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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원 시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 시해설]
미의식의 지평을 여는 언어 아티스트
(심은섭 | 시인·문학평론가·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암호 해독 시간
누군가 시 쓰기의 목적이 무엇이냐의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의 견해가 있겠으나 원론적인 대답은 시를 읽는 사람들의 슬픈 감정을 정화(淨化, catharsis)하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 시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시를 읽고 독자의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 쓰기의 작업을 재고해야할 일이다. 그러므로 시는 어느 누구든 목적 없이 써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문단은 시인 등단제도라는 통관의례를 두고 있다. 등단제도 요건에 부합된다고 판단될 때 시인 등단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문단에서 요구하는 등단제도의 취지에 어긋난 시를 쓰는 시인들을 주변에서 더러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시를 잘 쓰지 못한다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지적이다. 시를 잘 쓰지 못하여 일어난 문제가 아니라 시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의식’에서 오는 문제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서 『반회의파(反懷疑派)』에서 “시는 악마의 술이다”라고 지나치게 회의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그 반면에 I.S.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는 그의 소설 『루딘』에서 “시는 신의 말이다”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했던 시의 개념보다 투르게네프의 정의가 훨씬 긍정적이다. 한 편의 “시는 신의 말이다”라고 할 때 그 만큼 한 줄의 시는 메시아의 복음과 같은 것이다. 그 까닭에 시의 정의를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는 책임감마저 들게 한다. 따라서 어떤 시인이든 자기 편안한 대로 시를 써서는 안 된다고 호라티우스가 자신의 저서 『시론(詩論)』에서 밝힌 시의 정의를 우리들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의 책무를 일러준 말이다.
이런 명제를 앞세워 2007년에 시인으로 등단한 이래 꾸준히 창작활동을 펼쳐온 정계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정계원 시인이 한국문단에 첫발을 내딛은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하는 일은 매우 고무적이며, 시간의 간격 또한 가장 표준적인 시집 출판이다. 그것은 시인이 5년마다 한 권의 시집을 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시를 써놓은 지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시집을 내게 되면 한 권의 시집 속에 담겨 있는 시들이 늙어 보인다. 또 시인의 의식의 깊이, 사유의 미적 감각, 표현의 순발력 같은 일련의 일들이 작품마다 층이 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데 정계원 시인은 시집 출판의 시간적 간격을 잘 유지하며, 세 권의 시집을 발간하였다. 공식적으로 이 세상에 180여 편 이상의 작품을 내놓은 셈이다.
한 시인이 첫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그 시인의 ‘정체성’에 의미를 두며, 두 번째 시집 출판은 그 시인의 ‘성장성’을 의미하며, 세 번째 시집을 출판한다는 것은 그 시인의 ‘성숙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의 첫 시집 『접시 위의 여자』는 시인의 ‘정체성’을 나타낸 시집이며, 두 번째 시집 『밀랍물고기』는 정계원 시인의 ‘성장성’을 말해주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출판하는 세 번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는 정계원 시인의 ‘성숙성’을 가늠할 수 있는 시집이다. 요약하면 세 번째 시집으로 시인의 자기 완성내지 개성적인 시세계를 드러낸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 ‘성숙성’을 드러내는 일이라면 정계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를 통해 그의 내면세계, 혹은 시의식의 성숙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정계원 시인의 시집 『내 메일에 너를 저장해』는 전체 60편의 시가 실렸으며, 이 60편을 4부로 나누었다. 제1부는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제2부는 꽃과 관련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 제3부는 비가(悲歌)의 시가 주로 실렸고, 제4부는 일상생활에서 얻은 체험을 시로 재연하거나 승화시킨 것으로 묶어 놓았다. 따라서 4부로 나누어진 시작품을 토대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균등의 신앙
제1부에 수록된 시편들은 대체적으로 종교와 관련된 작품으로 ‘불영사’, ‘붓다’, ‘야단법석’, ‘기도’, ‘당간지주’, ‘불상’ 등의 소재들이 대거 사용되었다. 특히 기독교적인 내용들도 어느 정도 다루어졌지만 불교와 관련된 내용들이 대다수를 이룬다.
