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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집성촌, 독우물굿, 판소리, 목기
전북 남원의 산 위치도
미꾸라지를 넣고 얼근하게 끓인 추어탕(鰍魚湯).
전라도에서는 산 미꾸라지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고기 장국을 끓이다가 고추장으로 간을 맞추고
두부를 통째로 넣은 다음 즉시 미꾸라지를 넣으면,
미꾸라지가 끓는 물을 피해 두부 속으로 모두 파고든다.
'하여, 예나 지금이나 널리 알려진 남원 추어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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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1500년 전 고령 대가야 영역 중 한 곳
고령 대가야국 가실왕의 왕국 악사였던 우륵
가야금을 만들고 12개 연주곡을 지은 음악 성인.
고령읍 쾌빈리는 우륵이 가야금을 창제하고
연주곡을 작사 작곡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대구 달성군, 경북 고령·성주군, 경남 합천·
거창·함양·창녕·산청, 전북 남원시·장수군
고령 대가야 영역 옛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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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연대 미상, 작자 미상 춘향전의 본향.
남원 기생 춘향이 광한루에 그네를 타러 갔다가
사또의 아들 몽룡을 만나 평생을 같이하기로 약속.
사또가 서울로 자리를 옮기며 두 사람은 이별.
새로 부임한 사또가 춘향에게 수청 들라고 강요.
춘향은 죽기를 무릅쓰고 신관 사또의 요구를 거절
이때 암행어사가 된 몽룡이 춘향의 목숨을 구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가 평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영조·정조 시대에 생성되어
개화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이야기.
〈춘향전〉은 설화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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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남원은 전북 관광 및 문화 예술의 중심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격전지였던 전략적 요충지.
전라도 서해와 남해 일대의 육로는 남원으로 모인다.
'즉, 실크로드 뱃길과 육로가 모이는 곳.'
남원은 삼한시대 마한 왕조의 도읍지였던 곳.
남원은 고조선 세력의 최후 항전처인 곳이다.
남원은 고대국가 전부터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
통일신라 시대 5 소경(小京) 중 하나 남원.
..................소경(小京)........................
소경은 신라 영역에 설치한 작은 도읍 중 하나.
신라 지방통치 불편을 보완하려 설치한 5곳 소경.
최초 소경은 514년(지증왕 15) 의성(義城)에 설치
아시촌소경에 6부 왕경인 및 남쪽 백성들을 이주.
그러나 아시촌소경은 훗날 5소경에 속하지 않았다.
최초의 소경은 557년(진흥왕 18) 충주 국원소경(國原小京)
신라는 귀족 자제 및 왕경 6부의 호민들을 이주시켜 정착.
이어 639년(선덕여왕 8) 강릉지역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
말갈족의 침략이 계속되자 658년(태종무열왕 5)에 철폐했다.
678년(문무왕 18) 북원소경(北原小京 : 지금 원주)을 설치
강릉 지역의 북소경을 현재의 원주지역으로 옮긴 것이었다.
680년 가야 땅에 금관소경(金官小京 : 지금 김해)
685년(신문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 : 지금의 청주)
아울러,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며 5 소경 완성.
'5 소경 = 충주. 원주. 청주. 김해. 남원.'
소경은 신라 정령지역 지배층 연고지 단절이 목적.
동시에 그들을 회유·감독하기 위한 집단 거주지역
그것이 점차 지방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변모했다.
신라는 소경에 장관 사신과 차관 사대사를 1명씩 파견.
소경의 행정구역은 수도 경주와 같이 6부로 나누어졌고,
그 아래 방(坊)과 리(里)를 두어 왕경인을 소경으로 이주
'왕경(인)'이란 왕이 사는 도읍.. 경주(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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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들 인구 분산책.
점령 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정책을 폈다.
하여, 남원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풍습이 공존.
아울러, 통일신라 시대 당나라 유민들이 정착.
고려시대에는 발해 유민들이 대거 남원에 정착.
고려 말엔 원나라의 동아시아 유민들 분산 정책.
'하여, 남원은 동아시아 역사의 축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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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자락의 서북쪽은 모두 남원으로 통한다.
즉, 남원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서북쪽의 관문.
남원을 모르고는 지리산 유래를 이해하기 어렵다.
남원은 삼국시대부터 백제권 전략적 요충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전쟁이 빈번했던 고장.
하여, 목기 같은 군수물자와 전쟁 유적 많은 곳.
남원은 삼국시대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진을 두고 성을 쌓았다.
신라가 이곳을 차지한 뒤 685년에 남원소경 설치
757년 전주에 예속시켰고
940년 고려 때 부로 강등
1018년에 지부사(知府事).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전략적 요충지.'
남원이 함락되면 전주와 한양은 바람 앞에 풍전등화.
권율 장군의 육군과 충무공의 수군이 연합해 결사항전.
위태로웠던 이조 국운을 왜적으로부터 지켜냈던 남원성.
전라도가 없었다면 이조가 없었다는 상징의 고장이 남원
역사적으로 남원은 왜구 침략이 잦았던 고장이기도 하다.
하여, 임진왜란 7년 전쟁 특히, 정유재란 피해가 컸던 곳.
운봉읍·주천면·수지면·송동면·주생면·금지면·
대강면·대산면·사매면·덕과면·보절면·산동면·
이백면·동면·아영면·산내면·동충동·죽항동·하정동
쌍교동·천거동·노암동·신촌동·어현동·금동·조산동·
왕정동·신정동·화정동·향교동·용정동·광치동·내척동
산곡동·도통동·월락동·고죽동·식정동·갈치동 등 1개읍
15개면 23개 동이 있고 시청소재지는 도통동 면적 752.02㎢,
고려 940년 부로 강등되었으며, 1018년 '지부사'로 개편.
이때 임실 순창을 속군으로, 장계 적성 거령은 임실군 영현
940년 거령현으로 개칭했고, 1018년 남원에 병합(별호: 寧城)
구고(九皐)·장수(長水)·운봉·구례(求禮)를 속현으로 두었다.
1310년 대방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360년 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 도호부, 1739~50년 일신현, 1844~53년 현으로 강등
별호는 용성(龍城)이었고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남원부
1896년 13도제 실시로 전주와 함께 1등군이 되어 전북 소속
1906년 월경지 정리로 15개면이 장수·임실·구례군으로 이관
1914년 군면 폐합에 의해 운봉군을 병합하고 19개면으로 조정.
이때 통한면 등 4개면을 합친 남원면이 1931년 읍으로 승격
1955년 왕치면이 남원읍에 편입.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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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 반야봉 노고단·명선봉 덕두산에 쌓인 남원.
산내면 반야봉은 전남·전북·경남의 분수령을 이룬다.
