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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로(崔天老) |
삭녕최씨의 시조. 고려국에서 문하시랑형장사를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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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가(崔瑜價) |
삭녕최씨의 중시조. 고려중기 명종때에 문하시랑형장사를 역임하였으며 명종20년(1190년 경술)에 국자감 대사성 추밀원부사를 거처 1194년 갑인에 참지정사를 역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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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보(崔善甫) |
고려조(高麗朝)에 친어모군낭장(親御侮軍郎將)을 지냈으며 낭장공파1세조(郎將公派一世祖)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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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연(崔 珚) |
고려(高麗)때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를 지냈고 부사공파1세조(副使公派一世祖)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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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충(崔 忠) |
고려때 공조서승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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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옥(崔時玉) |
고려에서 사헌부 규정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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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문(崔潤文) |
고려때 호조전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에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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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명(崔守明) |
고려조에서 사설서령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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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앙(崔士昻) |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고 성천부사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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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유(崔士柔) |
1372(공민왕21)~1455(단종3) 자는 휘지(鰴之) 윤문(潤文)의 아들. 사마시(司馬試) 를 거쳐 1402년(태종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과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역임하고. 1432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이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와 보문각직제학( 寶文閣直提學)이 되었으며. 수직(壽職)으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으며, 아들 문 정공 항 (文靖公 恒)의 공훈(功勳)으로 영원부원구(寧原府院君)에 봉(封)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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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렴(崔士廉) |
조선조에 연기현감(燕岐縣監)을 지내고 연기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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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온(崔士溫) |
조선조에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희천군수(熙川郡守)를 지내고 희천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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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복린(崔卜麟) |
조선조에 대사간(大司諫)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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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형(崔 衡) |
자는 평보(平父) 호는 반송당(伴松堂) 세조(世組) 2년(1456)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칭롱불사(稱聾不仕)하였으며 참판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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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화(崔 華) |
조선때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지냈으며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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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항(崔 恒) |
1409(태종9)~1474(성종5) 자는 정보(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동량(㠉梁) 시호는 문정(文靖) 증영의정(贈領議政) 사유(士柔)의 아들로서 1434년(세종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고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이 되었다. 이어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創製)에 참여 1444년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撰進)했다. 이듬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서「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등을 찬진(撰進)했으며 1448년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올랐다. 1450년(세종32)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여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로 수사관(修史官)을 겸하여 정인지(鄭麟趾)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개찬(改撰)했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올라 「통감훈의(通鑑訓義)」를 편찬, 그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이어「 문종실록(文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고1353년 (단종1)동부승지(同副承旨)로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이 되고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이듬해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영성군(寧城君)이 되어 좌익공신(左翼功臣)2등에 책록되었으며 호조와 이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1458년 형조(刑曹)와 공조(工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이듬해 중추원사(中樞院事)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고 1460년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뒤 이듬해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간행하고 이해 다시 왕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착수함으로써 조선초기의 법률·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3년 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이해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찬수(纂修)를 시작하는 한편 신숙주(申叔舟)등과 「어제유장설(御製諭將設)」을 주해(註解)했다. 