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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6-20 세계 난민의 날
현시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 백범 김구, <삼천만 동포에 읍고(泣告)한다>에서
2005 - 일본 고이즈미 총리 방한, 노무현 대통령과 한일 정상회담
2005 - 청와대서 한일 정상회담(2005)
2005년 오늘,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가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날 회담에서는 새로 발족하는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산하에 교과서 위원회를 신설해 연구 결과를
두 나라의 교과서 편수 과정에 참고하기로 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해 제3의 추도시설 건립이 필요하다는 노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 국민 여론 등 제반 상황을 고려해 새로운 추도 시설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두 정상은 또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확인하고 한·미·일 공조의 원칙 아래 북한의 6자회담
조기 복귀를 위한 공동의 외교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정상은 회담 시간 대부분을 역사 인식 문제에 할애해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을 논의했지만
양측의 이견만 확인했을 뿐 합의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2005 - 이화여대에서 `여성 유엔총회`로 비유되는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개막
2005 - 정부 중앙청사 게시판에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자 신상명단 공개
2003 - 위키미디어 재단이 설립되다.
언론사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공정위 이한억 조사국장.
2001 - 공정거래위원회, 13개 언론사에 242억원 과징금 부과
공정거래위원회가 13개 중앙 언론사에 대해 모두 242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 같은 과징금 규모는 공정위가 2000년 7개 재벌그룹에 부과한 전체 과징금 규모(173억원)보다 훨씬 많은 것이었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은 2001년 6월 21일 10개 중앙 일간지와 3개 방송사를 상대로 부당내부거래를 조사한 결과
총 510억원의 부당지원 사실이 밝혀져 242억원(신문사 203억원, 방송사 39억원)의 과징금을 물렸다고 발표했다.
언론사별로는 조선일보 33억9000만원, 동아일보 62억원, 문화일보 29억원 등 그동안 비판적 논조를 유지해온
신문들이 과징금을 상대적으로 많이 부과받았다. 그러나 한겨레신문(1500만원), 대한매일신보(1억4000만원),
세계일보(3600만원)는 상대적으로 과징금 액수가 미미했다. 방송국도 신문사에 비해 과징금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방송사 가운데는 SBS가 1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고, MBC와 KBS에는 각각 13억원과 11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됐다.
그러나 공정위가 지금까지 30대그룹과 거대 공기업을 빼고 부당내부거래를 직권 조사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조사방식도 유례없이 강도가 높았으며, 과징규모도 상식을 뛰어넘는 편파적인 금액이 부과됐다는 점에서
공정위 조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았다. 더구나 신문산업의 특수성과 각 언론사의 소명자료를 전혀
반영하지 않아 언론사로부터 편파적인 조사라는 반발을 샀다. 조선
2001 - 제1회 세계 난민의 날
세계 난민의 날(World Refugee Day)은 6월 20일로 난민에 관한 기념일이다.
2000년 국제 연합 총회에 의해 의결되어 2001년부터 매년 치러지고 있다. 6월 20일은 "아프리카 난민의 날"에서 왔다.
매년 국제 연합 난민 고등 판무관 사무소은 전세계적으로 행사를 치르고 있다.
매년 6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World Refugee Day)입니다.
본래 6월 20일은 아프리카단결기구(OAU)가 1975년부터 아프리카 난민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여 오던 날로서,
국제적 난민보호 개념의 초석을 세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설립 50주년이 되던 지난 2001년을 기하여
‘아프리카 난민의 날’을 ‘세계 난민의 날로 확장하여 기념하기로 한 것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http://minbyun.org/?document_srl=8956
2000 - 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1차 총 폐업
2000 - 의료계 폐업 (2000)
2000년 오늘, 전국의 병·의원 92.3%가 일제히 문을 닫는 사상 초유의 의료대란이 시작됐다.
의사협회가 열흘 뒤인 7월 1일로 예정된 의약분업 시행 방침에 맞서 집단폐업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전국 100여 개 병원의 수련의와 전공의들까지 진료거부에 동참했다.
의약분업 시행안이 약사의 대체, 임의 조제를 막을 수 없다는 게 의사들의 주장이었다.