동북부의 장수군 반암면 대윤리에서 흘러 들어온 요천
남원 시내 지나 서남부 전남 곡성군 고달면으로 흐르며,
요천 중심으로 옥률천·갈치천 소한천이 수지상으로 발달.
운봉읍 일대에서 발원한 광천이 동부를 굽이쳐 흘러,
노고단에서 발원한 소하천과 합류해 만수천을 이룬다.
이들 하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전개되며,
금지면과 운봉읍 광천 유역은 넓은 평야가 형성.
지형상 평야부의 분지, 고원상의 분지, 고원지대
연평균 기온 11.8℃ 내외, 연평균 강수량 1,250㎜
식물은 떡갈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 등이 분포하며,
산내면 뱀사골 계곡은 원추리 군락지이고, 약초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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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동남부에 위치한 남원은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
농업이 발달하였고, 천혜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의 관광도시
지리산의 서북 관문 남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
벼 한말을 심으면 140두를 추수할 수 있다는 축복 받은 땅
남원은 국악의 발상지이고 이성계의 이조 창건 단초가 된 곳.
황산대첩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단초가 된 남원성 싸움.
삼국시대 남원성 서편에 만인의총(萬人義塚:사적 제272호)
정유재란 때 전사한 1만여 명과 순절한 8충신을 합장한 무덤.
운봉읍 화수리에는 1380년 이성계·이지란 장군의 황산대첩비
왜장 아시누키 미야코를 물리친 사실을 기념(1577년 : 선조 10)
'남원은 통일신라 경덕왕(757년) 이후 1300년간 지속된 지명.'
뱀사골로 하산하면, 거의 반선을 거쳐 남원을 들러 귀경한다.
어차피, 남원을 들르게 되면 여유를 갖고 명소탐방도 좋을 듯.
삼도에 걸쳐 동서로 뻗은 지리산' 북쪽 모든 접근로가 모인 곳.
봉화산은 남원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
임진왜란 당시 남원이 함락되면 전주와 한양까지 파죽지세.
남원을 보루로 왜적과 결사항전을 벌린 충무공의 난중일기.
남원은 옛부터 목기 특산물, 유배지, 춘향전, 기생이 유명한 곳.
아울러, 전통 풍습이 살아있고 판소리 동편제의 산실인 곳이다.
아직도 남도의 전통적인 문화를 즐길만큼 옛부터 풍요로운 고장.
남원은 백제 신라 고려에 걸쳐 불교 문화의 산실.
아울러 남원은 집성촌 고을이자 역사적인 격전지.
남원에는 전쟁과 관련된 문화 유적이 유난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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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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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략적 요충지.
'남원소경'은 신라의 작은 도읍이라는 의미.
남원은 고려 때부터 왜구 침입이 빈번했던 곳.
왜구가 식량 조달을 위해 남원 곡창지대 습격.
역사적으로 왜구와 맞싸워온 남원 지역 백성들.
역사적으로 남원은 항일 감정이 높은 지역이다.
1597년(선조 30) 8월 정유재란 때 왜군과의 싸움.
1597년 7월말 우키다, 고니시가 이끈 5만 6천 명
이조와 명 연합군 4천 여명은 남원에 병력을 집결
양원(楊元)의 명군 3천명과 접반사 정기원, 임현 등.
남원성 수비, 유격장 진우충은 전주성에서 남원 지원.
8월 6일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남원성에 들어오고
이어서 문안사 오응정,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13일에 왜군이 남원성에 도착하자 이날 밤부터 치열한 전투
4일간 공방전 끝에 이복남·이신방을 비롯한 장수들이 전사,
명나라 장수 양원만이 살아 탈출한 채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남원성 함락되자 진우충이 도주해 전주성은 무혈 점령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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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임진왜란 종식을 위한 명왜 강화교섭 결렬.
1597년 초 왜는 이조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다시 준비
1정유재란의 서막이 오르고 14만명 왜군이 이조를 침공.
1597년 1월 14일, 가토가 지휘하는 제 1군이 부산에 상륙,
양산 거쳐 울산 서생포에 집결, 고니시의 제2군이 웅천상륙
반년이 지난 7월 8일 왜군 후속부대가 경상도 남해안에 상륙
1597년 8월 3일, 총대장 고바야카와는 공격군을 좌우로 편성
우키타와 모리에게 각각 부대를 지휘하도록 하고, 전주로 진격.
당시 이조 도원수 권율은 성주-김천 간 일본군 북상을 대비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왜군의 길목을 막기 위해 의령에 배치
기타 지역 백성들은 조정의 청야작전에 의해 산성으로 피신
따라서, 왜군은 정유재란 초기에 무인지경으로 영남을 점령.
그들 공격의 주목표인 전라도로 진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왜군은 임진왜란 패배가 전라도를 점령 못한 데 있다고 판단
정유재란 당시에는 전라도 점령 후에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
이 작전에 따라 왜 우군은 황석산성(거창군), 좌군은 남원 공격
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이자 보루.
명군은 명-왜 양국의 강화 교섭이 진행됨에 따라
1593년 8월~ 1594년 9월 병력을 요동지방으로 철수
1597년 3월 형개를 경략으로 삼아 육만 동정군 편성
왜군의 좌군이 구례를 점령했을 무렵,
남원에서는 이조와 명군이 합동 방어.
당시 명 부총병 양원은 6월 중순부터 7월 하순까지
성벽을 증축하고 진지 방어시설 보강에 주력하였다.
8월 7일 구례에서 남원으로 진출한 왜군 선봉대 도착.
8월 13일에는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여 공격 개시.
8월 14일 왜적의 맹공으로 동남쪽 수비병사 거의 전사
다음날 왜군은 양원을 찾아가 화해를 원하였으나,
양원은 적군을 꾸짖으며 기세 당당하게 항전 표명.
그 다음날인 8월 16일은 사실상 남원성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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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총(萬人義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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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
1597년(선조 30) 화의 결렬로 재침한 왜군은 호남 호서 점령
같은 해 7월 28일 우키다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한 5만 선발대.
병력은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
이조와 명 연합군도 경상·전라·충청 잇는 남원을 사수.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 남원부사 임현
군사 천명, 명나라 부총병 양원 군사 3천 명이 방어.
8월 13일 일본의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해 오자,
동문 양원, 서문 모승선, 남문 장표, 북문 이복남
14~15일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16일에 함락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50기를 이끌고 탈출했고,
접반사 정기원·이복남·오응정·김경로·신호·임현,
통판 이덕회, 광양현감 이원춘·진안현감 마응방 전사.
명군 이신방·장표·모승선 등도 함께 전사했다.
또한 성을 방어하던 병사와 주민들 1만 명 전사.
1612년(광해군 4) 충렬사를 세워 8충신을 제향했다.