이듬해 어음(語音)이 정확하지 못하고 구두(句讀)가 불명하던 「사서오경 (四書五經)」에 구결(口訣)을 달았고 1466년 (세조11)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을 역임. 다음해 우의정이 되었다. 이어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1469년(예종1)경국대전(經 國大典)상정소도제조(詳定所都提調)를 겸하여 오랫동안 끌어온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진(撰進)했으며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했다. 이듬해 영성부원군 (寧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471년(성종2) 좌리공신(佐理功臣)1등이 되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조선초기 훈구파(勳舊派)의 대학자로서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의 정비에 큰역활을 했고 역사·언어 등의 분야에 정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당시 명나라에 보내는 사신의 표전문(表箋文)은 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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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도원(崔道源) |
자는 호연(浩然)조선 태종(太宗)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호조·형조좌랑(戶曹刑 曹佐郞)을 거쳐 4군(四郡)의 수령(守令)을 지내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가 세조(世祖)2년(1420)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재임(再任)하고 퇴임하여 부모봉양(父母奉養)을 지성으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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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린(崔永潾) |
자는 천명(泉明) 호는 석포(石圃) 조선 세조(世祖)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동부승지 (同副承旨)에 이어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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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崔永灝) |
영의정 항(恒)의 차자(次子)이며 성종(成宗)8년 춘장시(春場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 하여 사재 감정(司宰監正)에 제수(除授)되고 사옹원정(司饔院正)을 지내고 경차관(敬差官)으로 나갔다가 고성임지(固城任地)에서 서거(逝去)하여 좌찬성겸대제학(左贊成兼大提學)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찬성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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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부(崔景溥) |
겸보(謙甫) 세종조(世宗朝)에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용인현(龍仁縣)의 교도(敎導)를 지냈으며 교도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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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연(崔景淵) |
세종조(世宗朝)에 별시위부사정(別侍衛副司正)을 역임하였으며 사정공파(泗川派)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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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시(崔景時) |
세종조(世宗朝)에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역임하였으며 현감공파(金堤萬頃派)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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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현(崔秀賢) |
병조참의(兵曹參議) 영주(永澍)의 아들로서 진사(進士)시에 급제하고 현감(縣監)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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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준(崔秀俊) |
자는 국거(國擧), 성종조(成宗朝)에 사과(司果)를 거쳐 여러 고을의 군수(郡守)를 역임하였으며 시거양구(始居楊口)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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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륜(崔秀崙) |
초명은 자륜(自崙) 조선조때 이천현감(伊川縣監)을 지내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그 후 강원도 어사(江原道御史)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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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영(崔秀英) |
호(號)는 도계·조수(陶溪․釣叟) 성종조(成宗朝)에 사직(司直)을 역임하고 연산조(燕山朝)에 이르러 정사(政事)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며 사직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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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웅(崔秀雄) |
자는 운경(雲卿) 성종조(成宗朝) 정략장군(定略將軍)을 지내고 좌통례(左通禮)에 증직되었으며 통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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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걸(崔秀傑) |
성종조(成宗朝)에 부사정(副司正)을 역임하였으며 사정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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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언(崔秀彦) |
성종조(成宗朝)때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거쳐 참의·참판(參議·參判)에 이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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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진(崔秀珍) |
자는 정보(挺寶) 중종조(中宗朝)에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지내고 아들 충정공 흥원(忠貞公興源)의 공훈(功勳)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되고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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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종(崔秀宗) |
조선조때 현감(縣監)과 군수(郡守)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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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석(崔哲錫) |
자는 경수(敬受 ) 세종(世宗)17년(1435) 용인교도(龍仁敎導) 경부(景溥 )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여산 군수(礪山郡守)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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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관(崔哲寬) |