공터에서 공회전을 하는 나비의 궁핍을 위해
떨어진다
실어증에 시달리다가
길을 잃은 강물의 이정표가 되려고
생의 8부 능선을 오르다 지친 사형수를 위해
풍문에 흔들리는 부표를 위해
명퇴신청서에 지문을 날인하고 돌아오는
불혹의 패딩잠바를 위해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늙은 새를 위해
된서리에 혼절한 들국화를 위해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리는 인력꾼을 위해
허기의 원을 헛도는 독수리를 위해,
-「붓다의 발자국」 일부
이 「붓다의 발자국」은 가을날에 지상으로 떨어지는 도토리를 붓다의 자비로 승화시킨 시이다. 도토리는 붓다의 발자국으로 궁핍한 나비, 삶에 지친 사형수, 현대의 근로자, 늙은 새들, 들국화, 인력꾼, 허기진 독수리 등으로 모두 힘이 없는 나약한 대상을 위해 한 알의 도토리는 가을날에 보시(布施)하는 일이고, 이 도토리는 열매가 아니라 구원의 역할을 하는 붓다의 발소리로 시상을 확장하여 베풂의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결국 한 알의 도토리가 ‘붓다의 발자국’으로 그 의미가 치환된 것이다. 원관념의 ‘도토리’를 보조관념의 ‘붓다의 발소리’로 비유되었고, 이것은 다시 한낱 자연물 도토리에서 완성된 붓다로 진전되는 사유는 오래 습작의 경험과 시적 사유의 유연성에서 비롯된다. 정계원 시인은 「붓다의 발자국」의 시를 통해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은 연약한 ‘나비’에서 폭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독수리’까지 평등하게 혜택을 준다는 것으로, 자연은 붓다의 자비와 같은 가치를 우리들에게 알려준다는 것과 더 나아가 ‘균등’한 신앙의 본질을 설파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의 시적 사유가 깊을수록 시가 지니고 있는 내용의 깊이와 정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붓다의 발자국」의 시작품 결론 부분에서 ‘썩어간다/모든 것이 다 비워진 들판을 걷는 그는 붓다’로 규정하며, 도토리 한 알을 한낱 나무열매가 아닌 생존의 가장 필수적인 요소로 승화하는 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표현은 시인의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다음의 작품에서도 같은 맥락의 시의식이 발견된다.
노점에서 찬밥덩어리를 먹는 노점상 노모를 위해, 가느다란 장딴지를 드러내며 기어가는 강물을 위해, 늪에 앉아 수행하는 흰 수련을 위해, 눈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인동초를 위해, 질긴 허기를 꺾으려는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외벽에 매달린 채 떠는 입간판을 위해, 연극이 끝난 후 어둠 속으로 묻히는 백열등을 위해
-「1,000℃의 기도」 중반부
위의 「1,000℃의 기도」에서도 「붓다의 발자국」과 같은 동일한 시의식이 발견된다. 「1,000℃의 기도」 1연을 살펴보면 어떤 ‘진열대에 수석 하나 놓여 있다/그 속에서 동정녀 마리아가 기도하고 있다’는 시적표현으로 독자들의 궁금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면서 작품 속으로 유인하고 있다. 1연을 읽은 독자들에게 그 궁금증을 2연에서 하나하나 풀어가는 형식을 취한다. 진열대에 놓인 수석 속의 동정녀마리아는 노점상에서 찬밥 덩어리를 먹으며 행상하는 노모를 위해 기도하고, 장딴지가 가느다란 강물, 늪에서 수행하는 연꽃, 그리고 어둠 속으로 묻히는 백열등을 위해 기도한다고 시인은 진술한다. 시인이 아니면 그런 미지의 세계를 발견할 수가 없다. 또 시인이라고 해서 모든 시인이 다 발견하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달라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대상을 바라볼 때 타자의 입장되어 봐야 한다. 타자의 입장에서 그 대상을 바라볼 때 남다른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발견은 낯선 의미와 낯선 표현의 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수행하는 정계원 시인을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이유다.
붓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산비둘기의 사투리도 사라지고, 승무를 추던 편서풍도 사라지고, 군선강을 깨우던 목탁소리도 사라지고, 초서체로 흔들리던 수양버드나무도 사라지고, 고승의 헛기침도 사라지고, 정중하게 저녁을 맞이하던 범종도 사라지고, 연꽃이 발목을 적시던 연못도 사라지고,
-「당간지주의 오후」 2연 일부
우주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정계원 시인의 자세가 겸허하다는 것을 「당간지주의 오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결코 누구나 때가 되면 떠나가야 하고, 이별을 해야 하는 자연의 섭리를 시인은 결코 독자들이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느낄 수 있도록 주문한다.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회의적인 입장에서 만남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것은 곧 이별의 슬픔이다. 정계원 시인은 만남이 이별이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당간지주의 오후」를 읽어 본 독자들이 스스로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유인할 뿐이다. 그러므로 정계원 시인은 은유와 상징으로 시적 대상을 노래하여, 그 시 속에 육화된 주제를 독자 스스로 찾아내어 향유하도록 유도하는 데에 주력한다. 결코 녹록치 않은 창작기법이다. 이런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오랜 경험과 숙련된 자기만의 창작의식과 독특한 개성적인 방법이 터득된 시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지상에서 사라진다. 정계원 시인은 먼저 이 지상에서 생존하던 것들이 다시 흙으로 회귀할 때, 또 다른 새로운 존재들로 이 지상은 채워질 수 있다는 순환적 자연섭리를 따르는 의식의 뿌리를 지니고 있다. 즉 윤회사상의 시세계를 추구한다는 것과 같은 차원의 맥락이다. 