1964년 현위치 이전, 1971년 정화 시작 1979년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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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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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남긴 기록이 난중일기.
남원에서 구화역, 거제, 웅천, 남해 수군을 통제,
남원은 육군을 이끌던 권율 장군과 전략회의 장소.
누명에서 풀린 충무공이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한 곳.
1592년 임진년에 쓴 난중일기의 일부분.
1월 1일(양력 2월 13일)
<임술> 맑다.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번이나 설을 세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마사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마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여러가지 물건을 바치러 가지고 왔다.
1월 초7일(양력 2월 19일)
<무진> 아침에는 맑았다.
늦게부터 비와 눈이 번갈아 종일 내렸다.
조카 봉이 아산으로 갔다.
남원에서 전문(箋文: 임금께 바칠 일종의 글월)을
받들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월 16일(양력 2월 28일)
<정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각 고을의 벼슬아치와 색리(고을의 아전)
등이 인사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을 맡은 군관들과 색리들이
그들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지방 병마사영이나 수영에 첨사아래에 있는 무관)·
가수(假守: 임시 직원)도 역시 점검하지 않아
이 지경에까지 된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공무를 어줍짢게 여기고,
제몸만 살찌러 들며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 날의 일을 알만하다.
성밑에사는 박몽세(朴夢世)는 석수인데
선생원 돌 뜨는 곳에 가서 해를 끼치고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입혔으므로,
곤장 여든대를 쳤다.
5월 3일(양력 6월 12일)
<임술> 가랑비가 아침내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회답편지가 새벽에 왔다.
오후에 광양과 흥양현감 을 불러
함께 이야기하던 중 모두 분한 마음을 나타냈다.
전라 우수사가 수군을 끌고 와서 같이 약속하고서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우수사가 온다고 기뻐하였으나,
군관을 보내어 알아보았다.
그러니 그건 방답의 배였다. 실망하였다.
그러나 조금 뒤에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 가니
통분한 마음 이길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문에 곧 중위장(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을 약속하고 장계를 고쳤다.
이 날 여도수군 황옥천(黃玉千)이
왜적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 와서
목을 베어 군중앞에 높이 매달았다.
5월 29일(양력 7월 8일)
<무자>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미리 약속한 곳에 와서 만나
그와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한다.
바로 거기로 가보았더니
왜놈들은 벌써 뭍으로 올라 가서
산 위에 진들 치고
배는 그 산 아래에 줄지어 매어 놓고
항전하는 태세가 재빨리 튼튼해졌다.
나는 장수들을 독려
일제히 달려 들면서
화살을 비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같이 쏘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화살맞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왜적의 머리를 벤 것만도 많지만,
싸움에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다.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 중 탄환을 맞은 사람 또한 많았다.
적선 열 세척을 불태워버리고 물러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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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919.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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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와 장수군, 경남 함양군의 경계
봉화산(920m)은 철쭉이 곱기로 이름난 산.
흥부마을과 아막산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막산성...................
'서동요'의 남주인공 '장'은 백제의 무왕.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후 신라와 자주 충돌
재위 중 신라 아막산성(아막산성) 가잠성(잠성)
모산성, 늑노현, 주제성, 서곡성. 독산성을 공격
한편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나자 친당책을 펼쳤다.
624년 당 고조로부터 대방군왕 칭호를 받았던 백제 무왕.
627년 군사를 동원해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다
당나라가 백제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
아막산성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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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면과 암릉 곳곳에 철쭉이 있지만
정상 남쪽 2km 지점 꼬부랑재부터 치재
1km 정도 되는 능선 주변은 온통 철쭉 군락
봉화산에서 철쭉이 제일 많은 치재
봉화산 정상 중간지점 꼬부랑재 부근.
꼬부랑재를 지나면 억새밭으로 변한다.
봉화산 정상 밑인 다리재에 도착하면
또 다시 철쭉과 초원지대가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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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자연과 문학이 어우러진 고장이다.
서산대사가 말했듯 장중함과 후덕함의 고장.
남원은 춘향전뿐 아니라 흥부전의 발상지이다.
봉화산은 백두대간이 남해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
원나라가 고려를 정복후 한반도 곳곳에 설치한 봉화.
원나라가 일본 침략을 목적으로 봉화를 설치한데서 유래.
원나라는 고려의 배를 타고 두차례 일본을 침공.
두번 다 풍랑을 만나 일본 정복에 실패하고 만다.
운봉, 제주도 말 목장은 일본을 점령하기 위한 것.
남원은 일본을 점령하기 위한 원나라 전초기지.
봉화산에서 지금은 봉화(烽火)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상 동북쪽 1km 지점 '봉화산 봉화대’팻말
대신, 5월이면 철쭉군락이 봉수대에 횃불 타오르는 듯
임진왜란 당시 봉화산 봉화대는 이조의 전략적인 요충지.
아영면 마을 주민들은 철쭉 개화 시기에 맞추어.. 산신제.
짓재마을에서 봉화산 서쪽 능선까지 철쭉 군락지대.
봉화산 철쭉 군락지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
철쭉 군락지와 참나무 숲 지나면 정상 주변은 억새평원
봉화산 정상에 오르면 장쾌하게 이어진 백두대간
북으로는 경남 함양과의 경계선인 백운산(1,237m)
남으로는 아영면 고원지대 들판 너머 천왕봉(1,915m)
반야봉과 바래봉까지 이어지는 지리산이 우뚝 솟아있다.
동으로는 함양에서 거창, 서로는 장수군 번암면 일대 산야.
봉화산은 어린이와 노약자를 동반해도 될 만큼 수월하다.
봉화산에는 승용차 포장도로가 정상까지 나 있기 때문이다.
흥부가 부자가 된 아영면 성리마을은 판소리 배경무대.
성리에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지명이 그 사례.
지금은 길 양쪽으로 감자농사가 한창인 ‘허기재’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한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터,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주고 복받은 발복 집터.
실제로 '고둔’이란 지명은 곳집(창고)이 모여드는 터,
즉, 부자가 되는 터라는 뜻이고 장수군 번암면 짓재 고개.
고개마루 높다랗게 있어 마을과 논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금모퉁이'는 사금 채취로 흥부가 부자된 곳으로 보인다.
남원에서 차로 15분 거리 성산마을에 있는 흥부가족 동상.
인월면 성산마을은 박첨지 설화가 전해오는 흥부의 출생지
놀부 박첨지 묘, 타작마당, 박첨지네 텃밭, 서당터가 있다.
집성촌.
'남원은 동족마을 집성촌이 발달된 곳.'
김해 김씨와 남원 양씨, 영천 이씨가 많고,
한 마을에 타성이 섞이지 않은 마을은 없다.
그러나, 면 단위 대부분은 95% 이상 씨족마을.