세조(世祖)11년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한림(翰林)과 대교(待敎)를 거쳐 성종조(成宗朝)에 직강지평(直講持平)에 이어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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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문(崔自雯) |
충순위 부사정(忠順衛 副司正)을 지냈으며 시거사천(始居泗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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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원(崔濬源) |
자는 중연(仲淵 ) 통례공수웅(通禮公秀雄)의 아들 홍치 신유년(弘治辛酉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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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인(崔濬仁) |
자는 극기(克己) 사정공 수걸(司正公秀傑)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청주판관(淸州判官)과 목사(牧使)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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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원(崔興源) |
1529(중종24)~1603(선조36) 자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 시호는 충정(忠貞) 영의정 항(恒)의 증손이며 전첨(典籤)·수진(秀珍)의 아들로서 1555년(명종10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1568년(선조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장령(掌令)·정언(正言)·집의(執義)·사간(司諫)·동래부사(東來府使)를 거쳐 충정(忠淸)·황해(黃海)·함경(咸鏡)·평안 감사(平安監司)와 개성유수(開城留守)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였으며 호조(戶曹)·형조(刑曹)·병조(兵曹)·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사헌(大司憲)등을 역임하면서 이도(吏道)를 바로 잡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황해 양도(京畿·黃海·兩道)의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고 이어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선조대왕(宣祖大王)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고 성천(成川)에서 분조행궁(分朝行宮)하면서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국난(國難) 극복에 전력하였고 이듬해 신병(身病)으로 영상(領相)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체임되고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졌고 호성공신(扈聲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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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원(崔俊源) |
자는 간성(艮成) 1490년(성종21)에 태어나서 1522년(중종17)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판부사(判府事)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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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계훈(崔繼勳) |
자는 세업(世業) 1537년(중종32)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고 1553년(명종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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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언수(崔彦粹) |
자는 사순(士純) 호는 삼계(三溪) 중종(中宗)32년(153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정언(正言)을 역임한 다음 벼슬을 버리고 남원(南原)으로 낙향하여 시서(詩書)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후에 이조참판겸 홍문관제학(吏曹參判兼弘文館提學)에 추증되고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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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립(崔山立) |
자는 중망(重望) 호는 입암(立蓭) 선조(宣祖)23년(159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2대주(十二大州)의 수령(守令)을 역임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오르고 영안군(寧安君)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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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립(崔順立) |
영의정 흥원(領議政興源)의 차자로 음직(蔭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자산군수(慈山郡守)를 지냈으며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嘉善大夫 漢城府 左尹)으로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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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영(崔 潁) |
자는 경잠(景潛) 선조조(宣祖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승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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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옹(崔 頲) |
자는 경숙(景肅) 호는 남강(南岡) 명종 10년(155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에 이어 좌랑(佐郞)교리(校理)헌납(獻納)을 역임하고 사인(舍人)과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와 대사성(大司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으며 대사헌(大司憲)과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하였으며 남강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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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정(崔 頲) |
자는 경직(景直) 명종(明宗)16년(156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원삼사(翰苑三司)의 요직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으며 지평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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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적(崔 頔) |
자는 경선(景善) 선조(宣祖)때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내고 임진왜란때 창의(倡義)하 여 의병(義兵)들에게 군량을 지원한 공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목천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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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조(崔胤祖) |
선조(宣祖)때 상원군수(祥原郡守)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으로 증직되었으며 영창군 (寧昌君)으로 봉군(封君)되고 좌의정(左議政)으로 가증(加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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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용(崔應龍) |
