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뽕이는 재영이의 별명이다.
콧물을 많이 흘려서 정콧물이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대부분 재뽕이로 통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재영이는 모르시고 재뽕이만 아셨다.
우리집 큰애도 얼마전까지 재영이의 본명이 재뽕인줄 알았단다.
재영이는 초등 2학년때쯤 우리 동네에 이사왔고 고물상을 했었다.
오리지날 경상도 사투리를 썼고, 주변 사람 배를 잡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항상 엿장수 아저씨들이 사랑방에 가득 계셨고 고물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기계 부품도 많았다.
노새는 광현이의 별명이다.
하도 고집이 세서 누군가가 그렇게 붙였다.
지금껏 고집으로 노새를 이긴 친구는 없다.
광현네 집은 광명상회, 지금으로 말하면 동네 슈퍼다.
가게 안쪽에는 테이블이 있어서 동네 아저씨들이 오가시면서 막걸리를 드셨고 때로는
왁자지껄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며 컸다.
즉 술에 대한 조기교육을 받았던 거다.
광현이 어머니는 늘 억척이셨고 아버님은 한량이셨다.
중 3이되서 우린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을 했다.
재뽕이는 포항제철 공업고등학교, 노새는 전북기계 공업고등학교, 나는 부산기계 공업고등학교를 갔다.
당시는 중화학 공업 육성시대여서 공업 고등학교가 인기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우리가 진학한 학교는 포항제철은 사립이었지만 전북기계와 부산기계는 국립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4~5만원 정도 였던걸로 아는데 우리 학교가 만팔천원 이었고
기숙사비 월 만팔천원도 정부 융자였다.
마을 이장님이 보증을 서 주셔서 기숙사비는 융자를 받았다.
세 학교 모두 전국에서 촌놈들만 모이는 학교였다.
깡깡촌일수록 많은 학생이 지원했다.
나도 그중에 한명이었고 내 동창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는데....
돈보다 다른 이유로 온 녀석이 하나 있었다.
전라도 친구인데... 중학교 다닐때까지 아버지가 하도 일을 시켜서 고등학교도 집 근처로 갔다가는,
3년내내 일만 할 것같아서 우리 학교로 도망쳐 왔단다.
학교가 멀어서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가 걸렸다.
원통에서 강릉 약 두시간, 강릉에서 부산까지 약 6시간,
강릉에서 부산은 학생 50% 할인해서 4천5백원,롯데 빠다 코코넛 500원,
정차 시간이 짧아서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강릉에서 부산은 동해안 바다를 끼고 달려서 풍광은 멋있다.
여름바다, 겨울바다, 비오는 바다, 태풍오는 바다를 그때 다 봤다.
강릉, 삼척, 죽변,울진,영덕, 강구,포항을 거쳐 부산에 도착하면 날이 어두워진다.
그 기억이 나서 몇년전 그쪽을 가 보았더니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면서 내륙쪽으로 길이나서
바다는 잘 안보인다.
부산기계는 해운대 백사장 반대편 산위에 있다.
독일 대통령이 해운대 비취호텔에 왔을때 박정희 대통령과 산책하면서 저 산쪽에 학교를 지어 주기로 했고
그렇게 탄생한게 한독 직업 훈련소였고 나중에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가 됐다.
내가 14회고 올해는 50회가 배출됐으니 세월 참 빠르다.
방학때 고향에 모이면 요즘 은 상상도 못할 요절복통 할 일들이 참 많았다.
노새네 집에는 쉐이코 녹음기가 있었다.
A형 건전지 6개쯤 들어가는 아주 큰 놈이었다.
정확하게는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다.
이걸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때였다.
지금은 4차선 도로가 된 강변이 우리의 놀이터였다.
없는 돈 거둬서 재영이는 기타들고, 광현네 집에서 소주와 안주사고 우리집에서 장작을 아버지 몰래 훔쳐서
강변에 모닥불 피우고 동네 여자 후배들 나오라고 해서 광란의 밤을 보내곤 했다.
그 내용은 차마 넘사스러워서 못 쓰지만, 재뽕이와 노새, 정환이는 잘 알거다.
남자 친구는 성인이 되서도 만나지만 여자 친구는 잘 만날 수가 없어 조금은 아쉽다.
그때 그 후배들 잘 살고 있겠지?....
오동잎으로 시작해서 제 3한강교를 부르다 보면, 저 만치 제방뚝에서 광현이 어머니가 광현이를 부르신다.
정확히 밤 12시다.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거 같다.
가게 문닫으시고 아들 부르러 오신거다.
그렇다고 달려갈 아들이 아니지만....
그런 재미있는 술자리는 그때 이후로는 다시 없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1983년 3월 졸업 시즌이됐다.
졸업식 날짜를 꼽아보니 포항제철이 제일 빠르고 그 다음이 부산기계, 그 다음이 전북기계다.
너무 멀어 하루에 갔다 올 수없고, 비용이 많이 들어 부모님들은 당연히 못가신다...
해서 우리는 포항을 거쳐 부산, 이리를 (지금은 익산) 돌아 서로의 졸업식에 참석해 주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한계령을 넘어서 포항에 도착 , 포항제철 기숙사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재뽕이의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고
부산으로 가서 내 졸업식까지 잘 마치고 해운대 시장에서 점심을 먹고 이리로 출발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노새 표정이 심각해 지지기 시작한다.
"왜, 그래?" 하고 물었더니...
졸업식이 내일인지 낼 모레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이상하단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해 보기로 하고 전화를 하는데..
"여보세요, 전북기계죠?"
"졸업식이 언제죠?"
"네, 뭐라고요?"
"졸업식이 엊그제 지났다구요?"
노새는 졸업식에 참석을 못했다....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가 제일 먼저 보고 싶어하신것은 졸업장이었다.
그걸 위해서 자식 뒤바라지를 하셨으니까...
노새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노새야, 댓글 달아봐라.
그렇게 같이 큰 죽마고우 재영이가 지금은 몹쓸 병으로 투병을 하고있다.
별 도움을 주지못해 늘 안타깝고 미안하다.
"재영아!. 힘내라. 너의 의지면 이길 수 있어!.... "
"세상에 너처럼 의지가 강한 환우는 없다...."
"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