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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찰 순례 및 문화유적 답사기(6)
글/정진옥
3대 헌장탑
제7일 ( 2016-09-05, 월요일 )
원산 ( 방조제, 등대섬, 마식령스키장 )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여관이 바로 바닷가라서 아침에 방호제(防潮堤)를 산책키로 몇 사람과 약속을 했었기에 평소보다 좀 일찍 일어난 것이다. 여관의 복도에 소나무와 학을 소재로 한 그림이 걸려있다. 분위기는 남한의 그림과 좀 다르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화재(畵材)인 노송(老松)과 학을 그렸다는 점에서 동양화임은 분명하겠다. 이질감이 있지만 그래도 동질감이 더 많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매우 반갑다. 아직은 해가 나오지 않은 여명의 방호제防潮堤에는 10여명의 강태공들이 여기 저기 자리를 잡고 있다. 시멘트로 축조한 방호제는 반듯한 직선으로 바다쪽에 있는 자그마한 등대섬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산시의 바닷가쪽에 있는 가까운 건물들을 비롯하여 다소 멀리로 고층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만경봉호’라고 들었던 하얀 배가 정박(碇泊)되어 있는 광경도 보인다. 꽤 큰 도시인 듯 하다.
등대섬까지 갔다가 여관으로 돌아온다. 어느 독립된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다. 우리 말고도 북쪽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식사를 하고 있는 깨끗한 식당이다. 아마도 ‘총석정’이 아닌가 짐작되는 그림이 벽에 걸려있는데 아주 대형이다. 길이가 10m쯤은 되지 않을까 싶은 대작이다. 다시 버스를 탄다. 이제 평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아침 9시20분경에 ‘마식령스키장’에 차가 멎는다. 화장실도 이용할겸 잠시 쉬었다 간다고 한다. 8~9층으로 보이는 본관건물에 들어간다. 호텔같이 설계된 현대식 새 건물이다. 맨 끝층에 커피샵이 있다고 하여 여럿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다. 실내장식이 아주 고급스럽다. 다들 커피를 주문한다.한 잔에 $7.00라니 좀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개념치 않고 커피맛이 어떤가에 우리 일행의 관심이 쏠린다. 아주 젊은 처녀가 서빙을 한다. 커피맛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북한의 마식령에서의 추억을 맛본다는 심정으로 커피를 대한다. 하긴 다른 분들도 다 같은 심정이시리라. 외국인들에게는 외국의 시세를 감안하여 별도로 가격을 책정하는 모양이다.
시즌이 아니라서인지 대체로 한산한 정경이다. 베란다에 나가서 스키장 전경全景을 바라본다. 본관건물과 직각을 이루고 가까이에 5층짜리 건물이 있고 그 밖에도 스키장 주변에 10여개의 부속건물들이 보인다. 모든 건물이 약간 붉은 색으로 통일되어 있어 스키장의 초록과 잘 대비된다. 산뜻하고 아름답다. 건물을 나와서 깔끔하게 만들어 놓은 스키장안내판을 살핀다. 정상이‘대화봉(1363m)’이고 그곳에서 방사상放射狀으로 10개의 활강코스가 갈라져 나간다. “부지면적 1,412헥타르(427만평), 총 슬로프 17,580m, 총 트레일 34,161m, 최대주로 5,091m, 개장시기 11~4월”이라 설명되어 있다. 10시쯤 스키장을 나온다.
평양 ( 옥류관, 역사박물관, 주체탑, 월향전시관, 개선문, 대동문, 련광정 )
평양에 다 와갈 무렵인 12시20분경에, 차가 길옆으로 조금 나간 곳에 있는 세차장에 들린다. 세차를 하기 위하여 차를 세운 곳은 바닥에 자갈이 깔려있어 배수가 용이토록 되어있다. 우리의 차 말고도 다른 차들이 세차를 하고 있는데, 우리 차례가 되니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다부진, 그러나 용모가 고운, 여성 세차원이 장화를 신고 고무호스를 들고 우리 차로 와서 물을 뿌리며 열심히 세차를 해 준다. 차의 외관만을 씻어내므로 우리들은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다. 우중雨中에 먼 길을 다녀온 우리 차가 그다지 깨끗하지 않아 보여서 그런가 보다. 10분이나 걸렸을까 다시 평양을 향하여 달린다.