병원 폐업 사태로 환자들이 병원을 전전하다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잇따랐다.
의료계 폐업 사태는 1주일 만에 극적으로 해결됐지만 의사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게 떨어졌다.
1999년 6월 14일 보스턴 레드삭스의 조진호 선수가 볼을 던지고 있다.
1999 - 조진호, 한국인으로 두번째 메이저리그에서 승리
조진호(보스턴 레드삭스)가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메이저리그 승리투수가 됐다.
조진호는 1999년 6월 20일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등판, 6이닝동안 홈런2개 포함,
5피안타 4실점했으나 타선의 도움으로 첫 승리를 땄다. 삼진6개에 볼넷은 1개.
1998년 7월5일 빅리그에 첫 등판했던 조진호는 메이저리그 6번째 등판에서 첫승을 신고했다. 방어율은 4.50이 됐다.
조진호는 최고구속이 146Km에 불과했지만 절묘한 제구력으로 서부지구 1위팀 레인저스 강타선을 요리했다.
레드삭스는 7대4로 이겼다. 1998년 12월 귀국후 부친의 사망소식을 뒤늦게 알고 통곡했던 조진호는
"18일이 아버님 제사였는데 호텔에서 절을 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아버님께 첫승을 바친다"고 소감을 밝혔다.
북한에 억류됐던 민영미씨(가운데)가 중앙병원에서 퇴원해
남편 송준기씨와 함께 집으로 귀가하고 있다.
1999 - 금강산관광객 민영미씨 북에 억류
1999년 6월 20일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인 민영미씨에 대해 북한 환경감시원을 상대로 남한 `귀순 공작`을 했다며
그녀를 북한에 억류, 장전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감금, 조사했다.
북한에 억류된 민영미씨는 북측 여자 환경감시원과 10여분간 여러가지 대화를 나누다
북한 귀순자에 관한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측 환경감시원은 대화가 끝난 직후 민영미씨에게 관광증 제시와 벌금을 요구했으며,
민영미씨는 관광증을 건네주고 2회에 걸쳐 총 100달러의 벌금을 지불했다. 북측은 "더 조사할 것이 있다"며
민영미씨를 연행, 장전항 출입국관리소 옆 북측 금강산관광총회사 사무실로 데려가 강제 구금했다.
그후 5일 만에 북한이 현대측에 민영미씨를 인도했고, 다음날 새벽 속초항에 도착,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렸다.
그일이 있은후 한동안 금강산관광이 중단되었다가 8월 5일 다시 재개됐다.
- 외항선 1000만톤 돌파, 1995.6.20 발행
1995 - 외항선 보유량 1,000만톤 돌파 (기념우표 발행)(날짜 미확인)
정부는 대한해운공사법을 제정, 1950년 1월 대한해운공사를 발족시키면서 해운산업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큰 뿌리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더구나, 1950년 6.25 동란으로 인해 항만시설은 물론이고 많은 선박이 피폭됨으로써 우리 해운산업이 좌초되는 듯 했으나,
남과 북의 분단은 해운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정부는 1955년 2월 정부 조직법 개정을 통하여 해사행정을 총괄하는 해무청을 신설하여 체계적인 해운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1967년에는 해운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해운진흥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우리나라 해운산업은 눈부신 성장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해방 이후 2만여톤에도 못미치던 한국상선대 규모는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해운인들의
노력에 힘입어 1974년 선박보유량이 100만톤을 넘어섰으며, 1995년에는 1,000만톤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특히, 2006년말 현재 한국상선대는 모두 609척에 1,520여만톤에 달하고 있으며, 해외에 치적한 선박을 포함한 1,000톤 이상의
선박은 모두 1,900여만톤으로 반세기가 조금 지난 지금 세계 8위의 해운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더구나 용선선박을 포함하여 우리 외항해운기업들이 운항중인 선대규모는 6,700여만톤으로 세계
전체상선대의 10%에 달할 정도로 해운강국으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 외항해운의 비약적인 발전을 나타내는 지표는 이뿐만이 아니다. 외항해운업계의 해운수입은 1970년 초반까지만 해도
1억달러를 밑돌았으나, 1970년대 후반에 10억달러를 돌파한데 이어 15년 뒤인 1995년에는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그리고 2004년에는 최초로 200억달러를 돌파했으며, 2006년에는 28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반도체와 자동차에 이어 외화가득 효자산업으로서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해운항공신문
발탈 예능보유자 이동안씨.