따라서 이 지상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머물렀다가 떠나가는 공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간지주의 오후」에서 소멸의 의미를 가진 ‘사라지고’가 반복된다는 것은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은 영원성의 부재라는 것이며, 잠시 사용하다가 돌려주는 계약기간이 명시된 임차의 뜻을 지닌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두 번째 시집 『밀랍물고기』보다 한층 농익은 사유이며, 지극히 시인으로서 갖추어야할 필요조건이다. 이런 필요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숙성된 시가 나올 수밖에 없다. 정계원 시인도 문단활동 경력이 15년 이상 되었으므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는 또 제1부의 마지막 작품인 「바위 속으로 들어가 보다」에서 철저한 자기 성찰에 천착하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은 도(道)에 이르는 일이다. 도에 이른다는 것은 이치를 깨닫는 일이다. 그러므로 ‘힘없이 대웅전으로 기어가는 지렁이에게 난,/그늘 한 조각 내주지 못했다’는 표현처럼 정계원 시인은 한 편의 시를 통해 도(道)에 이르고자 ‘기도’, ‘사라지다’, ‘자비’와 같은 종교적 시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디아스포라의 고통
특정한 시적대상을 집단화하여 소주제별로 묶은 것이 정계원 시인의 시집 『내 메일에 너를 저장해』의 특징이다. 제2부에 실린 15편은 대부분 꽃과 관련된 시작품이다. 정계원 시인은 꽃을 대상으로 삼아 다양한 층위의 지평을 열어간다. 꽃마다 가지고 있는 특별한 사연을 삶과 연결하여 진리를 일러준다. 일반 보편적 진리인 것 같으면서도 바쁜 일상에서 가벼이 여기던 진리를 우리들이 다시 상기하도록 관여하고, 정신의 건전성을 갖도록 매개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점이 정계원 시인이 주목받는 부분이다.
누구는 재벌가의 딸로 입양 간다는 유혹으로 끌려왔다 짙은 어둠이 유괴한 어린소녀는 먼 길을 호송되어 왔다 울음을 말려야 꽃으로 완성된다는 이유로 매장은 한 모금의 물도 주지 않았다 정신분열증으로 시달리는 오후, 먼 곳에서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려온다 유통센터로 이동한다
-「드라이플라워」 2연 일부
자본 축적의 명분아래에 희생된 드라이플라워의 운명을 노래한 시가 「드라이플라워」이다. ‘울음을 말려야 꽃으로 완성된다는 이유로 매장은 한 모금의 물도 주지 않았다’는 구절에서 이성을 잃은 인간의 본능을 눈치 챌 수 있다. 「드라이플라워」는 배금주의가 만연한 현대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흙 속에 발을 묻고 살아야할 꽃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른 꽃으로 상품화되고, 매장 입구 자판기 속에 갇혀 있는 마른 꽃들은 꽃의 의미를 상실한 채 살아간다. 이 「드라이플라워」의 꽃은 고통 받는 모든 대상의 상징이다. 엔진소리를 요란하게 내는 작은 트럭에 실려 유통센터로 팔려가는 낮은 자들의 고통을 내세워 끝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생태시다. 이 시에서 정계원 시인은 비판의식을 직조하는 과정을 드러내는 시적태도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의 생명은 높고 낮음과 귀천을 떠나 동일하게 존엄하다. 그러나 나무가 인간을 괴롭힌 바가 없으며, 꽃이 인간을 인간답지 않게 살도록 강요한 적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무며, 꽃이며, 짐승이며, 심지어는 지하에서 몸을 숨기고 사는 광물까지 캐내어 욕망을 채우고 있다. 시적화자는 「드라이플라워」를 통해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작폐를 일삼는 인간을 완곡하게 비판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만물들을 인간의 무릎 아래에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늘 유아독존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도록 계도하는 시가 「드라이플라워」이다. 또한 자연을 인간 밑에 두려는 발상은 가장 미개한 문명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언제쯤 찾아왔는지 알 수 없는 아프리카의 여인이 베란다에 산다 이곳으로 올 무렵 그의 몸집은 한 장의 가난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그날부터 환청으로 들리는 검은 대륙의 치마폭 끌리는 소리, 그러나 나뭇가지에 초록눈물을 달기 시작했다 혹한의 겨울날, 붉은 흉터로 물을 끌어 올리며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를 보았다 그도 어금니를 깨물며 한 됫박 붉은 피를 빨아올리기 시작했다
-「아라비카커피나무」 일부
이 시는 ‘아라비카커피나무’의 안타까운 운명을 빌어주는 제의적 성격을 지닌다. 아라비카커피나무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한반도로 이동되어 정착하고 산다. 타인의 폭력에 의해 국적을 잃어버리고 먼 이국땅에 살고 있는 이 나무를 비관에서 비관으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어금니를 깨물며 한 됫박 붉은 피를 빨아올리기 시작했다’는 표현으로 시적화자는 아라비카커피나무의 강한 생존 의지를 독자들에게 일깨워준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화자(persona)는 그 나무가 이곳 한국에서 새롭게 정착하기를 기원하는 제의적 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시인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남달라야 하고, 이에 정계원 시인은 시인으로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른 것은 분명하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나무 한 그루를 나무로 보지 않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가난한 민족의 몸부림을 형상화하는 차이가 있다.