12시 50분경에 대형 석조기념물이 마치 도로에 세운 육교와 같은 방식으로 길을 가로질러 세워져 있는 곳에서 차가 멎는다. 나중에 알고보니, 평양의 관문인 락랑구역 통일거리의 입구였고, 3대 헌장탑이란다. 3대 헌장이란 1972년에 남북공동성명으로 천명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과, 1980년에 북한 노동당대회에서 결의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1993년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발표한 “전민족대단결 10대원칙”을 지칭한다고 한다. 2001년에 준공된 이 탑은 한복차림의 남한과 북한의 여성이 한반도 모형을 함께 양쪽에서 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높이가 30m이며, 넓이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기념하여 61.5m로 했다는 초대형 기념탑이다. 거대하면서도 알기쉽고 예쁘게 형상화한 아주 아름다운 조형물이다. 다들 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아무쪼록 평화통일이여 반드시 이루어지이다. 경건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차에 오른다.
평양으로 들어온다. 점심식사를 옥류관에서 냉면으로 하겠단다. 냉면이란 메뉴는 그저 그렇지만 워낙 유명한 옥류관 냉면이니 이 기회에 먹어본다는 사실이 기쁘다. 냉면을 먹으러가는 일이 기대되고 설레어 지는 일은 내 평생 처음이다. 룸메이트인 류선생님은 몸이 불편하여 호텔에 그냥 머무시기로 한다. 안타깝다. 옥류관은 그 규모가 놀랍도록 크다. 총 수용인원이 10,000명에 달한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옥류관”이라는 한글 상호가 붙어있는 한옥양식인데 처마와 벽 전체를 동일한 밝은 회색으로 칠하여 매우 산뜻하다. 대동강변에 위치하고 있는데, 여러 채의 건물이 연이어 있다. 출입구에 여성봉사원이 있어 우리를 2층으로 안내한다. 나선형螺旋形 계단을 올라 어느 한 실내의 테이블에 앉는다. 오후 2시경이다.
대동강맥주가 반주로 나온다. 기다리던 냉면이 나온다. 신선로 같은 둥그런 유기柳器그릇에 담겨 나온다. 옆에서 보면 T자로 보이는, 넓지만 깊이는 낮은 그런 용기이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보던 모습의 냉면으로 보이는데, 국물이 약간 거무스름하다. 약간 매콤하여 내 입맛에 잘 맞았다. 기분이 그래서라기 보다는 실제로 내 생애 가장 맛있게 먹은 냉면이다. 추가로 더 시켜서 나누어 드시는 분도 있었는데, 난 더 먹고 싶을 정도는 냉면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2시 40분경에 식사를 마치고 나온다.
금강산도 식후경인가, 식당을 나오니 바로 길 건너로 있는 현대식 상가건물 뒤로 30층이 넘을 듯한 현대식 아파트 건물군이 비로소 안식眼識에 들어온다. 김일성광장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을 견학한다.. 많은 미술작품들이 잘 전시되고 간단히 설명되어 있는데, 전문해설강사가 안내와 설명을 맡아 수고해 준다. 역시 여성인데, 나이가 지긋하고 이 분야에 조예가 깊어 보인다. 대략 1시간에걸쳐 안내를 받는다.
다음은 차를 타고 대동강 건너편에 올연兀然하게 서있는 주체탑을 찾아간다. 한복을 단정하게입은 키가 크고 안경을 낀 중년의 미녀가 주체탑의 입구에서 우리를 맞는다. 탑의 기단부에 있는 광장이나 건물의 규모가 아주 크다. 모든 것이 다 화강암인데, 기단부의 1층 건물은 견고한 요새처럼 육중한 화강암이다. 출입문도 화강암이다. 입장료로 $8.00을 받는다.