1995 - 중요무형문화재 발탈 예능보유자 이동안씨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의 예능보유자 이동안씨가 1995년 6월 2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씨는 발탈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으나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스스로 춤을 추어온 타고난 춤꾼이었다.
화성재인청 도대방의 아들로 태어나 광대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열두살 때 남사당에 입단했으나
곧 광무대로 옮겨가 당대의 명인 김인호 선생으로부터 `신칼대신무` `진쇠춤` `태평무` 등을 전수 받았다.
발에 탈을 쓰고 하는 놀이인 `발탈`은 박춘재, 줄타기는 김관보 선생으로부터 각각 배웠다.
18세 때 송만갑, 정정렬 등 명창들을 모시고 다니며 그들의 무대에서 줄타기로 인기를 모은 그는 21세 때 부민관에서
열린 `한성준 무용발표회` 때 처음으로 `태평무`를 선보였다.
당대 최고의 고수 한성준씨와의 인연으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 무용선생으로 들어간
그는 신무용의 개척자인 최승희에게도 `장고춤` `태평무` `진쇠무` `입춤` 등을 잠시 전수했으며,
최씨의 제자인 김백봉, 정승의, 문일지 등에게도 춤을 가르쳤다. 발탈은 현재 박정임, 조영숙 등 두명의 이수자가
뒤를 잇고 있으나. 제자층이 두껍지 못해 전수가 어려운 실정이다. -조선
1994 - KT(구 한국통신), 아시아 최초의 상용 인터넷 서비스 ‘코넷’ 시작
인터넷의 역사 = 인터넷의 출발은 1969년 9월 미국 국방성이 구축한 ‘ARPANET’. 냉전시대 미국 국방성은
소련의 핵폭격 상황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처음 미국 4개 지역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초창기 군사목적으로 시작된 인터넷은 이후 교육,연구를 목적으로
비영리로 운영되다 90년대부터 상업적인 네트워크로 발전하면서 일반인에게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했다.
국내와 아시아권에서는 KT가 1994년 6월20일 처음으로 ‘코넷’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상용서비스를 시작했고
데이콤이 같은 해 10월,아이네트와 나우콤이 11월 인터넷 시장에 뛰어들었다.
코넷을 상용화하기 이전에는 대학교나 일부 연구기관에서 연구 정보교류와 교육용으로 학술망을 통해 인터넷을 사용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었다.
국내 학술 인터넷망인 ‘하나망’을 이용해 상용화된 코넷은 초기에는 월 4만원에 9.6Kbps(초당 전송속도)로 제공됐는데
이는 현재 인터넷 평균 속도의 1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기업용 인터넷 전용회선은 1.544Mbps 회선
한달 사용료가 무려 400만원에 달했을 정도.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128Kbps 속도를 내는 종합정보통신망(ISDN) 서비스는 90년대만 해도 인터넷의 총아로 주목받았다. 98년 케이블 모뎀 방식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에 이어 99년 기존 전화망을 활용한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제공되면서 인터넷은 연간 100%가 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코넷 사용 초기에는 이용자가 많지 않아 가입 개통을 해주러 갔다가 고객서버 데이터베이스(DB)를 몽땅 날리기도 했고
사이버주식거래 초기에는 주가가 폭락하는 날이면 접속불만에 대한 민원이 폭주해 KT 전화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인터넷 이용자는 99년에 1000만명을 넘어선 뒤 현재 2800만명에 달하고,2002년에 1000만명을 넘어선
초고속인터넷 가입자수는 현재 1150만명에 이르고 있다.