아라비카커피나무가 윤택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이국땅에서 정착하려는 것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아픔이다. 이산(離散)의 나무로 조국뿐만 아니라 정든 가족과 이별을 감수해야 하는 이주의 아픔을 정계원 시인이 대변하고 있다. 즉 「아라비카커피나무」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그날부터 환청으로 들리는 검은 대륙의 치마폭 끌리는 소리로 인해 나뭇가지에 초록눈물을 달기 시작했다’고 아라비카커피나무의 슬픈 정서를 들려준다. 요컨대 이주의 가슴 아픈 실상의 진술이다. 시적 대상인 ‘아라비카커피나무’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다.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픈 역사를 가진 모든 것을 상징하는 총칭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식민주의로 인한 강제 이주뿐만 아니라 글로벌경제와 전지구화 및 세계화는 자본과 노동의 이동과 유연화를 가져왔고, 결혼 및 노동, 생계, 망명을 위해 국경을 넘는 이주자들이 출현하면서 이산의 아픔은 사회적으로 이슈화(issueization)되었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디아스포라의 사회적인 문제를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아라비카커피나무’를 통해 독자들과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 「아라비카커피나무」에서 시적화자는 디아스포라의 아픈 정서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혹한의 겨울날, 붉은 흉터로 물을 끌어 올리며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를 보았다 그도 어금니를 깨물며 한 됫박 붉은 피를 빨아올리기 시작했다’고, 이산(離散)의 아픔을 딛고 삶의 활력소를 찾는 이주민들의 강한 생활력을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 정계원 시인의 시적 사유가 매우 긍정적이며 의지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탈북한지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도시에서
라일락꽃으로 산다
·…… 〈중략〉 ……
목이 찢어지도록 어둠속에 고독을 묻거나
식당주방에서 낮달과 함께 저녁을 닦았다
그녀는 세상을 일직선으로 걸었다
가난이 무릎위에 서성이면
무대에 올라 목놓아 어둠을 물리치기도 한다
도시의 달이 몇 번 기울고
궁핍으로 흔들리던 시간도 오래되었다
이젠
오선지 위로 푸른 지폐들이 몰려오고
-「도시의 라일락꽃」 일부
정계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에 수록된 60편중에 여러 편이 시적화자(persona)가 세계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도시의 라일락꽃」도 이산(離散)의 아픔을 그려낸 시다. 그러므로 「도시의 라일락꽃」의 시적화자(話者)가 독자들에게도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제언(suggest)의 시이다.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것은 불안한 현대인들에게 혜안을 제시하는 시인으로서 당연한 처사이다. 그 까닭은 시는 문학의 한 부분이고, 문학은 인문학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지라도 주관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보편적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시인의 자기 경험은 시작(詩作)에 필요한 수단 불과할 뿐이며,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감정을 적절하게 조절하며, 시인의 자기감정을 객관적으로 보편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동시에 정계원 시인은 결론 부분을 대부분 해피엔딩(happy ending)으로 종결짓는다. ‘도시의 달이 몇 번 기울고/궁핍으로 흔들리던 시간도 오래되었다/이젠/오선지 위로 푸른 지폐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표현 등에서 해피엔딩의 사유를 확인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아라비카커피나무」에서도 결말을 긍정적으로 처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시인의 내면세계가 긍정적일 때만이 기능하다. 그러므로 정계원 시인이 평소에 보여 오던 삶의 양식과 시세계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작품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너’와 ‘나’의 동일성
정계원 시인은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의 시집 제목처럼 ‘자아’와 ‘세계’를 하나의 공간 속에 담으려고 한다. 동일한 공간에 담으려고 한다는 것은 자아와 대상을 일원화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와 ‘세계’가 대립하는 시세계가 아니라 화해의 관계로 귀결시킨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아’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화해의 시세계를 조성하는 데에 있어서 ‘투사’나 ‘동화’ 중에서 어떤 방법이 사용되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화해의 무드를 조성하는 시인의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녀는 눈비를 맞으며 빈 들판으로 서 있는
나에게 마테복음을 충전해 주었다
내 어깨 위에 우울한 초승달이 떠 있을 때
등뼈가 굵은 새벽을 보내왔다
천둥소리에 나의 영혼이 실종되었을 때
바흐의 교향곡을 들려주었다
…… 〈중략〉……
그녀가 이젠, 마른 은행잎으로 산다
잎맥이 시들은 은행잎 곁에 내가 누웠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따스한 피로
가뭄의 빈혈에 시달리던 나에게 수혈해 주었다
그래서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하려고 해
-「배터리 충전기」 일부
예문의 「배터리 충전기」는 정계원 시인이 ‘자아’와 ‘그녀’라는 세계를 화해의 무드로 조성하려고 노력하는 대표적인 시이다. ‘그녀’는 ‘나’에게 마태복음을 충전해 주었고, 우울한 초승달이 떠 있는 ‘나’에게 새벽을 보내왔으며, 삶에 지쳐 영혼이 실종되었을 때 바흐의 교향곡을 들려주기도 했다. 이것은 ‘자아’가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고, ‘세계’ 역시 ‘자아’를 찾아가 하나가 되기를 소망하는 정계원 시인의 시세계다. 이것이 서정시의 장르적 특징 중에 하나로, 소위 현대시라고 칭하는 모더니즘 시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도 그 저변에는 서정의 요소가 밑바탕에 깔려 있게 마련이다.
