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 조선시대 왕들이 누린 의료체계
오늘부터 조선시대 왕들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보죠.
<왕처럼 먹고 왕처럼 살아라> 저자인
장동민 한의사, 연결돼 있습니다.
(전화 연결 - 인사 나누기)
Q1. 조선의 임금은 총 27명이었죠?
네 맞습니다. 조선시대의 왕은 총 36명이지만, 이 가운데서 죽은 후에 왕이 된 추존왕 9명과 폐위된 2명의 왕을 제외하면, 실제로 왕 노릇한 사람은 27명이 맞습니다. 추존왕으로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까지 목조, 익조, 도조, 환조 선대 4명과 세조의 큰아들 덕종(德宗),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영조의 아들 진종(眞倧)과 장조(莊祖), 순조의 큰아들 문조(文祖)등의 5명이 있어 도합 9명이며, 폐위된 2명의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의 두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왕의 아내인 왕비는 총 48명이며, 왕의 후궁은 공식적으로는 약 120명이 되나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밖의 대군과 왕자 공주와 옹주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고 하는데요. 이러한 조선시대 왕실의 건강관리법을 연구하여 현대의 실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다면 매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Q2. 아무래도 그 당시 가장 뛰어난 의사들이 모여 있던 곳이
바로 왕이 사는 궁중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물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건강에 관한 문화가 발달된 곳은 궁중인데요. 정치는 물론 사회 문화, 경제적인 권력까지도 궁중에 집중되어 있으니 건강관리법이 궁중에서 가장 발달한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이나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등의 의서(醫書)들도 모두 궁중에서 편집이 되었으며, 수많은 한의사 중에서도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 궁중의 내의원으로 들어 왕족과 왕의 건강관리와 질병치료를 담당하였습니다. 일례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허준>이나 <대장금> 또한 그러한 경우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지요.
조선시대의 최고 통치자였던 왕의 건강과 안위는 나라의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동원 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이 왕의 건강을 위해 마련되고 제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즉 최고의 지위와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었기에, 전국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음식과 가장 좋은 의료진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었고요, 당연히 특별한 장수와 건강의 관리법 또한 개발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Q3. 조선시대 왕들의 건강관리법을 잘 연구‧분석하면..
현대인들도 왕들이 누렸던 삶을 살 수 있겠네요?
네 맞습니다. 더욱이 조선시대 왕들과 현대인의 생활을 비교해보면 여러 면에서 흡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 왕들이 최고 권력으로 가지고 있던 여러 혜택들을 현대의 우리는 발달된 과학문명으로 생활 속에서 누리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왕들은 가까운 거리도 가마를 타고 다녔는데요, 우리 현대인들도 교통수단과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절대 운동량이 부족합니다.
또한 복잡하고 넓어진 대인 사회관계로 인한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 것도 조선시대 왕들과 현대인의 비슷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12첩 반상의 영양과잉 식단 또한 음식쓰레기로 환경을 걱정할 정도의 우리 현대인들과 흡사합니다. 이렇게 여러 부문에서 현대인들과 조선시대 왕들은 상당 부분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에, 조선시대 왕들의 건강관리법은 현대에 있어 아주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Q4. 그럼, 먼저 조선시대 왕들이 누렸던 의료 체계부터
설명을 좀 해주세요.
네 말씀드린 대로 조선시대 왕은 최고의 의료혜택과 건강관리 시스템을 누렸는데요. 조선 초기의 전통의료체계는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등의 국가의료기관이 중심이었습니다. 내의원은 내국(內局)이라고도 하는데, 1392년(태조 1)에 설치된 이후로 왕의 약을 짓는 일을 전담하였고, 전의감은 신하에게 약을 내리고 의학교육, 의과시험을 주관하였으며, 혜민서는 서민에게 약제를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관원은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 부제조(副提調)를 각 1명씩 두었고, 부제조는 승지(承旨)가 겸임하였는데요. 이 중에서 일반적으로 정3품 당상관 이상을 어의(御醫)라고 불렀으며, 당하 의관을 내의(內醫)라고 불렀습니다. 내의원 한의사들은 왕의 기상부터 취침까지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관찰하고 기록하였다고 하는데요. 식사 세수 목욕 운동과 취미 심지어는 대변상태와 부부관계까지 관리하였으니, 지금으로 보면 주치의의 토탈 케어 개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Q5. 아, 어의들이 부부관계까지 살펴봤다니,
좀 과한 것 같기도 한데요?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침소였던 강녕전을 자세히 보면, 강녕전 온돌방 둘레에는 방과 마루로 구성된 툇간을 두었으며, 이 툇간에서는 지밀상궁들이 왕을 보필하며 근무를 하였는데, 궁녀와 의녀들이 돌아가면서 숙직을 섰고, 왕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왕의 건강을 살피고 시중을 들기 위해 24시간 대기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대소변의 경우로 예를 들자면, 왕과 왕비는 직접 뒷간에 가지 않고 이동식 변기인 ‘매우(梅雨)틀’을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매우틀이란 궁중용어로 왕의 이동식 변기를 뜻하며, 매화(梅花)와 매우라는 것은 왕의 대소변을 지칭하는 것으로, 왕의 대변과 소변을 매화 열매와 비로 미화해서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틀은 일종의 나무로 된 ‘ㄷ'자식 변기로 ‘ㄷ’자의 터진 쪽을 앞으로 향하는 나무틀로 앉는 부분은 빨간 우단으로 덮었고, 그 틀은 아래에 반짝반짝 닦은 구리로 된 그릇을 두어 이곳에 대변이나 소변을 받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Q6.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 내용을 본 적이 있는 거 같아요?
