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의 전쟁 이야기
6·25전쟁 발발 73주년, 정전협정 70주년 되는 해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나로서는 말로만 들어오던 전쟁의 이야기와 참혹함이 솔직히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호국의 고장 칠곡에서 40여 년의 공직생활을 하면서 많은 전쟁의 상혼들을 보면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시아버님과 시할머니의 전쟁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그냥 열심히 들어주기만 하면 될 일인 줄 알았다. 일을 그만두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시댁 식구의 아픔과 전쟁의 참상이 너무 가슴 아픈 일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시백부님은 국가유공자였고 시아버님은 참전용사였다. 시아버님께서 자주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적어본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21살이던 시백부님은(맞종손, 시아버지의 형) 군에 자원입대 했다. 피난 갔다 돌아와 때 늦은 모심기를 하는 들판으로 하얀 보자기에 싸인 조그만 상자를 들고 한 병사가 찾아왔다.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아들을 본 시할머니는 혼절하고 말았다. 입대한지 채 1개월도 되지 않아 하얀 보자기에 싸인 채 돌아온 것이다. 포항전투에서 입대 7일 만에 중상을 입고 포항23육군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사망했다고 한다. 시아버님도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살이던 시아버님도(둘째 아들) 온 가족과 피난 가던 중 전쟁터로 붙들려 간 후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전쟁 중에 겪은 일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길고 긴 그 이야기는 서너 권의 책을 쓰고도 남을 분량이며 어떤 영화보다 더 실감 나는 영화다. 5년 1개월 만에 피골이 상접해 집으로 돌아왔다.
의성에서 보따리 하나씩 들고 피난길에 올라 풍로라는 마을 산 밑에서 하루를 묵고 신령으로 피난을 가던 중에 큰아들은 군대 가야겠다며 자원입대했다. 할머니는 큰아들도 군대 가고 없고 둘째 아들은 군대 갈 나이도 안 됐다며 숨겼지만 며칠 되지 않아 결국 붙들려갔다.
시아버지는 청도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역에 내려 남산초등학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대구농림학교에서 7일간 총 쏘는 것만 배우고 전장에 투입되었다. 신령 갑령재에 배치되어 15일쯤 되었을 때 산 위에서 보초를 쓰던 중 왜관 폭격 소식이 전해졌고 그때 왜관 쪽을 보니 비행기가 하늘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꽝꽝하는 폭격 소리가 들리고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고 한다. 다부동 전투의 서막이었다.
얼마 후 인천상륙작전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오자 6사단 연대장(장도연) 2,000여 명은 트럭을 타고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20일간 계속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10월 초순에 압록강 변 초산에 도달했다. 강 건너 모래사장에 수많은 중공군이 포진해 있었고 모래사장 뒤쪽으로는 만주 벌판이었다고 한다. 전국 통일을 이루는 줄 알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초산에 도착한 지 3일 만에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에게 500리가 포위되었으니 부대이동은 어렵다며 중대장 인솔 하에 중대별로 분산하여 빠져나오라고 비행기에서 하는 방송을 듣고 분대별로 분산하여 총알이 쏟아지고 겹겹이 쌓인 포위망을 벗어나는데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150명 중대원 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아버지와 파편을 맞아 한 쪽 팔이 떨어진 박명호라는 남해가 고향인 두 사람뿐이었다. 전상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 걸어서 28일 만에 겹겹이 쌓인 500리 포위망을 벗어나 신북청(평북)에 도착했다.
포위망을 벗어난 아버지와 박명호는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군번만 몸속에 숨기고 거지행세를 하며 밥을 구걸해 먹으며 남쪽으로 오던 중 10여 일 만에 미1사단 소속의 미군에게 붙잡혔다. 40여 일간 머리도 깍지 못하고 세수도 못하고 추위를 이기려 불을 쬐며 불똥이 튄 옷은 구멍이 나고 형색이 상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었다. 인민군 포로로 의심하여 모진 심사를 받았지만 3일 만에 한국 군인으로 확인되어 원대복귀를 하게 됐다. 부대에 돌아오니 2,000명이 넘던 군인이 포로로 잡혀갔거나 죽고 150명 정도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복귀한 부대에서 10일 머물렀을 때 살아남은 군인과 신병들로 전열을 가다듬어 덕천(평북)을 재 반격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군인들은 다시 평양으로 후퇴했다. 덕천에서 평양까지 거리는 700리 길로 3일을 걸어서 도착하니 발엔 물집이 터져 피가 흥건했다.