안내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체탑의 횃불 밑이면서 옥상인 전망대에 오른다. 탑의 높이가 170m라 한다. 김일석주석의 70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25,550개의 화강암으로 건설했다고 한다. “70년X365일=25,550일”이라는 의미의 숫자이다. 전망대에서의 대동강과 평양의 모습은 대체로 아름답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니, 물품을 파는 방으로 안내한다.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뭔가를 사야 할 것 같아서, 옥으로 만든 작은 잔과 받침접시($45.00), 옥구슬을 엮은 팔찌($15.00), 작은 나무판자 위에 인두로 지진 보덕암 그림($5.00)을 고른다. 옥잔이 깨지면 안된다며 안내원이 정성스레 잘 싸준다. 안내원이 광장의 계단 아래까지 나와서 버스를 타는 우리들을 전송한다. 분단된 조국의 남쪽 동포에 대한 애틋함이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월향전시관’이라는 곳에 들른다. 옛 시절의 유명한 평양기생 계월향을 기리는 이름이다. 그림과 공예품 등을 판다. 난 수공예 지갑, DVD, 서적 등 약 $60.00의 기념품을 고른다.
다음은 대동강변에 있는 대동문을 구경한다. 대동강변에 있어서 대동문이겠다. ‘국보유적 제4호 대동문(大同門)’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한자가 병기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안내판도 있다. “6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내성의 동문으로 세운 것”이라는 설명이다. 1396년에 축조된 서울의 남대문과 비교하니, 세월의 깊이가 많이 다르다. 국토의 분단이 새삼 안타깝다. 가까이에 종각이 있고 종이 있다. ‘국보유적 제23호 평양종(平壤種)’이란 표지석이있다.
다시 조금 더 동쪽으로 걸으니, 련광정이라는 큰 정자가 있다. 조선의 선비였던 해사海史 송한주宋翰周(1798~1868)가 그의 저서 ‘지수렴필智水拈筆’에 “우리나라에서 산으로는 금강산이, 정자로는 련광정이 제일이다”라고 기록했다는 그 정자가 바로 이것이다. 역시 ‘국보유적 제16호 련광정(練光亭)’이라고 새긴 표지石이 있다. 그 옆의 안내판에는 “6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평양성 내성을 쌓을때 동쪽 장대將臺(군사지휘처)로 세운 누정樓亭”이라는 설명이 있다. 이 건물에는 또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는 현판과 ‘만화루萬和樓’라는 현판이 더 있다. 이 련광정 옆에는 청량음료라는 간판의 매점이 있는데, 열댓명의 교복차림의 여학생들이 모여있다. 아마 방과 후에 잠시 이곳에 들러 망중한을 즐기는 것이리라. 시각이 저녁 6시 40분이다.
호텔에 돌아와 호텔 옆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류선생님의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으신 것 같아 안됐다. 북한에서의 일곱번째의 날도 이렇게 마감되어진다.
제8일 ( 2016-09-06, 화요일 ) – 평양 순안공항, 함북 어랑공항, 칠보산( 내칠보, 개심사 )
오늘은 항공편으로 함경북도에 있다는 칠보산을 갈 일정이다. 원래의 공지된 탐방지는 백두산이었다. 그러나 북한에 들어온 다음에 칠보산이라는 전혀 생소한 산이 거론되면서, 백두산이냐 칠보산이냐는 양자택일의 선택권이 주어지게 된다. 북한의 5대 명산이라면 백두 금강 묘향 구월 칠보를 꼽는다 한다. 단원들 다수의 의향에 따라 택일키로 했는데, 결과는 6:3으로 칠보산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난 원래 이 북한방문을 결심하게 되는 배경에는 백두산을 갈 수 있다는 데 큰 무게를 두었었으니 만큼, 실망이 크다. 단원들이 칠보산을 압도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백두산은 중국을 통해서라도 갈 수 있지만, 칠보산만은 이 기회가 아니면 갈 기회가 거의 없겠다”는 관점이다. 나름대로 옳은 말인데 그래도 실망감이 크다. 또 백두산을 이미 다녀온 분들도 있다.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평양의 거리 여러 곳에서 수십명씩의 인원이 통일된 옷차림으로 도로변 건물의 앞 광장에서 정연하게 열을 지어 일사분란 붉은 깃발을 휘두르는 광경을 목격한다. 출근하는 시민들이 더욱 활력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임하라는 성원차원의 률동일 것으로 리해한다. 9시30분에 순안공항에 도착한다.