그중 수지면 호곡리 내호곡에는 죽산 박씨들 집성촌.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남원 토성은 11개 성씨
양(梁), 정(鄭), 진(晉), 윤(尹), 양(楊), 견(甄),
황보(皇甫),염(廉), 배(裵), 유(柳), 황(黃)씨 이며,
남원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는 양, 윤, 진, 영천 이씨 등
대체로 양(梁), 정(鄭), 진(晉)씨는 아전(人吏)을,
이(李), 임(林), 송(宋)씨는 향리(鄕吏)를 도맡았다.
아영면 의지리 율동마을 = 경주 김
인월면 성산리 성산마을 = 달성 서
신동면 부절리 중절마을 = 진주 소
주천면 호기리 호곡마을 = 풍천 노
덕과면 사율리 사곡마을 = 벽진 이
인월면 유곡리 유곡마을 = 영천 이
인월면 건지리 외건마을 = 동복 오
수지면 호곡리 내호곡 마을 = 죽산 박
남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성씨는 남원 양씨.
남원 양씨 유래에 관해 자세하게 알아보자.
....................남원 양씨 유래........................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무량산(586.4m) 아래
고려 때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남원양씨(南原楊氏) 종가.
양씨는 버드나무 양(楊)자를 쓰는 양씨와
들보 양(梁)자 쓰는 양씨로 크게 나누는데
양씨(梁氏) 시조는 탐라 개국설화에 나온다.
고씨, 부씨와 함께 삼성혈에서 탄생한 양씨(梁氏).
탐라 양씨에서 분포된 충주 양씨와 남원(南原) 양씨.
이중에서도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압도적인 수를 차지.
버드나무 양(楊)자 양씨 또한 본관이 남원이다.
양씨(楊氏)가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에 처음 등장하기는 고구려의 양만춘 장군
그러나 양만춘 장군을 선조로 하는 양씨는 없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역사기록이 단절된 증거이다.
우리 나라 양씨(楊氏)는 모두 47본이나 되지만
남원, 청주, 중화(中和), 통주(通州) 4본이 주종.
남원양씨는 고려 때 양경문(楊敬文)을 시조(始祖)
이후 9세 대제학공(大提學公)을 지낸 양이시(楊以時)
지금까지 관직만 전해오고 기타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여, 공민왕 4년 문과에 급제
집현전 대제학에 올랐던 양이시
양(楊)씨 가문의 실질적인 시조
남원양씨는 한때 후손이 끊길뻔한 적이 있는데
양이시 며느리인 숙인 이씨가 다시 일으킨 가문.
개성 출신인 이씨 부인은 양이시의 외아들과 결혼
부자가 급제한 가문으로 출가하자 마자 청산 과부.
시아버지와 남편을 그 해에 사별하는 불행을 당한다.
더구나 임신 중인 몸으로 남편 장례를 치룬 그녀.
유복자 양사보를 품에 안고 남원 옛집으로 향했다.
친정의 개가 권유를 뿌리치고 개성에서부터 천리길
천신만고 끝에 남원에 내려와 자리를 잡자마자
왜구 아지발도가 운봉으로 쳐들어와 일어난 난리
고려말 한반도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
진포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 공격으로 500척 침몰
왜구들은 홍성으로 상륙했다가 최영 장군에게 참패.
왜구들은 퇴로를 잃고 지리산 운봉까지 밀려 온 것.
이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
이때 출병했던 이성계가 적장 아지발도를 죽이고
황산대첩을 이뤘으나 남원은 전쟁으로 황폐화된다.
양씨 가문의 일점 혈육 양사보를 품에 안은 이씨 부인
남원에서 순창 가는 24번 국도변 비홍(飛鴻)재로 피난
그곳에서 바라본 순창 무량산 산세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나무로 만든 기러기 세 마리를 날려보냈다.
그러자 한 마리는 순창군 동계면 관전리(官田里)로
또 한 마리는 구미리, 나머지는 농소리로 날아갔다.
그녀는 어린 아들을 업고 구미리로 내려갔다.
이씨 부인이 나무 기러기를 날린 고개인 비홍치
이씨 부인은 나무 기러기가 떨어진 집으로 갔다.
그 자리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집 방 한 칸 얻어 살려고 집주인을 찾았다.
그런데 그집 노인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했다.
원래 집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며 살았다는 노인
이씨부인에게 원래 집주인은 양씨라고 알려주었다.
"내 등에 업힌 어린 아기도 양씨인데
방 한 칸 정도 빌려 쓸 수 있겠군요."
"바로 부인과 아이가 이 집의 주인입니다."
노인은 모자(母子)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그말을 하고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이 곳에 정착한 이씨 부인은 키워낸 아들 양사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음사(蔭仕)로 벼슬길
후손 8명 문과, 10명 무과 급제, 30명의 생원과 진사
1467년 이조시대 세조는 이씨 부인 정려(旌閭)를 내려
후손들에게 그 정절을 기리도록 한 것이 정려 중 최초.
이씨 부인 묘는 기러기가 떨어진 순창군 적성면 농소리
시아버지 양이시(楊以時)의 묘단을 위에 세우고
그 아래 남편 양수생의 묘단과 함께 나란히 있다.
이씨 부인이 정착한 집은 23대 600년간 종손 종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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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윤씨 (南原 尹氏) 유래........................
남원은 전북 남동부에 있고 본래 백제의 고룡군인데
대방군으로 고쳤고,신라 경덕왕때 남원소경으로 개칭
고려 태조 초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환원.
'1739년 일신현으로 하였고 1895년 다시 남원군.'
남원 윤씨 시조 윤위는 윤신달(파평윤씨 시조)의 8대손
고려 명종 6년에 국자박사 기거랑, 이부낭중, 예빈소경
남원 복기남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남원백에 봉해졌다.
이때 남원 땅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파평 윤씨에서 분적
남원을 관향으로 삼은 윤위는 윤관(尹瓘)의 후손으로서
덕과 인품과 문장을 갖추었으며, 말술인 호주가로 명성.
서경 유수로 있다가 죽었는데
남원 사람들이 그의 공을 기려
장례비를 모아 남원 땅에 묻혔다.
하여, 남원에 정착한 후손이 남원 윤씨.
남원 윤씨 가문을 대표하는 시조의 아들 극민
문하시중에 올라 함안백에 봉해진 돈(敦)의 부자
시조의 현손으로 평리를 지낸 수균의 아들 황(璜)
고려말 전서를 지냈으나 이조 때 두문불사하며 충절.
병자호란때 만언소를 올려 근왕병을 모집
남한산성에 들어가려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다가 발이 잘리었다.