평양(12.3)에 도착한 군인들은 미군이 지정해 준 아파트 3층에 자게 되었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미군은 미리 후퇴하고, 자다가 일어난 군인들은 엉겁결에 앞사람을 따라 나갔는데 마당이라 생각한 곳이 높은 언덕이었다. 언덕 밑에 떨어진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아버지도 떨어지면서 오른쪽 다리와 오른팔이 삑 돌아가 걸을 수가 없었다. 몸이 성한 사람은 다 빠져나가고 아버지와 박명호만 남았다. 밤새 앓다가 날이 밝아오자 인민군의 비행기 폭격을 시작했다.
아침 7시가 되자 넓은 도로에 피난민들의 행렬이 수도 없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넓은 평양역 앞 도로를 누워서 한쪽 팔과 다리로 건넜다. 내의와 작업복, 외투까지 입었지만 팔꿈치에 구멍이 나고 피가 흘렀다고 한다. 군대 안 가려고 걸을 수 있는 엄마를 지게에 지고 가던 피난민에게 애원하고 협박해서 지게로 대동강을 건너 주었다.
2군단 마지막 야전병원 차를 타고 사리원(함경남도)에 있는 임시(마을 집)야전병원으로 가서 하루 머물다 8일이 걸려서 서울수도육군병원으로 왔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수 없는 군인들이 죽어 갔고 죽은 군인들은 위생병들이 시체실 칸으로 던져 넣었다고 한다. 많은 기차 칸 속에 2칸의 시체실에는 죽은 사람이 가득했다고 한다.
서울수도육군병원 수술실에서 의사가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말에 울면서 고함지르니 3번이나 쫓겨났다고 한다. 통곡하는 아버지를 군의관인 유 대령이 만져 보더니 그냥 치료하라고 지시하니 수술대에 묶어놓고 마구잡이로 당겨서 깁스하는데 3시간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3일간 머물다 대구 대건중학교에 설치된 27육군병원으로 옮겨와 3달 치료를 받았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데 복귀하라고 했다. 운전할 줄 안다며 거짓말을 해서 수송부에 배치되었다. 강릉상업학교에서 지원한 43명이 7일을 머물렀고 43명의 지원자 중에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이른 아침에 13명을 호명하더니 차에 태워서 밤늦게 내려주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광주 송정리였다. 그곳에 있는 기술학교에서 3달3일 운전 교육을 받았다. 교육 중에도 3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수료식을 마쳤다. 교육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니 강릉 있던 부대가 대구로 옮겨 와 있었다.
대구 신암동 철도공사에 한 달 머무르는데 아침에 15명을 호명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 자동차학교로 갔다. 그 곳에서 운전 조교로 9달 근무했다. 조교 생활을 하던 중에 군수, 면장, 동장 도장을 받아 할아버지는 관보를 보내주었다. 어머니와 결혼식을 마치고 다음 날 바로 부대로 돌아가서 3년 동안 집에 오지 못했다고 한다.
다시 부산 부두 작업장으로 와서 88시간 교육을 받고 추레라가 달린 큰 자동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미군들이 운전할 수 있게 만들어진 큰 차를 키가 작은 아버지가 운전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군수 물품을 싣고 온 배에 고배가 붙은 큰 차를 후진으로 넣어서 물건을 실어 나오기에는 체구가 너무 작았다. 2년 반 동안 그 일을 했단다.(1952)
휴전이 되자 부산에서 군수 물품 운반이 어려워져 장안(충남)에서 배에 실어 온 군수품을 차에 싣는 작업을 9개월 했다고 한다. 1955년 1월 1일 제대를 했다.
아버지의 참전무용담은 끝이 없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전쟁을 치르는 5년여 동안의 군 생활은 아직도 아버지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자 나라를 지킨 자부심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방에는 참전용사의 옷과 흰 모자와 목걸이가 걸려있다. 마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아버지는 전쟁 중에 압록강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을 누비며 나라를 구한 참전용사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6.25전쟁이 발발 73년, 정전협정 70년이 되어가지만 안타깝게도 전쟁의 참상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세상을 떠나고 기성세대의 안보의식은 희미해지고 있다. 전쟁의 교훈은 크며 평화는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