탑승을 기다리노라니 청사내부에 부착된 항공노선도가 눈에 띈다. 국내노선이 단순하다. 평양에서 다섯개의 로선이 뻗어 있다. 신의주 삼지연 어랑 함흥 원산인데, 우리는 나에게는 생소한 지명인‘어랑’노선을 탄다.‘어랑漁郞’이란 즉 어부漁夫라는 뜻일텐데, 특히 젊은 어부를 지칭하는 여인의 말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나중에 들으니 이곳은 옛날에는 아주 유명한 고기잡이 항구였다고 한다. 고려항공 비행기이다. 양쪽 날개에 프로펠러가 각 2개씩 붙어있다. 나의 옆 자리에 외국인 젊은이가 앉는다. Paraguay국적으로 대만에 유학중인 공학도 Pierre이다. 틈을 내서 여행길에 나섰단다. 북한의 주민으로 보이는 승객들도 있지만, 주로 서양인들이 많이 탄 것 같다.
어랑공항에서 단체사진
어랑공항에 내린다. 아무런 건물이 없는 활주로에 내리도록 안내된 승객들이 휑한 비행장에 모여 있다. 비행장 구내를 운행하는 버스가 온다. 버스로 자그마한 공항청사로 이동한다. ‘칠보산려행사’라는 표지의 깨끗한 중형버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칠보산의 관문인 박달령(760m)에 도착한다. 14시 23분이다. 중간에 칠보산의 안내 겸 해설을 해줄 분이 동승했었다. 1946년생인 김갑성이라는 분이다. 성실하고 선한 삶을 살아온 농부같은 순박한 얼굴을 지니셨다. 예전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곳을 찾았을 때도 안내를 담당했었단다. 당의 간부라는 다른 한 분도 동승한다. 우리들의 탐방에 현지사정을 잘 아는 분이 동행하여 다소라도 더 편의를 돌보아 주려는 배려일 것이다. 박달령에 건립되어있는 대형 “칠보산관광안내도” 앞에서 차를 내린다. 가로 20m, 세로 7m가 되게 세운 대형 안내도이다. 칠보산 전체의 정경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각 볼거리에 그 명칭을 표시했다. 그런데 안료를 사용하여 색을 낸게 아니고 색색의 자연 그대로의 천연 돌가루를 입힌 그림이란다. 세월이 흘러도 탈색이나 변색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데, 이를 일러‘보석화’라고 하는 것 같다. 안내도 옆으로는‘UNESCO’마크와 함께‘칠보산생물권보호구- 2014년’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칠보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김선생이 “금 은 진주 산호 마노 파리 거거”를 이른다는 답변이다. 불교와도 관련된 이름일 수 있겠으나, 아마도 칠보라는 말이 ‘칠보단장’이라는 말처럼 ‘온갖 진귀하고 다양한 아름다움’이란 의미로 쓰인게 아닌가 싶다. 이 산이 그만큼 귀하고 소중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칠보산을 일러‘함북金剛’이라 칭하는데, 금강산의 경우처럼 역시“내칠보 외칠보 해칠보”로 구분하고 있단다.
칠보산의 일부분을 조망할 수 있는 이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평양에서 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각자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십년전으로 돌아가 소풍을 나온 학생들이 된다. 바로 옆의 수풀에 빨갛게 익어가는 머루가 있어 몇 알을 따서 입에 넣어 맛을 본다. 동심의 맛이다. 가까운 전망대에 올라 김선생의 간략한 설명을 듣는다. 푸르른 녹음에 덮인 산줄기들에 언뜻 언뜻 드러나 있는 바위봉들의 형상이 자못 비범하고 신비롭다.