그는 발이 없는것과 꿇는 것과는 다르다고
굴복하지 않다가 결국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병자호란때 척화론자로 몰려 청나라에 잡혀가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다가 심양 서문 밖에서 죽음
척화 <삼학사(三學士)>로 불리운 청나라 척화가문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윤씨(南原尹氏)는 남한에 총 37,838 명
남원 윤씨 집성촌
충남 부여군 옥산면 봉산리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충남 천안군 동면 화계리 전남 화순군 능주면 천덕리
전북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전북 남원군 주생면 일원 전남 영암군 삼호면 난전리
전북 남원군 덕과면 용산리 전남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은 왕건을 도와 삼국 통일
고려 건국 개국공신이자 태자의 스승 태사삼중대광
그의 5대손 윤관(1040~1111) 장군은 여진족을 정벌
북진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여 시조로 모신 윤신달
경기도 파평(파주)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
어느날 이 용연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며 천둥과 벼락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지 사흘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에 떠있는 금 궤짝을 발견.
그 금 궤짝을 건져 열어보니 찬란한 금빛 광체 아이.
어깨에 붉은 사마귀, 양쪽 겨드랑이에 81개 잉어 비늘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는 아이.
윤온 할머니 성을 딴, 아이가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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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는 신라 6촌 중 취산 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 후예.
서기 32년 본피부(本彼部)로 개칭, 정씨 성을 하사받는다.
서산(瑞山), 낭야 정씨를 제외한 모든 정씨의 시조가 된다.
남원군 주포면 지당리에 있는 대지마을
고려 말 남원 진씨와 남양 방씨의 정착촌.
그후 정착한 남원 윤씨가 대종을 이룬 집성촌
마을 한 복판에 연못이 있어 지당(池塘)이라 부른다.
큰 연못이 있고 마을 주변도 넓어.. 대지(大池)마을
지당(池塘)은 마치 연꽃이 만발한 형국
연못을 파야 명당의 발복을 받을 수 있다는 곳.
용두정과 침정이 청룡 산세인 남원 둘째 명당촌
뒷산 수덕봉(修德峰)엔 신라시대 문화제 석불입상
연꽃 당(塘)은 불교의 상징 당나라를 일컫는 한자.
신라시대 당나라 유민이 남원에 대거 유입된 흔적.
나당연합군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무렵 같다.
시 - 백련꽃(일명 : 육모 당)
素花多蒙別艶欺, 꽃이 하얗기에 늘 요염한 꽃들의 업신여김 받지만,
此花只合在瑤池. 오직 신선이 산다는 仙境에나 어울리는 꽃이라네.
無情有恨何人覺, 냉혹한 현실 한스럽게도 누가 그 고결함을 알리요?
月曉風淸欲墮時. 달은 지고 새벽바람 찬데 꽃마저 떨어지려 하네.
백련꽃의 고결한 자태와 맑고 우아한 품격을 묘사한 시.
첫 구절은 깨끗함이 화려하고 요염함에게 우롱받는다는 뜻.
둘째 구절은 백련꽃은 결코 범속한 꽃들과 어울리지 않고,
오직 전설 속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선경에서나 피는 꽃.
서왕모는 곤륜산에 살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 영약을 가진 여신
연꽃이 있는 연못가에는 으례히 있는 육모정 정자.
육모 방망이는 희고 깨끗한 6각형 백련꽃의 상징.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라는 뜻이 담겨있다.
독우물굿.
독우물은 밑바닥 없는 독을 묻어 만든 옹정(甕井)
그것은 옛부터 아름다운 여성의 음(움) 물을 상징 .
굿은 무당이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하는 의식절차
경남 영산지방 특유의 무속으로 매년 5월 1~6일.
호남지역 동신제(洞神祭)는 징 꽹과리 장으로 농악.
무당이 노래하고 춤추며 귀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의식.
'독우물 굿'은 옛날부터 '남원 굿'을 지칭.
선사시대 마한 영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설한 백제
고대 음악을 알만한 역사적인 자료가 매우 부족한 편.
하여, 고대 음악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선사시대 제천의식과 백제인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들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통해 음악이 상당히 발전했을듯.
백제음악을 시기적으로 분류하면 B.C.18년 ~ A.D. 660년.
...............백제 음악에 쓰인 악기..................
4세기 이후 백제는 고(鼓-북), 각, 공후, 쟁, 우, 지, 적
이 악기들은 중국의 남부와 북부의 악기로 나눌 수 있다.
남부악기 - 공후, 쟁, 우, 지, 적
북부악기 - 고, 각
북 종류인 고와 뿔피리 일종의 각은 고구려도 사용한 악기.
6세기 이후에는 도피리, 횡적, 군후, 막목 등이 연주에 편성.
백제 노래는 정읍, 선운산, 방등산, 무등산, 지리산 등이 있다.
백제는 기악과 노래 외 산대도감 놀이와
봉산 탈춤의 전신인 기악무도 공연하였다.
'남원의 유래를 대변해주는..남원농악.'
남원농악은 전라도지역 마한의 제천의식에서 유래.
풍년을 기원하는 축원 형태의 농악에서 비롯된 듯.
현재 각 마을 읍면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 풍습들.
남원농악은 각 마을 단위로 행해진 공동 제사의식
축원농악(祝願農樂), 노작농악(勞作農樂)/두레농악’
마을 공동체 농악에서 걸립농악(乞粒農樂)으로 발전.
각 마을 굿패가 전국을 누비는 걸립 농악패가 된다.
소위, 연예 농악(演藝農樂)/ 걸립패 농악으로 발전
실제로 남원에서는 그러한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농악은 모두 구비전승과 행위전승으로 전승
이러한 유래와 역사의 고증을 단정하기에는 어렵다.
하여, 남원농악은 좀 더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듯.
남원농악 계보는 곧 우리나라 역사의 정체성
현재 전승되는 남원농악 계보는 대부분이 마을굿 형태
소박한 농악들 뿐이고, 그나마도 대부분 거의 사라졌다.
현재 분명하게 전승되는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독우물’
............옹정리 석정(石井)마을......................
남원군(南原郡) 기지면(機池面) 옹정리(甕井里)
항아리처럼 생긴 우물이 있어 독우물 또는 옹정.
옹정리 동편 마을을 금정(金井), 서편 마을을 석정
석정마을은 통일신라 초 원주 원씨(原州元氏) 집성촌.
지금의 요천수가 마을 뒷산 밑을 굽이 돌아 흘렀는데
이때 흥덕 장씨 제각 부근에서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그후 김씨, 장씨, 양씨, 기타 성씨가 모인 큰마을.'
원씨 일가가 모여사는 남원 제일 샘이 옹정(甕井).
어느 샘이고 항아리처럼 생긴 것은 공통적이지만
이곳 샘은 항아리 속에 또 항아리가 있는 것처럼
생겨 이로 인해 독우물 , 독우멀 로 불리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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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굿.........................
