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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
··················································· 소재 이이명선생의 '요계관방지도" 설명
소재 이이명 선생은 신임사화 당시 4충신 중 한분으로 유능한 정치가이자 성리학자 이었으며, 특히 해외의 발달된 문물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 진취적으로 이들을 우리나라에 소개하여 오셨다.
천문 지리 역산등의 서적을 중국을 통하여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하시었고, 숙종승하 후 고부사(告訃使)로 중국에 가시어서는 그곳의 독일, 포르투갈 등의 선교사들과도 교유하시며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책자들을 들여와 소개하시었다. 이러한 노력은 그의 아들 일암 이기지 선생에게서 더욱 활발하였으나 모두 신임사화로 돌아가시어, 우리나라의 소위 말하는 북학내지 실학조류의 도입이 한세대 늦어지는 계가가 되었다.
소재선생의 이러한 열린 사고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실천적인 자세와 애국애민의 정신은 우리 후손들이 귀감으로 삼고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소재 선생은 이에 아울러 아래에 소개되는 요동지방의 지도인 "요계관방지도"를 작성하시었는데, 이는 국방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되어 숙종대왕에게 드려졌는데 생각건대 선생의 조부이신 백강 이경여 선생, 우임송시열 선생, 청음 김상헌 선생, 효종대왕 등의 염원이었던 민생의 안정과 병자호란 설욕을 위한 북벌계획의 추진과 맥을 이어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신임사화에서 백강 이경여 선생 후손들이 참화를 입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선 것이 효종대왕의 이른 승하와 더불어 북벌계획 실패의 한 가지 요인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 규장각이 보관중인 <요계관방지도>에 대한 규장각의 설명을 살펴보자.
<규장각의 '요계관방지도'에 대한 설명>
소재 이이명 선생의 <요계관방지도>는 그가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그가 입수한 주승필람과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의 [오라지방도] 등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이 성경지를 들여온 것은 1697년(숙종23)에 이르러서였다.
주승필람은 명나라 말 직방랑 벼슬을 하던 선극근이 저술한 국방지리관계 책자였다. 이 <요계관방도>는 서북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파악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만강의 남류 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선춘령에 대한 인식과 국경지대에 대한 물줄기 표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선춘령[先春嶺(高麗境)]은 고려시대 윤관이 영토를 개척하여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믿어져 왔다.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선춘령의 위치는 두만강 이북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는데,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17세기 후반 지식인들은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을 되살려 냈지만, 새로 입수한 성경지의 지리지식을 토대로 해 보면 두만강 이북 700리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표시되어 있다. 이는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바탕으로 수정한 결과로 판단된다.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는 지금의 해란하에 해당한다. 이 물줄기는 지도에서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조선 전기적인 지리인식을 성경지의 지리정보를 토대로 수정한 결과이다.
이지도의 사진은 사용 용량이 너무 커서 이곳에 게재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아래의 사이트에 들어가시어 '요계관방도'를 검색하시면 찾아보실 수가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http://e-kyujanggak.snu.ac.kr}
*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 *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숙종실록』 32년 1월 12일
1706년에 이이명(李頤命)이 조선의 서북 경계인 청나라 요동과 계주 인근의 관방 형세를 그린 지도.
개설
1706년(숙종 32)에 만들어진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는 사신으로 청에 갔다가 돌아온 이이명이 입수한 명대의 지도책 『주승필람(籌勝必覽)』과 조선에서 해로를 통해 산동에 이르던 길을 그린 공로도(貢路圖), 서북쪽 강해(江海)의 경계, 그리고 심양의 지리지인 『성경통지』의 지도에 기초해 만들어진 지도이다. 조선후기 관방지도의 대표작으로, 숙종대 조선의 서북 지역과 중국의 국경을 중심으로 한 지리 인식의 확대를 잘 보여준다.