다른 名山에 비해 우리에게 덜 알려진 이 칠보산의 이해를 돕기위하여‘한국관광공사’에서 칠보산 을 소개하는 자료를 아래에 인용한다.
“함경북도 명천군의 보촌리, 산내동, 개심동, 학암동, 청계동 일원에 걸쳐 면적이 250㎢에 달하는 칠보산은 일찍이 관북팔경의 하나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명산이다.
‘칠보산(七寶山)’이라는 이름은‘땅에 솟아오른 아름다운 일곱 개의 봉우리’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는데, 여섯 개의 봉우리는 육지에 있고, 한 개의 봉우리가 바닷가에 있었다. 그러나 바닷가에 위치해 있던 한 개의 봉우리가 풍화, 침식되어 무너져 버렸다.
칠보산은 예부터 각 봉우리가 보석처럼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옛 사람들은 ‘千佛萬獅 峰及競秀 開心會像(천불만사 봉급경수 개심회상)’으로 표현해 왔다.
지질시대의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분출하여 생성된 칠보산은 기반암이 조면암, 유문암, 현무암, 화산재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단단하지 못한 암석들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천태만상의 기암이 만들어졌다. 북한의 명산 가운데 화산활동으로 솟아오른 산은 백두산과 그 주위 여러 산이 있지만, 칠보산만큼 독특한 산악풍경을 보여주는 곳은 없다.
또한, 칠보산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각종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칠보산을 북한명산 제15호로 지정하였고, 그 후 1976년에 인근 일대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각 구역마다 자연경승이 독특하게 펼쳐지고 있어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는 금강산에 비견할 수 있다.”
차를 타고 개심사‘開心寺’라는 절에 도착한다. 이 산의 유일한 사찰이다. 좀 특이하게도 ‘개심사’라는 현판과 ‘칠보山’이라는 현판을 자그맣게 따로 만들어서 입구쪽에서 첫번째 건물인 심검당의 처마와 기둥에 각기 가로와 세로로 붙여 놓았다. ‘칠보산’이라는 현판은 세로로 썼고 ‘개심사’리는 현판은 가로로 썼다. 낙관을 읽으니 “己巳 九月 明原 上古面 九歲兒 白竹 韓一範”이다. 상고면의 한일범이라는 9살 소년이 썼다는 뜻일테니, 대단한 기재라 하겠다. 글씨도 그렇지만 자그마한 현판의 그 소박함에서 친근감과 견실함이 읽힌다.
1948년 개심사 대웅전 용마루 보수시 발해 선왕 9년 병오 3월 15일, 서기 826년 창건되었다는 글자가 적혀 있는 종이가 있는 나무함이 발견되면서 함경북도 현존 사찰 중 최대의 사찰로 인정받았다. 함경북도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하던 남북국시대에 발해의 남경지역으로, 개심사는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사지, 그리고 청해토성 등과 함께 한반도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발해의 유적지라 한다.
50대 후반의 연세가 아닐까 싶은 주지스님께서 우리를 대웅전 앞에서 맞아 주신다. 매사가 깔끔하고 명쾌하실 듯한 분으로 보인다. 대웅전은 3X2간의 그리 큰 건물은 아니나 튼튼해 보이고 아름답다. 발해시기인 826년에 세운 절로, ‘국보유적 제120호’라는 표지석이 있다. 함경북도에서 제일 큰 절이라는데, 대웅전에 이어 萬歲樓 尋劍堂 凝香閣 觀音殿 山神閣이 있다. 만세루의 바닥 한쪽편에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종이 이동식 종걸이에 걸려있다. 마당의 한켠에 우물이 있고 두레박이 있어 정겹다.
불상에 대한 조예는 없으나 중앙에 모신 부처님이 두 손을 가슴앞에 모두어 합장하고 계신 모습이라 특이하게 여겨진다. 대웅전 천장장식이나 조각들이 많이 입체적이고 정교해 보이나, 세월의 경과에 따라 많이 퇴락해가는 모습이다. 스님의 주재하에 예불을 드린다.