1994 - 금융기관 개인연금 상품 시판
1991 - 광역의회의원선거 실시
1991 - 한국-루마니아, 상사중재협정 체결
1990 - 로드리게스 파라과이 대통령 내한
1986 - 고려대 구병삼 교수팀이 국내 첫 체외 수정 시험관 아기 출산에 성공함
1981 - 이란 혁명검찰, 바니 사드르 대통령 체포령
1980 - 남북총리회담 대비한 판문점 자유의 집 별관 준공
1979 - 정신이상 사설도서실 주인, 공부하러온 대학생 살해
1975 - 아프리카단결기구(OAU)가 아프리카 난민의 날 제정
매년 6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World Refugee Day)입니다. 본래 6월 20일은 아프리카단결기구(OAU)가
1975년부터 아프리카 난민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여 오던 날로서, 국제적 난민보호 개념의 초석을 세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설립 50주년이 되던 지난 2001년을 기하여
‘아프리카 난민의 날’을 ‘세계 난민의 날로 확장하여 기념하기로 한 것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1974 - 태백선 전철 개통(제천-고한)
1973 - 중앙선 전철 개통
1973 - 중앙선 청량리-제천 구간 전철 개통
1970 - 국회의원 겸직 파동 발생
1969 - 김영삼 의원 초산병 피습사건
1969 - 문경선(진남-문경) 개통
전미 육상선수권대회에서 그린, 하인즈, 스미스(왼쪽부터)가 남자
100m 결승전에서 골인하고 있다.
1968 - 100m `魔의 10초벽` 돌파
100m 달리기에서 인간의 한계로 여겨 온 `마의 10초 벽`이 마침내 무너졌다.
전미 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린 1968년 6월 20일이 세계 육상사를 다시 쓰게 한 그날이다.
1912년에 세계기록 공인이 시작되고 1960년에 독일의 아민 해리가 10초F를 끊은 이래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10초 벽이 같은 날 그것도 세 사람에 의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무너진 것이다.
수동시계로 9초9. 준결승전 1·2조에 출전한 하인즈·스미스·찰리가 주인공이었다. 기록이 믿기지 않아 트랙 길이를 재조사했으나 오히려 10㎝가 더 길었다. 지미 하인즈는 4개월 뒤 열린 멕시코올림픽에서 9초95를 또 기록해 명실공히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됐다.
20여년 동안 깨지지 않던 9초9 벽이 88서울올림픽에서 9초79를 기록한 벤 존슨에 의해 깨지는 듯했으나
곧 약물중독임이 밝혀져 기록이 취소됐다. 이후 9초9 벽은 1991년 칼 루이스(9초86)가,
9초8 벽은 1999년 모리스 그린(9초79)이 깨뜨렸다. 현재의 세계최고기록은 2002년 9월 팀 몽고메리가 세운 9초78이다. 조선
1968 - 정부, 폭력배들을 국토건설에 투입
1966 - 베트콩, 미 공수부대 기습공격(1966)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 오늘.
베트콩이 미군 공수부대 주둔지를 포위하고 맹공격에 나섰다.
며칠 전 미군에게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본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이날 여덟 시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그러나 베트콩은 현대무기로 무장한 미 공수부대를 꺽지 못하고 후퇴했다.
1964 - 드골 프랑스 대통령 소련 방문
1963 - 제4호 태풍 '셰리' 남부지역 강타(1963)
1963년 오늘!
제4호 태풍 '셰리'가 우리 나라의 남부지역을 강타했다.
중심기압 965헥토파스칼에 초속 17m가 넘는 폭풍우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덮쳤다.
셰리가 우리 나라에 상륙한 6월 20일을 전후해 닷새 동안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졌다.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등 대부분의 강들이 홍수위험 수위를 오르내리고 하천 범람과 산사태가 잇따랐다.
여기저기서 도로와 가옥, 농경지가 침수됐다.
인명피해도 컸다.
무려 86명이 숨지고 120여 명이 다쳤다.
주민 5만여 명이 이재민 신세가 됐다.
1963년 6월 20일 미국-소련 간 직통전화가 개설됐다.
1963 - 미국-소련 직통통신선 개설 협정에 조인
미국과 소련 양국이 1963년 6월 20일 워싱턴과 모스크바 간의 직통전신가설에 관한 협정에 조인했다.