우물굿은 마당밝기 중간에 마을 중앙 공동우물에서 고사
우물을 두겹으로 둥글게 에워싸고 풍물장단에 춤을 추며
한동안 돌다가 굿판 대표인 '비나리'가 고사덕담을 한다
"고설 고설 고사로다 성겨 드리는 고사로다이
고사를 드리오니 동방청제 용왕님 남방적제 용왕님
일년이면 열두달
칠년대한 가뭄이나
오뉴월 긴 장마나
맑은 물이나 철철철
나오도록 하옵소사."
우물굿을 끝내고 삼채가락을 치며
동네 우물을 크게 몇 바퀴 도는데
밀무동은 윗무동을 어깨 위에 세워
춤추고 도령은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왜장녀와 남장녀는 무동앞에서 가는 길을
장난스럽게 막기도 하며 맞춤을 추며 간다.
...............................................
이른바 남원 '독우물굿/독우멀굿'의 계보.
그러므로 남원농악은 이 독우물굿을 중심으로 하여
가장 분명한 남원농악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
남원 농악은 삼한시대 마한의 제천 의식에서부터 유래.
남원 농악은 마을 단위로 행해진 공동체의 제사의식
마을 단위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한 결실이 '두레농악’
여기서 형성된 농악 굿패가 다른 마을까지 두루 다녔다.
즉, 걸립(乞粒)농악 굿패는 연예(演藝)농악으로 발전
대를 이어 예능으로 전수되어 온 대표 굿이‘독우물굿’
1948년경까지 전국을 상대로 했던 남원농악 굿패 구성.
...............남원 농악 굿패..............
이조시대 전라도의 산간 내륙은 좌도
서해와 가까운 평야 지역은 우도 지역
좌도는 남원, 담양, 임실, 진안, 곡성, 구례 등 21개 지역
우도는 김제, 정읍, 고창, 영광, 함평, 해남 등 36개 지역.
이러한 구분에 따라 풍물굿도 좌도와 우도 농악으로 구분.
좌도 농악은 가락이 빠르며 쇠가락이 발달. 진풀이가 단순
반면, 윗놀음(상모놀이) 등의 농악이 다양하게 발달되었다.
우도농악은 느린 가락에 다양한 진풀이, 장구가락이 발달.
대표적인 좌도농악은 남원지방 독우물(금지면 옹정리)농악
그당시엔 모르는 사람이 없이 널리 알려져 있는 농악이었다.
약 30명이나 되는 전 굿패가 한마을 사람으로 형성
이때문에 독우물굿이라 하면 아주 유명한 굿이었다.
남원지역 농악의 명인 중 가장 앞선 전판이 선생
생존했으면 지금 약 130여 세 가량 된다고 하는데
매우 뛰어난 기량을 가졌고 주요 활동 무대가 남원
전판이 선생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밝혀지지 않지만
남원 인근 임실 곡성 농악에도 영향을 끼친.. 상쇠.
그의 농악은 독우물에 살던 류한준 선생에게로 계승.
류한준 선생의 부친 류선장씨는 을사조약 당시 의병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돌아가신 독우물 지역의 상쇠.
류한준 선생은 일제시대에 부친께 농악을 배우기 시작
일제의 억압으로 농악을 하지 못하다가
정부수립이 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후
창경궁에서 전국 농악 경연대회가 열렸다.
전북에서 내노라하는 굿패가 다 모였지만
그중 독우물 굿패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류한준 명인을 상쇠로 한 전북팀은 대회1위
그후 전국의 농악경연대회를 모두 휩쓴다.
이때부터 류한준 선생은 전국적으로 명성.
그러다가 6.25 전쟁 중 52세로 생을 마감.
그후 류한준 명인의 부쇠로 활약하던 강태문 명인
그 뒤를 이어받아 남원굿 상쇠로 명성을 떨쳐왔다.
그무렵 16세 소년 류명철이 강태문 명인에게 농악을 배워
남원 소년 농악대를 조직, 남원 농악경연대회에서 특별상
소년은 바로 류한준 명인의 아들로서 남원굿을 계승받는다.
류명철은 강태문 선생이 작고하고 나서 5.16후
상쇠인 김수동과 함께 전북대표로 출전하여 1등
그 부상 특별 흥행허가로 전국을 누비며 포장걸립
그후 구례 농고, 남원 수지 중학교, 전주 농고 농악반 강사
1978년 전주대사습 필봉굿 상쇠로 출전하여 대상을 받는다.
1988년 서울 대학로 '공간사랑' 공연을 끝으로 가사에 전념
1994년 남원농악 맥을 이으려는 제자들 요청으로 활동을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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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각성바지' 집성촌이 모인 고을.'
집성촌마다 긍지 가득한 고유풍속 마을 농악.
고조선, 고구려, 당나라, 원나라, 유민 정착지.
다양한 유민 집단이 모여 형제처럼 지내왔던 남원.
전쟁으로 나라와 고향을 잃어버린 유민들.
서로 그 슬픔과 애환이 이심전심 통했던 듯.
하여, 전란 때마다 일심동체가 되어 남원 사수.
'제 2의 고향을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판소리.
동편제 창법은 웅장하면서도 맑고 깨끗하다.
섬진강 동쪽 구례, 남원, 순창에서 불리워졌다
서편제 창법은 그 소리가 부드럽고 애절한 느낌.
전북 운봉·구례·순창·흥덕에서 많이 부르는 동편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목으로 우기는 '막 자치기 소리'
기교보다 곧게 내리지르는 통성이라 거칠면서 호방한 맛
영화 서편제 (1993년 임권택 감독)에서의 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는 그 지역 산의 생김새와 같다.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 웅장하고 장엄한 지리산 지역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 끊어질 듯 부드러운 나즈막한 산세
판소리는 지역감정 및 악기재료 원산지의 영향도 받게 된다.
결국 지역적 풍습 기후 토양 그리고 지형의 영향도 받게된다.
소리가 물체 진동에 의해 일어나는 음파,
음파는 결국 산과 골짜기 생김새에 영향.
인간의 감정 또한 자연 환경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창법이나 소리의 형태로 표출되는 듯.
지리산을 서사구조(敍事構造)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판소리
춘양가는 남원 , 흥보가는 지리산, 변강쇠 타령은 서도(西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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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민족을 대표하는 민요는 아리랑이다.
우리 민족의 뿌리를 알게하는 진도 아리랑 가사.
진도 아리랑 민요는 서편제에 해당하는 가락이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소~~.(중략)
그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아리랑 쓰리랑'.
시베리아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의 언어.
아리랑은 '맞이한다' 쓰리랑은 '느껴서 알다'란 뜻.