대웅전 실내 한 켠에 쪼그리고 앉은 모양의 동물 목상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스님께 무엇인가를 물으니, 기자와 관련된 개심사 특유의 동물상이라고 하신다. 큰 나무도막을 호랑이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한 동물의 모양을 해학적으로 조각한 것인데, 스님이 언급한 기자를 염두에 두고 관찰을 하니, 무슨 용도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짐작이 맞는지 확인키 위해 실제로 그 목형의 궁둥이에 앉아본다.
안장을 얹을 수 있는 평평한 잔등에는 절구처럼 움푹 판 확이 있고 거기에 그리 높지 않은 절굿대가 꽂혀있다. 사람이 걸터 앉을 수 있는 곳은 엉덩이이다. 엉덩이에 앉아서 절굿대를 두 손으로 잡으면 몸이 뒤로 미끄러지지 않지만, 절구질을 하기 위해 절굿대를 들어 올리면 즉시 몸이 궁둥이 밑으로 미끄러진다. 그러므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앉으려면 즉시 다시 절굿대를 방아확에 꽂아야 하고, 절굿대를 두 손으로 움켜 잡고 그에 의지하여 밑으로 미끌어져 내린 몸을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데 이 동물의 꼬리부분에 남근男根처럼 생긴 돌출물이 있다. 결국 여성이라면 그 음부陰部가 자극되는 효과가 아주 강렬할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한 절구질을 계속하면 이는 유사 자위행위가 될 것이다. 이런 행위로 어떻게 잉태의 효능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논리적으로는 해답을 얻기가 불가하다. 다만 아들을 낳지 못하는 많은 여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필생의 고苦와 한恨을 풀어주려는 그 시대 나름대로의 지혜로운 자비의 손길을 보는 듯 하여 가슴이 뭉클하다.
반지르르 윤이 흐르는 이 꼬리에 서린, 또 훼손되어 뭉툭해진 이 목상木像의 코를 보면서,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여인들이 겪었을 숱한 애환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할머니요, 어머니에 다름아니거늘, 이렇듯 오늘날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다양한 기자祈子의 습속과 다 관련되어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이곳에 와 아들을 빌었던 모든 여인들이 白이면 白, 千이면 千, 모두 다 소원성취의 효험이 있었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동물상을 바라본다. 볼수록 참 잘 고안하고 제작한 ‘활인活人의 술術’이고 ‘제도濟度의 불佛’이라 여겨진다. 이 또한 개심사의 진정한 부처의 상이 아닐까 보냐.
산신각 옆에‘국가지정 천연기념물 322호 개심사 약밤나무’라는 표지석과 함께 200년이 넘었다는 굵은 밤나무가 있다. 푸르른 가지가 무성하게 늘어져 있어 아직 젊은 정기를 지니고 있다. 뒤쪽 뜰에 복숭아나무들이 있고 알이 작은 푸른 복숭아들이 다닥다닥 달려있다. 사람들이 천도복숭아라고 칭稱하는 듯 하다. “몇 개 따 먹어도 되느냐”는 물음에“원로遠路에 오신 동포분들인데 전부인들 대접치 못 하겠느냐”며 흔쾌히 손수‘천도天桃’를 따 주신다.
김단장이 부도탑을 보고 싶다고 위치를 묻는다. 스님께서 직접 안내하신다. ‘보존유적 제 1491호 개심사부도’라는 표지석 옆에 6기의 부도와 부도비가 있다. 어느 보살님의 비라고 하는 별도의 비석이 약간 훼손되어진 상태로 아래쪽 풀밭에 세워져 있다. 비에 새긴 글씨를 관찰하니, 아주 분명하진 않으나 ‘浩明普月堂 毘丘普月遺蹟’으로 읽어진다. 마지막에 ‘비碑’라는 한 글자가 땅속으로 더 있을 듯 하다. 살아 생전에 적덕積德을 많이 하시며 좋은 삶을 사셨던 분이었나 보다.
