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곤 교수의 술 이야기
중국 4대 기서의 하나로 손꼽히는 수호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원래 이름은 수호전(水滸傳)인 이 소설은 글자 그대로 ‘물가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는 뜻으로 양산박이라는 수상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108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시대 배경은 북송(960-1127)의 제 8대 황제 휘종의 치세기(1101-1125)입니다. 이른바 호걸들의 세계를 다룬 이야기이니만큼 소설 전편에 걸쳐 술에 관련된 호쾌한 장면들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그 중 소설의 22회분에서는 108 호걸 중 대표적 인물의 하나인 무송이 고향의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경양강(景陽崗)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침 고개 아래에는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주막에는 ‘삼완불과강(三碗不過崗)’이라는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 주막의 “술 세 사발을 마시면 고개를 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무송은 석 잔을 마신 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을 더 요구합니다.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열여덟 사발까지 술을 마신 무송은 호기롭게 주막을 나섭니다. 그리고는 만취 상태에서 고개 길을 건너던 중 때마침 나타난 큰 호랑이를 맨 손으로 때려잡습니다. 이 일은 무송타호(武松打虎)라는 고사로 오늘날 까지 전해 오는 유명한 일화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무송이 주막에서 마신 술은 과연 어떤 종류의 술이었을까요?
오늘날 중국술이라고 하면 금방 떠올려지는 독한 고량주 즉 빠이지우(白酒)였을까요?
사실 독특한 향과 함께 기름진 중국요리에 곁들여 작은 잔으로 마시는 강한 백주는 누구도 부인할 수없는 중국술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유구한 중국역사를 통하여 백주와 같은 높은 도수의 술이 중국사회에 소개된 것은 뜻밖에 그렇게 오래 전의 일은 아닙니다.
술 자체의 기원은 인류 역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포도와 같이 당분을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과일이 으깨진 상태에서 자연 효모와 작용하면 저절로 술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드카나 위스키 같은 높은 도수의 증류주를 만들려면 과학적인 증류 기술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술을 본격적으로 증류하는 기술은 역사상 동서양을 아울러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몽골의 전성기 때 페르시아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따라서 몽골제국(1206-1368)이전의 중국에서는 증류주인 백주를 마셨던 것이 아니라 도수가 그리 세지 않은 발효주 계통의 술을 마셨던 것입니다. 수호지의 무송이 마셨던 술도 그런 술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아무리 무송이라 한들 오늘날의 고량주와 같은 술을 사발로 열여덟 잔을 마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중국에서의 발효주 전통을 엿볼 수 있는 곳은 바로 황주라고 불리는 술에서입니다. 황주는 찹쌀 또는 차조를 주원료로 만든 발효주로서 발효에 보리누룩을 사용하여 짙은 황색을 띠어 황주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알코올 도수는 같은 발효주인 와인이나 일본 청주와 비슷한 14~18% 정도이고 맛이 진하면서도 부드러워 각종 요리의 맛을 내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황주는 그 오랜 역사와 함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지만 백주가 발달하면서 상대적으로 생산지가 축소되면서 생산량도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중국 절강성내에 있는 작은 도시인 소흥현(소흥縣)에서 생산되는 소흥주(紹興酒; 사오싱지우)는 중국 발효주의 대표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득 또 다른 중국 사대기서의 하나인 삼국지연의에서의 유명한 장면 하나가 생각납니다. 책의 초반에 당시 한 왕실을 유린하고 있던 동탁에 맞서 원소를 맹주를 한 중국 천하의 제후 연합군이 대결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연합군은 사수관에 이르러 동탁군의 맹장 화웅에 의해 가로 막히고 맙니다. 사나운 화웅은 연합군의 장수들을 추풍낙엽처럼 처치하며 연합군을 꼼짝도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자 당시 마궁수라는 낮은 직책에 있던 무명의 관우가 맞상대를 자처하고 나섭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데운 술이 식기도 전에>라는 일화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출전하는 관우에게 조조가 데운 술을 권하며 “이 술 한 잔을 들고 가시오.”라고 하자 관우는 “술은 그냥 두십시오. 갔다 와서 마시겠습니다.” 라며 사양합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화웅의 목을 베고 온 후 그 술을 마시니 술은 식지 않고 여전히 따뜻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관우가 마신 술도 삼국지(189-280)의 시대 배경을 감안할 때 당연히 발효주였을 것입니다. 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고량주를 데워 마신다는 개념 자체가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천하의 이태백(701-762)인들 그의 유명한 시 월하독작에서 <꽃발 가운데 술 한 항아리花間一壺酒 / 함께 한 이 없이 홀로 마신다獨酌無相親>를 읊으면서 그 독한 고량주를 혼자서 한 항아리나 마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