18세기 중반 이후 제작된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등에도 「요계관방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들 군현지도집에 포함된 「요계관방도」는 1706년 이이명의 「요계관방지도」를 모본(模本)으로 필사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이이명이 제작한 「요계관방지도」는 10폭 병풍 형식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 이이명은 자필로 제10폭에 주요 지역에 이르는 거리를 상세히 밝히고, 숙종에게 올린 차자(箚子)에서 밝힌 지도의 제작 경위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숙종실록』 32년 1월 12일).
제10폭의 주기에는 압록강부터 심양, 심양에서 북경에 이르는 거리를 기록하였고, 남으로 여순구(旅順口)까지와 동북으로 오라(烏喇)에 이르는 거리를 적었다. 오라 동남에서 영고탑(寧古塔)까지 거리와 영고탑 남쪽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거리를 적고 동북으로 흑룡강 해구(海口)에 이르는 거리를 리(里) 단위로 표기하였다. 또 북경의 북쪽에서 창평현과 경주에 연한 거용관까지 거리를 각각 적고, 북경 서북쪽에서 선부(宣府)까지 거리를 적었다. 그리고 선부에서 동북쪽으로 개평위(開平衛)까지 거리와 북경에서 등주까지 거리를 리 단위로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어지는 이이명의 글에 의하면, 지도는 이이명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올 때 가져온 명나라 선극근(仙克謹)의 『주승필람(籌勝必覽)』, 청나라에서 편찬한 『성경통지』의 오라지방도, 명말청초의 해로사행로, 서북쪽 강과 바다의 경계를 반영하여 제작한 사실을 밝혔다. 이이명은 지도의 제작 배경을 과거 오랑캐의 변고가 주로 동북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조선 역시 국토는 작지만, 변방의 경계는 넓고 먼 데다 서북 변방 지역은 강 하나로 경계를 짓고 있고, 산동과도 매우 가까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청나라가 심양과 영고탑에 성벽을 증축하는 점과 북방 지역의 사세(事勢) 등을 고려할 때 변방 접경지대의 방비에 힘써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지도는 17세기 후반 새로 입수한 『성경통지』의 지리 정보를 잘 반영하였다. 조선은 관북 및 관서 지역만 그렸으며, 두만강의 남류 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묘사되었고, 선춘령 바로 아래 온성부 근처에서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물줄기가 지도에서는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지리지인 『성경통지』를 토대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동쪽 흑룡강에서 서쪽 산해관 사이 성첩과 만리장성을 그렸고, 요동반도와 요하의 산맥과 하천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특히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에 고려의 윤관(尹瓘)이 동북의 여진을 축출하고 개척한 선춘령(先春嶺) 지역에 세운 고려경(高麗境)이라는 석비(石碑)를 고증하였다. 선춘령은 윤관이 새로운 영토로 개척하고 9성과 비석을 세운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하여 『고려사』「지리지」에는 선춘령의 위치가 두만강 이북 700리, 약 275㎞ 지점이라고 되어있지만, 『동국여지승람』 이후로는 선춘령을 함경도 안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성경통지』의 지리 정보를 바탕으로 「요계관방도」에서는 선춘령이 함경도 온성부로부터 멀지 않은 곳으로 수정하여 표시되었다.
육로는 통과 지점만을 표시한 것에 비하여 조선에서 산동반도와 산해관에 이르는 해로를 뚜렷하게 그렸다. 이는 17세기 전반 명청 교체기에 후금의 요동 점령으로 인해 육로가 막히자 조선의 사신단이 바닷길로 왕래하였는데, 주로 산동의 등주(登州)나 영원성 각화도(覺華島)에 이르는 길이 이용되었다. 이 밖에도 요새의 수비 상태를 지도 안에 특별히 기록해두고 있으며, 성의 망루에는 적색 깃발이 날리고 진(鎭)·관(關)·보(堡) 등은 적색으로 표시하였다.