이날 조인식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찰스 스텔과 소련을 대표하는 세이몬 차라프킨이 각각 서명했다.
이 협정은 국제긴장을 완화하기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으로 우연과 오산으로 인하여 생길 가능성이 있는 전쟁을
미리 막도록 중대한 국제적 위기에 사용됐다.
직통전화의 연결방법은 특별 텔레타이프 선을 헬싱키 스톡홀름 런던을 경유하도록 가설하는 것이었다.
이후 8월 30일 공식문서의 교환 대신에 미국이 시험적인 표준신호를 보내고 소련으로부터 같은 신호를 받음으로써 직통전화가
개설됐다. 이때부터 전화는 긴급 사태시 양국 정상들간의 메시지 교환을 위해 사용됐다. 개설된 직통전화는 국방성에 있는
기계장치들로부터 크레믈린궁에 있는 흐루시초프 서기장 사무실 근처의 통신실에 이르는 텔레타이프 통신선으로 구성됐다.
미국은 영문으로 전문을 보냈고 소련은 러시아어로 전문을 보냈다. 각 전문은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암호화됐다. /조선
1963 - 미국과 소련, 핫 라인 설치
1963년 6월 20일 미국과 소련 사이에 '직통통신 연락선 설치에 관한 미소각서'가 조인되어 워싱턴 D. C.의 백악관과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 사이에 직통전화가 설치되었다. 이 핫 라인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핵전쟁의 위험이 현실로 나타나자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 정상간의 직접대화를 통해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1년 9월 30일에 체결된 협정에 의해 인공 통신위성의 지원을 받았으며, 1984년 7월 17일 협정에 의해서는 팩시밀리 장치도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어 프랑스-소련, 영국-소련 간의 핫 라인도 설치되었다. 남북한의 경우에는 7·4남북공동성명에서 서울과 평양 사이의 상설 직통전화 설치 등이 합의된 바 있다. /브리태니커
1962 - 제2한강교(양화대교) 착공
1962 - 제2한강교 기공
양화대교(楊花大橋) = 1962년 6월에 착공해 1965년 1월 25일 준공한 구교(舊橋)와 1979년 1월에 착공해 1982년 2월 2일 준공한 구교 위측의 신교(新橋) 2개의 다리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원래는 구교를 '제2한강교'라고 하였는데, 1982년 9월 한강종합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구교와 신교를 합해 지금의 양화대교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구교는 8·15광복 후 한국 기술진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한강다리로, 폭은 18m, 길이는 1,053m이다. 설계는 대한설계공단이, 시공은 현대건설(주)이 맡았고, 총 5억 1242만 원(완공 당시 기준)의 공사비가 들었다. 상부는 3경간연속 플레이트 거더(girder) 구조, 하부는 우물통 파일기초 또는 직접기초 방법을 적용하였다. 이 구교는 완공 이후 경서지방과 인천지역, 그리고 김포국제공항을 연결하는 서울특별시 서부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도심과 영등포·김포·경인고속도로를 연결하는 교통량이 증가함에 따라 1979년부터 8차선으로 넓히기 위한 확장공사를 진행하여 1982년 2월 2일 신교를 준공하였다. ... /naver
1962 - 주민등록법 시행
1961 - 케네디-이케다 회담 미국서 개최
1960 - 말리,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 -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가원수 취임
1955 - IMF와 IBRD 가입에 대한 국회 비준
1952 - 부산에서 국제구락부사건 발생
1947 - 서재필, 한미특별의정관에 취임
1947 -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원국으로 정식 승인 - 21일에서 옮김
올림픽대회는 단순한 국제경기대회가 아니라 국가의 명예를 걸고 싸우는 스포츠외교의 정상무대이다.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독립한 신생 한국의 모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서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전에 개최되는 런던올림픽대회에 어떤 일이 있어도 출전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했다. 우선 올림픽 출전을 위해서는 국내 올림픽위원회(NOC)를 구성하여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어야 했고, 또한 올림픽 종목의 경기단체들이 각각 국제경기연맹에 가입되어 있어야 했다. 조선체육회는 1946년 6월 16일에 런던올림픽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대책위원회는 위원장에 유억겸(조선체육회 부회장)을 비롯하여 부위원장, 상무위원을 구성하고 조선체육회 산하의 경기단체 중 올림픽종목에 해당되는 육상, 수영, 축구, 농구, 역도, 권투, 레슬링, 빙상 등의 각 경기단체로 하여금 각각의 국제경기연맹에 가입하도록 했다. 한편 1947년에 봄 전경무 부위원장은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인 애버리 브란데지(Avery Brundage)를 만나 한국의 올림픽참가를 위한 협조를 교섭해 승낙을 얻었다. 이리하여 대한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6월15일에 스톡홀름에서 열린 총회에 참가하고 동년 6월 20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원국으로 정식 승인을 받게 되었다. /contents.archives.go.kr /Google