다시 절 안으로 돌아온다. 절 입구쪽에 일군一群의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있다. 30명 내외의 젊은 학생들로 보이는데, 여학생이 대부분이다. 아마 견학차 왔나보다. 선생님인 듯한 젊은 녀성이 뒤쪽에서 다가온다. 밀러보살님이 반가운 몸짓으로 그들에게 다가간다. 아마 사진이라도 같이 찍자고 제안하는 것 같다. 學生들이 모두 선생님을 바라본다. 처음엔 좀 당황해 하는 것 같았으나, 다들 천천히 경내로 들어와 만세루萬歲樓 주변에 모인다. 대략 절반쯤의 학생들이 우리와 사진을 같이 찍겠다고 앞으로 나온다. 나머지 학생들은 만세루 앞의 축대에 늘어앉아 우리를 바라본다.
개심사를 나와 승선대로 이동한다. 개심사를 나와 약 500m를 지나온 곳의 완만한 산정에 소나무가 늘어서있고, 4각형 시멘트 정자가 있다. 4개의 기둥으로 지붕을 받치는 구조인데, 그 중 기둥 하나는 자못 커다란 화강암 바위를 기둥삼아 받쳐놓고 그 바위면에 큰 글씨의 한글로 ‘승선대’라고 새겼다. 나름대로 운치를 살리기 위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칠보산의 바위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또 그럴듯한 것은 부부바위인 듯 하다. 좀 멀리있어 조그맣게 보이는데, 부부가 다정히 포옹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 왼쪽의 남편은 방금 전쟁터에서 귀향하는 길이라 갑옷을 입고 또 큼직한 투구를 쓰고있다. 아름다운 칠보 저고리와 긴 치마를 입은 날씬한 부인이 남편의 품에 안겨있는데, 부인의 왼손이 남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있는 모양새다. 이 칠보산을 일곱번이나 찾아왔었다는 김정일지도자가 ‘부인이 맨 먼저 남편의 그것이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는 정경’이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아주 그럴 듯 하다. 이 부부바위의 왼쪽 맨 뒤편으로는 ‘종각봉’이 있다. 위인이 찾아오면 이 바위가 鍾소리를 낸단다. 그 앞쪽으로는 수많은 부처들이 밀집되어 있는 형용이라 하여 ‘천불봉千佛峰’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있고, 다시 그 왼쪽으로는 일만개의 사찰이 모여있는 모습이라는 ‘만사봉萬寺峰’이 있다. 부부바위의 오른쪽으로는 영락없이 버섯의 모양인 ‘송이버섯바위’가 있고, 더 오른쪽으로는 큰 봉우리 전체의 모습이 원숭이가 앉아있는 모양으로 보이는 ‘원숭이바위’가 있다. 또 산정에 긴 배와 같은 모습을 한 선암이 있고, 그 옆에 노를 젓는 모습의 선두암船頭岩이 있어 마치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큰 배가 연상되어진다. 그 선암의 북쪽에는 절의 건물처럼 보이는 것은 사암寺岩이다. 이 사암과 이어진 호리호리한 암이, 칠보산이 너무나도 멋지므로 선녀들이 내려와서 노래와 춤을 즐겼다고 하는 무희대舞姬臺이다.
피아노바위도 있다. 두 개의 바위가 서로 가까이 있는데, 하나는 피아노를 닮았고 또 하나는 의자에 앉은 피아니스트를 떠 올릴 수 있어 부르는 이름이다. 그 밖에 크고 작은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암봉岩峰과 바위들이 푸르게 우거진 숲 사이로 우뚝 우뚝 고개를 쳐 들고있다. 김선생께서 저것은 무슨 바위, 또 저쪽은 무슨 바위라고 일일히 성의있게 설명을 해 주시지만 내 머리로는 일일히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저 멀리 뒤로는 높은 산줄기들이 병풍처럼 둘러있는데 삐쭉삐쭉한 암봉들에 뿌리를 내린 푸른 초목들이 마치 큰 바위에 낀 이끼같은 형용이다.
