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수립되기 전까지 육군은 조선국방경비대라고 불리는 조직으로 경찰에 비해 개인화기나 실무경험 그리고 나이가 상대적으로 어렸고 숫자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에 대한 적대감으로 군에 입대한 이들도 많았고 이북에서 내려온 젊은이들이 호구지책으로 군을 선택하였으며 정부수립 즈음 대한민국 육군이 되면서 병과별 교육이 병과학교에서 실시되는데 당시 포병은 용산과 영등포 일대에서 교육을 하고 체제를 다진다.
보통 상비사단의 전투부대엔 보병이 3 포병이 1 기갑 0.1 공병0.3 정도 이고 0.3 통신 0.3 기타 지원병과인 보급수송0.3 그리고 헌병 0.1이하 같은 병력들이 편성되는데 (여기서 1은 연대 규모 0.3은 대대라고 보면 된다.) 우리군의 경우는 미군의 원조에 따라 군이 조직되다 보니 포병은 대대급이 편성되어 북한군과의 전력에서 큰 차이가 났으며 그마저도 전방부대에만 있었고 기갑은 약간 편성되나 전차가 없다고 보면 되고 대신 말을 타는 기병이 약간 존재했으나 미미했다.
사병용
미군용
아무튼 다른 병과에 비해 장비(화포와 트럭)와 탄약의 수요가 많고 지휘관이나 병력들 또한 병기본 교육에 병과교육을 추가로 받아야 하니 교육의 부담이 컸으며 갑작스럽게 병력을 만들어 내야 하는데 남쪽의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때문에 북에서 월남한 이들이 생계를 위해 군에 입대하고 이들 중에 많은 비율이 포병으로 배치가 되는데 정규학교 교육수준이 높았고 전시에 학도병들이 포병부대에 많이 배치가 된다.
이들을 지휘할 지휘관들 또한 이북 출신이 많았고 전쟁중에도 포병장교들을 교육시키고자 미국의 포트실(포병학교)로 교육을 보내는데 보병장교들과 비교를 했을 때 상대적으로 숫자가 많았고 최전방에 배치될 확률이 적다 보니 살아서 같은 부대로 모이기도 하고 휴전 후에도 주로 한강이북의 부대에 있고 보수교육 때도 다시 만날 확률이 많은 수의 보병장교들에 비해 많다 보니 조직력도 높고 5.16 때는 6군단 포병단이 출동을 하는데 다른 부대에 비해 적극적이었다.
여기엔 박정희가 포병장교 교육을 받고 장군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또 교육을 받게 되는데 장군이 많지 않던 포병에겐 여러가지로 힘이 되는 일이었다.
아무튼 포병병과의 시작은 미미했으나 미국의 도움으로 휴전이후엔 155mm 곡사포나 8" 곡사포를 장비하여 화력을 증대하고 전방부대엔 연대급 규모 그리고 군단포병이 생기면서 인원 또한 늘어난다.
최초 병과가 탄생할 때는 미군의 병과휘장과 유사해서 멀리서 보면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60년대가 지나면서 우리고유의 화포문양과 장군전을 가운데 둔 모양으로 변화한다.
보통 임관전 사진을 찍을 때 보병병과 휘장을 정복에 부착하고 사진촬영을 하여 출신학교 앨범을 만들고 임관식 때 병과휘장을 정복에 부착 후 다시 사진을 찍어 앨범을 만들기도 한다.
지금은 막강화력을 자랑하고 보병여단에도 포병들이 있다보니 포병장교들 또한 많아 졌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