자는 사서(士瑞)1537년(中宗丁酉) 생명종임인(明宗壬寅) 문과에 급제하고 주부(主簿)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의주(義州), 광주(光州)목사(牧使)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영수(永水)와 더불어 가동(家僮)을 이끌고 의병(義兵)을 일으키어 고제봉(高齊峰)의 금산전투(錦山戰鬪)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전사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이 사실이 호남 절의록(湖南節義錄)에 올라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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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언량(崔彦亮) |
자는 명숙(明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형진(衡晋)상진(常晋)형제와 창의(唱義)하여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佑)와 성세 상응하여 진주성(晋州城) 방어전에 참전하였다가 함락시 순절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錄勳)되고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되고 충열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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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해(崔 嶰) |
자는 자경(子景)1606(선조39)~1682(숙종8) 인조 병자년(仁祖 丙子) 무과에 급제하고 용력이 장사(壯士)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심양으로 배종(陪從)하였으며 귀국 후에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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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립(崔東立) |
1557(명종12)~1611(광해군3) 자는 탁이(卓爾) 호는 행원(杏園) 영원군(寧原君) 변(抃)의 아들, 1585년(선조18)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參奉)에 재임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호가(扈駕)하고 의주행재소(義州行在所))에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대교·봉교(待敎·奉 敎)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기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헌납(獻納)과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순창군수(淳昌郡守)와 담양부사(潭陽府使)를 거쳐 1610년 호조참의(戶曹參議) 에 오르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행원집(杏園集)2권과 상제도설(喪祭圖說)5권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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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식(崔東式) |
1562(명종17)~1614(광해군6) 자는 정칙(正則) 호는 율정(栗汀) 영원군(寧原君) 변(抃)의 아들, 우성전(禹性傳)의 문인으로 1588년(선조 21) 진사(進士)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올랐다. 이어 헌납(獻納)·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이듬해 직강(直講)에 기용되고 사예(司藝)를 거쳐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가 관개사업(灌漑事業)을 크게 일으켜 농업에 크나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광해군초에 문학(文學)·장령(掌令)·사간(司諫)·필선(弼善)·집의(執義)등을 역임하고 1612년(광해군4) 보덕(輔德)에 이어 집의(執義)를 거쳐 이듬해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점차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승정원도승지(承政院 都承旨)로 추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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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범(崔仁範) |
자는 덕규(德規) 1583년(선조16癸未)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成均館 學諭)을 지내고 조졸(早卒)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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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중(崔尙重) |
1551(명종6)~1604(선조37) 자는 여후(汝厚) 호는 미능제(未能齊) 영의정 항(恒)의 6대손 어모장군(禦侮將軍) 영(穎)의 아들 류희춘(柳希春)의 문인 1575(선조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600년 헌납(獻納)·지평(持平)을 거쳐 이듬해 장령(掌令)·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고 1602년(선조35) 사간(司諫)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이어 아들 연(衍)의 공으로 대사헌(大司憲)에 가증(加贈) 남원(南原)의 노봉서원(露鋒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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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남(崔斗南) |
자는 추지(樞之)1581년(선조14)생으로 12세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아버지 참봉공을 모시고 피난하면서 왜적을 만났으나 굽히지 않고 지성으로 받으러 왜적을 감복시켰으며 효행(孝行)으로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정직되었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가증(加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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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호(崔 皥) |
자는 호여(皥如) 호는 월담(月潭) 세마(洗馬)를 거쳐 1616(광해군8) 진사(進士)에 합격 하고 1623년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지내고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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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보(崔 葆) |
자는 진백(眞伯)1603(선조3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해남현감(海南縣監)을 지내고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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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연(崔衍) |
1576(선조9)~1651(효종2)자는 유장 호는 성만(星灣) 사간(司諫) 상중(尙重)의 아들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610년(광해군2)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으나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파직당한 뒤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장령(掌令)이 되고 응교(應敎)·집의(執義)·사간(司諫)등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좌승지(左承旨)로 왕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扈從)하고 청(淸)나라와의 강화(講和)를 반대했다. 이듬해 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여생을 보냈다. 후에 이조판서(吏曹判 書)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되고 남원(南原)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성만집(星灣集)3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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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온(崔蘊) |