변천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에 삽입된 「요계관방도」는 채색 필사본으로 명나라 말기 군사 시설과 방어 시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지도의 원본이 『성경통지』 등 중국 측의 자료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백두산과 주변 물줄기, 토문강 등 중국 동북 지방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중국적인 인식이 여과 없이 수록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에 정계비를 설치한 이후 조선에서는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등장하거나 별도의 분계강을 설정하는 발상이 나타나는데, 이 지도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도는 서북 지역에 대한 조선의 지리 인식이 한 단계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지도에서 분명치 않던 두만강의 남류 사실과 백두산이 강조되어 있다. 이 지도에는 이이명의 「요계관방지도」에서 선춘령으로 표시된 곳이 ‘고려경’으로 바뀌어 표기되었다.
한편 『여지도』의 「요계관방도」는 『해동지도』와 동일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해동지도』를 필사하는 과정에서 『해동지도』의 맨 앞에 있던 주기(註記)가 이 지도에서는 모두 누락되었으며, 군현의 기호 표시가 잘못되거나 지명의 누락 부분도 발견된다.
<출처 : 위키 실록사전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
1705년(숙종 31) 청나라 사신으로 파견된 우참찬(右參贊)과 이이명(李頣命)은 외교활동을 틈타 청나라 지도를 구하느라 동분서주해 명나라 후기의 학자 선극근(仙克謹)이 편찬한 <주승필람(籌勝必覽)> 4책은 구했으나,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는 청나라에서 대외 반출을 금했기 때문에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이이명은 기지를 발휘해 대동한 화원으로 하여금 지도를 은밀히 모사토록 했다. 조선에 돌아온 이이명은 청나라에서 입수한 지도들을 숙종에게 바치고, 숙종의 명에 따라 요계관방지도(遼薊關防地圖)를 제작하게 된다.
<숙종실록> 43권 숙종 32년(1706) 1월 12일 신미 두 번째 기사에 그 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위의 계관방도는 신이 사신으로 연경에 갔을 때 구득한 것으로, 명의 직방랑 선극근이 지은 주승필람이란 책입니다. 신이 명을 받들고 이미 옮겨 써서 올렸고, 또 청인이 편찬한 성경지에 기재되어 있는 오라지방도와 우리나라에서 지난날 만든 항해공로도와 서북강해변계도를 합쳐 하나의 지도를 만들었습니다(右遼、薊關防圖, 出於臣使燕時所購得, 皇朝職方郞仙克謹所著, 籌勝必覽之書. 臣旣承移寫以進之命, 又取淸人所編盛京志所載烏喇地方圖, 及我國前日航海貢路, 與西北江海邊界, 合成一圖).’
회회식으로 그려진 장성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이 이이명은 <주승필람>에 첨부된 요계관방도(遼薊關防圖)와 모사해 온 산동해방지도, 그리고 <성경지(盛京志)>의 오라지방도(烏喇地方圖), 조선의 항해공로도(航海貢路圖)와 서북강해변계도(西北江海邊界圖) 등을 참고해 요계관방지도를 제작했다. 어람용으로 제작된 이 지도는 비단에 채색으로 그려 10폭 병풍으로 만들었는데, 지도의 크기만 가로 6m, 세로 1m 35cm에 이르는 초대형이다. 지도 제목은 첫 번째 도폭에 세로로 작게 적었고, 마지막 10폭에는 이이명의 발문이 장황하게 적혀 있다.
지도가 그려진 범위는 남쪽으로 한반도의 중간부와 중국 산둥 반도 북쪽, 동쪽으로는 연해주, 북쪽으로는 흑룡강, 서쪽은 산서성(山西省) 북쪽을 지나는 만리장성의 남당아안(南塘兒安)까지 나타나 있다. 모두들 남당아안의 한자를 ‘南塘雅安’으로 쓰고 있으나 지도상에는 ‘南塘兒安’으로 나와 있다. 이 지도는 조선 북쪽 변방과 중국의 국방 수비에 관한 내용으로, 장성(長城)이 그 주제이다.