제3부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가족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시로 분류하여 묶어놓았다. 시집 제목이 들어있는 시이기도 한 「배터리 충전기」는 그 줄거리가 가족사이다. ‘그녀가 이젠, 마른 은행잎으로 산다/잎맥이 시들은 은행잎 곁에 내가 누웠다/그녀는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따스한 피로/가뭄의 빈혈에 시달리던 나에게 수혈해 주었다/그래서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하려고’ 한다는 저장의 이유를 진술하고 있다. 이것 역시 ‘자아’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화해의 시도이다. ‘자아’와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동일한 집단으로서의 동일체 증명이다. ‘자아’와 ‘세계’가 동일한 집단으로 형성하려는 의지는 그 집단의 결속을 더욱 강화한다. 이런 시세계는 가족에서 사회집단으로 확산되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고양된 정신세계를 제공하고,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이바지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배터리 충전기」를 분석해 보면 비록 가족 이야기가 시의 소재로 활용되었지만 정계원 시인은 이것을 개인화하거나 주관적으로 시작(詩作) 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는 데 용이하며, 또 독자들에게 시를 향유하도록 유인하는 힘을 발휘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작품이 가지고 있는 여러 미학 중에서 개인의 경험을, 그 경험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시 쓰기를 해야 한다. 「배터리 충전기」는 정계원 시인이 체험했던 개인의 이야기를 주관성이 아닌 보편성으로 썼다는 점에서 그 시가 미적 면모를 획득했다고 보는 이유다.
들판을 달리며 젖을 물리던 팔순의 흰말 한 마리,
북천행 열차를 타고 떠나간다 그럴 때,
…… 〈중략〉 ……
새벽에 일터로 나갔던 푸른 바람들도 회색빛 표정으로 초상화 앞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축문을 읽는다 가냘픈 어깨를 들썩이며 흔들리는 촛불, 방명록엔 지상의 이름들이 쌓이고 말띠여자의 이름은 지상에서 지워지고 있다
-「백말띠의 여자」 일부
앞의 시 「백말띠의 여자」가 품고 있는 내용도 가족 이야기의 일종이다. 그러나 시적화자는 개인의 이야기로 주제를 몰고 가지 않는다. 개별적인 체험을 가장 보편적으로 객관화한다. 시가 일인칭 문학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작품 내용을 개별화하여 쓰지 말아야 한다. 모든 독자들이 시의 내용이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의 주제가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며, 또한 이해를 충족시켰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이 「백말띠의 여자」를 감상한 독자는 자신도 한 번쯤 경험한 사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것은 다시 공감으로 작용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시를 감상하도록 주선하는 매파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도록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정계원 시인은 이런 일들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찌 보면 오랜 습작 활동으로 몸에 밴 것 같기도 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귀한 것은 손쉽게 얻어지는 법이 없다.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정계원 시인은 등단 15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노하우(know-how)가 세 권의 시집을 출판하는 만든 원동력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처럼 꾸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영위해온 정계원 시인의 시는 시적 사유의 무게감부터 남다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체험이나 경험은 깊은 사유를 낳게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체험은 직접적인 체험도 중요하지만 독서나 음악 감상, 영화, 여행 등과 같은 간접적인 체험도 시 쓰기에 중요한 자산이 된다. 여러 시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시는 체험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이 체험을 있는 그대로 써서는 안 된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안들을 낯설게 표현할 때 문학작품으로써 가치를 가진다. 정계원 시인의 「배터리 충전기」, 「백말띠의 여자」 등은 시인의 체험이 시의 씨앗으로 성장한 것이며, 이것을 객관화하여 낯설게 한 결과이다. 체험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로 쓴 시작품 한 편을 예시로 삼아보면 다음과 같다.
