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함양중 19기이며,
그리고, 요즘에 조금은 알려진 거창고 15회의 입학시 TOP을 했었지요 ...
또한 1200년을 이어온 진주 정가의 27대 지종손이기도 하여, 서부 경남에선 행세께나 했었답니다 ...
함양, 거창에서 이몸은,
백사장(水東, 咸陽, 居昌 - 초,중,고 시절)의 격투, 콩쿨대회(수동, 함양,산청)석권등, 전설로 통하는 것이 몇 있지만,
그중에서도, 詩나 散文으로,
중고 시절, 경상 우도의 지방 예술제
(천령 문화제, 娥林 文化際/거창, 개천 예술제/진주등등)에서,
항상 탑은 아니었지만, 장원, 차상, 차하중에는 RANK 되었었지요 .... 심지어는 漢詩 시조 백일장 까지도 ...
좌 안동, 우 함양을 흔히들 선비의 고향이라 하지만, 안동은 퇴계 선생과, 安金의 세도에 힘입은 바 크나, 함양은 일두 정 여창을 필두로 수많은 청유와 명현을 낳은 곳입니다.
내 그리운 故鄕을 방문해 주신, 존경하는 중구 회장님, 그리고 중구 사모님,
보고싶군요 ...
山人 拜上.
PS ;
1) 함양은 중국의 지명을 딴 것으로, 진시황이 도읍한 곳인 지금의 서안입니다. 그러나 원,신라때 이름은 천령군으로, 天嶺 곧 하늘에 닫는 재가 많아 천령이며, 현재 함양에선 천령문화제가 해마다 열립니다.
잘 알려진 上林은 토황소 격문, 계원필경집으로 널리 알려진, 孤雲 최치원公이, 통일 신라末, 당에서 귀국하여, 6두품이라, 고위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이곳 함양 군수를 역임하시면서, 읍을 관통하는, 渭川水의 범람으로, 해마다 고통받는 민초를 위해, 조성한 防災林으로, 당시엔, 상림 - 하림으로 4KM가 넘는 큰 숲이었으나, 일제가, 하야부사 육공기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하림을 벌채하여, 오늘날, 상림만 남게 된 것입니다....
고운 선생은 해인사에서 신발만 남기고, 登仙하시어, 무덤이 없습니다 ...
그리고 마음이 맑은 사람은, 상림, 思雲停 부근의 숲에서, 고운이 숲을 조성할 당시 손수 사용하셨던, 두 자루의 금 호미가 부딪는, 맑은 소리를 지금도 들을 수 있다합니다 ....
제가 들었는지는 NO COMENT 합니다.
그리고 농월정, 거연정등, 선비들이 음풍농월하던, 아취있는 정자가 전국에서 제일 많은 곳이 함양이고, 두류(지리)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그 정자들을 거느린, 白雲,黃石,巨望,金猿, 錤白등의 명산이 많습니다.
드라마 토지의 촬영장으로 알려진, 99간 여창 고택도 있으니,
다음 방문때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함양이 낳은 유명한 시인은, 성종조, 3절의 한 분이신 유호인 선생입니다,
남계에서 낚시를 하다, 팔뚝만한 꺽지를 낚아, 본인이 들지 않고, 성상 생각이 나서, 술 먹으며, 한 달을 걸려, 경복궁에 도착하니,
고기는 뼈만 남았으나, 상(성종 대왕)께선, 침전 처마끝에 그 것을 걸어 놓고,
혼자 사랑하는 주정뱅이이며, 詩狂인 신하를 생각하며, 웃곤 하셨답니다.
대왕의 총애로, 벼슬길엔 더러 나갔으나,
선생은 정사는 제쳐두고, 술과 시만 즐기다가, 슬며시 고향으로 돌아가, 제 맘대로 자동 퇴직을 했으나,
그가 首領을 지냈던 고을 백성들은,
열흘에 한번 등청을 하여, 술 취한 채로 송사를 가렸지만, 명판결과, 無爲 善政으로 그를 칭송했다고 합니다 .
사대 사화의 첫번째 사화인, 무오 사화는,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왔을 때, 고운을 기리는 사운정에 올랐다가, 간신 유자광의 詩 편액을 보고, 부셔서 태워버렸기에,
자광이 앙심을 먹고, 역시 김종직 일문에 탄핵당한, 훈구대신 이극돈과 결탁하여, 영남 유림의 씨를 말린 것입니다...
스승보다,
더 뛰어난, 제자들인,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선생등이, 무오 名賢입니다 .,.....
여창 선생을 모신 南溪書院이 우리 고향집에서,
2.5km 떨어진 윗세평에 자리합니다 ...
남계천 건너, 개평의 여창 고택은,
드라마, 토지의 main 촬영장입니다....
안의현의 농월정을 태워 날린,
함양지구 문화재 방화범의 소행으로,
이곳도 화마를 당한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어, 나그네를 슬프게 합니다 ...
나의 祖父께서는,
남명의 맥을 잇는 영남 유림의 마지막 선비로서,
서당, 시회 주관, 화산사( 花山 書院)의 외임 유사(대외 대표),
약값 의식하지 않는 한의사(실천 위주의 남명학파기에 가능)
등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곳 고향의 지방 수령을,
만10년간을 역임하시다가,
재직중 42세 아까운 나이에,
나의 대학 2년때 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기울어,
자타가 공인하던,
재학중 고시를 나는 고립무원이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arbeit로 학교를 다니느라,
ROTC를 하게 되었답니다 ............
내가 실향민은 아니지만,
나의 할아버님,
아버지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기에,
지금도 錦衣野行하는,
아니,
이제는,
布衣夜行하는
내 처지가 그 어른 들께,
罪스럽습니다 ....
山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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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교
중학
고교
나는 졸며,
공부를 했지만 .....
컨닝 안하고,
항상,
中學 한학년 300 명중 1-3등
高敎 120 명중 1-30등
대학 1등
軍 1등을 기록 했었다 .....
그래서,
선생님들
감독관 들이
내게 드리 대는 일은
없었다!!!
지금도
腦細胞
77%가 사라졌지만 ....
이 行星에서,
모든 學文의 석사 給
이상인,
나와
토론 할 수 있는 이는
이 行星엔 없다 .....
Soju 11병 째 마시는,
山人 wro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