아리랑은 알다(知) 어원을 가지고 있고,
쓰리랑은 쓰다(用) 어원을 가지고 있다.
아리는 알이(知人, 잘 알고 있는 사람이란 뜻)
쓰리는 쓰는 이(用人, 사람을 쓴다, 또 그 사람)
랑은 라(羅, 那) 즉, 나라의 변음으로 볼 수 있다.
아리랑은 지혜로운 사람, 현자, 대인이 있는 나라.
쓰리랑은 이들이 중요하게 쓰이는 백성이 있는 나라.
아리랑 쓰리랑은 에벤키 족 조상의 나라와 그 백성들
'우리 민족은 에벤키 족과 이웃인 브리야트 족.'
우리 민족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부터 유래.
해뜨는 동남쪽을 향해 끝없이 이동후 한반도에 정착.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혼이 가득 담긴 판소리.
지리산 등줄기를 닮은 동편제.... 섬진강을 닮은 서편제.
남도 문화로 꽃 피워 지구촌 곳곳마다 흐르는 무형문화제.
'동편제와 서편제'를 합친 한반도의 고유가락이.. '판소리.'
중앙아시아 티벹 고원 유목민의 음률.
인도 불교음악에서부터 유래된듯한 음률.
때론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음률.
'우리 민족 옛 조상의 혼이 담겨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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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주능선은 하늘을 향해 빚어지는 춤사위 같다.
지리산 주능선에 흐르는 고저 장단은 판소리 가락 같다.
아득한 수평선 파도의 물결처럼 광야를 달리는 산등성이.
섬진강 푸른 물이 흘러 빚어 낸..가슴 끓는 애잔한 민족 혼.
지리산의 자락을 맴도는 바람소리는 귓전을 울리는 판소리.
하늘을 나르는 새들의 지저귐이 장단 맞추면 저절로 어깨 춤.
'판소리는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선율.'
판소리는 지리산 일대 무당음악과 불교음악의 결합.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변기를 거쳐 발전.
급성장한 평민 계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의 발로.
무엇보다도 최하층 천민들의 민속 예술에서부터 유래.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
이조 영조 30년(1754년) '만화집'의 <춘향가(春香歌)>
문헌 자료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 12종의 판소리
당시,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廣大)와 재인(才人)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
정조 때 가난한 선비 송만재는 잔치를 베풀 수 없어 글로 대신
그 글이 관우희(觀優戱)이고 거기에 소개된 12 바탕의 판소리.
<심청가>,<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장끼타령>,<옹고집>,<왈자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전>,<가짜신선타령 =숙영낭자전)이 수록된 관우희.
<춘향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심청가>
오늘날까지 명맥이 끈기지 않고 전해오는 5 바탕.
이들 판소리 주제는 오륜에서 각각 찾을 수 있다.
'부부유별 장유유서 군신유의 붕우유신, 부자유친.'
숙종말 이후 영,정조 때 명창은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이 알려진 명창
동편제 始祖 - 송흥록. 전라도 남원 운봉 태생
서편제 始祖 - 박유전.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음
중고제 始祖 - 염계달. 경기도 여주 출신
동서편 구분은 산악 대 평야, 혹은 섬진강 좌우가 분기점
지형적 특성상 동편제는 빠르고 씩씩하며 웅장하되 고졸함.
서편제는 느리고 애잔하며 장식음이 많고 기교적인 판소리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의 1930년대까지는 '5 명창 시대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다.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
판소리는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정착.
이후 판소리는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발전.
판소리계 최초의 여자 창자인 진채선은 많은 일화의 주인공.
'여류 명창 '진채선'은 고창 무당의 딸로 태어났다.
신재효에게 판소리를 배운 뒤 경회루 낙성연에서 소리.
진채선의 소리를 들은 대원군은 그녀를 곁에 두고 사랑
서울에 올라간 진채선이 내려오지 않자
신재효는 진채선을 그리워하며 지은노래.
'도리화가' 판소리는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끝끝내 신재효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진채선
'지리산의 명창 - 故 강도근.'
남원이 배출한 소리꾼..판소리의 고장 동편제의 제왕 강도근 명창.
1918년 남원시 향교동에서 농군의 자식으로 태어나 1996년 에 타계
그의 제자로서는 안숙선, 강정렬, 전인삼, 이난초등 명창들이 알려졌다.
김정문, 송만갑, 유성준 문하에서 판소리를 전수 받은 남원 동편제 대가.
일찌기 지리산 계곡에서 혹독한 독공을 통해 얻은 소리는 지리산이 스승
평소 "자작을 안 한다. 배운 대로만 한다" 할 만큼 전통에 충실했던 소리꾼.
73년 이래 남원 국악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남원 판소리의 맥을 이어왔다.
동편제 소리는 19세기 초반 운봉 출신 가왕으로 불리는 송흥록으로부터
송광록, 송우룡,송만갑, 유성준에게 이어진 소리로 일제시대에는 박봉래,
박봉술, 임방울, 김연수, 정광수, 박초월, 김소희, 박록주, 박동진 대물림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장기로 삼는 수많은 명창들을 배출했던 판소리.
동편제 소리는 기교 장식을 달지 않고,
가성을 쓰지 않으며, 감정을 절제하고,
소리 끝을 뭉툭 끊는 남성적 장대한 창법.
지리산 산줄기와도 같은 웅장한 맛의 판소리.
'강도근이 동편제 소리꾼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의 스승들이 전형적인 동편제 소리의 대가였다는 점
둘째, 배운 것을 나름대로 고쳐부르려 하지 않았던 그의 고집.
1988년 흥부가로 무형문화재 5호를 지정 받을 만큼 전통 고수.
셋째, '목으로 우기는.. 도음'을 낸 타고난 성대, 동편제 소리.
목 쉰 소리이면서 고음인 송만갑과 김정문 목소리가 바로 철성.
그를 동편제 소리의 대가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게 한 원동력.
지금도 지리산 일대는 우조 가락의 웅장하고 힘찬 동편제의 고장.
'<판소리의 법통>을 잇는 송씨 가문.'
판소리는 운봉 중심으로 섬진강 동쪽 구례로 내려와 동편제.
섬진강 서쪽 장흥과 보성을 중심으로 서편제의 유파가 정립.
지리산 주변지역과 관련깊은 판소리 내력은 명창들의 계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판소리는 18세기 초기에 발생한 것으로 18세기 중엽에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19세기 전반기는 양반 대상 <전기 8 명창시대>
송흥록, 송광록 형제 등등을 명창으로 손꼽는다.
19 세기 후반은 <후기 8 명창시대>라 한다.
송우룡, 이들의 판소리 풍은 송만갑으로 전승.