의주 북쪽의 봉황성 책문(鳳凰城柵門)에서부터 버드나무가지를 엮어 만든 경계인 유조변(柳條邊)이 흥경(興京, 현재의 푸순시 서부) 서쪽까지 이어지고, 그로부터 옛 고구려 성인 박작성(泊灼城)이 만리장성의 동단인 산해관(山海關)까지 이어진다. 산해관에서 시작된 만리장성은 북경의 북쪽을 지나 남당아안까지 나타나 있다. 회회식으로 그려진 장성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마치 공중에서 찍은 사진을 보는 듯한데 성체와 여장(女墻)은 물론이거니와 관성(關城), 성보(城堡), 봉수대, 각종 군기(軍旗)까지 빠짐없이 그려져 있다. 다만 이 지도를 그릴 때 참고했던 지도가 명나라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 지도에 그려진 군사시설은 청나라의 것이 아니었다.
초록색으로 그려진 많은 산과 달리 백두산은 흰색으로 우뚝하게 그려 넣었으나 그 주변의 하천과 지역정보는 강희제(康熙帝) 때 간행된 <성경지>를 참고한 탓인지 중국 쪽 정보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 백두산 위에 적혀진 설명문 역시 〈대청일통지(大靑一統志)〉 권45에 나오는 글로 ‘명지 왈 (백두산이) 천리를 뻗어 있고 높이는 2백리이고 그 산마루의 못 둘레는 80리다. 남류해 압록강이 되고 동류해 토문강이 되며 북류해 혼돈강이 된다(明志曰橫亘千里高二百里其巓有潭周八十里南流爲鴨綠江東流而爲土門江北流而爲混同江)’라고 해 중국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요계관방지도를 놓고 ‘첩보영화 뺨치는 조선의 국방지도’라느니 ‘북벌 의지가 반영된 지도’라느니 마치 조선이 청나라를 치기 위해 제작한 지도인 것처럼 자극적으로 말하지만, 지도가 제작될 당시 청나라는 이미 안정기에 들어섰기 때문에 북벌론은 비현실적이고 자칫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지도를 그려 바친 이이명이 숙종께 아뢰는 다음 글만 보더라도 충분히 지도를 제작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지금 신이 이 지도를 바치는 것은 감히 천하가 액색하매 장차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요, 또한 국력을 다해 변방에 전심을 다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원컨대, 주상께서는 변계를 지키기 어려운 것과 관방의 불가한 것을 깊이 살피시어, 환난을 염려하기를 항상 세력이 강한 도적이 국경을 억압하는 것과 같이 여겨, 공검 절약하여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위아래의 의리가 있는 줄 알게 하며, 선왕이 다하지 못한 뜻있는 일을 추구하고 명나라 말년의 실패를 주의한다면, 국가에 심히 다행한 일이겠습니다(今臣之進此圖者, 非敢曰知天下塞, 將以有爲也, 亦非欲竭國力, 而專意邊防也. 惟願聖明, 深察乎邊界之難可守, 關防之不可恃, 而慮患憂難, 常若强寇之壓境, 恭儉節約, 以裕民生, 使國人, 知有手足、頭目之義, 追先王未究之志事, 戒皇朝末年之覆轍, 國家幸甚).”
이 요계관방지도는 1750년 초에 모사되어 8책으로 제작된 회회식 군현지도집인 <해동지도(海東地圖)>에도 실리게 된다. 이 지도집에는 조선전도와 도별도, 군현지도뿐만 아니라 천하도와 외국지도까지 망라되었는데, 이 가운데 요계관방도(遼薊關防圖)는 9면에 걸쳐 실려 있다. 1706년에 제작된 요계관방지도 원본은 지도사적인 가치와 회화성이 뛰어난 지도로 평가되어 2008년 3월 12일 보물 제1542호로 지정되었다.
* 필자 한국지도학회 부회장, 한국지도제작연구소 대표, 한국산악회 자문위원
<출처 : 월간산 http://s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