거목巨木의 밑둥을 2m가 넘는 크기로 잘라내어 ‘탄금대’라는 글씨를 세로로 멋있게 새겨 놓은 곳으로 이동한다. 嵐氣(남기)에 싸인 첩첩기봉疊疊奇峯들이 더욱 기묘하고 유현하다. 아찔한 기분을 느낄만한 바위끝 전망점까지 안전을 위한 란간이 설치되어 있다. 피아노 바위가 아까보다 훨씬 가깝다. 탄금대란 아마도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풍류를 아시는 어느 신선이 이 칠보산의 천하절경에 심취하신 나머지 이곳에 앉아 그 넘치는 환회를 가야금에 실어 천상의 곡을 연주했었다는 전설이 어렸을 법한 이름이겠다. 그 때 저 쪽의 저 피아노바위에는 아마도 그리스의 아홉 뮤즈(Muse)들이 절세 미남인 이 조선 신선의 탄금곡에 맞추어 각자의 재능으로 합주를 하며 천상의 화음을 울렸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모두 다 차에 오른다. 또 다른 명소를 향하여 이동하는 것이다. 차가 출발하기 전에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남자가 무엇인가를 담은 비닐봉지를 우리와 동행하는 북측 인사에게 건넨다. 방금 채취한 것으로 보이는 신선한 버섯이다. 송이버섯이라고 한다. 냄새도 맡아본다. 상큼하고 잘 생겼다. 예전에 北韓의 김정일지도자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南韓의 김대중대통령과 언론사 사장들에게 추석선물로 보냈던 송이버섯이 바로 이곳에서 채취한 것이었다고 한다. 송이의 대표적인 유명산지란다.
차를 내린 곳에 2개의 큰 바위가 있다. 그 중 높이가 10m는 될 큰바위에 ‘례문암’이라는 표지石이 있다. 중앙에는 큰 틈새가 있는데, 부부가 서로 꼭 껴안은 채 이 틈새를 바위에 닿지않고 통과하면 백년해로를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모두들 배우자가 이곳에 없으니 그림의 떡이 바로 이것이다. 언젠가 배우자를 동반하여 다시 이곳을 찾아와야 할 사유가 생겼다.
그 옆으로 있는 바위에는 ‘가마바위’라는 표지石이 있다. 새색시가 예문암禮門岩에서 혼례를 올리기 위해 타고온 가마란다. 바위나 지형지물의 모습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신화나 민담을 만들어내는 우리 민중의 소박한 상상이 따사롭고 정겹다.
다시 걸음을 옮겨 ‘금강대’라는 표지가 바위에 새겨진 곳에 이른다. 가까이 다가가니 표지석과 안내판이 있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315호 금강봉과 금강굴’이라는 표지가 있다. “금강봉은 신생대 3기말에 화산분출로 생겨났다. 금강봉의 해발높이는 703m이며 동쪽 기슭에는 깊이 9m, 너비 12m, 높이 2.5m의 금강굴이 있다. 금강봉과 금강굴은 분출암噴出巖의 형성과 풍화과정의 연구에 가치가 있고 풍치상 의의도 있다. 그러므로 원상대로 잘 보전하여야 한다.” 안내판의 설명이다.
넓고 깨끗하게 잘 조성된 탐방로를 따라 1시간 가까이 내칠보의 승경을 탐방하고 차로 돌아온다. 저녁 6시 30분이다. 주변 경관이 대단히 아름다운 외칠보여관에 여장을 풀고 일행 모두가 식탁에 둘러 앉는다. 저녁 7시 20분이다. 식탁이 푸짐하다. 밥과 미역국, 쇠고기조림, 생선튀김, 생선조림, 산나물, 풋고추와 된장 등이 차려져 있는데, 거기에다 따뜻하고 뽀송뽀송한 송이구이가 더 해진다. 물론 반주로 대동강맥주도 제공된다. 다들 천천히 북녁조국 칠보山 지기地氣의 결정結晶을 음미吟味한다. 추억으로 오래 간직될 별식別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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