1583(선조16)~1659(효종10) 자는 휘 숙(輝叔) 호는 폄재(砭齋) 상중(尙重)의 아들 1609(광해군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당쟁(黨爭)이 어지러워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연구에 전심했고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능참봉(陵參奉)에 천거됐으나 사퇴했다. 1624(인조2)에 이 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형 연(衍)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평정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이흥발(李興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1653년(효종4)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과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폄재집3권(砭齋集三卷)이 전하며 남원(南原)의 노봉서원(露峰書院)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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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무(崔茂) |
자는 임종(林宗) 호는 대치(大痴)1582(선조15)~1649(인조27) 광해2년(庚戊)에 사마시 (司馬試)에 합격하고 세마(洗馬)를 거쳐 9개읍의 수령을 역임하고 칠곡부사(漆谷府使)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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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원(崔薳) |
자는 원지(遠志) 호는 쌍백당(雙柏堂)인 조조(仁祖朝)때 문인으로 천문학교수(天文學敎 授)에 제수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불취(不就)하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웠다. 전북 임실 덕계서원(德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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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년(崔碩年) |
자는 대로(大老) 호는 역족헌(亦足軒)1610(광해2)~1686(숙종12) 인조1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통천군수(通川郡守)을 지내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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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휘지(崔徽之) |
1598년(선조31)-1669(현종10)자는 자금(子琴) 호는 오주(鰲州) 연의 장자(長子) 인조(仁祖)때 문과에 급제하고 누차에 걸쳐 천거되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가 후에 집의(執義)·부사 (府使)·군수(郡守)등을 역임하였다. 글씨에 뛰어났고 남원의 노봉서원(露鋒書院)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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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지(崔攸之) |
자는 자유(子有) 호는 간호(艮湖) 인조(仁祖)23년(1645)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直長)·정자(正字)를 저쳐 효종(孝宗)8년 군수(郡守)·집의(執義)·사간(司諫)을 역임하고 현종(顯宗)4년(1662) 담양부사(潭陽府使) 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 기주관(記注官)에 이어 8년에 기사관(記事官) 교리(校理) 보덕(補德)시강관(侍講官)등에 이어 현종11년(1670)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끝으로 사임 귀 향하였다. 공(公)은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밝아 노화설(爐火說) 목갑설(木匣說) 죽원자설(竹園子說)등이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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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지(崔容之) |
자는 자능(子能)1639(인조17)~1694(숙종20) 1672년(顯宗壬子) 무과에 급제하여 비 변랑선전관(備邊郞宣傳官)을 거쳐 오위도총부 경력(五衛都摠府經歷)을 지내고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가 해남(海南)·철산(鐵山)·낙안(樂安) 세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애민선치(愛民善治)하여 낙안향교(樂安鄕校)앞에 선정비(善政碑)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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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옹(崔商翁) |
자는 덕수(德叟) 1670년(현종)~1756년(영조32) 숙종33년(丁玄) 무과에 급제 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고 홍원현감(洪原縣監)으로 나가서 선치(善治)의 공으로 오위장(五衛將)이 되고 삼척영장(三陟營將)으로 나갔다가 희천군수(熙川郡守)가 되고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어 돌아왔다가 풍덕부사(豊德府使)가 되었다. 수직(壽職)으로 가자(加資)되어 숭정대부 중추부사(崇政大夫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천수87세를 누리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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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옹(崔致翁) |
1635년(인조13)-1683년(숙종9) 자는 우황(虞凰)호는 수춘자(收春子)12~3歲에 경사 (經史)에 통달하고 철문에 무소불능(無所不能)하여 그 명성이 경향(京鄕)에 알려졌다. 현종(顯宗)1년(1660)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이어 지평(持平)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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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옹(崔是翁) |
1646년(인조24)~1730년(영조6) 자는 한신(漢臣) 호는 동강(東岡) 휘지(徽之)의 아들 남원출신 윤증(尹拯)의 문인 학행(學行)으로 박세채(朴世采)의 추천을 받아 지평(持平)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동강유고(東岡遺稿)2권과 동강가의(東岡家儀)1권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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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계옹(崔啓翁) |
1654년(효종5)-1720년(숙종46) 자 는 내심(乃心) 호는 우와(迂窩)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연(衍)의 손자, 휘지(徽之)의 아들 남원출신으로 1681년(숙종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설서(設書)를 거쳐 1695년 지평(持平)을 지내고 1704년 장령(掌令)으로서 앞서 단종(端宗)이 폐위될 때 이를 지지한 대신들의 관작 추탈(追奪)을 주장하다 파직(罷職)되었으며 그 후 1706년 보덕(補 德)으로 기용되고 집의(執義)·사간(司諫)을 역임하고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가 1710년 파격한 상소(上訴)로 말미암아 좌천되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원배(遠配)되었다. 우와문집(迂窩文集)2권이 세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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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악(崔柱岳) |