경포습지에 나의 DNA를 닮은 말뚝 하나가 수척하게 박혀 있다
…… 〈중략〉 ……
앳된 단발머리 능금이 가출의 언덕에서 홀로 펄럭일 때, 칠순의 말뚝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성황당으로 달려가 빌며, 나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산을 넘어가던 칠순의 말뚝은 앳된 능금에게 새벽을 데려다 주었다 지금은 온몸이 젖은 채 습지에 오~오래도록 박혀 있다
-「젖은 말뚝」 일부
위의 작품 「젖은 말뚝」에 사용된 ‘말뚝’은 ‘나의 DNA를 닮은 말뚝’이라는 부분을 통해 시인의 가족 중에 한 사람과 관련된 시어(詩語)임을 알 수 있다. 「젖은 말뚝」의 ‘말뚝’은 2연에서 진학의 합격통지서보다 구로공단의 구직을 권유하던 ‘능금’의 아버지이다. 즉 시적화자의 조부이다. 능금은 6.25가 손목을 앗아간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참전용사다. 요약하면 ‘말뚝’과 ‘능금’은 부자지간이고 화자는 손녀이며 딸이다. 말뚝은 진학을 권하지만 능금은 구로공단에 취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진학을 권하던 조부께서 경포습지에 수척한 표정으로 박혀 있어, 시적화자는 지난날의 가족사를 반추하며 조부를 떠올린다.
오래 전에 ‘앳된 단발머리 능금이 가출의 언덕에서 홀로 펄럭일 때, 칠순의 말뚝(조부)은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성황당으로 달려가 빌며, 나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었다’고 화자(話者)는 아픈 가족사를 회고하고 있다. 그러한 ‘말뚝’은 가난의 역사 속에서도 연로한 나이를 뒤로 한 채 앳된 능금에게 새벽을 데려다 주었’고 ‘지금은 온몸이 젖은 채 습지에 오~오래도록 박혀 있다’고 화자는 진술한다. 매우 애절한 정서를 자아내는 시이다. 어느 가정이든 가슴을 저미는 사건 하나쯤을 모두 안고 산다. 그런 경험이나 체험을 낯설기를 통해 언어예술의 미학을 극점으로 끌어 올리는 일이 시인 본연의 자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계원 시인은 대체적으로 결론을 해피엔딩으로 끝내는 특징을 보여준다. 「젖은 말뚝」 역시 해피엔딩의 시다. 이렇게 정계원 시인이 결론 부분을 해피엔딩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긍정적으로 끝나는 사건을 다수 체험했다는 것과 시인의 사유가 매우 밝다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피엔딩은 ‘자아’와 ‘세계’의 화해라는 전제 조건을 필요로 한다. 해피엔딩의 결말은 화해의 사유가 우선 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계원 시인의 시의식은 늘 화해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원칙을 위반하지 않는 건전한 사유로 시를 쓰는 목적으로 삼는다.
지금까지 제3부에 실린 작품들을 분석하여 보았다. 가령 「고등어의 비가」, 「탈무드의 부록」, 「아프리카의 비가悲歌」와 같은 시편에서도 화자는 화해의 제스처(gesture)가 보이는 시세계를 드러낸다.
성찰의 자화상
다음은 정계원 시인의 시집 『내 메일에 너를 저장해』의 마지막 소제목인 제4부 ‘시간의 태엽을 풀며’를 살펴볼 요량이다. 이 4부에도 15편의 시가 실렸다. 전편(全篇)의 시 제목을 살펴보면 일상의 평범함을 벗어난 시어들이 눈에 띈다. 또한 시인의 일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시로 예상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시의 내용이 개별적 주관화의 사유가 적용되거나 신변잡기 형태의 내용들로 구성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50km 지점을 통과할 때
머리에 뿔 달린 몰래카메라가
너의 지문과 유년의 뒷모습을 찍었다
70km 지점에서, 너는
제비들이 떠나간 양철지붕 밑에서 산다
날마다 손목이 가늘어지는 빈 둥지,
‘너’가 ‘너’를 만날 무렵
흰그림자가 되어 서쪽요금소를 통과하는
너를 보았다
-「7번국도의 표정」 후반부
위의 「7번국도의 표정」에 나타난 ‘50km’와 ‘70km’는 시간의 개념으로, 시적화자가 현재의 나이와 미래에 다가올 나이를 상징하는 시어들이다. 즉 ‘50km 지점을 통과할 때’라는 것은 50대를 보내는 때이다. 또 ‘70km 지점’은 시인이 상상하는 미래의 공간이며, 미래에 확정된 자화상이다. 지천명의 나이 때에는 ‘머리에 뿔 달린 몰래카메라가/너의 지문과 유년의 뒷모습을 찍’는 나날들이었다면 70km 지점의 칠순 나이에는 ‘제비들이 떠나간 양철지붕 밑에서 산다/날마다 손목이 가늘어지는 빈 둥지’가 된다는 미래를 가설한 진술이다. 이 시의 ‘제비’는 성장하여 각각 제 삶을 위해 집을 떠나간 자식들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날마다 손목이 가늘어지는 빈 둥지’로 노년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미래를 점치고 있다.