대한올림픽위원회는 국제올림픽위원회 「올림픽헌장」(제1장, 제4장)의 규정에 의해 설립된 국가올림픽위원회로서 1947년 6월 20일에 제41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대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사업에 대해 국제올림픽위원회와 대외적 교섭을 갖는 단체로서 스포츠를 통해 올림픽정신을 함양, 보급하고 아마추어스포츠의 기조를 이루는 정신적, 신체적 자질의 발전을 도모하여 국제친선과 세계평화 및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contents.archives.go.kr /Google
1946 -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 발족
1946 -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지도자, 초대 대통령 구스마오 (Gusmão, Xanana) 출생
구스마오 [Gusmão, (Kay Rala) Xanana, 1946.6.20~ ]
1945 - 캐나다 가수 앤 머레이(Murray, Anne) 출생
머레이 [Murray, Anne, 1945.6.20~ ]
1935 - 남경에서 민족주의단체 대표회의
1933 - 독일의 여성해방운동가 체트킨(Zetkin, Clara) 사망
체트킨 [Zetkin, Clara, 1857.7.5~1933.6.20]
`후버 모라토리움`을 제안한 제31대 미국 대통령 후버.
1931 - 후버 美대통령 `모라토리움` 선언
미국의 제31대 대통령(1929∼1933)후버가 1931년 6월 20일 오후 6시 성명을 발표, 세계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미국에 진 채무와 독일이 연합국에 지불해야 할 전시배상 지불을
7월 1일부터 1년간 동결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후버 모라토리움’이다.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란 전쟁ㆍ천재(天災)ㆍ공황 등에 의해 경제가 혼란하여
채무상환 기간이 도래했음에도 외채가 많아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 채무상환 기간의 일시적인 연기를
채무국이 요청하는 것, 즉 지급유예를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패전의 책임을 지게된 독일은 당시 배상금 1320억 마르크라는 엄청난 금액의 채무를 연차적으로
분할지급을 하거나 외국으로부터의 단기차입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0년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정치의
불안이 가중되고 외국단기자본의 인상ㆍ유출이 격화되어 독일은행이 차례로 도산하게 되자 경제가 마비됐다.
이에 후버가 전시채무 동결을 제안하는 ‘후버 모라토리움’을 제안하자 배상지불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독일과 불황에 빠진
연합국 각국이 ‘현명하고 용기있는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후버의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쟁부채 배상안의 제안자인
오웬 영은 채권국의 현명한 처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 번영에 도움이 되는 조치라고 논평했고
당초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며 선뜻 응하지 않던 프랑스도 결국 이에 동조했다. 조선
1929 - 소학교. 보통학교 규정개정공포
1927 - 미국-영국-일본 3국 해군군축회의
1926 -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개관
1925 -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조셉 브로이어 사망
1925 -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브로이어(Breuer, Joseph, 1842-1925) 사망
1924 - 언론집회압박탄핵민중대회 개최
카란사(1910경)
1923 - 멕시코의 혁명가 판초 비야 암살
1923년 6월 20일 멕시코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인 판초 비야가 치와와 주 이달고델파랄 근교의 농장에서 암살되었다.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비야는 1909년 독재자 디아스에 대한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봉기에 가담하면서
혁명에 참가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1913년 마데로가 암살된 뒤에 멕시코로 돌아와 유명한 '북부사단'을 조직하고,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와 연합해 우에르타의 무단통치에 저항했다.
