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좋아 창주 땅을 그냥 지나치다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학인을 가르치는 원철 강사 스님은 지난 봄에 매화 나들이를 다녀왔다. 함양 단속사터의 육백 살이나 먹은 족보 있는 정당매로 시작하여 섬진강가 다압 마을에 이르는 지리산 매화 세상 순례를 나섰던 것인데, 돌아와 보니 처소 앞에 핀 매화꽃이 그만 못지않게 장하더라는 것이다. 매화를 찾아 바깥으로 내달려 보았던 발걸음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본래 자리’로 되돌아온 셈이었더라 했다. 그 매화 한 가지가 깨우쳐 준 뜻이 그윽했기로 오늘 스님의 처소 앞을 기웃거렸으나, 매화나무는, 공도 없이 얻으려느냐, 한 마디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스님의 처소는 학림의 강당으로 쓰이는 당우의 한쪽 끝에 자리하고 있어서, 시간 되면 청익(請益)이 본분이 될 학인들을 지체하는 바 없이 마주 대하게 되기는 할 터였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만이나, 언제인가 조촐한 집 한 간 따로 거두게 되면 현판으로 걸고 싶은 당호는 ‘노월(撈月)’이라 했다. 달을 건지려 애쓰시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
그 말은 원숭이 오백 마리가 꼬리에 꼬리를 붙잡고 우물 속에 빠져 있는 달을 건지려 하다가, 붙들고 있던 나무가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부러지는 바람에 모두 우물 속에 빠져 죽었다는 옛일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때 이후로 ‘달을 건지려 하는 원숭이’는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선가에서는 ‘애써 정진하는 모습’으로 뜻을 바꾸어 쓴다. 원숭이가 달을 건지려 했던 것은 선정에 든 부처에게 공양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서는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 위에 뜬 달은 건질 수가 없는 것, 수행이란 그것이 도로에 그치더라도 끊임없이 애쓰고 또 애쓰는 것이다. 그것이 ‘노월’의 뜻이다.
마조가 달구경을 하다가 세 제자에게 물었다. 달이 밝은 날에는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지장은 (부처에게 달을 바치는) 공양을, 회해는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답했다. 그러나 보원은 말 없이 소매를 휘저으며 가 버렸다. 마조가 세 사람을 두고 “경(經)은 장(지장)으로 들어갔고, 선(禪)은 해(회해)로 돌아갔는데, 보원만이 홀로 사물 밖으로 벗어났구나” 했다. 남전 보원이 지어 보인 것은 말로는 이를 수 없는 격외 도리(格外道理)였던 것이다. 아뫃거나, 지장은 마조의 세 상수 가운데서도 참선은 물론이고 그가 이룬 교학의 경지까지 인정받은 것이니, 실상사에 화엄 전문 도량이 마련되는 인연의 뿌리로 봄직한 것이다. 실상사의 창건주인 홍척은 서당 지장의 심인(心印)을 받은 선사였지만, 화엄종에도 밝았으며, 2대조인 수철도 참선뿐 아니라 <화엄경>을 공부했다 한다. 비롯됨이 이와 같았으니, 연관 학장 스님을 모시고 1995년에 개설된 화엄학림이 성취할 바 적지 않을 터였다.
셋도 함께 눕지 못할 작은 방, 이마에 ‘정진(精進)’이라 적혀 있다. 방의 이름이 그러하니 입정(入定)을 도모하여 봄직도 하겠으나, 원주 스님 발소리 멀어진 뒤, 목 밑에 베개 하나 괴고 지평(地平)으로 몸을 누이고 만다. 달력 하나, 대나무 횃대, 한 자 남짓한 너비의 낮은 나무 좌탁은 단순 소박하나 손맛이 남은 정겨운 것이다. 그 위에 붙은 글귀, “머무는 동안 맑고 고요한 기쁨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원하시는 대로만 된다면, “한가히 노닐며 절집에 조용히 앉았으니 / 고요한 안거, 참으로 소쇄하도다”라고 노래한 영가 현각의 경지와 한가지가 될 터였다.
고요한 안거, 적멸지경.