조선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친 명창 송홍록
전북 운봉 출신으로 가왕의 칭호를 받는 소리꾼.
진양조 판소리를 개발, 귀곡성을 잘낸 것으로 유명
'후대를 잇지 못해 끊긴 것이 아쉬운 진양조.'
송광록은 처음엔 형인 홍록의 고수로 활동했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명창의 대열에 오른 소리꾼.
구례에 정착 그의 아들 송우룡은 고종때까지 명창.
송우룡의 아들 송만갑 역시 대를 이은 소리꾼이다.
송만갑은 부친 송우룡에게 판소리를 7살부터 배웠다.
판소리 2백년 역사에 가장 유명한 국창(國唱)은 송만갑
'오늘날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어 낸 송씨 가문.'
판소리는 명창들 출신지나 노래하는 방법에 따라
그 제자들이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어지고 있다.
목기.
남원 목기는 실상사 스님들로부터 유래되었다.
노각나무 목기제작 기술은 스님들이 전수한 것.
노각나무는 평안남도 양덕온천, 소백산 희방사,
지리산, 가야산, 가지산, 남해 일대 등이 자생지.
목기 제작으로 노각나무가 귀해져, 다른 목재를 사용.
그늘에서 5개월 이상 말리는 제조과정을 거치는 목기.
남원은 목기 제작에 적당한 위치와 여건을 갖춘 고장.
남원은 옛부터 불교 문화권의 중심이었던 고장이다.
남원 목기는 도자기, 유기가 대중화 되기 전 생필품
목기는 소리가 나지 않아 사찰, 제사 용품으로 각광.
찻잔, 식기, 교자상. 식탁, 혼수용품으로 인기.
이조 500년간 남원 목기는 생필품으로 사랑받았다.
남원목기는 신라 고찰 실상사 식기로부터 알려졌다.
실상사 일대의 지리산 목재는 남원목기 원료.
재질이 단단해 정교하고 섬세한 가공이 가능.
일본의 전통적 목기는 대부분 남원에서 유래.
오늘날, 남원목기는 중국 목기에 밀려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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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기는 언제 어디서 유래된걸까?
한국, 일본, 중국에도 있는 옻나무.
불교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되는 목기.
불교의 전파 경로를 알려주는듯한 목기.
허황후 일행에 의한 최초 남방불교 전래설.
한반도 목기 역사는 허황후 일행 항로와 일치.
인도 - 미얀마 - 베트남 - 대만 - 일본 -한반도.
하여, 목기에 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듯.
목기를 완성하려면 옻칠을 해야한다.
옻나무 원산지는 티벳 히말라야 일대.
옻나무는 수고 20m, 직경 90cm에 이른다.
중국에서 약 4000년 전부터 재배하여 왔고
우리나라에서는 약 2000년 전 고분에서 발굴.
낙랑고분, 광주 신창동 발굴지에서 나온 칠기.
'선사시대부터 옻칠한 목기사용.'
한국, 일본, 중국에서는 옻나무
베트남, 대만에서는 검양옻나무
미얀마 등지에서는 버마옻나무
漆液을 얻어 도료로 사용했다.
.....................베트남....................
서북쪽에서 동남쪽까지 최대길이는 약 1,650km
동서 최대넓이 북부 550km, 남부 340km 가량이다.
북쪽은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
남서쪽 타이 만, 남쪽과 동쪽은 남중국해와 통킨 만
BC 200년경 베트남어 민족이 세운 남월(南越)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의해 점령되었다.
1세기 인도문화 영향을 받은 푸난 왕국
메콩 강 삼각주를 차지후 6세기에 멸망.
939년 북부지역은 천년 중국의 지배에서 해방.
13세기 3차례 몽골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
1407년 중국에 정복되었지만 1428년 마침내 해방.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서방과 관계를 개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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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중화민국 또는 타이완 국민정부가 통치하고 있는데,
그들은 중국 본토 전체에 대한 관할권도 주장한다.
타이완 섬은 태평양 상의 북회귀선에 걸쳐 있다.
전체 지역의 약 2/3가 산지와 구릉지대.
여우 사슴 멧돼지 곰 원숭이 염소 서식
한족이 주민의 98%를 구성하는데
그중 14%가 본토에서 이주온 사람.
주요종교는 불교·도교·유교이며,
주민의 7.4%가 그리스도교도이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주민도 있다.
국민 1인당 수입은 1만 3,819달러.
복지사업은 기업체 기부금으로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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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연방(옛 버마).......................
동남아시아 벵골 만과 안다만 해의 동쪽 해안의 나라.
수도는 양곤, 말레이 반도따라 내려간 길이 640km 지협
남북길이는 약 2,050km, 폭이 넓은 곳 동서길이는 935km.
남동쪽 타이·라오스, 북동쪽 중국,
북서쪽 방글라데시 및 인도제국 경계
미얀마는 북부 산악지방, 서부 산악지방,
중부 저지대, 동부의 샨 고원 등 4개 지역
미얀마 최북단 중국과의 국경에 있는 카카보 산(5,881m)
그 남쪽으로 뻗어내린 쿠몬 산맥을 중심으로 한 미얀마.
히말라야 산맥 동에서 남으로 뻗으며 치솟은 구릉지대
중부 저지대는 아라칸 산맥과 샨 고원 사이
벵골 만을 향해 펼쳐진 아라칸 해안평야와
안다만 해에 접한 좁다란 테나세림 해안평야,
인구 밀집 지역은 이라와디 강과 시탕 강 삼각주 지대
열대성기후로 아시아 남부 계절풍에 큰 영향을 받는다.
미얀마는 산이 많아 경작지가 전체 국토면적의 1/6 정도
코끼리와 호랑이는 멸종 위기지만 여전히 중요한 동물.
미얀마는 사회주의 중앙 계획 경제체제의 개발 도상국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매우 낮은 국가들 가운데 하나.
쌀은 제 1 수출품 그밖에 옥수수·땅콩·콩류·목화 등
가축은 돼지 물소 염소 등, 쌀 다음 식량은 바다 수산물.
말라리아 콜레라 결핵 간염 페스트 뇌염 등 질병이 많다.
미얀마에 인류가 정착한 시기는 약 만 천년 전
9세기 중국 남조(南朝)의 지배를 받던 미얀마인들
티베트 미얀마 여러 민족들을 장악하고 도읍은 파간
1044년 파간에서 아나우라타가 최초로 미얀마를 통일
1287년 몽골족의 침략을 받아 무너졌다.
16세기 퉁구 왕조 치하에서 최초 재통일
1759년 알라웅파야 왕국은 국토 팽창정책
2번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1824∼26, 1852)
제3차 전쟁이 끝나며 1885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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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말.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목기.
결국 옻나무 자생지역이 옛 조상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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