예시된 「7번국도의 표정」은 단순히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을 형상화한 시가 아니다. ‘7번국도’는 그동안 시인이 영위해 온 삶의 흔적이다. 일상의 반복 속에서 늘 부대껴야 하는 만남과 이별이 중첩되는 생의 아우성을 노래한 시다. 어떤 사람의 삶이든 늘 굴곡과 평탄한 일이 서로 반복되는 변화무쌍한 일상으로 이어진다. 이 시가 함의하는 주제는 만남과 이별이라는 질곡 된 굴레 속에서 ‘새벽으로부터/북쪽의 어둠과 발밑으로 쌓이는 절망을/쓰러뜨리는 검법을 익’혀 ‘너’를 만나고, ‘너의 지문과 유년의 뒷모습’을 읽어가다가 ‘손목이 가늘어진 채’로 ‘제비’들을 떠나보내고, 양철지붕 밑에서 고독과 싸우며 살아가는 현재와 미래의 자화상을 형상화했다. 전체 6연 중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는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 있다는 것을 ‘흰그림자가 되어 서쪽 요금소를 통과하는 너를 보았다’라는 진술로 확실성을 상상으로 예견하고 있다.
두 눈이 충혈되도록 밤새워 짠 그늘을 행인들에게 내어 준 적도 없다 마트의 입간판처럼 24시간 뜬 눈으로 새벽을 찾던 날도 없다 통닭처럼 기름가마솥에 발목을 넣어 본 기억이 없다 정신이 혼절한 사막의 이마에 비 한 방울을 뿌려 본 적이 없다
-「블랙롱코트」 일부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이며, 시인의 삶이 비친 거울이다. 따라서 시는 곧 그 시인이다. 시인의 시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의 의미가 확정되고, 그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예술이 탄생한다. 그러므로 이 「블랙롱코트」에 정계원 시인의 삶과 시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벽장 나무 옷걸이에 내가 베짱이의 얼굴로 걸려있다’로 시작하는 「블랙롱코트」의 ‘불랙롱코트’는 시적 화자 자신이다. 화자는 블랙롱코트에 자신을 가탁하여 성찰한다. 그 진술의 내용을 살펴보면 행인들에게 그늘 한 장 내준 적이 없고, 마트의 입간판처럼 뜬 눈으로 새벽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본 적도 없거니와 목마른 사막 한가운데에 빗방울 한 번 뿌려준 적이 없다고 반성과 성찰의 시의식을 드러낸다.
시적대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는 순전히 시인의 시적 경향이며, 동시에 시인의 몫이다. 이것을 시의식이라고 말하며, 이 시의식은 화가가 정물화를 그리는 것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간단명료한 의식을 드러내는가 하면, 반대로 자연물이나 자연의 섭리, 또는 일상의 현상에서 인간으로서 본받아야할 대상을 승화하거나 반성, 혹은 성찰을 교시적으로 서술하는 등의 경우가 있다. 앞의 후자를 따르는 정계원 시인은 「블랙롱코트」에서 드러낸 시의식과 같은 성찰의 내용으로 점철된 시들이 제4부에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시인이 어떤 대상을 놓고 성찰하거나 반성하는 것은 개인적인 성찰이나 반성이 아니다. 이것은 보편성을 지닌 성찰과 반성으로 우리 모두의 반성과 성찰이 된다. 우리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인 성찰과 반성으로 시의 정서를 조성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는 시작(詩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계원 시인이 여러 시작품에서 성찰의 사유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의 시의식이 완숙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제시하는 시 「용궁흑염소탕」에서도 「블랙롱코트」와 같은 성찰의 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고, 내장에 무엇이든 채워지며 돌아가는 세상이 옳다고 말하고, 비워지면 세상을 비관하던 내 얼굴이 빈 그릇에 가득 채워져 있다 빈집은 비어 있을 때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의 빈 내장은 이유도 없이 채우는 데 혈안이다 달콤한 살점, 혀끝에서 춤추는 육수, 그 순간에 나를 뒤돌아보지 않는 나는
누굴 위해 살 한 점 떼어 준 적이 없다
- 「용궁흑염소탕」 일부
앞의 시 「용궁흑염소탕」을 살펴본 것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누굴 위해 살 한 점 떼어 준 적이 없다’는 화자의 단호한 진술은 흑염소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생을 당한 것에 대한 일말의 죄스러움을 토로한 것이다. 이 시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화두는 ‘모든 동식물은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인간우월주의자들에 대한 경고 메시지이다. 자산의 의지와 관계없이 목숨을 내놓은 흑염소에 대해 최소한의 고마움을 느끼며,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흑염소들은 그들 나름의 고귀한 생명체이며, 우리들이 그들과 동행할 때 지구는 정상 궤도를 공전한다는 깨달음을 주고 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지구를 지켜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동식물은 자연물로서 지켜야할 그들 나름의 의무가 있다. 따라서 자연을 인간의 발아래에 두어서도 안 되며, 인간 위에 두어서도 안 된다.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등가로 보는 인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가령 기후 온난화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은 자연을 인간의 발아래에 두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계원 시인이 「용궁흑염소탕」에서 진술한 것을 살펴보면 ‘나의 빈 내장은 이유도 없이 채우는 데 혈안이다 달콤한 살점, 혀끝에서 춤추는 육수, 그 순간에 나를 뒤돌아보지 않는 나’라며, 투명하게 성찰하고 있다. 이 같은 치열한 성찰은 정계원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함이며, 그의 풍격(風格)과 직결된다. 다시 말하면 천성이며 유전인자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정계원 시인의 성찰과 반성의 삶과 시세계가 일치를 이룬다는 것을 확인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렇게 시인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성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모두(冒頭)에서 정계원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는 언급에서 특히 세 번째 시집 출판은 정계원 시인의 ‘성숙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처럼 정계원 시인이 성숙된 시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문적 요소로 무장된 의식으로 오랜 습작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언어예술의 아티스트