누운 방 귀퉁이에 쳐진 거미줄에 적멸의 도리를 일러 줄 걸린 벌레는 없었다, 싶은 그 순간에 날개짓 소리 요란한 날벌레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온다. 불을 따라 들어온 미물, 쫓아내려다 말고 불만 끄고 다시 눕는다. 그러나 한데에 켜진 불은 몸을 되돌릴 만큼 밝지는 않았던지, 미물의 움직임은 방안에서 헛되이 맴돈다.
니가 들어왔던 틈을 찾아라, 틈을!
부모미생전의 본래 면목?
그것은 일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불빛 따라 창문 틈으로 들어왔는데 / 들어온 곳 몰라 헤매고 있네 / 문득 들어온 곳 되찾게 되면 / 이전의 잘못된 곳 되찾게 되리.(백운 수단)”
여전히 나갈 길 찾지 못한 날벌레를 쫓아내려다 말고 대발을 걷어 올려 두고 방 밖으로 나온다.
큰키 감나무 아래 지나, 돌돌, 소리 내며 물 떨어지는 수각을 지난다. 해우소 앞의 전등 불빛이 세를 잃는 자리, 그 끝에서 몸을 휘덮어 오는 것, 달빛! 법당 앞 돌탑 뒤로 서면 그 위로, 뒤돌아 배롱나무 아래 서면 그 잎 사이로 얼굴 들이미는 저것!
저 하늘에 유정한 무슨 물건 있기에(何物有情天上在)
밤이 되면 밝은 달이 홀로 와서 엿보는가(夜來明月獨窺尋)
―편양 언기, ‘박 상사를 멀리 보내며’ 중
극락전 앞 연못, 수련은 대숲이 드리운 그늘을 이불 삼아 모두 잠들었다. 못 속에는 축생을 여의고자 눈을 뜨고 수행 중인 물고기가 없지 않을 터이나,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하다.
달 하나 그 위에 고요히 떠올랐다.
대 그림자가 뜰을 쓸어도 먼지 한 점 없고 (作影掃階塵不動)
달이 물 밑을 뚫고 들어가도 일렁임조차 없네 (月穿潭底水無痕)
―야보 도천, (무제)
자성을 바로 깨쳐 오안(悟眼)이 자재해지면 맑은 거울에 제 얼굴 비치듯 할 터였다. 무지[無明]의 바람이 멎고 망식(妄識)의 파도가 그친 깊고 넓은 바다에 되비칠 삼라만상의 세계, 바다에 찍힌 사진[海印] 같은, 일천 강에 드러날 달[月印] 같은 명료한 세상일 터였다.
그러나 물 속에 비친 달은 실체가 아니다. “물 속의 달이 좋아 / 달 잠긴 찬 샘물 병에 담았네 / 돌아와 쏟아 보지만 / 달은 간곳 없는”(괄허 취여) 것이다. 수중월은 곧 경중상(鏡中像)이니, 그것이 이르는 바는 무상의 이치요 공(空)의 도리이다. 수중월이 그러하거니와, 안이비설신의로 파악하는 삼천 대천 세계란 저 바다의 허망히 스러질 물거품이요, 한 순간 번쩍 하고 나타났다 사라질 번갯불이다. 그러나 수중월로써 비량(比量)할 바, 중생이 저마다 품고 있으나 무명에 가리어 보이지 않는 원만한 본월, 본래 면목이다. “저 한 달 비치나니 일만 강에 달빛이요(一月普賢一切水), 일만 강에 잠긴 달빛은 저 한 달로 모임이여(一切水月一月攝)“(영가 현각).
그러나 오늘 밤 이렇게 달이 좋으니, 그 달에 넋을 앗기어 사철 봄이요 죽음도 없다는 창주(滄洲) 땅을 지나치게 된다 하더라도, “성품 따라 달빛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만 사랑하기로”(야보 도천) 한다.
빈 누(樓)에 홀로 앉아 달맞이 하나니 (獨坐虛樓待月生)
개울 소리 솔바람은 이미 삼경이네 (泉聲松籟正三更)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 기다림마저 잦아진 곳 (待到待窮無待處)
추운 빛 대낮같이 산 가득 밝아오네 (寒光如晝滿山明)
―허응 보우, ‘빈 누각에서의 달맞이(虛樓待月)’
첫댓글 무상해서 실체가 없는 공성의 도리 ...
성품 따라 달빛에 차갑게 비치는 그림자만 사랑하기로
감사합니다.