1914년 6월 두 사람은 멕시코 혁명의 개선장군이 되어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1914년부터 카란사 정권이 전복된 1920년까지 비야는 게릴라 활동을 계속했다.
1920년 비야는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조건으로 사면받았으나 3년 뒤 암살되었다. 브리태니커
1922 - 조선물산장려회(평양) 창립. 회장에 조만식 선출
1919 - 비타민을 발견한 영국의 생화학자 프레데릭 홉킨스 출생
1915 - 영국의 영화감독 테렌스 영(Young, Terence) 출생
영 [Young, Terence, 1915.6.20~1994.9.7]
영국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에서 동양학을 공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아른험 전투에 탱크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1940년 영화 《On the Night of the Fire》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에 입문했고 1940년대와 1050년대에는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1948년 《당신과의 하룻밤》이란 영화를 처음으로 감독했고 1962년 숀 코네리(Sean Connery)를 주연배우로 기용하여 찍은 007 시리즈의 첫 작품 《007 살인 번호》로 큰 성공을 거둔 후 1963년 《007 위기일발》, 1965년 《007 썬더볼》을 연달아 연출했다. 이후 몇 편의 액션영화들을 만들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1981년 인천상륙작전을 다룬 대작 《오, 인천》을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대표작으로 007시리즈 3편 외에
《블랙 타이츠》(1960) 《어두워질 때까지》(1967) 《배신자》(1970) 《살인 영장》(1972) 《비극의 마라톤》(1988) 등이 있다. 1994년 프랑스의 휴양지인 코트다쥐르의 칸에서 79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naver
1911 - 숙박 및 주거규칙 공포
1911 - 삼림법 공포
1911 - 삼림법(森林法) 공포
1904 - 일본, 만주군 총사령부 설치
1902.6.20 - 시인 정지용(鄭芝溶) 출생
정지용 [鄭芝溶, 1902.6.20~1950.9.25?]
한국의 시인. 1902년 6월 20일(5월 15일을 고침) 한국 근대 시사에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열어 보인 시인으로 평가받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난 그는 재학시절 성적이 매우 우수했고, 교지를 만들며 일찍이 뛰어난 문학적 재질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후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ㆍ조지훈ㆍ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됐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공간에 접어들어 격렬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인해 집필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6ㆍ25전쟁 이후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누명 때문에 1988년 해금되기까지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기도 했다. /조선 (5월 15일자)
정지용(鄭芝溶, 음력 1902년 5월 15일/양력 1902년 6월 20일 ~ 1950년 9월 25일)은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아호는 지용(池龍). 대한민국에서는 납북 여부와 사인이 모호하여 이름이 '정X용'으로 표기되고 그의 시가 금기시 되었다가, 1988년 해금되어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위키백과
1899 -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영웅 물랭(Moulin, Jean, 1899~1943) 출생
1891 - 아일랜드의 정치가 코스텔로(Costello, John A., 1891~1976) 출생
1887 - 독일의 다다 미술가, 시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1887~1948) 출생
1879 - 프랑스, 국민대표의회 조직
1870 - 프랑스 작가 쥘 콩쿠르(콩쿠르형제중 동생) 사망
1870 - 프랑스의 소설가 공쿠르(Goncourt, Jules de, 1830~1870) 사망
1861 - 영국의 생화학자 홉킨스 출생 - 필수영양소 비타민 발견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
1861 - 영국의 생화학자 홉킨스 출생
1859 - 독일의 철학자 에렌펠스(Ehrenfels, Christian von, 1859~1932) 출생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심리학에 도입하고 가치론에 이바지한 것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이다.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프란츠 브렌타노와 알렉시우스 마이농의 영향을 받았다. 1888년 <감각과 의지에 대하여 Über Fühlen und Wollen>로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되었으며, 1890년 <과학적 철학을 위한 계간지 Vierteljahrsschrift für wissenschaftliche Philosophie>에 발표한 <게슈탈트의 성질에 관하여 Über Gestaltqualitäten>라는 논문으로 형태 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의 문을 열었다. 에렌펠스는 선율의 예를 들어 게슈탈트라는 용어를 설명했다. 소리에 대한 직접적 감각 경험이 청취자가 듣는 선율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고, 이해에는 기억이 필요하며 때로는 다른 구성 요소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모든 구성 요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게슈탈트 구조 또는 전체 구조를 형성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게슈탈트는 직접적 감각 경험 이상의 것이 있어야 지각될 수 있는 복합자료를 설명하는 개념이 되었다. <가치론의 체계 System der Werttheorie>(2권, 1897~98)를 집필해 가치론에도 이바지했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안톤 브루크너에게 사사를 받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게슈탈트(Gestalt) 성질의 바탕이 될 수 있는 복합자료는
어떤 기여를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의식 속에 주어져 있다."