지금까지 정계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에 실린 60여 편 중에 대표적인 시를 몇 편 선정하여 다각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시인은 어떤 대상을 바라보며,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세계를 찾아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시의 소재 선정 과정에서 발견된 주제를 시상전개라는 단계를 거쳐 작품 속에 녹여야 한다. 그러할 때 완성도가 높은 시가 출시된다. 정계원 시인도 앞에서 말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작품 활동을 해왔고, 그 결실로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그 시집을 감상해 본 결과를 정리해 보면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먼저, 시의식의 다면성 발현이다. 즉 시의식이 어떤 한 경향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인공물 소재에서 이끌어낸 사유를 포함하여, 자연물에서 불러들인 시의식을 각각 독립적으로 보여주거나 혼합된 양상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인공물 소재인 ‘등대, 불영사, 불상, K-트롯, 충전기, 항아리, 탈무드, 국도, 베란다. 핸드백, 노숙자’ 등을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발상으로 주제를 확장시켜 갔다는 특징을 보였다. 또 자연물에서도 ‘황태, 동백나무, 삼나무숲, 벚꽃축제, 눈꽃, 동백꽃, 빅토리아가시연꽃, 커피나무, 느티나무, 장미꽃, 양귀비꽃, 종려나무 등을 통해서도 다양한 주제를 드러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직관적 능력과 결부된다는 뜻이며, 또한 관찰의 횟수가 남다르게 다수 작동된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계원 시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적 태도가 무의식적이다. 즉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습관적으로, 또는 연속적인 반복에 의해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이며, 그 사물로부터 시의 소재를 발견하고 주제를 결정짓는 일련의 창작과정이 시스템화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두루 살펴볼 때 정계원 시인을 언어 아티스트(artist)로 명명할 수가 있다.
또한 정계원 시인은 시작(詩作)을 인과응보(因果應報)로 귀결시킨다는 점이 남다르다. 부연하면 정계원 시인은 원인이 있음으로써 결과가 있다는 사필규정의 구조로 작품화 한다. 악의 행위는 업(業)이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인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인간은 전생에서 지은 죄에 따라 내생(來生)의 외모나 고난 등이 결정되므로 올바른 현세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시상을 전개한다. 특히 자연파괴에 대해 참회하고, 자연을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을 때 인류의 업이 사라진다고 진술한다. 가령 인류의 업은 기후변화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재앙과 같은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인간은 늘 절제하고 선한 일에 몰두해야 하며, 자기반성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시를 통해 시인은 설파하고 있다. 정계원 시인이 강조하는 자기반성은 타인에게 권유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으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적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정계원 시인은 여러 시편에서 성찰의 양상을 보아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과응보의 의미를 깨닫고 있으면서도 바쁜 일상에 쫓기어 그 인과응보의 중요성을 잊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점을 우회적으로 일깨워주는 시세계를 일구어 왔다.
마지막으로 정계원 시인의 시작(詩作)의 동인(動因)은 휴머니즘의 심연에서 출발한다. 시인의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에 수록된 시편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시인이 일관되게 겸손한 시적태도를 보여 왔다. 냉소적이거나 무소불위의 사유는 일체 불허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둠과 절망을 극복하라는 응원 메시지와 같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시작품은 긍정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예찬, 성찰, 고뇌, 경이로운 자연현상, 희로애락의 인간사, 관조, 달관, 반성, 설렘, 반추, 그리움, 의지, 친근감 등을 진술하거나 묘사했다. 그러므로 탈권위적이며, 탈중심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대상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도록 스스로 자신을 단련시키고, 시인 자신의 자아를 탐구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정계원 시인이 낮은 자세로 시작(詩作)에 임하는 태도는 독특한 자기 색깔이며, 몸에 밴 프로의식이다. 그런 연유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절망이 아닌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주는 시집을 출판했다. 매우 인간적인 휴머니즘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런 일들을 종합해 보면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조응하며 하나가 된 모습을 추구하는 시세계를 열어갔다.
정계원 시인은 매우 조용한 어조로 시의 정서를 자아낸다. 어조가 조용한 반면에 작품이 전하는 의미는 매우 강렬하게 증폭되어 전달된다. 부드러우면서 강한 면모를 드러내는 시편들이 시집 속에 실려 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시집 『내 메일함에 너를 저장해』 역시 독자들로부터 많이 애송되리라는 기대를 해보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