네 맞습니다. 매우틀을 담당하는 나인이 미리 틀 속에‘매추(梅蒭)’라 하여 여물을 잘게 썬 것을 뿌려서 가져오면, 왕과 왕비는 그 위에 용변을 보고, 나인이 그 위에 매추를 다시 뿌리고 덮어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 때 내의원에서 이를 가져가 검사함으로써 왕의 건강을 체크하였던 것이지요.
또한 철종 대의 내의원 기록을 보면, 왕이 대궐 밖으로 행차하였을 때도 내의원의 제조와 부제조가 수행하여 왕의 건강을 체크하고 생강차와 귤강차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내의원의 한의사들은 언제 어디서나 왕을 수행하며 건강을 살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Q7. 요즘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나가면
대통령 주치의가 꼭 함께 수행한다고 하니까..
조선시대 때는 당연했겠네요.
물론입니다. 또한 왕실의 주요 인물들, 즉 국왕과 왕비와 왕세자 등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비(妃)와 빈(嬪)과 내명부(內命婦) 즉, 궁 안에 근무하는 품계가 있는 여자 등의 병환이나 해산(解産) 때에는 내의원(內醫院)과는 별도로 임시 기구를 설치하였는데요. 왕의 경우는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여, 1품관이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유의(儒醫)와 어의(御醫)들이 함께 모여 진맥과 처방을 논의하여 약을 지어 올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약을 달인 후에 어의 중 우두머리인 수의(首醫)가 먼저 맛을 보고 다음에 세자가 맛을 본 후 왕에게 진상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는데요. 이는 왕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 때 약을 진공하는 의관을 의약동참(醫藥同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비와 왕세자의 병에는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여 내의원의 도제조 이하 의관들이 이곳에 모여 처방을 논의한 후 조제하여 올렸다고 합니다.
Q8. 어떻게 보면, 일종의 ‘특별 비상대책본부’ 같은
성격이었던 것 같아요?
네 그러한 특별기구가 또 있었는데요. 산실청(産室廳)은 비(妃)나 빈(嬪)이 아기를 해산할 때 설치하는 기구이고, 호산청(護産廳)은 빈이나 내명부가 해산할 때 설치하던 임시 기구였습니다. 이러한 임시 기구는 치료나 해산이 끝나면 즉시 폐지하였는데, 이 때 완치되거나 무사히 해산하면 모두가 큰상을 받게 되지만 잘못되면 관계 의관은 벌을 받게 되며, 심지어는 의관이 사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모시던 왕이 승하하면 담당 어의가 유배를 가거나 심한 경우 사형에까지 처해졌었다는 기록을 보면 과연 내의원 한의사들이 철저하게 왕의 건강을 관리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환한 일이다. 그 유명한 어의 허준도 선조가 승하한 후 유배를 떠났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 관리체계가 매우 엄격하였을 알 수 있습니다.
Q9. 어의 잘못이 아니어도
왕이 잘못되면 귀양이나 사형을 당했다니, 좀 무시무시하네요.
네 맞습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왕은 내의원의 의사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내로라하는 유명한 의사들을 모두 불러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요. 순조의 경우 매창(梅瘡)이라는 질병을 앓았었는데, 내의원에서 제대로 치료를 못하자 “정약용(丁若鏞)의 의술이 탁월하고, 박제안(朴薺顔)이 종기 치료에 제일이라 하옵니다. 불러 치료하도록 해보소서.” 라는 진언을 받고는 바로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이 때 불려 들어온 정약용, 박제안 두 사람은 밤을 새우며, 환후 치료에 전력하였다고 전합니다. 또한 유의 출신, 즉 유학자로서 의학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았던 홍욱호를 초빙해서 진료를 보게 한 기록도 있는데요, 워낙 실력이 좋아 바로 궁궐에 붙잡아두고 어의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절대적인 왕권의 강력함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장동민 한의사와 함께
‘조선시대 왕들이 누린 의료체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