 있어서 나도 쌀 한 되를 주고 떡 여섯 편을 사서 나와 노비 셋이서 나누어 먹었다. 1594년 굶주림이 극에 달하고 동생을 잃다. 전쟁 발발 2년이 지나면서 비축한 식량은 줄어들고 굶주림은 극에 달한다. 나물과 쑥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일쑤이고, 굶주림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1594년 일기는 앞선 연도에 비해 작성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그 내용 또한 굶주림과 식량에 대한 걱정 등으로 채워진다. 굶주림의 끝에 막내 동생 복일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일기는 잠시 중단되었고, 4개월 뒤 나락 종자를 구하기 위하여 떠난 의흥[현 군위군 의흥면]에서 일기가 마무리된다.
·갑오년 1594년 정월: 비축해 둔 식량이 점점 다해 가지만 달리 조치할 방도가 없다. 늘 죽을 끓여 먹으며 연명하고 있다. 굶주림이 날로 극에 달해 가지만 나올 만한 계획도 없다.
·1594년 3월 18일: 운곡에 이르니 형님과 누이는 겨우겨우 명줄을 보존하고는 있으나,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다. 서로 마주보며 말을 잊고 있다가, 노복들의 안부를 물어보니 명복, 애정, 수정은 이미 굶어서 죽었다는 것이다.
·1594년 3월 20일: 배복원이 왔다. 그의 얼굴이 배고픔으로 상해 있었다. 아무 나물이나 마구 뜯어 먹었던 것이다.
·1594년 6월 8일: 나는 누이와 동생 복일과 옛 집터에 남아 있으나 식량이 다 떨어졌다. 나무열매를 따고 푸성귀를 뜯어서 먹으며 겨우 죽지 않고 연명하고는 있지만 동생 복일이는 더욱 쇠약하여 기력이 다해 가고 있었다.
·1594년 6월 22일: 정신없이 달려가서 동생을 보니 목숨이 목구멍에 걸려 있고, 숨쉬기가 곧 멎을 것 같다. 이씨 어른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니 처음 와서 보리밥을 먹었는데 먹고 나니 숨이 막혔다는 것이다. 그러다 이제 동생은 영원히 떠나 버렸다. 아아, 슬프고 괴롭다.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동생을 업고 돌아왔다. 다음날 임시로 묻었다.
·1594년 6월 24일: 형님이 팔계에서 돌아와서, 동생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세상이 끝난 듯이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1594년 12월: 친척 이대기 아재가 의흥에서 현감을 하고 있다. 그곳에 가서 뵙고 나락 종자를 좀 얻어올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