자는 경천(敬天) 1651년(효종 2)~1735(영조11) 현종정사년(顯宗丁巳)에 진사시 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개천군수(价川郡守)를 거쳐 부사(府使)와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고 무신란(戊申亂)에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으로 공을 세워 일등으로 녹훈(錄勳)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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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유(崔仁裕) |
자는 선여(善餘) 숙종(肅宗)때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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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관(崔 瓘) |
자는 화서(和瑞) 호는 함의제(涵義齊) 예학(禮學)에 정통한 학자로「사예요의(四禮要 儀)」의 저서가 남아 있으며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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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주(崔宗周) |
1682년(숙종9)~1737년(영조13) 자 는 문길(文吉) 호는 자봉(紫峰) 생원 경수(慶壽)의 아들로서 1705년(숙종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정언(正言)·설서(說書)를 거쳐 1709년 지평(持平)이 되고 1717년 사과(司果)를 지낸 후 장성부사(長城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1724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내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겼다가 이듬해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이어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1734년 남양부사(南陽 府使)가 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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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현(崔龍賢) |
자는 우경(虞卿) 1705(숙종 31)~1736(영조12) 영조신해(英祖辛亥)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있다가 32세에 조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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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경(崔 炅) |
자는 하언(夏彦) 1736(영조14)에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지냈으며 1785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하였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고 영은군(寧恩君)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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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훤(崔 烜) |
자는 성저(聖箸) 1773년 (영조4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교리(校理)에 이어 헌납(獻納) 사간(司諫)을 지내고 장령(掌令)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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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형(崔尙衡) |
1701년(숙조27)~1753(영조29) 자는 자시(子是) 증좌승지(贈左承旨) 종은(宗殷)의 아들1733년 식년무과전시(式年武科殿試)에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 도총부도사겸 종사관(都摠府都 事兼從事官)이 되었다가 경력(經歷)을 거쳐 1737년 박천군수(博川郡守)가 되었다. 1739년 훈련원정(訓練院正)이 되고 이어 대구영장(大邱營將)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내고 은성부사(隱城府使) 이천부사(伊川府使)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역임하고 강화중군(江華中軍)을 거쳐 장단부사겸 방어사(長端府使兼防禦使)가 되었다가 1751년(영조27)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를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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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형(崔台衡) |
1718(숙종44)~1783(정조7) 자는 계정(季靖) 1743년(영조1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에 제수되고 개령현감(開寧縣監)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정언(正言) 지평(持平) 장령(掌令)을 거쳐 헌납(獻納)· 사간(司諫)·집의(執義)를 지내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이어 강계부사(江界府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우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右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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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헌중(崔獻重) |
자는 아회(雅誨) 1775년(영조5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이어 검상사인(檢詳舍人)과 삼사응교(三司應敎)를 역임하고 사간(司諫)과 집의(執義)등을 거쳐 1795년(정조19)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이어서 좌부승지(左副承旨) 경주부윤(慶州府尹) 한성우윤(漢城右尹)을 역임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고 영춘군(寧春君)에 봉해 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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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범(崔成範) |
자는 성약(聖若) 호는 탈취정(脫翠亭) 1802년(순조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훈련첨정(訓練僉正)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를 역임하고 기장현감(機張縣監)을 거쳐 삼척영장(三陟營將)을 지내고 여산 부사(礖山府使)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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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계현(崔啓鉉) |
자는 치옥(穉沃) 1784년(정조8)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평안도권관(平安道權官)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훈련원주부· 판관첨정(訓練院主簿· 判官· 僉正)을 지내고 양덕 현감(陽德 縣監)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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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현(崔光鉉) |
자는 경삼(景三) 호는 귀경헌(歸京軒) 1800년(정조2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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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현(崔升鉉) |
자는 이호(彛好) 1783년(정조 17)~1842년(헌종8) 출천(出天)의 효행(孝行)으로 효자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孝子嘉善大夫同知中樞副 事兼 五衛將)의 명정려(命旌閭)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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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풍(崔遇豊) |
자는 윤원(倫元) 호는 만예제(晩藝齊) 1821년(순조21)~1892년(고종29)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通政大夫 敦寧府都正)으로 효행루유(孝行累有)하여 삼강록(三綱錄)에 등재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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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형(崔遇亨) |