- 크리스티안, 프라이헤어 폰 에렌펠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대수사를 만든 빅토리아 여왕(1837~ 1901).
1837 - 빅토리아(Victoria) 영국 여왕 즉위
1837 -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 왕위를 승계받다.
1837 - 빅토리아 영국 여왕 즉위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한
하노버 왕가 켄트 공작의 외동딸 빅토리아 여왕이 1837년 6월 20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빅토리아 시대’는 확장과 정복, 승리와 번영의 동의어였고 원동력은 18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1858년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 빅토리아 사망 당시 대영제국은 전세계 모든 대륙에 걸쳐 있었으며
넓이로 따져 1,100만 평방 마일(지표면적의 약 20%), 인구로 따져 4억인(전세계 인구의 약 25%)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시대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자 ‘은행’이었다. 1850년 전세계 공업생산의 28%를 영국이 차지했고 강철의 70%,
면직물의 50%가 영국제품이었다. 또 전세계 상선의 3분의 1이 영국 소유였으며 금융자본의 90%가 파운드화로 결제됐다.
또 유사 이래 신이 창조한 것으로 믿고 있던 인류사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종의 기원’이 나온 것도 빅토리아시대였다.
기나긴 64년간의 치세를 마치고 1901년 1월 22일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던
빅토리아 여왕이 사랑했던 남편 알버트 공작의 뒤를 따라 눈을 감았다.
1833 - 프랑스의 초상화가 보나(Bonnat, Leon, 1833~1922) 출생
1819 - 미국 증기선 사바나호, 첫 대서양 횡단
1819 -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 출생
1819 - 독일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 오펜바흐(Offenbach, Jacques, 1819~1880) 출생
1789 - 프랑스 '테니스코트의 서약'
1789 - 프랑스 '테니스코트의 서약' 체결
1789 - 프랑스 삼부회 평민 의원과 자유주의적 귀족의원들이 모인 테니스코트의 서약
1771 - 캐나다의 박애주의자 셀커크(Selkirk, Thomas Douglas, 1771~1820) 출생
1646 - 조선 명장 임경업 사망
위에서 내려다 본 소마도, 장도, 대마도(전남 완도군 금일읍)전경.(항공촬영)
1419 - 이종무, 대마도 정벌
1419 - 이종무 장군, 대마도 정벌
오랫동안 지리·정서적으로 일본보다 한국에 가까웠던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돼 우리 연안을 본격적으로 유린한 것은 고려 말, 조선 초 때의 격변기였다. 두 번이나 대마도를 정벌하고 유화책을 써 봤지만 약탈행위가 근절되지 않자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태종은 1419년(세종1년)에
이종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한 대마도 정벌군을 편성한다.
1419년 6월,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이 거제도 견내량에 집결했다. 병선 227척에 병력이 1만7300명이나 된 대규모
해외원정군이었다. 6월 20일 대마도 아소만에 상륙한 정벌군이 대마도주의 항복을 권했으나 반응이 없자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다. 129척의 선박을 소각·포획하고 가옥도 1940여채나 불태웠다.
왜구도 104명이나 죽이고 21명을 포로로 삼았다. 이 정벌로 왜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수십년간
지속돼온 국가의 근심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었다.
645 -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안시성전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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