자는 예경(禮卿) 호는 죽하(竹下) 영연군(寧延君) 종문(鍾問)의 아들, 1837년(헌종3)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대흥군수(大興郡守)를 지내고 1852년(철종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司諫)· 장령(掌令)· 응교(應敎)를 거쳐 함경도(咸鏡道)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가 사은사(謝恩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와서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와 양주목사(楊洲牧使)를 거쳐 승지(承旨)와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어 호조(戶曹)·공조(工曹)·형조(刑曹)· 예조(禮曹)·판서(判書)를 역임하고 영풍군(寧豊君)에 봉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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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기(崔遇箕) |
1816년(순조16)~1885년(고종22년) 자는 영백(永白) 호는 남훈제(南訓齊) 6세조 충신응립(忠臣應立)의 후예로 통정대부 돈녕대부도정(通政大夫敦寧府都正)데 제수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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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환(崔震煥) |
자는 주선(周善) 호는 만오정(晩俉亭)1832년(순조21)~1900년(광무4) 통정대부 돈녕부도정(通政大夫 敦寧府都正)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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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구(崔鴻九) |
자는 대재(大哉) 1820년(순조 20)~1888년(고종25) 철종신유년(哲宗辛酉年)에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을 지내고 가선대부호조참판(嘉善大夫戶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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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집(崔漢輯) |
자는 용여(用汝) 1788년(정조12) 병조참판(兵曹參判) 계현(啓鉉)의 아들로 태어나서 정조갑인(正祖甲寅)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겸 오위장(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兼五衛 將)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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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崔漢綺) |
1803년(순조3)~1875년(고종12) 자는 지노(芝老) 호는 혜강(惠岡)·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로서 조선말기(朝鮮末期)의 실학자(實學者)이다. 1825년(순조2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 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을 학문의 연구에 전심하였고 1872년고종9) 아들 병대(柄大)가 고종의 시종(侍從)이 되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학자로서 실학(實學)이 학문으로서 이론적으로 규명도 못하고 사상적으로 통일된 기본 원리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에 비추어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철학적 기반을 확립했다. 노자(老子)· 불교(佛敎)의 학설에 모두 비판적인 입장으로 인격적인 신(神)을 거부하고 신기(神氣)의 합일설을 설파 했으며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에 의한 이치의 터득을 극히 과학적인 입장에서 다루고, 증험(增險)의 증대(增大)를 통한 인식(認識)을 주장하여 경험주의적인 과학철학의 중요성을 주장했고 특히 교육사상에 있어서 직업교육을 제창했다. 사화(詞華)· 훈고(訓誥)를 금과옥조로 한 성리학의 배타적이고 고루한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이론을 지리(地理)· 농학(農學)· 의학(醫學)· 수학(數學)등 학문 전반에 걸쳐 박학(博學)하여 방대한 실학(實學)의 1,000여권에 달하는 저서(著書)를 남기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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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구(崔鳳九) |
자는 공육(公六) 호는 벽서(碧棲)1867년(고종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거쳐 북평사(北評事)를 역임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어 병조(兵曹)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 로 옮기고 이어서 남양(南陽) 곡산(谷山) 도호부사(都護府使)로 나갔다가 승정원우승지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承政院右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을 역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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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구(崔容九) |
1849년(현종15년)~1890년(고종27년) 자는 사효(士孝) 호는 죽정(竹亭) 영능참봉을 지내시고 통정대부에 올라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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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민(崔尙敏) |
자는 주견(周見) 호는 춘산(春山) 1863년(철종14)~1950년(庚寅) 장능참봉(長陵參奉) 을 거쳐서 궁내부 참시관(宮內部參試官)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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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직(崔炳直) |
1864년(고종1)~1942년(壬午) 자는 원중(元中) 호는 성전(星田) 남원(南原)출신 선구(璇九)의 아들. 1894년 고종갑오(高宗甲午)년에 문과급제하여 한림(翰林)으로 봉상시(奉常寺) 직장(直長)을 거쳐 비서감랑(秘書監郞)이 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세자시강원 (世子侍講院) 시강(侍講)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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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무(崔炳武) |
자는 문겸(文蒹) 호는 죽암(竹菴) 1865년(고종2)~1895년(고종32) 건릉참봉(乾陵參奉)을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었으나 동학(東學)난(亂)에 가담 활약하여 참수 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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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대(崔炳大) |
자는 경유(敬有) 1862년(철종18)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고 감찰(監察) 전적(典籍)을 거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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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철(崔炳哲) |
자는 경한(景翰) 호는 혜인(惠人) 1892년(고종29)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하여 권지(權智)와 승정원부정자(承政院副正字)를 거쳐 홍문관시강(弘文館侍講)을 지내고 통정대부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監丞)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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